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6화
435화-은검과 광검 (2)
난데없는 백수아의 딸꾹질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던 것도 잠시.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유예린이 망설임 없이 거한을 향해 달려들었다.
급소를 노리고 파고드는 공격에 거한은 기어코 방어를 시작했다.
여태까지는 방어를 도외시하고 유예린을 공격했다면, 이번에는 급소를 지키기로 한 것이다.
서걱.
그러나 익숙하지 않은 방어가 능숙하게 될 리 없었다.
이번엔 심장보다 세 마디 아래에 생긴 상처와 함께 거한은 움직였다.
“인정하마!”
사납게 파고드는 소검을 몸으로 받아 내며, 앞으로 나아간다.
여태까지와 같은 움직임으로 반격해 오는 거한의 주먹에 유예린은 허리를 낮췄다.
물러나지 않는다.
왼손으로 쥔 검으로 거한의 주먹을 흘려 내고, 오른손에 쥔 검으로 거한의 목을 찌른다.
압도적인 신장 차이를 뛰어넘기 위해 땅을 박차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다.
공중에 뜬 순간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위험 따위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 고려는 의미가 없을 것을 알기에.
“크하하!”
흘려 나간 주먹을 당기며 몸을 틀어 낸 거한은 가까스로 목을 가르는 검을 피해 내고, 호탕하게 웃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구나! 지독할 정도의 살검이로다!!”
“당신의 인정 따위 필요 없습니다.”
“자신의 목숨조차 승리를 위한 발판으로 사용하는 검을 어찌 인정하지 않을 수 있겠나!”
웃음을 터트리며, 거한은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여태까지와는 다른 기백이 담긴 묵직한 한 걸음.
“나는 제2소궁주, 혁철거탁(赫鐵巨倬)!”
진각을 내디딘 거한, 혁철거탁의 몸에서 거친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보통의 무인이 뿜어내는 흰색에서 회색 정도의 것과는 전혀 다른, 붉은 연기.
순식간에 전신에 연기를 휘감은 혁철거탁은 입꼬리를 비틀며 무릎을 굽혔다.
“전력으로 찌부러트려 주마!”
시간 끌기라는 목적을 잊어버린 것처럼 압도적인 기세를 뿜어내기 시작한 혁철거탁의 몸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유예린과 같은 은신은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단련된 무인의 눈으로도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빠를 뿐이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혁철거탁의 주먹이 유예린이 있던 자리를 분쇄한다.
말 그대로 분쇄.
유예린이 서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먼지로 가득 찬 구덩이가 되었다.
“날래군!”
그와 동시에 몸을 비튼 혁철거탁의 육체가 만들어 내는 풍압에 먼지가 솟구쳐 먼지구름이 된다.
순식간에 시야를 뺏긴 상황.
붉은 연기와 먼지구름이 섞여 사위를 분간할 수 없는 장소에서.
“크하하하하하!!”
혁철거탁은 그딴 건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듯 달려들었다.
커다란 웃음소리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며.
그 무식하기 그지없는 돌진에 유예린은 혀를 내두르면서도 검을 쥔 손을 앞으로 모았다.
가슴 앞에서 교차시킨 두 자루의 소검.
자신의 뜻은 이곳에 있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거한을 향해 유예린은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시간으로 따지면 한 호흡도 되지 못할 짧은 시간.
순식간에 교차한 혁철거탁과 유예린이 동시에 호흡을 골랐다.
촤악!
혁철거탁의 어깨에서 솟구친 피가 땅을 적신다.
범상치 않은 출혈이었으나, 여태껏 그가 입었던 생채기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던 것처럼 출혈은 빠르게 멈추고 상처는 아물었다.
도저히 인간의 재생력이라고 하기 힘든 회복 속도.
그렇기에.
“안타깝군.”
몸을 돌린 혁철거탁은 왼팔을 타고 흐르는 피를 천으로 닦아 내고 있는 유예린을 보며 혀를 찼다.
“너 같은 여자가 인간이란 것이 참으로 안타까워. 저 괴물만 없었더라면 궁주님께 들고 갔을 거다.”
“헛소리를 하는군요.”
피를 닦아 내고 신속하게 약을 바른 뒤 상처를 묶어 지혈한 유예린은 자신을 공격하지도 않고 그저 웃고 있는 혁철거탁을 비웃었다.
“인간이기에 저는 강한 겁니다.”
“크하하하! 변하기 전에는 전부 그리 말하지. 나 또한 그러했고.”
입꼬리를 비튼 혁철거탁은 가만히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유예린의 동료들을 가리켰다.
“저 녀석들은 네 승리를 믿고 기다리고 있는 거겠지만, 안타깝게도 틀렸다.”
혁철거탁의 웃음과 함께 서하영이 움직였다.
망설임 없이 창을 뻗어 허공을 찌른다.
