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5화
444화-역전 (7)
[크아아아아아!!]
분노를 토해내는 궁주를 보며 설천위는 도(刀)를 들고 있는 오른쪽 손목을 가볍게 돌렸다.
‘꽤나 할 만해졌어.’
천희만락궁의 궁주를 상대하는 데 가장 걸림돌이 되는 건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궁의 병력.
자잘한 병력 정도야 무시할 수 있지만, 벽을 넘은 수준에 도달한 소궁주들은 그냥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인간 혹은 악귀가 경계를 넘어서는 것으로 힘을 손에 넣은 그들의 강함은 무인의 무력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부분이니까.
일 대 일이라면 얼마든지 이길 수 있지만, 그들이 시간 벌이가 되어 궁주의 뜻대로 흘러가면 바로 두 번째 걸림돌에 발이 걸리고 만다.
두 번째 걸림돌.
궁주의 강함.
뭐, 간단한 이치다.
술사로서 아득한 세월을 살아온 궁주의 강함 그 자체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손휘처럼 폭넓은 술법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이 파고든 분야에서만큼은 확실한 깊이를 가지고 있는 궁주다.
가볍게 들이댔다가는 그대로 탈탈 털리고 깡마른 미라가 됐을 거다.
그래서 기다렸다.
놈의 독에 순순히 당해 시간을 벌었고.
게임 속에서 봤던 대법을 손휘에게 설명해 그 카운터를 칠 수 있는 술법을 익혔다.
게임 속의 기억만으로는 정보가 부족해 다양한 상황에 대응할 수 있는 술법을 만들려다 보니 하나밖에 익히지 못했고 조건도 까다로웠지만…….
이 순간밖에 쓸 수 없는 단발성 술법이라고 해도 충분할 정도로 시간을 쓴 효과는 톡톡히 봤다.
궁주를 향해 쏟아지던 영력을 전부 차단한 것은 물론이고, 가장 큰 방해가 될 소궁주들조차 단숨에 끊어 냈으니까.
순간적으로 혼의 연결을 끊어 냈다.
아무리 강인한 존재라고 해도 심각한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과정에서 대다수가 망가지겠지만…….
어쩔 수 없지.
적을 지키겠다고 이쪽이 목숨을 잃을 순 없으니까.
적까지 챙길 정도의 대의(大義)는 안타깝게도 이쪽엔 없어서 말이지.
조금 손을 늦추니 즉시 파고드는 무형의 검을 쳐 내며, 설천위는 천천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준비는 끝났다.
궁주의 술법은 파훼했고, 놈은 이미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백 년을 준비한 대계가 무너졌는데, 아무리 괴물이라고 해도 정신적으로 타격을 받을 수밖에.
냉정함은 지금의 놈과는 연이 없는 단어다.
그러니.
“슬슬 끝내자고.”
설천위는 양팔을 벌렸다.
검과 도를 뻗어, 거대한 선을 만들어 낸다.
천천히 손목을 돌려 검은 아래로, 도는 위로 향하게 쥐었다.
“위건.”
[노옴! 그 이름을 입에 담지 말라!]
“네가 죽는 이유는 단 하나야.”
솔직히 말해서 원래 계획은 도주였다.
여기까지 왔으면, 궁주의 복장을 뒤집어 놓는 것 정도는 충분히 한 데다 놈의 계획도 확실하게 무산시켰다.
굳이 목숨을 걸고 궁주랑 싸울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소모한 영력과 정신력 때문에 뒷목이 뻐근할 정도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놓칠 순 없었다.
“욕심을 부리면 안 되지.”
히죽 웃는 설천위의 말과 함께 공간이 얼어붙는다.
[……네놈?]
궁주가 다급히 고개를 돌려 북존을 바라봤으나, 북존은 팔짱을 낀 채 그저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북존이 움직인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는 경우의 수는 오로지 하나.
궁주가 고개를 돌린 순간, 왼손에 쥔 검은 땅으로, 오른손에 쥔 도는 하늘로 향하게 한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아버지가 오기 전에 날 처리했어야지.”
쩌저저저저적!
설천위의 검에서부터 시작된 냉기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에 거대한 빙판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동시에 도에서 뿜어진 희미한 선홍색을 품은 백색의 화염은 단숨에 하늘을 뒤엎었다.
“천라지망(天羅地網).”
술법으로 하늘과 땅을 뒤덮은 순리를 역행시켰다면.
지금 이곳에서 내 무(武)는 하늘과 땅을 품은 순리가 되리니.
심상에 품은 강렬한 의지가 설천위의 의지에 맞춰 공간을 가득 메운다.
발아래에는 그 어떤 죄인도 벗어나지 못할 혹한의 대지가.
