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6화
445화-설천위 (1)
“후우…….”
“천위, 전투가 꽤나 격렬했나 보구먼. 숨이 거칠어.”
“……어, 어어. 그렇지. 상대가 궁주였잖아.”
전투가 끝나고.
아래에서 이성을 잃고 달려드는 천희만락궁의 병력을 상대하고 올라온 철백은 궁주가 앉았던 의자에 걸터앉아 있는 설천위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싸움은 꽤 전에 끝났는데, 왜…….”
“아오! 이 곰탱이가!”
깡!
서하영이 꺼낸 창의 꼬리에 머리를 맞은 철백이 움찔하며 물러섰다.
“……그런 걸 왜 물어요!”
얼굴이 묘하게 붉은 서하영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한 철백은 일단 순순히 물러났다.
이대로 더 몰아붙였다간 서하영에게 한 소리 듣는 걸 넘어서서 서하영이 삐질 것 같았으니까.
“으휴, 주인님.”
“왜?”
“처음인데 야외라니……. 충격이 크셨……. 꺄악!”
철백이 서하영의 눈치를 보는 사이, 작아진 상태로 설천위에게 접근해 등을 토닥이던 청아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우리 청아, 이야기 좀 할까?”
“아, 아니……. 뉍. 마님.”
유예린의 날카로운 눈빛과 마주한 청아가 끌려가며 설천위에게 실체화를 풀어 달라고 눈빛으로 말했지만.
“아버지!”
설천위는 회피했다.
책임(?)을 회피하고 가장 늦게 올라온 북존을 보고 일어선 설천위는 급히 그에게 달려갔다.
순식간에 도달하는 발걸음.
“천위.”
“네.”
자신의 앞에 선 설천위를 가만히 바라보던 북존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집으로 돌아가마.”
“넵.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참으로 쿨한 아버지시구먼.
별다른 신경도 안 쓰고 돌아가시겠다니.
음음.
꽤나 만족스러운 북존의 태도에 설천위가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무슨 소리냐? 네 녀석도 가야지.”
“……네?”
아니, 그 전에 북존이 원래 이렇게 의사 표현이 확실한 인물이었나?
게임 속에선 고개나 끄덕이든가 ‘내가 하지.’ 정도의 말만 했던 것 같은데?
북존의 예상외의 행동에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어머님께서도 보고 싶어 하셨고, 긴 시간 고생만 하셨으니 조금쯤은 집에서 쉬셔도 괜찮겠죠.”
눈치 없는 청아를 응징하고 돌아온 유예린이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북존의 편을 들었다.
“집으로 돌아갈까요, 공자?”
……넵, 누님.
* * *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전투의 후유증(?)을 핑계로 마차를 빌린 설천위는 마차에 누워 유예린의 간호를 받고 있었다.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응.”
“그래. 그래.”
유예린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운 설천위는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피식 웃었다.
“우리 누님, 꽤나 심경의 변화가 많았나 봐?”
“……누님이라고 하지 말라니까요.”
“에이, 나보다 나이가 많……. 끄악!”
스톱! 스톱! 그거 아이언클로!
단숨에 안면을 휘어잡은 유예린의 손아귀에 설천위가 발버둥을 쳤지만, 유예린의 다른 손이 그런 손아귀의 발버둥마저 봉인했다.
몇 초 후.
“우리 공자님, 뭐라고요?”
“……유 매는 예쁘다고.”
“어머, 고마워요.”
겨우 유예린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목에 힘을 풀었다.
푹신한 감촉과 함께 달콤한 향기가 올라온다.
가만히 앞을 바라보고 있는 유예린의 턱을 올려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입을 뗐다.
“……미안해.”
“알면 다행이네요.”
“진짜 미안. 다음에는 확실하게 연락을 넣을게.”
“네. 그래야죠.”
슥.
눈 앞을 가리는 손에 설천위는 순간 움찔했지만, 순순히 받아들였다.
지은 죄가 있으니 아이언클로 몇 번 정도는……!
설천위가 눈을 감고 자신의 벌을 기다리는 그때.
“다음에는 용서하지 않을 거니까요.”
이마 위로 가볍게 떨어진 손이 부드럽게 설천위의 머리를 쓸었다.
달콤할 정도로 부드러운 손길로.
‘아, 이거 백퍼 용서해 주는 거다.’
다음에도.
……이걸 이용하면 너무 쓰레기겠지?
스스로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가볍게 털어 낸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다음에는 잘할게.”
“네, 좋아요.”
설천위의 답에 웃으며 그를 내려다본 유예린은 쪽 하고 설천위의 이마에 입술을 내렸다.
“이건 대답을 잘한 포상.”
“……으응.”
