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9화
438화-역전 (1)
“이건 걸작이군.”
설천위가 묶여 있는 동굴.
감탄과 함께 고개를 돌린 궁주는 딱딱한 얼굴로 굳어 있는 설천위를 바라보며 웃었다.
“네 약혼자는 생각보다 더한 또X이구나.”
“……조금 과격할 뿐이야.”
“과격? 단어의 뜻을 잘못 알고 있는 것 아니냐?”
히죽 웃으며 손을 터는 궁주였지만, 설천위는 딱히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궁주가 펼친 술법 너머로 보이는 유예린.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각성이야.’
게임 속에서 유예린은 둘 중 하나였다.
철저하게 은신에 파고들어 살존에 버금가는 암살자가 되거나.
모든 것을 놓고 광기에 휩싸여 학살자가 되거나.
전자는 설천위가 그냥 정파에서 쩌리로 남아 살아갈 때의 이야기이고.
후자는 설천위가 죽거나 적에게 넘어가 타락했을 때의 이야기다.
극단적이지만, 설천위를 향한 유예린의 사랑을 볼 수 있었다며 좋아하던 놈들이 많았지.
그런데.
‘둘 다 가졌다라…….’
이건 상상하지 못했던 일인데.
거기다.
‘백유랑 똑같군.’
유예린이 벽에 걸쳐 있다는 건 알았지만, 백유처럼 화경에 오르기도 전에 화강(化罡)을 사용하고 막 그럴 줄은 몰랐는데.
거기다 백수아의 도움으로 다행히 위기를 넘겼다.
무리하는 것이 너무 뻔히 보여서 계획이 틀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손을 써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는데…….
‘어느새 이런 고민까지 하는군.’
살짝 자아 성찰을 하면서 히죽 웃은 설천위는 다시 궁주를 바라봤다.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는 궁주.
그리고.
“……어?”
“음? 뭐냐?”
“……아무것도 아닌데.”
“음?”
술법으로 만든 거울을 바라보던 설천위가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고개를 갸웃한 궁주는 다시 거울을 바라봤다.
순식간에 몰아에 돌입한 유예린의 몸이 살짝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강렬하게 쏟아지는 내공의 여파로 애초에 걸레짝이었던 옷은 이미 흔적도 찾아보기 힘든 상황.
흉터투성이의 전신이 드러난 유예린은 생각보다 풍만한 굴곡의 몸을 가리지 않은 채 오로지 운기조식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이! 이이이이!!”
분노가 가득한 요려의 괴성에 궁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설천위를 바라보며 발로 바닥을 쾅쾅 내려치고 있는 요려.
그리고.
고개를 돌리는 척하면서 힐끗힐끗 거울을 바라보고 있는 설천위.
이상할 건 없었다.
아는 사람, 그것도 이성의 알몸이다.
보면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보고 싶은 거야 뭐, 젊은이의 본능 같은 거지.
다만, 그것만으로는 요려가 저렇게까지 화를 내는 게 말이 안 된다.
말도 제대로 못 할 정도로 화를 내고 있는데, 당연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야…….
“허!”
찬찬히 설천위를 살피던 궁주는 이내 그 이유를 깨닫고 헛웃음을 흘렸다.
올라와 있었다.
작은 천으로 가려 놓은 중요 부위가.
요려가 수십 번을 유혹했음에도 요지부동이었던 설천위의 그곳이 반응하고 있었다.
“저딴! 저딴 흉물스러운 몸에 흥분하는 변태라니!”
“흥분한 게 아니다! 생리 현상이야! 어쩔 수 없다고!”
“그게 더 화난다고, 이 고자 새끼야!”
이를 악물고 화를 분출하는 요려는 거침없이 설천위에게 다가가 손을 휘둘렀다.
분노를 쏟아 내듯 뺨을 때린다.
“내가! 내가!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는데! 고작! 고작 이딴 특이 취향 따위에!”
이를 악물고 화를 토해내는 요려의 모습에 궁주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화가 날 법도 하다.
유혹이라는 특기를 인정받아 소궁주가 된 요려다.
설천위가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끊임없이 유혹했음에도 전부 실패해 그녀가 얼마나 좌절했던가.
그런데 그게 흉터로 가득한 몸이 취향이어서라니.
화가 날 법도 했다.
뭐, 자신은 건들지 않았고 저 정도야 고문도 아니니 약조에 문제는 없겠지.