머리 위에는 그 어떤 죄인도 고개를 숙일 혹염의 하늘이.
북존을 보고 깨달은 설가(雪家)의 냉기를 검에 품고.
고난을 겪으며 다져 온 소령(燒靈)의 열기를 도에 품는다.
그렇게 해서 완성되는 것은 천지를 뒤덮는 거대한 그물.
그 어떤 적도, 그 어떤 죄인도 벗어나지 못하는.
“동염지천지락(凍炎之泉池落).”
[동염지천지락(凍炎之泉池落)]
혹한과 혹염의 못에 빠져 얼어붙고 녹는 고통 속에서 사라져라.
* * *
“……아름다워요.”
하늘에 펼쳐진 얼음과 불꽃의 장관에 서하영이 무심코 감탄을 내뱉었다.
그리고 그런 서하영에게 누구 하나 말을 보태지 않을 정도로 그 광경은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하늘에 생겨난 얼음의 대지에 불꽃의 하늘이라니.
몽환적인 걸 넘어서서 등골이 오싹오싹해질 정도다.
그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모두가 감탄에 빠져 있던 사이.
“가죠.”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건 유예린이었다.
가볍게 손뼉을 쳐서 모두의 정신을 깨운 유예린은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일행이 따라붙고.
기이할 정도로 가로막는 적이 아예 없는 길을 지나고 지나, 금세 정상에 도달했다.
애초에 벽을 넘은 무인에 가까운 이들이니 이 정도 절벽을 오르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으니까.
거기다 외부로도 길이 있는 경우가 있어서 쉽사리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도달한 정상.
“아버님.”
“왔느냐.”
가장 먼저 도착한 유예린은 팔짱을 낀 채 지켜보고 있는 북존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묘하게 불편해하시는 것 같네요.’
남들이 보면 무슨 차이냐고 할 정도로 다른 게 없는 북존이었지만, 그 미세한 변화를 직감적으로 느낀 유예린이 말을 꺼낼까 말까 망설이는 사이.
“대모님!”
“어머, 청아야.”
다다다다, 달려온 청아를 품에 안은 유예린은 품에 고개를 묻는 청아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바쁜 주인 때문에 네가 고생이구나.”
“훌쩍, 감사합니다!”
왜 감사 인사를 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울먹이는 청아를 달랜 유예린은 다시 고개를 돌려 허공을 바라봤다.
얼음으로 만들어진 대지 위에 선 설천위는 그야말로 신화에 나오는 신처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설천위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대지에서 얼음이 송곳처럼 솟구쳤고, 도를 휘두를 때마다 하늘에서 화염이 벼락처럼 떨어졌다.
무리(武理) 따위는 씹어 먹는, 무식할 정도의 화력전.
아마 주현운이 벽을 넘어 화경에 도달했다면 돌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전투 방식이지만.
‘오히려 낫군요.’
술법을 펼치는 적에겐 이쪽이 훨씬 더 효과적으로 보였다.
애초에 무인을 상대하기 위해 기예(技藝)를 무력화시키는 법을 알고 있는 적이다.
파훼 당할 위험을 무릅쓸 바엔 아예 화력으로 찍어 누르겠다는 생각이 보였다.
그 무식한 전투에 절로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이대로라면 도움 하나 주지 못하고…….
유예린이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깨무는 그 순간.
“정신을 차린 자들이 있군.”
북존의 한마디에 순간적으로 기감을 넓힌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을 차린 자들이 이곳을 향해 몰려오고 있었다.
설천위는 지금 술법을 이용한 화력전을 벌이는 중.
적의 방해가 들어오면 빈말로도 좋다고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조금 아래로 가서 틀어막겠습니다.”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곧장 움직이려고 했던 유예린은 움직이지 않는 몸에 당황했다.
이건…….
“내가 가도록 하지.”
유예린의 짐작이 맞았다는 듯, 유예린이 멈추자 그녀의 팔을 붙잡았던 허공섭물을 푼 북존이 천천히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아버님?”
그 모습에 당황한 유예린이 그를 불렀지만, 북존은 별다른 대꾸 없이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흠흠, 저희도 가서 도울까요?”
“아미타불, 저는 계도를 좋아합니다.”
“난 천위가 싸우는 걸 좀 더 보고 싶…….”
눈치 없이 입을 여는 철백의 어깨를 살벌한 소리가 나게 때린 서하영이 기어코 철백까지 끌고 내려갔다.
“저, 저도요! 저도 일하겠습니다!”
홀로 남아 뻘쭘하게 눈치를 보던 청아마저 내려가고.
이해할 수 없는 동료들의 행동에 유예린이 고개를 갸웃하던 순간.
콰과가가가강!
굉음이 그녀의 귀를 사로잡았다.
