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47화 (447/624)

제447화

446화-설천위 (2)

완전한 어둠이 찾아온 뒤.

“……쓰읍.”

겨우 정신을 차린 설천위는 차가운 바닥의 감촉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얼마나 누워 있었는지 볼이 땡땡할 정도로 아린 것이 동상에 걸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여긴 또 어디야?”

이곳저곳이 쑤시는 몸을 억지로 일으키자 차가운 바람이 몸을 휘감는다.

으슬으슬 떨리는 냉기 속에서 설천위는 주위를 둘러봤다.

얼어붙은 세계. 바닥은 꽁꽁 얼어붙은 빙판인 데도 앙상한 나무에는 눈이라곤 터럭만큼도 쌓여 있지 않았다.

기이한 겨울 풍경.

겨울이라면 반드시 있어야 할 눈이 완전히 제거된 세계.

그 속에서 누군가를 발견한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네가 여기 주인이냐?”

“그렇지.”

자신감이 없는, 어색한 미소로 고개를 끄덕이는 소년.

깡마른 몸에 거죽만 붙어 있는 목과 턱.

거기에 작은 키까지.

“내가 바로 천위야.”

“……나는 천희다.”

슬쩍 자신의 몸을 내려다본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른 주제에 배만 볼록 튀어나온 몸.

게임에 미쳐 살던 천희의 몸이다.

“응, 알고 있었어. 너는 내 기억을 보지 못했지만, 나는 네 기억을 봤으니까.”

“그건 참 안타까운 소식이네.”

이쪽도 볼 수 있었다면 행동이 여러모로 편했을 텐데.

잔잔하게 웃는 천위에게 어깨를 으쓱인 천희는 얼어 있는 바위에 대충 엉덩이를 걸쳤다.

“그래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난 이유는?”

“안타깝게도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야. 네가 드디어 나를 부른 거지.”

“……불렀다고?”

그런 기억이 없는데.

설천위가 어릴 때 써 놓은 일기를 읽고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충격을 받았을 뿐인데.

딱히 설천위 본인을 부른 기억은…….

“네가 설천위임을 부정했으니까. 나는 여태껏 쫓겨나 있었을 뿐이야.”

“……그럼 지금은 내가 인정했다는 거냐?”

“응. 예린 누나를 향한 마음도 인정했잖아?”

“……그래, 뭐 그렇다고 치자.”

대충 고개를 끄덕인 천희는 눈을 가리는 앞머리를 대충 넘기고, 천위를 바라봤다.

“그래서, 갑자기 이렇게 나타난 이유가 뭐냐? 이제 대충 갖춰질 건 갖춰졌으니 몸을 돌려 달라, 뭐 이런 거냐?”

“안타깝게도 그건 아니야.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

고개를 저은 천위는 자신의 깡마른 몸을 두들겼다.

“나는 과거의 잔재야. 내게 현재의 너와 같은 힘과 능력은 없어. 무엇보다 나는 잔존사념 같은 거라서 몸을 뺏을 능력도 없고.”

“그건 다행이네.”

부드럽게 웃는 천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천희는 한숨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가장 궁금한 거.”

“뭔데?”

“너와 나는 같은 사람이냐?”

단도직입적인 질문.

천위를 향하는 천희의 눈동자에는 불신과 확신이 동시에 깃들어 있었다.

그리고.

“답은 네 스스로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런 천희의 질문에 미소로 답한 천위는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다.

“예린 누나를 잘 부탁해. 다른 여자는…… 뭐, 알아서 하고.”

“오냐.”

“그리고 마지막으로…… 고마워.”

작게 웃으며, 천희의 어깨에 손을 올린 천위의 몸이 하얀 눈으로 변해 흩어지기 시작한다.

“내 세상에 눈을 내려 줘서.”

눈 한 점 없던 겨울의 세계에 하얀 눈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설(雪:눈)이라는 성을 쓰는 일족의 피로 태어나 단 한 번도 스스로의 손으로 눈을 만들어 본 적 없던 설천위.

그는 자신의 세계에 내리는 눈을 보며 웃었다.

“그럼, 뒤는 부탁할게.”

* * *

“아오!”

“어머, 일어나셨나요?”

겨우 눈을 뜬 설천위는 미간을 누르는 손에 일어나기 위해 목에 줬던 힘을 풀었다.

“유 매?”

“갑자기 쓰러지셔서 제가 살피고 있었어요.”

“……내가 쓰러진 건 어떻게 알고?”

“옆방이 제 방이거든요.”

아, 그래?

……가 아니라.

