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7화
436화-은검과 광검 (3)
노골적이고, 농밀한 살기.
유예린의 압도적인 살기에 모두의 시선이 쏠린 그 순간.
“헛소리를 지껄이는군.”
압도적인 한기가 대지를 얼렸다.
하얗게 서리가 낀 대지 위에서.
‘……단단하군.’
자신의 발이 대지와 함께 얼어붙었음을 깨달은 혁철거탁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북존을 바라봤다.
아들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에서도 즉시 힘을 사용했다.
둘 중 하나다.
아들의 목숨을 인질로 삼을 수 없는 냉혈한이든가.
“납치를 해놓고 죽이겠다? 조잡한 협박이로구나.”
누구나가 생각할 법한 가정에 아들의 목숨을 걸 정도의 강심장이거나.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누구나 해 볼 법한 생각이다.
목적이 있으니까 납치했겠지.
그러니 결코 그냥 죽이진 않을 거다.
그런 계산 정도야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고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다.
다만, 그걸 전제로 행동할 수 있느냐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다.
아무리 그래도 적의 손에 인질이 붙잡혀 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수틀리면 고문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을 거고.
잘못하면 사지 중 하나가 잘려 나가거나 눈이나 혀를 잃는 등 영구히 장애가 남을 수 있는 일을 충분히 겪을 수 있다.
살려만 두면 인질로서의 가치는 있는데,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인질극이 벌어지면 괜히 피해자 측이 전전긍긍하는 게 아니다.
인질범의 수중에 인질이 있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할 수밖에 없으니까.
[냉정하기는 여전하구나. 그래, 뭐 목숨을 앗아 갈 생각은 없다고 해도 고문 정도야 할 의향은 있다만?]
그래, 지금처럼.
궁주의 협박에 살기를 뿜어내던 유예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는 것이 보였다.
거기에 더해 설천위의 친구로 보이는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거는 내용물이니까 팔다리 정도야. 아니면 혓바닥이나 눈 정도라면 얼마든지 떼어 낼 의향이 있는데?]
후후 웃으며, 부채를 팔랑이는 궁주.
입에 담는 끔찍한 말과 달리 그의 태도는 느긋하기 그지없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인질로 삼고 협박하고 있는 사람의 태도라고 보기에는 끔찍할 정도로 담담했다.
인간의 감정 따위는 없는 그 메마른 눈동자에 서하영이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그 순간.
“상관없다.”
“예?”
“에에?!”
설주철의 한마디에 긴장하고 있던 백수아와 서하영이 순간 당황했고.
“……아미타불.”
겨우 부동심을 유지한 무해의 불호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붙잡힌 놈이 잘못이다. 자신을 구하러 온 친우를 위해서 팔다리 하나쯤 내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
‘냉정해!’
‘살벌해!’
‘무서워!’
담담하게 아들의 팔다리 정도는 내주어도 괜찮다고 말하는 설주철의 모습에 가뜩이나 싸늘했던 공기가 더 차갑게 식는 사이.
[하하하하하! 진짜 북풍보다 더 차갑구나. 북존.]
웃음을 터트린 궁주가 자신의 부채로 어깨를 툭툭 두들겼다.
시원하게 웃음을 토해낸 궁주의 웃음이 멈추는 것과 동시에 부채도 멎은 순간.
[요려.]
[예.]
[귀를 잘라라.]
[예.]
궁주의 명을 받은 요려가 품에서 비수를 뽑았다.
살벌한 예기가 일렁이는 비수.
그 예기가 어찌나 날카로운지 어린아이에게 쥐여 주어도 사람의 귀 정도는 우습게 잘라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침없이 비수를 뽑아 든 요려가 망설임 없이 설천위를 잡고 귀로 손을 뻗는다.
“아버님!”
그 모습에 오히려 당황한 유예린이 설주철을 불렀지만, 설주철은 말없이 그 광경을 지켜볼 뿐 행동을 하지 않았다.
아니.
“구, 궁주님……!”
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서하영의 상대였던 암살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쩌적!
손끝에서부터 피어난 균열이 순식간에 팔꿈치까지 올라간다.
팔을 덮은 옷까지 단숨에.
얼음덩어리가 되어 무너진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괴물 놈……!”
“크윽!”
“꺄아아! 추, 추워!”
하반신부터 얼음에 뒤덮인 소궁주들이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하지만, 눈앞에서 팔 하나가 얼음 파편으로 변하는 모습을 봐서인지 그 움직임이 상당히 소극적이었다.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은 범위만 움직이는, 작은 반항.
