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0화
439화-역전 (2)
키이이이이잉!!
기(氣)와 기(氣)가 충돌하면서 내는 강렬한 소음과 함께 설천위는 입꼬리를 올렸다.
“더럽게 까다롭네.”
“……그건 내가 할 말이구나.”
순간적으로 목을 감싼 결계로 도(刀)를 막아 낸 궁주는 몇 걸음 물러서서 설천위와 거리를 벌렸다.
“기이하구나.”
그제야 설천위의 어깨 위로 모습을 드러낸 소백진의 모습을 눈에 담은 궁주의 눈동자가 깊어졌다.
“여태까지 느끼지 못했던 혼이 이리 갑자기 등장했다는 것은 완전히 그 혼 자체를 품고 있었다는 소리지.”
설천위의 가슴에 넣던 도중에 빼낸 부채를 펼치며 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구나. 너, 혈패황의 무공을 익혔어.”
혈패황(血覇皇).
그가 누구인가.
이 무림을 피로 한 번 씻어 냈던 괴물이다.
무림 전체를 한 번 초기화했던 괴물.
그게 바로 혈패황이다.
괴물 중 괴물.
그런 괴물의 진전을 이었다니, 정파의 무인으로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을 떠나서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혈패황의 무공은 그의 죽음과 함께 사라졌으니까.
그의 무공을 알고 있으면서 살아 있는 인간은 지금 무림에 없다.
그렇다면…….
마지막 가능성을 떠올린 궁주가 부채로 가리지 못한 눈을 스산하게 빛내는 순간.
“늙은 거 티 내도 딱히 대우는 안 해 줄 거다.”
사슬에 묶인 손을 빼내며, 설천위가 이리저리 어깨를 돌렸다.
“어떻게?”
그 모습에 요려가 당황하는 게 보였지만, 궁주는 딱히 놀라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 사슬은 영력과 내공을 봉인하는 물건이다.
거기에 묶여 있는 상황에서 혼을 실체화시킬 힘이 있다면, 사슬을 끊어 내는 것 정도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닐 테니까.
특히, 설천위처럼 무(武)를 단련해 무식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어린아이의 손목을 비트는 것처럼 간단했을 거다.
그 간단한 걸 하지 못해 죽어간 놈들이 수두룩하지만.
최소한 설천위는 그런 머저리들은 아니라는 소리다.
“나쁘지 않구나. 하긴, 그만한 재능이라면 이 정도 역량은 보여 줘야겠지. 너무 순순히 잡혀 줬다 싶었다.”
“뭐, 당신 같은 괴물이 상대이니 순순히 잡혀 줄 수밖에 없긴 했지만.”
접견실로 불러서 얼굴을 마주 보고 약을 풀고 술법을 갈기는데, 당할 재간이 있겠느냐고.
‘……약 기운이 아직 좀 남아 있나.’
[해독]을 최대로 운용하고 있는데, 아직도 해독이 다 안 됐다.
[독기 흡수]로 독기를 흡수하면서 동시에 해독까지 하고 있는데도 이렇게 느리다면, 보통의 방법으로는 독 기운을 빼는 것 자체가 아예 불가능하겠지.
그나저나.
‘생각보다 더 담담하군.’
이쪽이 이렇게 나왔는데,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 태도가 침착하다.
거기다.
[감촉이 무뎠다.]
소백진의 증언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역시 예상했던 것이 맞겠지.
뭐, 상관없어.
이쪽도 그걸 예상하고 준비해 온 거니까.
다만, 북존이 직접 행차했으니 플랜을 조금 수정할 뿐이다.
“조금 전의 소리, 아버지가 결계를 부순 거겠지? 이곳까지 도착하는 데 앞으로 일각도 안 걸리겠군.”
“아아, 그럴 테지. 북존 정도의 속도라면 일각도 너무 길구나. 아마 반각도 걸리지 않을 게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는 궁주.
그의 말대로 무서운 기세로 이쪽을 향해 달려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살기가 없음에도 강대한 힘을 감추는 것 없이 뿜어내 그 무시무시한 기세에 절로 오금이 저릴 정도였다.
오존(五尊)급의 강자가 본격적으로 힘을 풀어내면 이 정도라는 소리인가.
살존(殺尊)은 진짜 얌전한 편에 속한 사람이었네.
새삼 살존에 대한 평가를 높이며, 설천위는 손을 뻗어 몸을 훑었다.
그의 손을 따라 검은색의 갑주가 그 몸을 감싼다.
“호오? 그건 또 신기한 술법이구나. 아니, 술법이라기보다는 기술에 가깝구나.”