안 돼.
자각하고 난 뒤로 그놈의 반응이 격해졌어.
움직여라. [부동심(不動心)]!
겨우 평정을 유지하는 데 성공한 설천위는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만족하며 유예린을 올려다봤다.
“더 하고 싶은 말은?”
“으음……. 있죠. 많이 있어요. 예를 들어 공자의 입에서 난 다른 여자의 맛이라던가.”
“……예?”
그걸 어떻게 느끼죠?
귀신인가요?
“어머, 진짜였나 보네요? 찔러 본 건데.”
“주, 죽을죄를…….”
“뭐, 됐어요.”
눈을 감고 벌벌 떠는 설천위의 이마를 가볍게 손가락을 툭 건드린 유예린은 싱그러운 미소와 함께 설천위의 가슴 위로 손을 올렸다.
“이 품에 가장 먼저 안길 사람이 저라면 옆에 누가 있는지 정도는 신경 쓰지 않으니까요.”
* * *
“엣취!”
“맹주님, 또 밤새서 술 드셨나요?”
“아니야. 내가 누군지 알고? 나 할 때 하는 여자야.”
깊은 숲이 끝나고 공터가 시작되는 곳.
나무 위에 걸터앉은 백유는 혈뇌의 물음에 호쾌하게 가슴을 쳤다.
“그냥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어서 재채기를 했을 뿐이야.”
“흐음, 찝찝한 기분이라……. 맹주님 정도 되는 강자의 기분이라면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인데요.”
백유의 대답에 턱을 가볍게 두드린 혈뇌는 고개를 돌려 너머에 있는 작은 마을을 바라봤다.
“감이 좋지 않으면 일단 물러날까요?”
벌레 색출이라는 명목으로 시작된 피바람.
사파에 불고 있는 피바람의 중심에 선 백유는 몇 번째인지 세는 것조차 포기한 혈교의 지부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이 정도라면 혈교에서도 소문이 꽤 돌았을 테니 상당한 대비를 갖췄다고 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쪽이 모르는 전력을 숨겨 두고 있을 수도 있으니 백유쯤 되는 인물의 감이 좋지 않다면 일단 한번 물러나는 것도 좋은 선택이다.
조심을 기하기 위한 혈뇌의 물음에 백유는 나무 위에서 엉덩이를 뗐다.
어깨에 걸친 장포가 펄럭이며 바닥에 착지한 백유는 허리춤에서 꺼낸 단도를 손가락 사이로 돌리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니, 이쪽에서 느껴진 건 아니야.”
가볍게 단검을 돌리던 백유가 앞으로 나아가고, 혈뇌가 즉시 신호를 보내자 숨어 있던 병력이 단숨에 마을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아이는 전부 사로잡고, 성인은 전부 죽여라.”
남녀노소(男女老少) 중에서 딱 소(小)만 챙긴다.
세뇌가 덜 됐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이 마을은 혈교에서 숨겨 놓은 진짜들을 위한 마을.
완벽한 광신도들만 모여 있는 곳이다.
괜히 병력을 끌고 와 대규모 기습을 가하는 게 아니란 소리다.
“여기는 예정대로 전부 지우도록.”
전장으로 걸어가는 백유의 등 위로 검은 용이 일렁였다.
* * *
“으어……. 늘어지네.”
설가(雪家).
생각보다 정말 편히, 그리고 빠르게 도착한 설천위와 일행은 곧바로 짐을 풀고 각자의 방에 자리를 잡았다.
당연히 자연스럽게 시비에게 자신의 방을 안내받은 설천위는 대충 짐을 풀어놓고 침대에 늘어지게 누웠다.
“……집은 집인가.”
꽤 편하네.
침대에 누우니까 뭔가 늘어져!
유예린을 좋아하는 마음처럼 몸이 먼저 반응하는 건가?
‘……뭐 이제 부정할 생각은 없지만.’
처음에는 몸이 제멋대로 반응하는 거라고 생각해 싫었지만, 뭐 이젠 그런 변명 따위 뱉을 수 없는 단계가 됐고.
음, 감내해야지.
문제는…….
‘가족들인데…….’
북존과는 오는 내내 거의 열 마디도 안 했다.
애초에 말이 없는 사람이니까 먼저 가서 말을 걸지 않으면 대화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문제는 어머니.
낳아 준 어머니는 아니지만 키워 준 어머니는 맞다.
그리고 설란의 경우를 생각하면 북존의 첫째 부인은 기본적으로 괜찮은 사람일 확률이 높았다.
물론, 가정 관리는 개판으로 하는 글러 먹은 어머니일 순 있지만.
일단 사람 자체는 그리 모난 인물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다.