쾅!!
저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는 폭음에 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설주철도 아직 결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이 정도야 뭐, 문제없지.
그렇게 생각한 궁주는 씩씩거리며 손을 멈춘 요려를 짧게 보곤 거울에 비치는 상을 바꿨다.
아직 싸우고 있는 아이들이 있었으니까.
다만.
“강하군.”
안타깝게도 이쪽의 전력이 전패(全敗)할 것 같았다.
분명 벽을 넘지 못하고 있던 녀석들인데, 어찌 된 건지 벽을 넘은 소궁주를 몰아붙이며 자신들의 앞에 있는 벽을 부수고 있었다.
고작 넘는 것 따위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듯.
[크아아아압!!]
[이 무식한 놈이!]
전신이 피로 흥건한 주제에 미친 듯이 달려드는 철백.
그 육체를 향해 끊임없이 도(刀)를 휘두르는 소궁주였으나, 철백은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나아가 주먹을 휘두른다.
소궁주는 회피했으나 그것이 반복되고 반복되며 점점 더 열세에 몰리고 있었다.
창을 다루는 서하영과 싸우는 소궁주는 더 말할 것도 없었고.
저쪽은 뭐, 이미 끝난 수준이다.
서하영은 상대의 전략과 준비를 말 그대로 전부 분쇄하며 나아가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 과정에서 강기(罡氣)를 깨달았는지 바람과 같은 강기가 그녀의 창을 휘감고 있었다.
이쪽도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아 마무리되리라.
“네 녀석의 동료들은 상당히 강하구나.”
“뭐, 그런 편이지.”
요려에게 맞아 빨갛게 달아오른 뺨으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재능만큼은 무림에서도 손에 꼽을걸.”
“그래 보이는구나. 다만 그래도 네 재능만큼은 아니다.”
“……뭐래.”
저 녀석들이 재능 하나는 얼마나 끝내주는데.
주현운을 제외하면 진짜 무림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재능이란 네 녀석처럼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는 것을 재능이라고 하는 거다.”
“뭐?”
“그 비루한 몸뚱이로 무(武)의 경지를 뛰어넘는 것. 그것을 가능케 해 준 네 재능이야말로 진짜 재능이라는 소리다.”
평생을 무(武)에 몰두해도 불가능할 위업을 고작 약관의 나이에 이루어 냈다.
이게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재능이란 말인가?
무(武)의 천재 중에서도 약관에 벽을 넘어 화경에 도달한 무인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런 재능을 낭비하며 살고 있었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 있겠느냐?”
그렇기에 이 재능은 올바른 곳에 쓰여야 한다.
얼굴에 짙게 칠해진 새하얀 화장이 흐트러질 정도로 궁주의 입꼬리는 크게 비틀렸다.
“네 재능을 내가 올바르게 사용해 주……. 응?”
지금 중요한 순간인데.
이 자식이 어딜 보고 있는 거야.
눈동자가 멍청하게 풀린 설천위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린 궁주는 설천위의 고개가 향한 방향을 바라봤다.
그곳에는 궁주가 만들어 낸 거울이 있었다.
그리고.
[……이게 환골탈태.]
거울에는 환골탈태를 끝마쳤는지 자리에서 일어서는 유예린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환골탈태의 영향으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유예린이 멍하니 흉터 하나 없는 자신의 몸을 매만지고 있었다.
모든 노폐물이 빠져나오고, 새로운 피부가 생겨난 유예린의 모습은 그야말로 하늘 위의 달을 사람으로 빚어낸 것만 같은 아름다움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달덩이 같은…….
“이, 이이이이! 미친놈이!!”
“생리 현상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악을 쓰는 요려의 외침에 다시 고개를 돌린 궁주는 반응해 버린 설천위의 그곳을 보며 그의 앞에서 악을 쓰고 있는 요려를 바라봤다.
눈앞에서 반쯤 드러낸 요려의 가슴이 흔들리고 있었지만, 설천위는 요리조리 피해서 거울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증명하는 것.
“……허어.”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토해낸 궁주는 이내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하! 독종인 줄 알았더니, 애틋함을 품은 가인이로구나!”
“궁주님!”
“됐다. 이 정도면 인정하여라.”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볼을 부풀린 요려에게 대충 손을 휘저은 궁주는 아직도 거울을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는 설천위를 보며 웃었다.
