제451화
450화-설천강 (4)
“……용케 따라오네요.”
“목표는 같은 것 같으니까.”
갑자기 길 안내를 하겠다고 나선 유사를 설천강은 순순히 따라갔다.
그리고 그런 설천강의 모습에 오히려 찝찝하다는 듯 유사가 어색한 목소리로 되물었지만, 설천강은 당당했다.
“길이 달랐다면, 따로 움직였을 거다.”
“그게 아니라…… 함정이면 어떡하려고요.”
“어차피 가야 할 길이니, 그건 중요하지 않은 일이지.”
담담히 대답하며 자신의 검을 툭툭 두들긴 설천강은 담담한 눈으로 주위를 훑었다.
“혹시 모를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길을 피할 거였다면, 이곳까지 오지도 않았다.”
“당신, 강한 사람이군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인 유사는 자신의 옆을 바라봤다.
자신을 보자마자 달라붙었던 아가씨가 천천히 저쪽으로 붙는 게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군요.’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곁에 두지도 않던 사람인데.
먼저 다가가는 남자가 생겼을 줄이야.
‘……다행이네.’
그 모습에 부드럽게 웃은 유사는 천천히 발걸음을 줄였다.
천천히, 그리고 은밀하게.
유사의 인도는 그야말로 확실했다.
가끔씩 느껴지는 괴물의 인기척을 확실하게 피해 점점 더 성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몇 개의 건물을 지나 내성에 들어가고.
내성 안에서도 몇 개의 건물을 지나쳐 가장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다.
가장 중앙에 있는 큰 건물이 아닌, 조금 외곽에 있는 건물로.
[여기서부터는 입으로 말을 꺼내지 말도록.]
[알았다.]
전음으로 대답한 설천강은 부하들에게 눈짓한 뒤 가장 먼저 유사의 뒤를 따랐다.
건물의 내부는 조용했다.
침묵이라는 말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처럼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설천강은 검에 올린 손을 천천히 움켜쥐었다.
그리고.
“여기까지인가.”
“네?”
갑자기 입으로 말을 꺼내는 설천강의 모습에 소연이 당황하는 순간.
“훌륭하네.”
몸을 돌린 유사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럼, 아가씨를 부탁해.”
뿌득!
순식간에 목이 부러진 유사의 몸이 바닥을 구른다.
아니.
목이 부러진 게 아니다.
부러졌던 목이 힘을 잃고 다시 부러진 상태로 돌아간 것일 뿐.
“전원! 전부 다 때려 부숴라!!”
설천강의 외침과 동시에 거칠게 내공을 뿜어낸 부하들이 망설임 없이 주위를 때려 부수기 시작했다.
“꺄아악!”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여인이 뒤늦게 비명을 터트렸지만, 설천강은 무시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신경 써 줄 여유가 없었다.
이 건물에 들어온 뒤, 유사는 확실하게 같은 곳을 돌았다.
마치 이곳이라는 듯.
자신은 이 이상 안내할 수 없다는 듯.
동생 놈 때문에 나름 죽은 망령에겐 익숙하기에.
그녀가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금세 알아챘으니까.
그리고 그 덕분에 알 수 있었던 정보도 있다.
“영역(靈域)이다! 지금부터 나타나는 적은 살아 있는 인간이 아니다! 목을 벤 정도론 안심하지 마라!”
만난 순간 주고받았던 일격.
확실하게 묵직한 무게감이 있었다.
즉, 죽은 영혼이 실체화를 할 수 있는 환경이라는 뜻.
동생 놈 덕에 알게 된 지식은 이럴 때 활용해야 하는 법이다.
“전원 여자를 지키며 이동한다!!”
주위를 때려 부수기 시작하자, 비틀린 공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방문을 부쉈는데 복도가 보이고, 벽을 부쉈는데 계단이 보이는 기이한 공간.
설천강은 아직도 얼타고 있는 여인의 팔을 붙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본능이 외쳤다.
지금 지켜야 할 건 이 여자라고.
이 여자를 넘기면 안 된다고.
거칠게 검을 휘둘러 길을 뚫어 내며 설천강은 기감을 펼쳤다.
“부지부장님! 대체 뭘 하고 싶으신 건데요!”
“근처에 대법을 펼치고 있는 곳이 있다! 혹은 제물들이 모인 곳이 있을 거다! 찾아라!”
설천강의 명령에 아직도 상황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지만, 해야 할 일은 확실하게 이해한 부하들은 무기를 휘두르며 기감을 펼치기 시작했다.
부수면서도 착실하게 주위를 살폈다.
그리고.
“숨소리가 들립니다!”
부하 한 명의 외침에 설천강은 즉시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렸다.
부하가 말한 곳으로 달려가 검을 휘두른다.
쩡!!
