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9화
448화-설천강 (2)
“남경이 아예 봉쇄됐다고?”
“네. 겨우 탈출에 성공한 이들의 입에서 나온 정보예요.”
“……남경이면 지금 바로 출발해도 최소 보름은 걸려.”
그것도 미친 듯한 속도로 이동할 수 있는 무림인을 기준으로 했을 때다.
일반인은 말이나 마차를 타고 가도 보름은커녕 한 달로도 빠듯할 정도의 거리다.
사람의 체력에는 한계라는 것이 있으니까.
“버텨 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나.”
당장 방법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지금부터 준비해서 달려가도 족히 보름은 걸린다.
진짜 모든 걸 쥐어짜서 달리면 열흘 정도까진 어떻게 기간을 줄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선 도착한 뒤에 전투를 할 수가 없다.
상황이 어떤지 모르는 지금, 최소한의 컨디션을 유지하면서 남경까지 가장 빠르게 갈 수 있는 시간은 보름이다.
“아버지는?”
“움직일 생각이신 것 같아요.”
움직일 생각이다.
그렇게 말한 유예린은 그녀답지 않게 말을 이어 가지 못하고 우물쭈물했다.
그녀의 시선이 향한 곳을 눈치챈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복수할 생각이신가 보네.”
“복수……입니까.”
설천위의 말뜻을 이해한 여웅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책상을 내려봤다.
복수.
애초에 설천강의 죽음을 각오하고 움직인다는 소리다.
설주철조차 아들의 죽음을 각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
설천위의 노골적인 표현에 여웅의 안색이 급격하게 어두워지자 서하영은 여웅의 등을 쓰다듬으며 설천위를 노려봤다.
왜 굳이 그런 말을 하느냐는 책망의 눈초리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알 건 알아야지. 희망만 품어서는 아무것도 못 해.”
그래.
희망만 품어서는 아무것도 못 한다.
이 더럽고 옹졸한 세상은 희망만으로 헤쳐 나가기엔 너무 힘드니까.
“유 매, 내 짐 좀 챙겨 줘.”
“짐을요?”
“어, 난 좀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알겠어요.”
소식이 들어왔으니 아버지가 인원을 선별해 출발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약 한 시진(약 두 시간).
조금 빠듯한 시간이지만.
“천천히 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상황이 그러질 못하겠네.”
전리품을 좀 빨리 정리해야 할 것 같다.
* * *
“후욱, 후욱.”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설천강은 검을 쥔 손을 바꿨다.
조금 전까지 검을 쥐고 있던 오른손을 급히 몸에 닦는다.
손에 피가 너무 묻어서 검이 미끄러질 지경이니, 이렇게라도 닦아 놓지 않으면 전투 중에 검을 놓치고 말 거다.
“영문을 모르겠군. 언제 이렇게 많이…….”
금릉성에 침입해 언여휘를 만났던 날.
설천강은 큰 소득 없이 금릉성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불길을 뚫고 돌입한 설천강이 볼 수 있었던 건 그가 손을 쓸 수 없는 괴물들뿐이었으니까.
‘괴이, 아니 악귀인가?’
인간이 아닌 형체를 한 것들이 사람처럼 나돌아 다니는 모습에 하는 수 없이 금릉성을 탈출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 하나를 구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도저히 자신이 상대할 만한 적들이 아니라는 확신이 들었다.
검기(劍氣)는 물론이고, 빙공까지 사용했음에도 한 무리를 겨우 정리할 수 있었을 뿐이었다.
금릉성 전체가 불타고 있는 이상, 몇이나 되는 적이 있을지 감도 잡을 수 없었기에 설천강이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후퇴뿐이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 하나를 구한 게 성과라면 성과이겠지만…….
“미치겠군.”
유일한 성과는 어찌나 충격을 받았는지 아직도 기절해 있는 상태였고, 금릉성을 아작 낸 적들은 이제 남경 전체로 퍼지고 있었다.
지부에 모인 인원들은 적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흩어진 상태.
뒤늦게 도착한 설천강은 남아 있던 부하 몇 명과 함께 남경 시내를 떠돌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호흡을 고르던 설천강은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투를 거듭하다가 겨우 적을 따돌리고 들어온 이곳.
빈집이다.
분명 시내 한복판에 있어서 무조건 사람이 살고 있어야 할 집인데.
이 난리가 났다고 모두가 집을 버리고 도망치진 않았을 텐데, 여태껏 숨었던 집들은 전부 비어 있었다.
