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8화
437화-은검과 광검 (4)
베고, 또 벤다.
그 와중에 파고든 주먹에 살가죽이 찢기고 터져 나갔지만.
멈추지 않는다.
상처 따위는 익숙하니까.
흉터 위에 또 흉터가 덮어지고.
피로 흥건해진 팔과 손아귀에 내공까지 운용해 검을 꽉 쥐었다.
그냥 쥐었다간 피 때문에 미끄러질 테니까.
물론, 옆에서 보면 그런 사소한 문제는 아예 생각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당연했다.
전신에 피 칠갑을 한 사람을 보면서 ‘아, 피에 검이 미끄러지겠는걸. 조심해야겠어.’라고 생각하는 미친 인간이 대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걱정하거나.
겁을 먹거나.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나오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유예린의 상태를 보며 걱정해 줄 사람은 이곳에 없었다.
유예린이 본격적으로 전투를 시작한 뒤로 그녀의 동료들도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후우, 후우.”
혼자다.
철저하게.
도움을 줄 사람 따윈 없다.
아니, 이쪽이 먼저 적을 쓰러트려서 도움을 주러 가야 할 판이다.
혼자다.
언제나처럼.
그러니 해내라.
이뤄내라.
그 이외의 선택지는 그 어떤 것도 허락하지 않는다.
점점 이가 나가기 시작하는 두 자루의 소검을 쥐고, 유예린은 깊숙이 파고들었다.
전보다 훨씬 상처가 적은 혁철거탁의 품 안으로 파고들어 소검을 찔러 넣는다.
강기 한 점 깃들지 않은 검이 날카롭게 파고든다.
검기를 휘감은 검일지라도 맨몸으로 받아 낼 수 있는 혁철거탁이라면, 당연히 몸으로 받아 내고 그대로 주먹으로 유예린의 얼굴을 짓이겨야 정상인 상황.
허나, 혁철거탁은 회피를 선택했다.
자신의 목을 찌르는 소검을 피하고, 그 뒤에 반격한다.
상대가 한 번 회피라는 동작을 취했기에 유예린 또한 회피를 선택할 여유가 생긴다.
허나, 혁철거탁의 공격은 유예린의 공격과 달랐다.
압도적인 힘을 품은 주먹은 그 풍압만으로 살을 찢고, 가죽을 가른다.
그렇기에 살짝 틀어 아슬아슬하게 피하는 것만으론 피해 없이 회피한다는 게 불가능했다.
크게, 그리고 완전히 공격 범위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었다.
허나.
“크하하하!”
유예린은 그러지 않았다.
최소한의 회피로.
이쪽의 움직임이 흐트러지지 않을 정도의 거리 수준으로.
풍압에 가죽이 찢어지고 살이 터지는 것을 감내하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몸을 사리지 않고 오로지 적을 베기 위해 끊임없이 파고드는 그 모습은 그야말로 광인(狂人) 그 자체.
아마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 기세와 광기에 압도되어 움츠러든 나머지 진즉에 목을 내줬으리라.
하지만, 상대는 고작 상대의 광기 따위에 움츠러들 인물이 아니었다.
“좋구나! 계집!”
쇄골 쪽의 옷과 피부가 터져서 피가 솟구치는데도 자신의 품으로 깊숙이 파고든 유예린을 보면서 광소를 터트린 혁철거탁은 단숨에 근육을 조였다.
이건 피하지 못한다.
그리고 피할 생각도 없다.
적의 검이 기이할 정도로 날카롭긴 하지만, 단숨에 이 몸의 목숨을 취할 정도의 수준은 아니다.
그러니 견뎌 낸다.
견뎌 내고 나면 박힌 검을 뽑아내지 못하는 계집의 허리를 그대로 으스러트려 주리라.
입꼬리를 비튼 혁철거탁이 굳건하게 서서 유예린의 검을 받아 내는 바로 그 순간.