“흡!”
다른 이들이 최소한의 발악만을 할 때, 혁철거탁만은 유일하게 자신의 다리를 부수기 위해 손을 뻗었다.
다리 정도야 얼마든지 내주지.
이 두 팔로 땅을 기어서라도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다면, 내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
혁철거탁이 강렬하게 타오르는 눈동자로 얼음을 움켜쥐는 그 순간.
[독하기는.]
혀를 차는 소리와 함께 요려의 움직임이 멈췄다.
설천위의 귀를 살짝 파고든 비수에서 흘러나온 피가 요려의 손을 타고 흘렀다.
[좋아. 내기의 조건을 바꾸지.]
“…….”
내기의 조건을 바꾸자는 궁주의 제안에 설주철은 말없이 팔짱을 꼈다.
그리고 올라오던 얼음이 멈춘 것을 확인한 혁철거탁은 손을 멈추고 기다렸다.
다른 소궁주들도 움직임을 멈추었고.
[나는 설천위를 건드리지 않고, 너도 내 아이들을 건드리지 않는다. 아이들의 전투가 끝나기 전까지 의식을 시작하지 않을 거라는 약속도 하지.]
“궁주님……!”
너무나 파격적인 조건에 오히려 소궁주들 사이에서 당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궁주도 설주철도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중요한 것은 서로 원하는 것을 얻는 거니까.
[어때? 이 이상은 나도 양보해 줄 생각 없단다.]
빙긋 웃고 있지만, 그 눈동자에 담긴 서늘한 한기를 마주한 유예린이 자신도 모르게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하는 순간.
“좋다.”
설주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와 동시에 적들을 묶고 있던 얼음이 단숨에 사라진다.
순식간에 자유를 되찾은 적들이었지만, 이미 육체가 한 번 완전히 얼었다가 녹았다.
“끄윽!”
심지어 아예 파편이 되어 흩어진 사람도 있었다.
고통을 느낀 암살자가 결손된 팔을 붙잡는 순간.
[그럼 평등한 싸움을 위해 조금 손을 쓸까?]
장난스러운 궁주의 한마디와 함께 소궁주들의 몸에서 초록색의 빛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자연을 품은 바람이 그들을 휘감은 것 같은 모습.
그리고.
“……허.”
“기사(奇事)로군.”
무해와 철백의 감탄과 함께 완벽하게 치료된 소궁주들이 몸을 풀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내 결계 너머에 있을 궁주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자신들의 적을 마주한다.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본 설주철의 미간이 미세하게 일그러졌지만, 궁주는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귀를 자르던 것을 멈췄으니 이 정도는 해야 균형이 맞지 않겠어?]
“……상관없다.”
[그럼 조금 이따 보자고. 북존.]
웃으며 손을 흔든 궁주의 모습이 사라지고,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온 공간 속에서 설주철은 몸을 돌려 유예린을 바라봤다.
“맡기마.”
길게 말하지 않고 딱 한 마디만 남긴 설주철의 모습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당연히 살존처럼 고절한 은신 같은 것으로 모습을 숨긴 건 아니었다.
단순히 어마무시한 속도로 사라져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이다.
“……알겠습니다.”
설주철이 사라진 빈자리를 짧게 바라본 유예린은 완전히 멀쩡해진 혁철거탁을 향해 검을 겨눴다.
“너희를 정리하고, 북존 어르신을 따라가겠다.”
“크하하하하! 헛소리를! 그 몸 상태로 어쩌겠다는 거냐.”
다른 이들과는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유예린은 몸을 사리지 않는 방향으로 혁철거탁과의 전투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상당한 부상을 입었다.
물론 혁철거탁도 그만한 타격을 입었지만……. 그 타격을 궁주가 단숨에 회복시켜 준 지금, 균형의 추는 크게 기울어졌다.
무너진 균형은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넘을 수 없는 벽이 생겨났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닌 상황.
북존마저 사라진 지금, 그야말로 최악이라는 말로 표현하기에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이 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참 간단한 걸 물어보시는군요.”
두 검을 교차하며, 유예린은 미소 지었다.
“모든 걸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을 베는 것까지도.”
* * *
끼릭끼릭.
무언가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대체 뭘 돌리고 있는 걸까.
음.
잘 모르겠지만, 일단 나한테 도움이 될 법한 일이 아닌 건 확실했다.
그도 그럴 게.
‘……뻐근한데.’
양손을 묶어 천장에 매달아 놓고, 이쪽에게 좋은 일을 해 줄 리가 없을 테니까.
고문인가.