“내 오리지널이지.”
“오리지널?”
“자작(自作)이라고.”
“호오!”
스스로 만들었다는 설천위의 말에 흥미롭게 지켜보며 고개를 주억거린 궁주는 부채를 접고 손바닥을 탁 쳤다.
“훌륭하구나. 허비한 시간을 메우는 방법으로 자작을 선택할 줄이야.”
“자꾸 시간을 허비했다고 하는데, 아니거든?”
“아니다? 그건 동의할 수 없겠구나. 스스로 그만한 기술을 만든 네가 무공 따위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더라면, 지금 이 자리에서 우위에 선 것은 내가 아니라 네가 됐을 것이다.”
담담하게 말하고 있으나, 궁주의 말에 담긴 뜻에 놀란 요려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일 수가 있나?
궁주님께서 술법을 갈고닦은 세월이 얼마인데, 고작해야 약관 정도의 애송이가 술법을 갈고닦는다고 궁주님보다 더 뛰어날 수 있단 말인가.
말도 안 되는 비약이다.
……라고 생각하면서도 요려는 궁주의 말을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는 것이 그녀에게 궁주님의 말은 곧 진리이기에 궁주의 말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궁주가 보낸 신호에 즉각 반응한 요려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설천위에게 들키지 않도록.
요려가 조심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하고, 궁주는 간단한 술법을 펼치며 설천위의 시선을 끌었다.
“고작해야 무공 따위다. 조금 전에 네가 보여 주지 않았더냐? 술법이 극에 이르면 무(武)조차 품을 수 있음을.”
허공에 나타난 분홍색의 연기가 설천위를 휘감는다.
순식간에 몸을 휘감아 피부와 구멍으로 파고드는 연기를 그대로 마시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건 잘 알지도 못하는 녀석이 하는 헛소리고. 무(武)를 함께 익혀야만 올라설 수 있는 경지가 있는 법이지.”
“하나만 해도 정상에 오를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거늘, 오만하구나.”
“누구의 말대로 재능 하나는 끝내줘서 도박을 걸어 볼 만했거든.”
히죽, 웃으며 분홍색 연기를 전부 빨아들인 설천위는 이내 깊게 숨을 토해냈다.
“후우우.”
설천위의 코와 입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오고.
“카악! 퉤!”
설천위가 가래침을 뱉듯 침을 뱉자, 탁한 자주색의 액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내공을 수준급으로 익히면 이런 것도 가능하지.”
“확실히, 해독은 술법보다 무공이 나은 것 같구나.”
“뭐, 당신의 독은 술법도 익혀서 해독이 가능한 거지만.”
피식 웃으며 [흑관]으로 도(刀)를 만들어 낸 설천위는 껄렁한 자세로 어깨에 도를 걸쳤다.
“여기서 당신의 목을 베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거야. 나, 나름 화경급 고수거든.”
“그렇군. 확실히 술사가 이런 좁은 공간에서 무인을 상대하는 것은 상당히 버거운 일이지.”
설천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은 궁주는 부채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다만, 아쉽게도 나는 너와 싸워 줄 생각이 없단다.”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리는 궁주.
정말로 설천위와는 아예 싸울 생각이 없다는 듯 무방비하게 등을 돌리는 모습은 안일해 보이기까지 했지만…….
“씁.”
설천위는 그 등을 벨 수가 없었다.
복잡한 이유가 있어서 베지 못하는 건 아니고.
단순히.
“고자 새끼!!”
“아니라는 건 증명했을 텐데?”
그를 향해 달려드는 적의 존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刀)가 향하는 방향을 꺾을 수밖에 없었다.
거침없이 달려들어 손톱을 휘두르는 요려의 공격을 막아 내려고 설천위는 도(刀)를 휘둘렀다.
요려는 술사 계열.
궁주와 대치하고 있던 빈틈을 노린 것은 나쁘지 않았지만, 술사가 근접전을 시도한 건 역시나 하책(下策)이었다.
할 수 있는 게 근접전밖에 없다면 모를까, 이렇게 달려드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주인님!]
순간, 머릿속에서 울리는 청아의 목소리에 설천위의 손이 멈췄다.
“……고자 새끼!”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슴으로 향하던 손이 멈추자, 요려는 이를 악물었다.
목숨을 걸고 접근까지 해서 매혹술을 펼쳤는데, 이걸 견뎌 낸다고?
궁주님의 약에 당한 상태인데?
지독할 정도의 강한 정신력이다.
그리고 끔찍할 정도로 꼴 보기 싫은 사랑이다.
남자란 것들은 자신이 살결만 드러내면 좋다고 헉헉거리는 놈들 아닌가.