그리고.
챙!
분명 허공을 찔렀음에도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직후 허공에서 떨어진 사내가 미간을 찡그리고 혁철거탁을 노려봤다.
“돌대가리, 뭐 하는 짓이냐.”
“흥, 이미 들켰던 건데 내 탓을 할 거냐?”
“쯧.”
혁철거탁의 코웃음에 사내는 비수를 들고 이쪽을 노려보던 백수아와 눈을 마주쳤다.
혁철거탁이 말하기 한참 전부터 이쪽을 지켜보던 백수아 때문에 방금 창을 내지른 서하영에게도 위치가 들켰다.
“암살은 실패군.”
“애초에 북존이 있는 상황에서 암살을 계획한 것 자체가 글러 먹은 거다.”
“암살의 이점은 하나라도 적의 숫자를 줄일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거다. 돌대가리.”
혁철거탁을 비웃은 사내는 꺼냈던 비수를 다시 품에 넣으며, 서하영을 바라봤다.
“그럼 내 상대는 계집, 너냐?”
“암살자라……. 인연이 깊네요.”
살짝 고개를 끄덕인 서하영은 창을 쥔 채 천천히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그런 서하영의 모습을 사내가 비웃는 순간.
휘리릭!
현란하게 회전한 서하영의 창이 사내와 서하영 사이에 있는 모든 것들을 분쇄했다.
그가 은밀하게 준비한 함정들까지 전부.
“……어떻게 알았지?”
북존이 알려 준 건가?
그런 기색은 아예 없었는데?
사내의 눈에 불신이 깃들었지만, 서하영은 담담하게 대답했다.
“암살자와 싸울 땐 주위를 완전히 초토화시키는 것이 정답이라고 배웠거든요.”
“……그럼?”
“혹시 몰라서 휘저은 것뿐이에요.”
“……돌대가리가 하나 더 있었군.”
정말로 마음에 안 든다는 듯 얼굴을 구긴 사내는 천천히 뒷걸음질쳤다.
“좋다. 천천히 숨 말리는 공포 속에서 죽여 주마.”
서서히 그 존재를 숨기던 사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고요함이 내려앉은 순간.
“크하하하하!”
혁철거탁의 웃음소리와 함께 유예린과 그가 충돌했다.
팔에 입은 상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검을 휘두르는 유예린의 공세와 자신의 육체 따위는 돌보지 않는 혁철거탁의 공격이 뒤섞인다.
유예린은 언제나 최소한의 방어만을.
혁철거탁은 언제나 최대한의 공격만을.
인간이냐 아니냐에 의해 생기는 육체적 특성이 만들어 내는 차이.
그리고 그 차이는 생각보다 더 크게 작용했다.
조금이라도 방어에 움직임을 쏟는 유예린이 조금씩 밀리기 시작한 것이다.
혁철거탁이 피해야 할 공격조차 맞으며 들어왔기에 생기는 변화.
그 격렬한 싸움에 모두의 시선이 집중될 때.
촤라라락!
서하영이 휘두른 창이 어둠 속에서 파고드는 비수를 튕겨 냈다.
수십 개의 비수를 전부 쳐 낸 서하영이 창을 등 뒤로 당기고 어둠을 향해 뛰어들었다.
“무식한 계집이!”
망설임 없이 달려드는 서하영을 비웃으며 사내가 함정을 쏟아 냈지만, 서하영은 말 그대로 그 일대 전체를 박살 내면서 나아갔다.
창의 넓은 범위를 이용한, 무식하기 그지없는 돌진.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더 효과적이었다.
숨겨 놓은 함정도, 쏟아 내는 암기도 전부 분쇄하며 나아간다.
그 무식하기 그지없는 돌진에 무해마저 감탄하고.
“슬슬인가.”
철백이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었다.
그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무해는 가슴 앞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쓰게 웃었다.
“아미타불……. 피가 흐를 것이 보이니 이 어찌 슬프지 아니하겠습니까.”
씁쓸함이 가득한 독백과 함께 무해는 몸을 돌려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이들을 바라봤다.
하나하나가 범상치 않은 기세를 뿜어내는 이들.
“아아, 이런 식으로 일 처리를 대충하면 우리가 곤란해.”
짜증이 담긴 목소리를 내뱉은 남자는 어깨에 도를 걸치고 있었다.
웬만한 성인 남성은 휘두르기는커녕 드는 것도 온 힘을 쥐어짜야 할 것 같은 큼지막한 도를 남자는 손가락으로 돌리며 입을 삐쭉였다.
“궁주님께서 내린 명령을 잊은 건 아니겠지?”
“물론이다!”
유예린의 검을 쳐 내며 호쾌하게 대답한 혁철거탁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 자리에서 우리는 죽는다! 북존의 몸에 상처라도 남기고!”
쿵!
