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2화
441화-역전 (4)
“……사적귀검(斜跡鬼劍).”
갑작스레 등장한 현태중의 모습에 북존은 조용히 읊조렸다.
기억에 있는 모습 그대로.
죽었던 전대 초생단주가 서 있었다.
“그냥 귀검(鬼劍)이면 충분하오.”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북존에게 말하며, 현태중은 검을 세웠다.
쓸데없는 허례는 빼고 실질적으로 움직이겠다는 의사 표현에 북존은 고개를 돌렸다.
죽은 사적귀검이 어떤 경위로 이곳에 서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아들이 불러낸 것만은 확실한 것 같으니 굳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북존이 다시 냉기를 끌어올리고, 현태중마저 검을 세운 상황.
“하하하! 이건 좀 심각하군.”
웃음소리와 함께 지하 전체의 영력이 울린다.
영력을 다루지 않는 북존마저도 미간을 찡그릴 정도로 강렬한 흔들림.
“이거 참……. 재미있는 기술을 쓰는군. 설천위.”
현태중의 뒤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설천위에게 미소 지은 궁주는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 괴물이 사용하던 것보다 훨씬 더 완성도가 좋구나. 그자는 이런 식의 운용은 거의 하지 않았는데 말이지.”
히죽 웃으며, 궁주는 손을 내렸다.
“하지만, 그렇기에 나약해.”
요동치던 영력이 어느 순간을 뒤틀린다.
사람조차 비틀리는 감각을 느낄 정도로 영력이 뒤틀리고 있었다.
북존마저 이상함을 눈치챈 순간.
“당신의 상대는 여전히 저입니다.”
북존의 앞으로 달려든 오련의 도(刀)가 단숨에 북존의 이목을 사로잡았다.
이제는 쉽사리 넘길 수 없는 거력이 담긴 일격.
쾅!!
지하 전체가 울릴 정도의 굉음이 터져 나오고, 튕겨 나온 도(刀)를 어깨 뒤로 넘긴 오련이 그대로 허리를 숙였다.
자세는 낮게, 호흡은 깊게.
강렬한 열기를 뿜어내는 그녀의 몸 위로 하얀 증기가 안개처럼 휘감긴다.
[휘련(煇煉)]
빨갛게 달아오른 오련의 도(刀)가 공기를 일그러트릴 정도의 열기와 함께 쏘아져 나갔다.
강렬한 빛을 머금은 그녀의 도가 등 뒤에서부터 튀어나와 사선으로 공간을 가른다.
베는 것을 넘어 녹인다.
그런 목적을 품은 듯한 일격.
닿는 순간, 확실하게 모든 것을 녹일 것 같은 열기를 품은 도가 북존의 검과 부딪치는 순간.
오련은 직감했다.
이 공격은 막혔다.
직감한 것과 동시에 오련은 망설임 없이 도를 비틀었다.
쩌적!
도에 엉겨 붙은 얼음이 뜯어져 나가고 단숨에 도를 회수한 오련은 급히 남은 팔로 가슴을 가렸다.
빠각!!
뼈가 부러지는 느낌과 함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른다.
무덤덤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북존과 시선이 마주치고.
“명불허전이구려!”
호쾌하게 웃으며 오련은 몸을 비틀었다.
허공에서 몸을 비트는 것으로 움직임을 만들어 낸 오련은 치켜 올라오는 북존의 검을 받아 내고 땅에 착지했다.
“후, 역시 오존(五尊)이라는 이름은 허명이 아닌 듯하구려.”
“네깟 것 따위가 평가할 이름이 아니다.”
싸늘하게 대꾸하며, 북존은 검을 겨눴다.
이 이상 길게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듯 전투를 이어 가려는 북존.
그가 다시 검을 휘두르려는 순간.
“나약하구나.”
튕겨 나간 현태중이 북존을 지나 벽에 처박혔다.
그리고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설천위를 비웃는 궁주.
“너는 술법으로 사자(死者)를 재현했구나. 완성도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니라. 독학으로 이 정도면 아주 훌륭한 편이지.”
벽에서 꾸역꾸역 일어나는 현태중을 보며 궁주는 손가락을 까딱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약점이 생겼어.”
“커헉!”
허공에서 솟구친 영력의 창이 단숨에 현태중을 꿰뚫었다.
내공과 패기를 담아 실체화시켰다곤 해도 그 본질은 영체.