어느새 돌아온 백수아가 그녀에게 옷을 걸쳐 주자 노골적으로 실망하는 모습이 참으로 우습다.
“참으로 재미있구나. 진정으로 부동심을 이룬 녀석이 이리도 어린 녀석이라니.”
부동심(不動心).
그것을 진정으로 이룬 자는 흔들리지 않는 자이다.
감정이 죽어 아예 변화조차 없는 것을 부동심이라고 하진 않는다.
그랬더라면 소림에서 말하는 부처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모든 감정이 죽어 버린 살수일 것이다.
마음을 갈고닦음에 있어서 부동심이란 완전한 평상심을 이른다.
평상심이란 그릇과 같다.
그 안에 물이 차 있어서 외부의 충격이 가해지면 물은 흔들려 그릇 밖으로 넘친다.
감정이 소모되고, 흘러넘친 감정은 주위를 적셔 이성을 흐트러트린다.
부동심이란 그 그릇을 완전하게 만들어 내부의 물이 넘치지 않게끔 하는 것을 말한다.
완전한 평상심.
완전한 그릇.
그것을 이루었을 때, 사람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외부의 자극에 감정을 소모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것은 반대로 말하면, 내부의 자극에는 감정을 소모할 수 있다는 소리다.
물이 흘러넘치진 않지만, 그릇 안에서라면 요동칠 수 있다.
감정을 느끼고 또 소모하지만, 그것을 전부 자신의 뜻대로만 행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부동심의 경지다.
머저리 같은 땡중들이나 주제도 모르는 학사 놈들, 무식한 무지렁이 같은 무인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진짜 부동심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살아가면서도 외부의 일에는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은.
“흐하하하하하!”
어린 나이에 결코 이뤄낼 수 없는 것이다.
아무래도 그릇의 크기가 작을 수밖에 없으니까.
살아온 세월의 길이가 짧으니 그릇을 다듬고 만들 시간 또한 짧다.
그들이 만들어 낸 그릇은 고작해야 접시 정도밖에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접시가 있고, 항아리가 있다면.
외부의 충격에 물이 더 잘 넘치는 그릇은 무엇일까?
당연하게도 전자다.
어린 나이의 사람이 보편적으로 곧잘 흥분하고 외부의 자극에 쉽게 반응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그런데 설천위는 아니었다.
이미 마음속에 항아리를 품고 있었다.
대개 어린 사람의 그릇은 작지만, 그것이 절대적인 법칙은 아니라는 듯.
설천위가 품은 마음의 그릇은 이미 아득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다.
“이건 못 참겠구나.”
자리에서 일어난 궁주가 손을 뻗었다.
쇠사슬에 매달린 설천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고.
“야! 이건 약속 위반이지!”
“상관없다. 인세의 약속 따위 하늘이 열리면 무의미한 것이니.”
“이 새끼가! 뻔뻔하게 억지를 부릴래?!”
발버둥 치며 몸을 비트는 설천위였지만, 손이 묶이고 술법으로 육체마저 거의 힘을 빼앗긴 상태.
허무하게 궁주의 바로 앞까지 끌려간 설천위는 코앞에서 부채로 자신의 가슴을 찌르는 궁주를 노려봤다.
“너……. 후회하게 될 거다.”
“우습구나.”
부채를 서서히 가슴에 밀어 넣으며 궁주는 웃었다.
피 한 방울 튀지 않고 서서히 몸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부채.
그리고.
“약속을 어기지 않을 수 있겠어.”
쿠르릉!!
궁주가 입꼬리를 올리는 것과 동시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굉음이 울려 퍼졌다.
“과연 북존(北尊)은 북존이로구나.”
생각보다 더 빠르네.
힘으로 결계를 부수고 나온 북존의 인기척이 빠르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며, 북존은 더욱 깊게 부채를 찔러 넣었다.
“……아버지가 결계를 나왔나?”
“너도 느낀 것이냐? 참으로 무식한 방법이긴 하나, 맞다. 결계를 부수고 빠져나왔지.”
“그래?”
어느새 심장에 닿을 위치까지 파고들어 간 부채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궁주를 바라봤다.
“그럼, 우리도 시작할까?”
입꼬리를 비틀며 설천위가 웃는 것과 동시에.
[귀령현신(鬼靈現身) 참수(斬首)]
설천위의 어깨 위로 모습을 드러낸 노인이 한 자루의 도(刀)를 휘둘렀다.
훤히 드러난 궁주의 목을 향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