고문인가……!
역시 고문은 좀 싫은데!
움찔거리려는 몸을 참으며, 설천위는 최대한 감각을 곤두세웠다.
눈을 감고 있는 지금, 주위의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은 감각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는 일뿐이니까.
축축한 공기가 느껴진다.
다만, 이상하게도 축축한 곳이라면 당연히 나야 할 곰팡이 특유의 퀴퀴한 냄새는 없었다.
이 시대의 기술력으로 곰팡이를 완전히 제거하다니.
얼마나 빡세게 관리한 거지.
살짝 감탄하는 사이, 영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안 되지, 안 돼.”
듣고 싶지 않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북존(北尊), 남의 앞마당에 와서 남의 자식을 괴롭히다니. 성격이 나빠도 너무 나쁘구나.”
웃음소리가 섞인 목소리.
여유가 가득한 목소리와 그 안에 담긴 내용으로 설천위는 상황을 파악했다.
‘……백수아.’
본가로 간 거냐.
아버지를 끌고 왔을 줄이야.
이건 의외인데.
역시 북존은 부성애가 있는 편인가?
게임에서야 설천위가 죽으면 좀 더 빨리 전장에 나오지만.
골때리게도 설천위가 흑화하면 거침없이 자식을 공격하기도 한다.
그래서 감을 잡기 어려워 집에 돌아가지 않았던 건데…….
자신이 직접 움직일 정도라면 아들을 사랑하는 부분이 분명히 있…….
[상관없다.]
……응?
뭐가 상관없어?
[붙잡힌 놈의 잘못이다. 자신을 구하러 온 친우를 위해서 팔다리 하나쯤 내주지 못할 이유가 없지.]
……으응?
“요려.”
“예.”
“귀를 잘라라.”
“예.”
요려의 대답과 함께 귀에서 화끈한 통증이 밀려왔다.
부동심 덕에 아예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지만…….
“독하기는.”
궁주의 목소리와 함께 귀를 파고들던 날붙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고통은 여전하나, 확실한 건 귀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건 아니라는 점이다.
짝귀가 될 뻔한 걸 겨우 모면한 상황.
속으로 한숨을 삼키는 사이, 궁주와 북존 사이에서 빠르게 거래가 성립됐다.
북존을 따라온 이들이 있다는 것을 파악한 설천위는 한숨을 삼켰다.
누군지 뻔했으니까.
그리고.
“슬슬 눈을 떴으면 좋겠구나.”
“……언제부터?”
“북존과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을 때부터니라. 북존은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궁주는 아무리 숨겨도 영력을 의식하면서 혼이 요동치는 것을 감출 순 없다며 웃었다.
“내기의 내용은 들었을 테니 조금 대화를 나누자꾸나.”
“구라 치고 있네. 어차피 의식을 준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할 뿐이면서.”
“후후후, 관점의 차이이니라.”
“관점의 차이는 개뿔.”
코웃음을 친 설천위는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이거나 풀어 주지? 딱히 의미도 없을 텐데.”
“의미가 없기는. 너 같은 괴물 녀석을 붙잡아 두려면 필수이니라.”
……철저하기는.
손목을 휘감은 사슬은 당연하게도 법구의 일종이었다.
그것도 악귀를 봉인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물건이란 소리다.
“나는 일단 사람인데.”
“호호호호호! 농담도 과하구나. 너 같은 아이를 사람이라고 한다면, 하늘과 지옥은 이미 인간의 발아래 짓밟혔을 것이다.”
“……그 정도는 아닌데.”
올려치기가 너무 심하잖아.
“아니. 진심이니라. 솔직히 말해서 놀랐느니라.”
부채로 의자 팔걸이를 툭툭 치며 궁주는 솔직하게 말했다.
“너 같은 재능이 어째서 아직까지 무인 나부랭이 노릇이나 하면서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는지, 왜 천명회 놈들이 너를 포기했는지 궁금한 것투성이이니라.”
궁금하다고 말한 궁주는 잠시 설천위를 바라보다가 이내 빙긋 웃으며 술법을 펼쳤다.
설천위와 궁주가 볼 수 있는 곳에 생겨난 거대한 원.
그 원에서.
“궁금한 건 천천히 해소하기로 하고, 지금은 여흥이나 즐기자꾸나. 마침 좋은 볼거리가 생겼으니.”
궁주가 만들어 낸 원.
그 원을 통해 보이는 풍경 속에는.
[흐아아아!]
어울리지 않는 기합 소리를 내지른 유예린이 피투성이가 되어서 쌍검을 휘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