혼을 꿰뚫는 힘을 품은 공격은 인위적으로 실체화한 현태중에게도 충분한 타격을 줬다.
거기다.
“아직 술사 간의 싸움에는 익숙하지 않은 것도 보이는구나.”
궁주가 인위적으로 비틀어 버린 영력에 적응하지 못한 현태중은 실체화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반응이 좋지 못했다.
“네가 낭비한 시간은 네가 이뤄낸 업적조차 무뎌지게 만드는구나.”
가만히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설천위를 비웃으며 궁주는 끊임없이 영력을 움직였다.
흔들고, 비틀고, 돌린다.
고위급 술사들의 싸움은 결국 영역 싸움이다.
무인들이 그러하듯, 자신만의 영역을 확고하게 지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보다 많이, 보다 정확하게 하는 것.
그것이 고위 술사 간의 전투에서 승패를 가르는 관건이다.
설천위는 그런 영역 싸움에서 패배했다.
애초에 이 지하 전체가 궁주의 영역인 상황.
처음부터 주도권을 쥐고 있던 사람은 궁주란 소리다.
설천위는 스스로 범의 아가리에 고개를 들이민 상황.
무슨 의도로 순순히 잡힌 것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것은 설천위가 주제 파악에 실패했다는 것이다.
“적대 술사의 영역에 쉽게 몸을 들이밀면 안 되지.”
“커헉!”
또다시 요동치는 영력과 함께 현태중의 몸이 날아간다.
허무할 정도의 패배.
처음 등장과 동시에 오련의 방어를 뚫고 상처를 남겼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현태중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등장은 화려했으나 실속은 없었다.
북존이 조금 더 빨리 오련을 마무리하기 위해 내공을 끌어올리는 그때.
“너, 내가 한 말 제대로 안 들었지?”
침묵으로 일관하던 설천위가 비틀린 미소와 함께 입을 열었다.
그리고.
‘……설천위가 했던 말?’
북존과 싸우던 오련조차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순간.
쩡!!
“커헉!!”
피를 토한 오련이 순식간에 파고드는 북존의 검을 막아 내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끄읍!”
기합과 함께 겨우 버티고 선 오련은 식은땀을 흘리며 고개를 쳐들었다.
으스러진 어깨와 팔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회복되는 과정에서 끔찍한 고통이 엄습했지만,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뭐, 기업 비밀이지.”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당황해하는 오련을 한 번 보고는 다시 궁주를 바라봤다.
“어때? 나는 내가 한 말은 지키는 편인데.”
“……통탄스럽구나. 그 재능이라면 하늘이 열렸을 때 단단히 한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을 터인데.”
“뭘 억울할 것까지야. 어차피 안 열릴 텐데.”
어차피 안 열린다.
설천위의 자신만만한 말에 궁주는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
비웃음도 없이, 그저 무덤덤하게.
“하늘은 열린다. 그것은 결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지.”
거스를 수 없다.
그 말에 설천위는 입을 다물었다.
사실 맞는 말이니까.
‘한 번도 막았던 적은 없지.’
유저들 사이에서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나왔지만, 실제로 막았던 사람은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이 넓은 땅덩어리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이벤트를 전부 막아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 리가 있나.
재(災) 등급의 악귀를 때려잡고, 혈교주를 잡아 족쳐도 하늘은 열린다.
인지를 아득히 뛰어넘은 괴물들이 지상으로 내려오고, 또 올라온다.
이 자리에서 궁주를 처리해도 열리는 문의 크기만 줄어들 뿐, 열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을 거다.
궁주의 말대로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니까.
게임 속이었다면 말이다.
“뭐, 다 필요 없고 한 가지 확실한 건.”
히죽 웃으며, 설천위는 흑도(黑刀)를 꺼냈다.
“설령 열리더라도 넌 못 볼 거다.”
* * *
“후우, 정리는 됐나요?”
백수아가 건넨 얇은 잠행복을 입은 유예린은 하나둘 모이고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네! 언니! 확실하게 끝냈어요!”
“상처 벌어져.”
가장 먼저 도착한 서하영의 경쾌한 대답에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벽을 뛰어넘진 못했지만, 이겼어요!”
“그래 보이네.”
소궁주라고 해도 전원이 화경급 이상이었다면 천희만락궁이 진즉에 무림에서 한자리를 차지했겠지.
허리춤이 붉게 물든 서하영을 부드럽게 달래며 유예린은 하나둘 다가오는 이들을 살폈다.