묵직하게 진각을 내디딘 혁철거탁의 허리가 거칠게 움직인다.
허리부터 시작된 힘은 등과 어깨를 타고 팔에 닿아 주먹에 실린다.
콰가가가각!!
넓은 범위를 풍압만으로 갈아 버린 혁철거탁의 일격에 나무들이 파편이 되어 흩날렸지만.
“크하하!”
역으로 파고든 유예린의 검이 혁철거탁의 턱을 스치고 지나갔다.
자신의 피부를 우습게 베어 내는 그 검에 혁철거탁은 웃음을 터트리며 공격을 이어 나갔다.
거칠게 휘두른 손이 유예린의 가슴팍을 노린다.
맞는 순간 폐가 곤죽이 되다 못해 더 이상 숨을 쉬지 않아도 될 정도로 큼지막한 구멍이 뚫릴 일격.
차마 그 공격까지 맞아 줄 순 없었기에 유예린은 몸을 비틀어 회피를 선택했다.
그리고 그제야 유예린과 거리를 벌린 혁철거탁은 허리를 쭉 펴고 뒤늦게 합류한 동료들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이놈들을 처리 못 하면, 북존한텐 손도 못 댄다.”
“……흥.”
차마 부정할 순 없는지 코웃음을 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남자는 도를 들어 철백을 겨눴다.
“그렇다면 가장 벨 맛이 날 너로 정하지.”
“잘못된 선택을 하는군. 네 녀석의 도(刀) 따위로는 날 벨 수 없다.”
“살가죽이 갈라지고 피를 흘려 정신이 흐려진 뒤에도 그딴 말을 할 수 있는지 보마.”
입꼬리를 올린 남자와 철백이 마주하고.
“아미타불……. 시주께서는 어찌 이리도 지독한 혈향을 내뿜으십니까.”
“응? 뭐라는 거야, 땡중이.”
무해는 철사를 가지고 장난치는 소녀와 마주했다.
그리고 백수아는…….
“많군요.”
주위를 포위한 적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보며 단검을 꺼냈다.
순식간에 조여 오는 포위망.
백수아도 혈투를 각오하고 나아가려는 순간.
“같잖군.”
모든 것을 얼릴 것 같은 차가운 목소리와 함께 모든 이들의 행동이 일제히 멈췄다.
검을 뽑지도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있던 설주철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내 앞에서 꽤나 제멋대로 행동하는군.”
살기(殺氣) 따윈 없었다.
허나, 그럼에도 살을 에는 것 같은 한기가 그들을 잠식해 왔다.
이대로라면,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런 섬뜩한 예감에 누군가가 행동에 나서려는 그 순간.
[안 되지. 안 돼.]
허공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한기를 날려 버렸다.
이 정도 한기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가볍게.
[북존(北尊), 남의 앞마당에 와서 남의 자식을 괴롭히다니 성격이 나빠도 너무 나쁘구나.]
“자식? 자식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부모는 오랜만에 보는군.”
[그 아이들이 바라던 것이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겠는가.]
웃음을 흘리며 천천히 형체를 이루는 것은 분홍색 연기였다.
그것이 뭉쳐 사람과 비슷한 형태를 이루자, 허공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맞춰 입처럼 뚫린 구멍이 움직였다.
[이것도 기회이니 가벼운 내기를 하자꾸나.]
“꺼져라.”
[냉정하기는. 들어보아라. 네게도 그리 나쁜 제안은 아닐 터이니.]
후후 웃음을 흘리며, 궁주는 연기로 이루어진 손을 뻗었다.
[네가 데려온 아이들과 내 아이들이 싸워 이기는 쪽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하지. 물론 설천위를 풀어 달라는 과한 요구는 안 되지만.]
웃음과 함께 흔들거린 연기의 머리가 삐딱하게 꺾였다.
[이 결계를 해제하는 것 정도는 해 줄 수 있단다?]
비웃음이 담긴 그 목소리에 설주철의 두 눈에 차가운 살기가 일렁였다.
“가소롭군. 그딴 내기에 응할 생각 따윈 없다.”
한 걸음.
북존이 단 한 걸음 내디딘 것만으로 궁주가 만들어 낸 연기의 반이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얼음 파편이 되어 무너지는 연기.
[여전히 살벌한 능력이네. 하지만 그래, 그럼 내기를 위한 판을 마련해 줄까.]
웃음을 흘린 궁주가 손을 뻗자 연기가 원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북존, 네가 움직이는 순간 설천위는 즉시 죽이겠어.]
그 안에 비치는 설천위의 모습에 결계가 요동쳤다.
쇠사슬에 결박당해 천장에 매달린 설천위는 중요 부위만 가린 상태였고.
“죽인다……!”
그의 곁에서 설천위를 어루만지고 있는 요려를 바라보는 유예린의 두 눈에서 지독할 정도의 살기가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