여태까지 그냥 부서지던 벽이나 문과 달리 멀쩡하게 버티는 벽.
여기다.
여기가.
“축이군……!”
강렬할 정도의 빛을 검에 담은 설천강은 은은한 은빛을 품은 검을 망설임 없이 내리쳤다.
쩡!!
천지가 어긋나는 것 같은 굉음과 함께 건물 전체가 요동친다.
까득!
‘부족한가!’
아직 내 힘으로는 부족한 건가……!
이를 악문 설천강은 저릿저릿한 손아귀에 힘을 더하며 검을 치켜들었다.
[크우어어어어어어!!]
저 멀리서 괴물들의 괴성이 들려온다.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곳에 도착하겠지.
길을 뚫어 내지 못하면, 그다음에 남는 건 처절한 실패뿐이다.
전멸, 혹은 그에 준하는 피해를 입겠지.
그럴 순 없다.
자신을 믿고 이 저승 문턱까지 함께 와 준 녀석들이다.
허망한 개죽음으로 저승에 보낼 순 없다.
[히히, 너 맛이 갔네. 이번에는 특별히 한 번 더 도와주는 거야.]
순간, 귀에 들리는 몇 번 들어 본 목소리와 함께 검을 고쳐 잡은 설천강은 직감했다.
이번에는 벨 수 있다.
거침없이 휘두른 검이 결계를 갈라낸다.
벽은 반으로 갈라져 그 안을 드러내고, 축축한 돌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
설천강은 여인을 어깨에 걸치고 망설임 없이 계단으로 뛰어내렸다.
“안으로 들어간다!”
* * *
“꺄하하하! 정신 나갔네! 저걸 들어가?”
하긴 그 여자의 정체를 짐작하고도 데리고 다닌 녀석인데, 제정신일 리가 없나.
“우리 천위가 없었다면, 애완견 정도로는 들이고 싶었을지도?”
히죽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이던 언여휘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흐흥~. 솔직히 말하면 이 녀석이 이대로 성공하는 건 영 좋지 않은데~.”
하늘을 여는 데는 도움이 되기야 하겠지만, 그 녀석의 힘이 너무 강해진다.
연옥에 있는 그 괴물들조차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완성에 필요한 가장 중요한 제물을 기껏 밖으로 빼돌렸는데 다시 제 발로 기어들어 왔으니 의식의 완성은 그리 멀지 않을 터.
설천강이 약간의 훼방 정도야 놓을 순 있긴 하겠지만, 계획 자체를 파투 놓는 건 아무리 봐도 무리다.
자신이 도와준 덕에 결계 자체는 어떻게 뚫었지만, 애초에 서로 할 수 있는 능력의 영역이 달랐다.
그리고 지금 그놈이 하고 있는 일은 무인이 해결할 수 없는 범주의…….
“응?”
순간, 기묘한 감각에 고개를 갸웃한 언여휘는 감각을 끌어올렸다.
인형에 담긴 영력을 뿌리고, 조금 더 깊게 의식을 쏟았다.
그리고.
“꺄, 꺄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배를 붙잡은 언여휘는 휘릭 하고 일어나서 지붕 위에서 양팔을 벌렸다.
“천위! 천위! 우리 천위! 응! 대체 어떻게 이런 귀여운 아이가 나왔을까? 응? 으응?”
환희의 감정을 쏟아 내며 언여휘는 활짝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 괴물이 됐구나! 우리 천위!”
* * *
지하에 도착한 설천강이 목도한 것은 온통 붉은 세상이었다.
동굴을 개조한 것처럼 보이는 지하에는 인간의 살과 피밖에 보이지 않았다.
역겨울 정도로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르고, 오물의 역한 냄새가 저린 코를 마비시켰다.
조금만 숨을 쉬어도 코가 헐어 버릴 것 같은 악취.
그 안에서 설천강은 즉시 움직였다.
“네놈?”
어느새 침입을 감지한 적이 두 눈을 치켜뜨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여인을 대충 던져 소연에게 맡기고 설천강은 거침없이 달려가 검을 휘둘렀다.
“흥! 가소롭구나!”
그러나 허공에 생겨난 붉은색의 장막이 당연하다는 듯 설천강의 검을 막아 냈다.
뒤이어 설천강이 미친 듯이 검격을 쏟아 냈지만, 사내의 앞을 가로막은 장막은 가볍게 설천강의 공격을 받아 냈다.
설천강이 자신의 방어를 뚫지 못한다는 확신을 얻은 사내는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호오?”
그의 눈에는 소연의 부축을 받고 겨우 일어서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들어왔다.
짜증으로 가득 차 있던 표정에 만족감이 드러나고, 이내 여유로움이 깃들었다.
“짜증 나는 벌레인 줄 알았더니, 선물을 가져온 까치였구나.”