친모를 기억하는 설란조차도 자연스럽게 어머니라고 부를 정도이니까.
즉, 그렇기 때문에 위험하다.
설천위의 몸에 천희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아챌 가능성이 가장 높다.
유예린도 눈치채지 못한 시점에서 희망은 충분히 있었지만, 사람 일은 만약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아니, 꼭 그런 건 아닐 수도.”
자기 친자식이 삐뚤어진 것도 눈치채지 못하는 사람인데.
키웠다곤 해도 배다른 자식의 변화를 눈치챌까?
음.
‘희망적인데.’
딱히 무서워 안 해도 될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긍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가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단, 이럴 게 아니다.
조금이라도 조사를 해야지.
집 안에 있던 기억은 전부 잊어먹었으니 정보를 얻을 필요가 있었다.
곧바로 방을 뒤진 설천위는 이내 일기로 보이는 서책을 몇 권 찾아냈다.
꽤나 어릴 때부터 썼는지 양이 꽤 많았다.
“흠, 일단 이게 가장 옛날 건가.”
한 8살? 그때쯤 쓴 것 같은데?
책의 먼지를 툭툭 털어 낸 설천위는 천천히 일기를 읽어 가기 시작했다.
내용은 어린애답게 상당히 간단했다.
뭘 먹었느니, 뭐 하고 놀았느니, 유예린이 예쁘다느니.
흔한 이야기들이 적혀 있었다.
어린아이의 일기를 보는 게 이렇게 재미없을 줄이야.
살짝 흥미가 식은 설천위가 빠르게 서책을 넘기던 중.
“응?”
묘하게 거슬리는 문장에 설천위의 손이 멎었다.
[꿈을 꿨다. 큰형에게 들은 악인이 나오는 꿈이었다.]
어린아이라면 으레 꾸는 악몽.
……이라고 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구체적이었다.
[나쁜 아저씨는 큼지막한 도를 들고 사람들을 베었다. 뜨거운 숨결과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진다. 나보고 무력한 놈이라고 소리친다. 무슨 뜻일까. 확실한 건 분명 나쁜 말일 거다.]
글자가 떨린다.
쓰는 순간에도 공포에 질려 있었다는 증거.
그리고 무엇보다.
[옆에서 누군가가 소리친다. 뭐 하냐고, 빨리 검을 뽑으라고. 정신을 차리고 보니 허리춤에 검이 있었다. 겁에 질려 검을 뽑았다.]
이건…….
[하지만 늦은 걸까. 끔찍할 정도로 배가 아프더니 몸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다. 서서히 눈이 감기는 그때, 예린 누나를 닮은 예쁜 누나가 나를 끌어안고 우는 모습이 보였다.]
죽은 NPC를 되살리지 못하는 하드 모드에서 아무런 훈련도 되지 않은 설천위를 끌고 갔을 때 벌어지는 일이다.
조금 강한 사파인을 만난 것만으로 배에 구멍이 뚫리고 죽음에 이르는 설천위.
그를 보기 위해 임무지를 가깝게 한 유예린이 뒤늦게 와서 구해 주지만, 설천위는 끝내 죽는.
[예쁜 누나가 우는 것을 보니, 가슴이 너무 답답했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정말 이상한 꿈이었다.]
끝에 가서는 글자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써 내려가는 것으로 꿈을 지워 낸 것처럼.
그 뒤로도 몇 번이나 설천위가 배드 엔딩을 맞이했을 때를 꿈의 형태로 겪은 일기가 남아 있었다.
몇 번이고.
“……이게 대체?”
[기이하구나. 어린아이가 꾼 꿈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기이해.]
흥미를 느낀 손휘가 영체 상태로 튀어나와 턱을 쓸었지만, 설천위는 거기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건 말이 안 돼.’
만약 설천위가 어린 시절부터 그런 기억이 있었더라면 어떻게든 대비하기 위해 준비를……!
“아.”
그게.
무공이구나.
재능이 없는 설천위가, 그것을 스스로 알고 있는 설천위가 꾸역꾸역 무림학관에 들어가서 계(癸)라는 치욕을 감내하면서까지 버티고 끝내 무림맹에 들어가는 이유.
이것 때문이구나.
이 꿈속에서 나온 이가 자신이고, 유예린을 닮은 예쁜 누나가 유예린이라는 것을 커 가면서 깨달았기에.
유예린과 거리를 두려 하고 어떻게든 강해지기 위해 이를 악물었구나.
자신의 재능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깨달은 순간, 설천위는 깨질 듯한 두통과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음? 뭐냐! 어이, 괴물! 괴물 녀석아! 일어……!]
흐릿해지는 손휘의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의식은 완전히 암전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