그럼 기감으로 이쪽을 계속 살피고 있었다고?

못 느꼈는데?

[내가 불렀다. 갑자기 쓰러져서 살필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쯧, 그냥 단순한 기절이었다니까. 알아서 깰 것을.]

현태중의 말에 혀를 차는 신의.

신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슬쩍 팔로 몸을 당겨 내린 뒤 상체를 일으켰다.

유예린의 무릎에 머리를 올린 상태로 그냥 일어서면 무언가에 걸릴 수도 있으니까.

작은 배려라고 해야 하나.

“유 매.”

“네.”

“고마워.”

“별말씀을.”

설천위의 인사에 웃으며 대답한 유예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공자께선 멀쩡하신 것 같으니 일단 제 방으로 돌아갈게요.”

“응.”

“그리고 조금 있다가 가족끼리 모여서 아침을 먹는다고 했으니 바로 준비해 주세요.”

“응……. 응?”

벌써?

잠깐…….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서서히 해가 떠오르고 있는 창밖의 풍경에 얼굴을 구겼다.

아니, 내면세계에서 대화라곤 잠깐밖에 안 했는데 무슨…….

밤을 날려 버렸다는 사실을 깨달은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완전히 몸을 일으켰다.

“알았어. 준비할게.”

그나저나 조식이면 어머니도 오시려나?

* * *

설가의 아침.

훈련을 마치고 대충 땀을 씻어 낸 뒤 식탁에 앉은 설천운은 색다른 기분으로 식탁에 앉았다.

“오랜만에 보는구나.”

“그러게요.”

“솔직히 말해서, 네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게 너무 오랜만이라 낯설 정도다.”

어색하게 웃는 설천위를 보며 웃은 설천운은 어색하게 앉아 있는 설천위의 친구들을 보고 가볍게 손짓했다.

“그리 굳어 있을 필요 없어. 오늘 너희까지 모은 건 이번 고생에 대한 감사를 하려는 것뿐이니까.”

“감사라뇨.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정자세로 앉아 있던 철백의 대답에 설천운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다고 해도, 감사받을 일은 감사받을 일이지.”

포쾌가 강도를 현행범으로 잡으면 피해자가 고마워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서 그 일의 가치가 낮아지는 건 아니니까.

“현경급 강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적진으로의 돌입. 결코 쉬운 결정은 아니고, 또 아무나 할 수 있는 결정도 아니지.”

심지어 그것이 강제되는 임무가 아닌 자발적인 것이라면 더더욱 하기 힘든 결정이다.

생각해 보라. 목숨을 걸 이유라곤 의리 하나밖에 없는데, 누가 쉽게 목숨을 걸겠는가.

의리(義理)라는 것은 참으로 안타깝게도 이익과는 거리가 먼 개념이다.

무림의 호사가들 전부가 협(俠)이 죽었다고 떠드는 요즘 시대에 이 정도로 손익과 관계없이 나서 주는 친우는 하나만 있어도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인복이 있구나. 천위.”

“뭐, 그렇죠.”

설천운의 칭찬에 홀짝이던 찻잔을 내려놓은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런 복이라도 있으니까 이렇게 번듯하게 큰 거 아니겠어요?”

“말은 여전히 잘하는구나.”

“자신감이 보여서 좋군요.”

설천운의 말 뒤로, 바로 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곳으로 쏠렸다.

설주철과 함께 들어오는 정유화는 특유의 잔잔한 눈으로 설천위를 똑바로 바라봤다.

마치 타인을 바라보는 것 같은 감정 없는 눈동자.

그 눈빛에 설천운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또 저러시네.’

둘째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더더욱 아이들과 거리를 벌린 어머니다.

어린 시절, 사이가 좋은 두 어머니 사이에서 자랐던 기억이 있는 자신과 설란은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그런 어머니를 이해할 수 있었다.

싫어서가 아니라 아끼기에.

어머니가 없는 설천위나 설란이 차별받는 기분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 아예 방관을 선택한 어머니.

어린 시절에야 야속함도 느꼈지만, 그게 평생을 무(武)만 익혀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투른 어머니 나름의 배려라는 것 정도야 세월이 지나면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문제는 어린 설천강과 설천위였다.

천위야 어릴 때부터 무(武)에 재능이 없음이 드러나 위축되어 있었고, 설천강은 천성이 어리광이 많은 편인데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받지 못했다.

정확히는 설천강이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관심을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 이지만.

여하튼, 그러다 보니 설천강은 애정 결핍과 질투, 기타 등등의 이유로 삐뚤어져만 갔고, 설천위는 그냥 바닥을 파고들어 가 버렸다.