사내가 히죽 웃으며 손을 뻗는 순간.
“어어?”
여인을 부축하고 있던 소연은 몸이 딸려 가는 느낌에 다급히 발에 힘을 줬다.
그러나 마치 절대 고수가 허공섭물이라도 펼치는 것처럼 그녀의 몸은 여인과 함께 사내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갈(喝)!!”
소연이 균형마저 흩어져 넘어지기 직전, 그녀와 사내의 사이에 끼어든 설천강은 사내가 만들어 낸 흐름을 억지로 끊어 내며 기세를 뿜어냈다.
“네놈의 상대는 나다.”
“쯧, 역시 벌레였군.”
검기와 기세로 자신의 영력을 끊어 버린 설천강의 모습에 혀를 찬 사내는 품에서 작은 병을 꺼내 던졌다.
동굴의 바닥과 부딪히자마자 허무하게 부서지는 병.
그리고 그 안에서 쏟아져 나온 액체는 순식간에 바닥으로 퍼져…….
[크우어어어어!!]
“……이건?”
“조잡한 실패작이지.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짧아 이럴 때나 쓰려고 가지고 다니는 거다.”
몇 번이고 밖에서 마주했던 괴물과 다시 마주한 설천강은 이를 악물고 검을 쥐었다.
‘삼 합.’
세 번의 검격 안에 끝낸다.
그 이상 시간을 끌면 위험하다.
눈치껏 여인의 곁을 지키는 소연 이외의 부하들은 착실하게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들이 합공해서 만들어 내는 틈을 찌르기 위해선 최대한 빠르게 눈앞의 괴물을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수만 명의 사람이 증발했을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선……!
호흡을 고른 설천강이 앞으로 달려 나가고.
[크우어어어!]
괴물 또한 설천강을 향해 달려들었다.
쾅!!
충돌과 동시에 괴물의 힘이 밖에 있는 것들보다 더 강함을 깨달은 설천강은 즉시 내공을 더 끌어올렸다.
설령 조금 무리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삼 합 만에 끝낸다……!
튕겨 나온 검을 당겨 내리긋는다.
반사적으로 휘두르는 괴물의 팔을 가른다.
고통스러운지, 아니면 그냥 파괴 본능에 괴로운 건지.
발작적으로 휘두르는 괴물의 반대쪽 손이 설천강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진다.
허리를 비틀어 공격을 피해 내는 것과 동시에, 설천강은 한 발로 섰다.
검을 휘두르기에는 불안정한 자세.
하지만.
“흐읍!!”
설천강의 검은 그대로 괴물의 심장을 꿰뚫었다.
동시에 검을 휘둘러 뽑아낸 설천강의 검이 만든 상처를 따라 얼어붙은 살점이 떨어져 내린다.
쿵!
괴물을 처리하는 데 성공한 설천강은 다리를 고정시킨 얼음을 부쉈다.
한 발이라는 불안정한 자세에 힘을 더하기 위해 스스로의 다리를 얼려 지면과 고정했던 것이다.
물론 그 여파로 크게 비틀린 무릎과 고관절이 비명을 질렀지만, 이 정도는 조금만 쉬면 돌아올 수 있는 수준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적을 처리하는 것.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라면……!
“쯧.”
사내를 노리기 위해 고개를 든 순간, 설천강은 여태껏 무시하고 있던 현실에 직면했다.
[크어어어어어!]
[쿠어!!]
날뛰는 괴물들.
어떻게든 틈을 만들어 내기 위해 달려들던 부하들은 이를 악물고 괴물과 부딪치고 있었다.
소연은 어떻게든 여인을 지키기 위해 방어를 고집하다가 피를 흘리고 있었고.
“이미 늦었거늘, 헛된 발악이나 하기는.”
노인의 고개만 밖으로 나와 있는 연못으로 걸어가며, 사내가 혀를 차고.
설천강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두 마리의 괴물을 마주하며 이를 악물었다.
“으아아아아! 여 소저!!”
그답지 않은 기합성과 함께, 설천강이 달려드는 순간.
[흑관(黑棺)]
수십 개의 흑관이 날뛰던 괴물들의 사지를 봉했다.
단숨에 싸우던 적이 움직임을 멈춘 사실에 당황한 설천강의 부하들이 얼타는 순간.
[쇄(碎)]
순식간에 크기를 늘리기 시작한 흑관이 괴물들을 집어삼켰다.
뼈와 살이 분쇄되는 섬뜩한 소리 끝에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검은 관이 땅 위에 내려앉는 비현실적인 광경 속에서.
“형수님은 왜 찾아? 바보 형.”
수많은 제물이 쌓인 언덕의 바로 위.
허공에 생겨난 검붉은 문을 지나 설천위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