들었던 의문을 전부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단숨에 고개를 돌린 유예린은 불꽃과 검붉은 연기가 힘 싸움을 하는 모습에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
응원을 내뱉으려던 목소리는 순식간에 잠긴다.
전투 중에 자신의 목소리가 닿을 리가 없으니까.
천위는 언제나…….
꾸욱.
주먹을 움켜쥐고 침묵을 선택한 유예린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나 그래 왔으니까.
기다리는 것만은 충분히 자신 있었으니까.
그렇게 고개를 숙인 순간.
출렁.
“으윽!”
“…….”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인의 풍만한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뒤척이는 움직임이 어찌 이리 파괴적인지.
자신도 밀리진 않지만, 남의 것이라 그런지 눈을 떼기 힘들었다.
그러고 보니, 요려라는 잡것이 천박하게 몸으로 공자를 유혹하려 했다고 했지.
내 천위를.
아직 나도 손대지 못한 그 몸을…….
까득!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문 유예린의 머릿속에 딸꾹질한 백수아가 스쳐 지나간다.
‘히끅! 저, 저는 아직 안 건드렸어요.’
백수아는 아직 안 건드렸다고 했는데.
그럼 건드린 년이 있지 않을까?
설천위는 요 몇 달간 사화라고 불리는 백유와 함께했는데.
그 요망한 여자가 천위를 건든 것 아닐까?
내 천위를?
나만 알았고, 나만 지켜봤던 내 천위를?
내 세상의 전부를?
나는 그 여자 품에 저 사람이 안겨 있는 모습을 보고도 참을 수 있나?
……참을 수 있겠지.
그게 천위의 행복이라면, 자신은 배를 가르는 고통이라도 참을 수 있다.
단장(斷腸)의 고통을 미소 지으면서 참아 낼 수 있다.
하지만.
그 품속에 자신은 아예 안기지도 못한다면?
자신은 안기지 못하는 저 품에 다른 여자가 안겨서 천위의 미소를 가까이에서 독점한다면?
그때 나는 과연 참을 수 있을까?
‘감춘다고 하여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억누른다고 하여 그것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설가에서 들었던 어머님의 조언이 떠올랐다.
까드득!
광검(狂劍)이 요동친다.
참을 수 있겠지……! 그래, 참을 수 있을 거다……! 천위가 행복하다면 무엇을 참지 못하겠는가?
하지만.
“참지, 못할, 지도 모르겠군요……!”
상상만으로 살의가 번들거리는 것을 느끼며 유예린은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얼음과 불꽃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기 시작한 천위를 향해 유예린은 외쳤다.
“천위야!! 힘내!!”
평소에는 하지 않는 반말.
짧은 응원이기에 굳이 존대를 없애고 단순하게 응원의 말을 내뱉었다.
유예린으로서는 기념비적인 한 걸음.
그리고.
쩌저저저저저적!
그 외침에 호응하듯 얼음으로 만들어진 대지가 요동쳤다.
설천위의 검을 따라 움직이던 얼음이 미친 듯이 솟구쳐서 적을 가두고, 도를 따라 움직이던 화염이 미친 듯이 쏟아져 적을 삼킨다.
얼음과 불꽃.
섞일 수 없는 두 가지가 폭풍처럼 뒤섞여 적을 분쇄했다.
얼어붙은 몸 안으로 불이 붙고.
타오르던 몸은 얼어붙어 부서진다.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보조하며, 얼음과 불꽃의 폭풍은 적을 집어삼켰다.
[커어어어…….]
만신창이가 된 궁주가 분칠이 전부 지워진 주름진 얼굴로 무너진다.
이미 사지는 전부 사라지고 몸도 절반만 남은 상태로.
[네, 놈을…… 저주할…….]
“응, 안 돼.”
저주를 말하는 궁주의 입에 도를 박아 넣은 설천위는 궁주가 완전히 소멸해 그 영력을 흡수한 뒤에야 몸을 돌렸다.
그리고.
“웬일이야? 이런 응원도 해 주고.”
단숨에 내려와 유예린을 끌어안았다.
한 팔로 허리를 휘감고 웃으며 그녀의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다.
궁주 덕에 본 광경 때문에 스스로의 내면을 인지한 설천위가 한 작은 장난.
서로의 숨결이 닿을 정도의 거리까지 접근한 뒤에 설천위가 다시 고개를 뒤로 빼려는 순간.
광검의 손놀림이 설천위의 턱을 붙잡았다.
“읍?!”
그리고 돌격.
길고 긴 충돌이 끝나고.
늘어진 선 끝에서 유예린이 입꼬리를 올렸다.
“누나가 가장 먼저 찜할 거야.”
응? 할 거야?
……뭘 해요, 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