철백은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옆구리로 빠져나가는 긴 자상을.
무해는 몇몇 사혈의 근처에 구멍이 뚫려 있었다.
“다행히, 전원 무사한 것 같군요.”
“아미타불, 부단주님께서는 더 건강해지신 것 같습니다.”
“조금 기연이 있었거든요.”
작게 웃는 유예린의 모습에 무해는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구태여 말을 덧붙이지 않고 조용히 합장하는 무해와 달리, 그녀의 옆에서 미소를 지켜본 서하영은 유예린에게 달라붙었다.
“언니! 언제 그런 미소도 지을 수 있게 됐어요?!”
“얘는 참, 또 뭔 소리니.”
“언제나 막! 딱딱한 미소만 지었으면서! 이번 건 뭔가 뭔가예요!”
“그게 뭔 소리니.”
서하영의 조잡한 어휘력에 피식 웃음을 터트린 유예린은 어느 정도 진정한 서하영을 떨어트리곤 검을 손에 쥐었다.
“아버님께서 먼저 결계를 부수고 빠져나가셨습니다. 이제 저희도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북존 어르신의 흔적은 잡아 놨습니다.”
백수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백수아를 선두로 세우고 곧바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도 상당한 부상을 입고도 말없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렇게 순조롭게 숲을 통과하자.
“……여기가 천희만락궁.”
“생각보다 규모가 엄청나군요.”
절벽과 절벽 위에 지어진 건축물들의 위용에 절로 흘러나오는 감탄을 감추지 못하면서도 서하영은 미간을 찡그렸다.
“……생각보다 건물이 더 많네요. 단주님이 잡혀 있는 곳을 어떻게 찾죠?”
북존은 범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하는 감지 능력으로 금세 찾아냈지만, 안타깝게도 이곳에 그런 기감(氣感)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화경에 오른 유예린이 흉내 정도는 낼 수 있겠지만…….
“무리네요.”
범위가 넓어도 너무 넓었다.
감각을 넓히곤 있지만 절반도 채우기 힘들었다.
작게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정상까지 돌파하죠.”
“……음?”
“보통은 흩어져서 찾지 않나요?”
“적이 얼마나 전력을 숨겨 두고 있을지 모르는 지금, 산개는 좋은 선택이 아니야.”
서하영의 말에 고개를 저은 유예린은 소검으로 절벽의 정상을 가리켰다.
휘황찬란하게, 누가 봐도 궁주가 이곳에 살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는 듯한 건물.
“이런 환경에서 저런 건물을 짓는 인간이 자신의 머리 위로 부하들이 돌아다니는 걸 좋아할 리가 없죠.”
주로 드나드는 곳은 반드시 저 높은 건물의 주위에 마련해 놨을 거다.
그리고.
“공자를 잡았다면 분명 상당한 술법적 조치가 된 공간일 겁니다.”
그런 공간이라면 저 건물의 주위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가능성이 높다.
유예린의 말에 다른 이들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일단 산개는 좋은 선택이 아니니까.
이대로 뭉쳐서 정상으로 올라가는 게 최선이라는 데 이견은 없었다.
모두가 동의하고 정상으로 올라갈 최적의 길을 찾는 그 순간.
쿠구구구구구구구구구!!
대지가 울리기 시작했다.
거세게 흔들리는 땅.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흔들리는 땅 위에서 본능적으로 균형을 잡은 이들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흔들리는 땅을 보고 자세를 잡기에도 급한 이 순간에.
본능이 그들의 고개를 하늘로 이끌었다.
그리고.
[네노오오오오오오오옴!!]
허공에서 괴성을 내지르는 인형의 손을 따라 하늘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분홍색과 칙칙한 검은색이 만나 뒤엉키는 연기.
어느새 오래된 피 같은 꺼림칙한 검붉은색이 된 연기가 기묘한 도형을 이루며 진(陣)을 그리는 순간.
“찾을 필요도 없겠네요.”
유예린의 미소와 함께 허공에 모습을 드러낸 설천위가 검은 흑의를 펄럭이며 웃었다.
“왜 도망치고 그래? 너희 집 안방은 이쪽이잖아?”
[네노오옴……! 감히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있는 것이냐……!]
분노와 증오가 뒤섞인 궁주의 외침에 설천위는 히죽 웃으며 흑도(黑刀)를 그에게 겨눴다.
“알 바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