자신이 손으로 턱을 한 번 쓸어 주면 개라도 된 것처럼 혀를 길게 내밀고 허리를 흔드는 놈들뿐이다.
그런…… 그런 놈들뿐인데.
대체 왜……!
“여우 쪽이 섞여 있나.”
“흥!”
“아니, 여우가 아니라 고양이군.”
날카롭게 세운 손톱을 휘두르는 요려의 공격을 물 흐르듯 피해 내면서 설천위는 차분하게 요려를 살폈다.
어느새 돋아난 동물의 귀, 생김새로 봐서는 고양이의 귀다.
요려가 입고 있는 노출이 많은 옷 아래로 튀어나온 꼬리도 고양이의 그것이니 확실하겠지.
거기다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까지.
이 정도면 훌륭한 수인 속성…… 이 아니라.
훌륭한 괴이(怪異)다.
“어느 쪽이 원류지? 인간? 악귀?”
“……인간이다! 왜!”
하악질을 하면서도 공격을 멈추지 않는 주제에 또 대답은 해 주는.
요려의 기이한 태도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 버릇부터 고쳐 놔야겠군.”
회피에 집중하던 것을 멈추고, 앞으로 나아간다.
도(刀)를 휘둘러 요려가 거의 막무가내로 휘두르던 공격의 흐름을 끊어 낸다.
조잡하기 그지없는 조법(爪法)이었기에 그 흐름을 끊어 내는 건 단 일격으로 충분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접근한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요려의 목을 틀어쥐었다.
“컥! 이, 이……!”
“고자 새끼라고 하면 꺾는다.”
아무리 사실이 아니어도 남자한테 할 욕치고는 너무 잔인한 욕이잖아.
거의 부모님을 욕하는 수준이랑 동급이라고.
요려의 목을 움켜쥔 채 고개를 돌린 설천위는 느긋한 태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궁주의 모습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나.”
이쪽은 양보해야겠네.
가볍게 혀를 찬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요려와 마주했다.
“순순히 정보를 불면 부드럽게 대해 주고, 아니면 알지?”
“흥!”
숨이 막히고 있는 주제에 코웃음은 잘 치네.
대답하라고 일부러 손에 힘을 좀 뺐더니 아주 여유로워.
코웃음을 치는 요려를 지그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요려의 몸 곳곳을 때렸다.
혈을 짚어 요려를 완전히 제압한 설천위는 요려를 어깨에 걸친 뒤에 입구 쪽으로 이동했다.
축축한 지하실. 거의 동굴과 같은 구조를 하고 있어서 입구는 한 곳밖에 없어 당연히 이쪽으로 향했지만.
궁주는 여전히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막거나 하진 않았다.
‘나가도 상관없다는 건가.’
그럼, 의식을 여기서 치르는 게 아니란 소리군.
여기는 단순한 준비 공정이거나…….
‘미끼.’
상황 파악을 끝낸 설천위는 그대로 입구 쪽으로 달렸다.
그리고.
콰앙!!
굉음과 함께 무너진 천장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천장을 부수고 떨어졌음에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깔끔한 모습으로.
“드디어 보는군.”
북존(北尊)이 강림했다.
그리고.
“아버지!”
설천위의 경고와 함께 즉시 검을 뽑은 북존이 뿜어내는 냉기가 단숨에 지하 전체를 서리로 뒤덮는다.
순식간에 지독한 냉기로 가득 찬 지하.
그곳에서.
“제1소궁주, 오련(傲煉)이라고 하오.”
무려 상의를 벗고 가슴을 붕대로 감싼 파격적인 복장을 한 여인이 도(刀)를 세워 북존과 마주한 채 기세를 끌어올렸다.
지하가 무너질 것처럼 울리기 시작하는 기파.
북존과 오련이 뿜어내는 기세의 충돌이 그 자체로 폭탄이 되어서 지하를 마구 뒤흔들었다.
자신과 검을 맞댄 오련의 강함에 북존이 드물게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는 사이.
“소궁주의 숫자는 강함으로 정하진 않으나.”
부채로 입가를 가린 궁주가 웃으며 천천히 허공에 술법을 그리기 시작했다.
“첫째 딸만큼은 언제나 내 아이들 중에서 가장 강했지.”
궁주가 펼친 술법이 순식간에 오련의 몸에 겹쳐지고.
대치하던 북존의 검을 힘으로 밀어낸 오련이 도를 당기는 것과 동시에 하얀 입김을 뱉어냈다.
“북존의 목을 가져가겠소.”
오련의 도(刀)가 지하 전체에 가득 찬 냉기를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