마치 사람을 이 도시 전체에서 깨끗이 지워 버린 것처럼.
“……진법 같은 게 아닐까요?”
“이 도시 전체에 진법을?”
제갈공명이 살아 돌아와도 힘들 것 같은데.
부하의 의견에 쓰게 웃은 설천강은 검을 쥐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말곤 답이 없긴 하네.”
제갈공명은 힘들지 모르지만, 이 도시를 습격한 괴물은 가능한 모양이다.
하늘을 올려다본 설천강은 하늘 위로 흐르는 붉은색 연기를 지켜봤다.
이 난리가 나고 사흘째.
어제부터 하늘로 피어오른 연기는 노골적으로 이 도시의 하늘을 떠돌고 있었다.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이 도시의 위만 맴돌고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이곳을 지켜보는 것처럼.
“부지부장님, 이 아가씨를 계속 데리고 다닐 거예요?”
“두고 갈 순 없잖아.”
“두고 갈 순 없긴요. 얘 때문에 부지부장님이 얼마나 무리하고 계신데요. 열흘 버틸 걸 닷새도 못 버티겠어요.”
한숨과 함께 다가와 설천강의 어깨에 약을 바른 여인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아무리 인명 구조가 중요하다지만, 살 사람이 먼저 살아야죠.”
“성에서 구한 유일한 사람이야. 뭘 알고 있을지 모르잖아.”
설천강의 말에 한숨을 푹 내쉰 여인은 날카로운 눈으로 설천강을 올려다봤다.
“그럼, 일어나서 정보를 불면 두고 갈 건가요?”
“그건…… 아니지.”
“에휴, 이런 사람이 무슨 설가(雪家)야. 냉혈한은 무슨!”
사람이 어째 물렁물렁한 게 따끈따끈하게 익힌 만두 같구먼.
지독한 냉혈한이라는 설가의 악명에 첫 만남에서 떨었던 기억까지 있는데.
“안 되겠다.”
“뭘?”
“어차피 죽을 거, 소원이라도 이루고 죽어야겠어요.”
“……저리 가라.”
약을 바르던 손으로 설천강의 어깨를 붙잡은 여인은 후후 웃으며 설천강에게 다가갔다.
“자, 순순히 몸을 맡기……. 꿱!”
“가라고 했지.”
여인의 입을 검집으로 거침없이 밀어 버린 설천강은 바닥에 널브러진 여인을 차갑게 내려봤다.
“연인이 있다고 골백번은 말했을 텐데?”
“냉혈한! 이렇게까지 유혹하는데, 한 번 정도는 눈 딱 감고 넘어올 수도 있잖아요!”
“설가의 사람답지 않다고 한 게 누군데?”
처량한 모양새로 흑흑거리는 여인을 설천강이 가볍게 쳐 내는 사이.
주위에 있던 이들은 피식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소연, 대체 몇 번을 까이는 거냐.”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남자들도 많은데, 참…….”
“하긴 가질 수 없는 게 탐나는 건 인간의 본성이긴 하지.”
“뭔 소리예요! 가질 수 없긴 뭘 가질 수 없어욧!”
동료들의 놀림에 빽 소리를 지른 소연은 입술을 삐쭉이며 몸을 일으켰다.
“고자.”
“참을성이 강한 거라고 해라.”
“역시 참는 거죠! 암, 내가 매력이 없을 리가 없지.”
설천강의 대답에 ‘그럼 그렇지!’ 하고 쾌재를 부른 소연은 당당하게 팔짱을 꼈다.
자신이 어디 가서 외모로 빠지는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설천강보다 나이가 조금 많긴 하지만, 무인들에게 그 정도는 흠도 못 되니까.
동료들은 장난처럼 놀려 대긴 하지만, 실제로 좋다고 다가오는 남자들도 많고.
뭐, 부지부장보단 못해서 다 쳐내고 있지만.
“제 외모면 충분히 남자를 꼬실 수 있는…….”
“그런 점 때문에 못 꼬시는 거다.”
“누가 못 꼬셔요! 저 좋다고 하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물론 다 쳐냈지만!”
“그건 꼬신 게 아니지.”
검집을 바닥에 대곤 설천강은 피식 웃었다.
“여자한테 제대로 넘어간 남자는 절대 안 물러나거든. 너한테 고백한 놈들은 다 예쁜 외모에 끌린 것뿐이야.”
“그게 꼬신 거죠!”
“다르다니까. 단어는 똑같지만 의미가 달라, 의미가.”