극도의 집중 상태에 빠져든 혁철거탁은 자신의 품으로 파고드는 유예린과 두 눈이 마주쳤다.
살기가 가득한 눈동자.
인질을 본 뒤로 가뜩이나 광기로 번들거리던 눈동자가 완전히 맛이 갔다.
광기에 휩싸여 무너질 광인의 눈동자.
그래, 살기에 휩쓸려 이성이 마비된 머저리의 눈동자다.
저런 인간이 휘두르는 검 따위 얼마든지 받아 낼 수 있다.
얼마든지 꺾을 수 있다.
한데.
‘……왜?’
내 몸은 회피를 선택하고 있지?
어째서 허리를 틀고 있지?
고작해야 가죽이 갈라지고 살점이 조금 떨어질 공격을 어째서.
-이리도 필사적으로 피하고 있지?
촤아아악!
피가 솟구친다.
이 육체를 얻은 뒤로는 한 번도 본 적 없던 대출혈.
가슴에서 어깨까지.
겨우 심장을 지켰으나, 깊게 파고든 검이 지나간 흔적은 선명하게 남아서 피를 토해냈다.
“……무슨 짓을 한 거냐, 계집?”
반격은 생각지도 못하고 거리를 벌린 혁철거탁은 검을 늘어트린 채 호흡을 고르고 있는 유예린을 매섭게 노려봤다.
지쳐 보이는 모습.
하지만, 아마 조금 전에 반격을 가했다면 목이 날아갔을 거다.
본능에 의지해 겨우겨우 부지한 목숨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을 순 없다.
그리고 그건 앞으로의 전투에서도 마찬가지다.
‘분명히 달랐다.’
여태까지도 날카로운 검이었지만, 조금 전의 일격은 확실히 달랐다.
가죽과 살을 베어 내는 것을 넘어서서 뼈까지 끊어 냈다.
강기조차 두르지 않은 검으로 가능한 기예가 아니거늘.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예기(銳氣)의 정체에 혁철거탁이 미간을 찡그린 그 순간.
“……네년?”
유예린을 살피던 혁철거탁은 어이없는 광경을 목도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없다.
아니.
없어 보였다.
“……괴물 년.”
헛웃음과 함께 흘린 혁철거탁의 한마디에 유예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게 제 검(劍)인 것 같군요.”
무언가를 쥐고 있는 손.
하지만, 그 내용물이 보이지 않았다.
검(劍)이 보이지 않았다.
“이 강기(罡氣)는 은검(隱劍)이라고 부르죠.”
보이지 않던 강기가 기어코 검마저 보이지 않게 만들어 버렸다.
“맞지 않는군. 네년의 광기 어린 검술과는 전혀 맞지 않는 강기다.”
미간을 찡그리고 혀를 차는 혁철거탁의 모습에 유예린은 고개를 저었다.
“은검(隱劍) 또한 저입니다.”
설령 그 안에 집착과 광기로 가득한 광녀(狂女)가 숨어 있다고 해도.
십수 년을 갈고닦아 온 은검(隱劍) 또한 자신의 검이었다.
그리고.
“이 또한 저의 검이죠.”
품에서 백수아가 넘겨준 주머니를 꺼낸 유예린은 망설임 없이 내용물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 모습에 경계하던 혁철거탁은 헛웃음을 흘렸다.
“드디어 미친 게냐?”
전투 중에 영약을 처먹어?
영약의 힘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해 낭비될 테니 아깝다.
그런 수준의 문제가 아니었다.
급격하게 체내로 들어온 막대한 기(氣)는 평상시의 흐름을 전부 헝클어트린다.
무인(武人)의 전투에서 기본은 심기체(心氣體)의 일치.
그중 기(氣)가 미쳐 날뛸 텐데, 그런 상황에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무인 따윈 없다.
전투 중에 영약을 먹는 것이 얼마나 미친 행동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거침없이 영약을 털어 넣고 삼킨 유예린의 행동에 혁철거탁이 미간을 찡그리고 있는 사이.