자존감을 잃고 축 처진 설천위를 보며 얼마나 한숨을 내쉬었던가.

설상가상으로 아버지란 작자는 ‘성장하면 저절로 해결된다.’ 같은 소리나 하고 있었으니…….

뒤늦게 자신의 방식이 틀렸다는 것을 깨달은 어머니가 손을 쓰기엔 이미 너무 늦어 버렸다.

자식들은 이미 커서 각자의 길을 가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욱 침묵을 지켰고, 그런 시간이 벌써 몇 년째인지.

‘뭐, 가만히 있었던 나도 할 말은 없나.’

이쪽은 알고서도 가만히 있었으니 더 악질인 셈인가.

얼마 전에 만난, 여동생에게 크게 한 소리를 들었던 것을 떠올린 설천운은 웃으며 손뼉을 쳤다.

“자자, 또 삭막하게 이러신다. 오랜만에 가족이 만났는데, 이런 침묵은 좀 아니죠.”

말없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설주철과 정유화를 보며 씨익 웃은 설천운은 고기를 뜯고 있던 설천위를 보고 그 옆에 있는 유예린을 바라봤다.

“천위에게 들을 이야기가 많잖아요? 우리 제수씨랑 언제 식을 올릴지도 결정해야 하고.”

* * *

“……폭풍 같은 식사 자리였군.”

아침 식사가 끝나고, 연무장에 나온 철백은 고개를 저으며 철봉을 내려놨다.

“생각보다 궁금한 게 많으셨죠.”

철백의 옆에서 창을 들고 수련하던 서하영도 창을 내려놓았다.

식후 가볍게 몸을 푼 두 사람은 호흡을 골랐다.

“대체 집에 얼마나 안 온 거예요?”

“……너희랑 만나고 나서부터?”

“어우, 불효자.”

“불효하는구나. 천위.”

“뭐래.”

구석에서 조용히 마보를 하고 있던 설천위는 코웃음과 함께 허리를 폈다.

“어쩌다 보니 안 왔을 뿐이야.”

“그런 핑계를 대는 게 바로 불효다.”

이 자식이?

철백의 묵직한 일격에 눈을 치켜뜬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니다.

“무림맹으로 언제쯤 돌아가는 게 맞을까?”

“그거야 단주가 정할 일이지.”

“저희는 뭐, 사실 명령을 무시하고 움직이고 있는 거니까요.”

파견 임무 수행 중 실종.

몇 개월이나 실종됐던 인간이 갑자기 나타나면 반응이 어떻겠는가.

거기다.

“단주 자리를 박탈해야 한다고 난리 치는 인간들도 꽤 많을 걸요?”

무림맹의 단주(團主)란 무력(武力)의 상징이다.

꺾일 순 있어도, 절대로 쉽사리 꺾여서는 안 된다.

그런데 설천위는 수적들이랑 싸우다가 실종됐다.

그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의도적으로 은폐한 데다 애초에 내용 자체가 쉽사리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혈교의 놈들이 수작을 부려서 겁나 강한 혈귀가 나와서 개판이 됐다.

그런 설명을 어떻게 하겠는가?

설령 그렇게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런 혈귀 따위에게 져서 중태에 빠진 단주 따위 인정하지 못한다고 한바탕 난리를 칠 게 뻔했다.

심지어, 설천위는 파견 임무 전에 간자를 색출한다는 명목으로 거의 모든 단을 들쑤시고 다닌 전적이 있었다.

그 과정에서 뒷주머니가 떨어져 나간 놈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로 인해원한을 품은 놈들의 숫자도 상당하고, 나름 힘을 가진 놈들이 원한을 품은 경우도 많았다.

“돌아가면 흑룡단 건물이 싹 사라지고 없는 거 아니냐…….”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군.”

천희만락궁은 아직 그 실체가 드러나지 않았다.

제대로 공적을 인정받지 못할 가능성이 컸다.

심지어 북존의 도움까지 받았으니…….

실적이 없는 단(團)?

완전히 해체돼도 할 말이 없는…….

“공자!”

한숨을 푹푹 내쉬던 설천위는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어야 할 유예린이 다급한 얼굴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설천강 아주버님이!”

유예린의 외침과 동시에, 한쪽에서 목각 인형이 섬뜩한 소리와 함께 부러졌다.

“지금, 뭐라고……?”

힘 조절을 실패해 부숴 버린 목각 인형을 등진 여웅의 눈동자가 격하게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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