휘휘 손을 저은 설천강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검집으로 느껴지던 진동이 서서히 강해진다.
“온다.”
설천강의 한 마디에 소연과 그의 농지거리를 지켜보던 이들의 얼굴이 단숨에 변한다.
웃음기라곤 하나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무기를 쥐고 일어선 이들이 경계의 촉을 세우는 순간.
콰드득!
나무로 된 벽을 단숨에 무너트리며 달려드는 괴물을 향해 설천강이 망설임 없이 검을 내리그었다.
촤악!
인간의 형태가 아닌데도, 인간과 똑같은 냄새의 피를 뿜어내는 괴물.
‘막혔나.’
그러나 고작 팔을 베었을 뿐이란 것을 깨달은 설천강은 솟구치는 피를 피하지 않고 역으로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품으로 파고든 설천강의 검이 괴물의 가슴팍을 가르며 솟구친다.
또 한 번 피가 치솟았지만, 설천강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괴물 또한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
[크우어어어어!!]
괴성과 함께 달려드는 괴물의 공격을 피해 내며 설천강은 끊임없이 검을 움직였다.
막는다는 선택지는 취하지 않는다.
오로지 회피.
그리고 공격.
방어는 체력을 크게 소모하는 행위다.
조금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방어는 최소한으로 하고 적을 처리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 유리하다.
그렇기에 설천강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기회를 잡은 순간, 괴물을 밀어내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크어어어어!]
[크우어어어!]
순식간에 괴물들의 한복판에 놓인 설천강에게 세 방향에서 적들이 단숨에 쇄도했지만.
“안 되거든!”
“흡!”
단숨에 그의 뒤를 따른 동료들이 다른 괴물들을 저지했다.
특히, 다른 이들은 두세 명이서 하나를 겨우 감당하는 괴물을 설천강처럼 홀로 맡은 소연의 활약은 눈에 띌 정도였다.
난리를 치는 괴물을 베어 내며 설천강은 입술을 깨물었다.
‘느려.’
공격을 받아 내고, 밀어내 전투 공간을 확보했다.
그 뒤로 최소 삼십 합 내에 괴물을 처리했어야 했는데, 벌써 오십 합을 넘게 겨뤘는데도 결판이 나질 않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앞으로도 이십 합 이상은 겨뤄야 할 텐데…….
그래선 늦는다.
이 괴물은 동료가 끝도 없이 많으니까.
싸움이 길어지면 불리해지는 것은 이쪽이었다.
‘내공은 최대한 아끼려고 했지만…….’
적의 방어가 점점 더 까다로워지기 시작한 지금, 미래를 신경 쓰려다가 현재에 발목이 잡혀선 본말전도가 되어 버린다.
내공을 아끼지 않고 단숨에 처리한다.
호흡을 고르고, 냉기를 끌어올린 설천강은 단숨에 적을 꿰뚫었다.
심장 부근부터 얼어붙기 시작한 괴물의 육체가 서서히 무너진다.
얼어붙은 가슴이 얼음 파편이 되어 흩어진 시체의 모습은 끔찍하기보다는 비현실적으로 보였다.
“부지부장님!”
“바로 도와주마.”
즉시 움직여 다른 이들이 상대하던 괴물까지 마무리한 설천강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적들이 몰려올 거다.
지금 당장 그 여자를 챙겨서 도망을…….
“……일어났소?”
흐리멍덩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던 여인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절한 동안 딱히 씻긴 적이 없음에도 꽤나 아름다운 얼굴이 똑바로 설천강을 향했지만…….
“잘됐군. 일어나시오. 지금 당장 움직여야 하니.”
설천강에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외모였다.
애초에 설천강은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니까.
설천위를 욕하고 다니던 시절에도 설천위의 능력을 가지고 욕했지 외모를 가지고 칭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설천강의 냉정한 태도에 정신이 들었는지 여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긴 어디죠?”
“친절히 설명해 주고 싶지만, 시간이 없소. 일단 일어나시오. 다른 곳으로 가야 하니.”
“다른 곳이라면…….”
“내 말 못 들었소? 움직여야 한다니까.”
미세한 짜증이 담긴 목소리에 흠칫한 여인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설천강의 뒤를 따라 무너진 건물 벽을 지나 밖으로 나가고.
“아아……!”
“무슨!”
하늘을 올려다보며 주저앉는 여인을 다급히 붙잡은 설천강은 직감했다.
“당신, 뭘 알고 있는 거지?”
이 여인이야말로 지금의 상황을 타개할 한 수가 될 거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