“움직이지 않는군요.”
꿀꺽, 영약을 삼킨 유예린이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혁철거탁을 노려봤다.
영약이 흡수되며, 유예린의 몸에서 거친 기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요동치는 약 기운의 영향으로 유예린의 얼굴은 붉어졌다 파래졌다 하는 증상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즉시 앉아서 운기조식을 하지 않으면 영약을 흡수하기는커녕 내상을 입기 딱 좋은 상황.
유예린은 가부좌를 틀지 않고 투명해진 검으로 혁철거탁을 겨누며 입꼬리를 올렸다.
“겁먹었군요. 당신.”
* * *
“……하?”
겁을 먹어?
누가?
내가?
얼굴색이 시시각각 변하는 유예린의 한마디에 혁철거탁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무섭게 일그러졌다.
겁을 먹어?
“내가? 겁을 먹었다고?”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욕에 혁철거탁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검이 조금 날카로워졌기로서니 제가 이미 이긴 줄 알고 착각하는구나!
정신 나간 년이 갑자기 영약을 처먹어 놀라긴 했지만, 고작 그딴 걸로 내가 겁을 먹었다고 말해?
부풀어 오른 근육을 단숨에 조이며, 혁철거탁은 땅을 박찼다.
고작해야 몇 걸음 정도의 거리.
순식간에 유예린의 코앞에 도착한 혁철거탁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영력과 기로 강화된 손과 팔.
예상했던 대로 유예린의 검이 손을 저지하기 위해 팔을 베어 냈지만, 이번에는 가죽과 살을 베이는 데서 그쳤다.
그래, 고작해야 이 정도인 거다!
이딴 나약한 검 따위! 얼마든지 무시하고 저 계집의 얼굴을 짓뭉갤 수 있다.
흉터로 가득한 몸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저 얼굴을 처참하게 짓뭉개 주지!
두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몸을 밀어 넣은 혁철거탁의 주먹이 유예린의 얼굴을 짓뭉개려는 바로 그때.
“역시.”
비웃음이 담긴 유예린의 한 마디와 함께 혁철거탁은 두 눈을 부릅떴다.
유예린을 짓뭉개기 위해 뻗었던 손이 어느새 몸을 가리고 있었다.
유예린의 검을 막기 위해.
공격이 아닌 방어.
자신의 육체를 믿지 못하고 본능이 방어를 선택한 것이다.
“겁먹은 게 맞는 것 같군요.”
“이, 이이!!”
유예린의 조롱에 이를 악문 혁철거탁이 다시 팔을 뻗으려는 그 순간.
“늦었습니다.”
단숨에 파고든 검이 혁철거탁의 팔을 피해 그대로 그의 급소를 베어 냈다.
두 자루의 검이 지독하게 급소만을 노리는, 광기로 가득 찬 검술.
잔잔하기 그지없는 눈동자로 광기를 터트리는 유예린의 검은 미친 듯이 혁철거탁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혁철거탁의 날카로운 반격에 또다시 상처가 늘어났지만, 유예린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나아가고 또 나아간다.
베어 내고 또 베어 낸다.
물러선다는 선택지 따위는 없다.
기껏 검을 숨겨 놓고, 검은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알린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노리는 곳은 급소밖에 없었으니까!
자신의 몸조차 사리지 않고, 광기에 휩싸여 미친 듯이 몰아붙이는 검술.
동시에, 모든 것을 지워 낸 극은(極隱)의 강기(罡氣).
왜 같이 사용하는지 도저히 모를 조합이었지만.
혁철거탁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그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몰아치는 검격을 어렵사리 막아 낸 그 순간.
살점이 갈라지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깊게 파고든 감각이 느껴졌다.
촤악!
그리고 옆구리를 통해 빠져나가는 검에 의해 다량의 피가 바닥에 흩뿌려진다.
베였다.
완전하게.
심장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이 느껴진다고 생각하며, 혁철거탁은 고개를 아래로 내렸다.
“어떻게?”
그건 당연한 의문이었다.
혁철거탁의 능력은 하나.
강함.
육체가 강하다.
그 하나만으로 혁철거탁은 선택받았고,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나기까지 했다.
육체의 강도와 회복력은 인간을 아득히 뛰어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갈고닦은 무(武)는 결코 얕지 않았다.
그러니 이리 허무하게 심장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당신, 온전히 방어만 하는 상황은 상정한 적이 없지요?”
눈에 보이지 않는 검을 털어 내며, 유예린은 담담하게 다른 손의 검을 휘둘렀다.
잘려 나간 혁철거탁의 오른팔이 공중으로 튀어 오른다.
“허술합니다. 육체를 믿고 공격에 집중할 때는 바늘 한 점 들어갈 수 없는 철옹성이었으나.”
남은 한 팔로 반격해 오는 혁철거탁의 주먹을 코앞에서 검으로 갈라 버린 유예린은 투명한 검 위로 흐르는 피로 얼굴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겁을 먹어 방어를 시작한 뒤로는 허점투성이의 모래성이 되더군요.”
검을 털어 내는 것으로 혁철거탁의 남은 손마저 잘라 낸 유예린은 양손을 잃은 혁철거탁의 목에 검을 겨눴다.
“겁을 집어먹은 순간, 당신은 패한 것입니다.”
“흐, 흐흐흐……. 불굴의 육체만으로는 이길 수 없다, 이건가?”
“물론입니다. 굴하지 않는 육체만으로는 이길 수 없습니다.”
꽤나 멀어졌는지 시야에 담기지 않는 곳.
거친 굉음을 터트리며 싸우고 있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유예린은 검을 그었다.
“중요한 것은 꺾이지 않는 마음입니다.”
혁철거탁의 목이 떨어진다.
그리고 무너지는 혁철거탁의 모습을 확실하게 확인한 뒤에야 유예린은 검을 휘감고 있는 강기를 거뒀다.
어쩌다 보니 각성한 화강(化罡).
임독양맥을 타동하기도 전에 화강을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이제는 무리겠지만요.’
내공이 부족해 영약을 먹은 것이 화(禍)가 되었다.
영약 덕분에 어떻게든 강기는 유지할 수 있었지만, 날뛰는 기(氣)로 인해 내부는 이미 한계인 상황.
어떻게 이번 전투는 견뎌 내더라도, 그 뒤에는…….
‘……결혼하자고 하면 받아 줄까요?’
폐인이 된 여자를.
이런 흉측한 몸의 여자를 받아 줄까.
치밀어 오르는 불안감과 허무함에 유예린이 자신도 모르게 입술을 깨무는 그때.
“이건 사죄입니다.”
“……당신?”
어느새 옆에 나타난 백수아가 유예린에게 작은 목함을 내밀었다.
“어머니께서 저를 위해 구한 수많은 영약 중 하나입니다. 내상을 다스리는 데 탁월한 효능이 있죠.”
“……당신이 써야 할 것 같은데요?”
전신이 피로 흥건한 백수아는 어찌나 격렬하게 싸웠는지 호흡마저 거칠어져 있었다.
이런 영약이 있다면 당연히 본인이 쓰는 게…….
“저는 괜찮습니다. 필요한 사람에게 쓰는 게 맞습니다.”
유예린의 손에 영약을 쥐어 주고, 백수아는 물러서서 주위를 경계했다.
운기조식을 하라는 신호.
잠시 그 뒷모습을 바라본 유예린은 목함을 열어 영약을 꺼냈다.
청아한 향이 퍼지고.
단숨에 그걸 삼킨 유예린이 가부좌를 틀었다.
그리고 그 모든 걸 기척으로 느낀 백수아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유혹했다는 그 계집의 살점을 도려내 드리죠.’
……이 정도면 봐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