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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35화 (435/624)

제435화

434화-은검과 광검 (1)

손휘에게 수업을 들으면서 설천위는 꾸준히 밖으로 나돌았다.

물론 매일 돌아다닌 건 아니었다.

그랬다간 의심을 받을 테니까.

한 번 이쪽을 주시한 궁주도 있다.

조심하는 것이 좋았기에 3번째는 2번째 이후로 사흘이나 쉬고 난 뒤에 진행했다.

그다음에는 대충 이틀에 한 번 정도씩 나갔다.

그렇게 열흘.

“흠, 오늘은 어디로 가지.”

[또 나가는 게냐?]

목표로 했던 다섯 번을 전부 채우고도 나갈 준비를 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손휘가 미간을 찡그렸다.

씨앗은 이미 넉넉하게 뿌려 뒀으니 차라리 안에서 여태까지 익힌 것을 복습하는 것이 더 나을 터인데.

[네 녀석이 빠르게 지식을 흡수한 것은 사실이나, 실제로 그것을 운용하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심상 수련에 힘쓰는 것이 어떠냐.]

“에이, 밖에서 지켜보고 있는 것들 때문에 집중도 안 되는데 무슨 심상 수련이야.”

손휘의 말에 피식 웃으며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대충 차려입은 옷을 툭툭 털고 방문을 열었다.

“여. 기다렸나?”

“오늘도 돌아다니실 생각인가요?”

“어. 이야, 볼 게 많네. 역시 화려한 경력을 가진 궁주가 만든 곳다워.”

화려한 경력.

그 말에 요려의 미간이 살짝 움직였으나, 설천위는 모르는 척 태연하게 걸었다.

“오늘은 조금 위쪽으로 갈까 하는데. 어때?”

“그건 다행이군요.”

다행이다…….

요려의 대답에 설천위는 걸음을 멈추고 그녀를 돌아봤다.

부채로 입가를 가린 요려의 눈이 곱게 휘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궁주님께서 부르십니다.”

* * *

“……결계인가.”

조용한 숲.

그곳을 걷던 북존의 한마디에 다른 이들은 일제히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주위를 살핀 그들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북존을 바라봤다.

“아버님, 결계라 하시면?”

“기(氣)가 교묘하게 헝클어져 있다.”

짧은 대답과 함께 주위를 살핀 북존은 작게 미간을 찡그렸다.

“파훼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정공법으로 공략하는 건 무리다.

힘으로 찍어 눌러 짓밟는 게 최선이다.

다만 그것도 어느 정도 결계의 축이 있는 위치를 알아야 가능한 일이다.

영역 전체를 힘으로 찍어 눌러 부수는 것도 방법이 될 순 있지만, 그건 힘의 낭비가 너무 심하다.

현경급 강자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북존이 그렇게까지 힘을 낭비하는 건 결코 좋은 선택이라고 볼 수 없었다.

북존이 말하는 의미를 깨달은 유예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급할수록 돌아가라.

그 격언대로 일단 정지해서 정비하려 했던 유예린의 계획은 저쪽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무너졌다.

“그건 너무 힘든 일이 아닌가 싶은데.”

땅이 울릴 정도의 묵직한 걸음.

지축을 흔드는 그 울림에 북존을 제외한 네 사람이 일제히 살기를 일으켰다.

“까탈스럽기까지 한 것 같군.”

나무를 헤치고,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인간이 맞나 싶을 정도의 엄청난 크기.

철백도 거한이지만, 철백보다 1.5배는 더 큰 신장에 근육의 크기도 철백과 비교할 수 없는 수준이다.

뚜둑.

목을 꺾으며 거대한 손으로 자신의 어깨를 잡은 거한은 담담한 눈으로 유예린 일행을 바라봤다.

“궁주님의 명이다. 어느 누구도 이곳을 지나가지 못한다.”

“과연, 아예 발을 묶어 둘 생각인가요.”

거한의 선언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북존을 짧게 바라보곤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렇다면 치우겠습니다.”

“하, 계집. 주제를 알아라.”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손을 내린 거한은 유예린을 비웃었다.

“반푼이 따위가 감히 날 치우겠다고? 천년이 걸려도 불가능한 일이다.”

“당신 같은 추남 앞에 천년이나 서 있을 생각은 없습니다.”

소매에서 소검을 꺼내 양손에 쥔 유예린은 작게 웃었다.

“아버님께서 이 결계를 읽어 내 파훼하시기 전에 쓰러트려 드리지요.”

“하! 그 아가리를 찢어 저 괴물 놈 앞에 뿌려 주마!”

유예린의 도발에 거친 포효와 함께 달려드는 거한.

그런 거한을 향해 유예린 또한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충성심이 엄청나군요.’

순식간에 거한의 아래로 파고든 유예린은 망설임 없이 거한의 허벅지를 칼로 그어 내며 침착하게 상황을 분석했다.

북존조차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펼쳐진 진법.

방향을 제대로 읽어 낼 수 없게 하는 간단한 성능의 진법이지만, 그렇기에 위력은 충분했다.

적의 목적이 시간을 끄는 것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테니까.

다만, 그걸 파훼할 능력이 있음을 알고 시간을 끌 수하를 보냈다.

허벅지를 파고든 검이 가죽조차 제대로 베어 내지 못하고 튕겨 나온 것을 확인한 유예린은 몸을 비틀었다.

회전과 함께 사내의 거친 주먹에서 벗어난다.

마치 주먹을 휘두르면 주변의 공기가 그 주먹을 휘감고 움직이듯이.

주먹에 닿지 않고 주먹이 만들어 내는 흐름에 몸을 맡긴다.

순응은 은신을 하면서 얼마든지 익혔다.

이런 무식한 공격에 순응하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차분하게 적의 공격을 피해 내며 유예린은 착실하게 적을 파악했다.

무력은 화경급.

천희만락궁에서도 꽤나 요긴하게 쓰이는 전력일 거다.

그런 전력이 이곳에 왔다.

북존을 바라보는 눈에 흔들림이 없는 것으로 봐선 북존이 올 것을 모르고 있었던 것도 아니다.

괴물 놈이라고 칭하는 것을 보면 자신이 상대가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도 기꺼이 사지라고 할 수 있는 이곳으로 왔다.

그 의미가 무엇이겠는가.

궁주의 명령이라면 화경급 고수조차 망설임 없이 목숨을 내던질 수 있다는 소리다.

‘역시…….’

거한의 주먹을 검으로 받아 내 위로 튕겨 올린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지금의 저로는 안 되겠군요.”

“무슨 헛소리냐?”

“제가 치울 수 있는 것은 제가 치워야겠지요.”

거한의 말을 무시하며 유예린은 말을 이었다.

애초에 거한에게 한 얘기가 아니다.

자기 자신에게 한 이야기지.

계기가 생기면 넘을 수 있겠지.

시간이 지나면 닿을 수 있겠지.

그런 안일한 생각으로 낭비한 시간이 얼마인가.

부단주라는 직책을 얻어 그의 곁에서 함께한 시간이 너무 행복해 낭비해 버린 시간이 얼마인가.

……그의 보호에 취해 안일해진 것이 누구인가.

잊어서는 안 된다.

놓아서는 안 된다.

거한과 거리를 벌린 유예린은 망설임 없이 소검을 돌렸다.

자신을 향해.

그리고.

서걱.

잘려 나간 소매가 바닥으로 흩날린다.

중원의 여인들이라면 결코 드러내지 않을 어깨와 겨드랑이를 드러낸 채 유예린은 소검을 겨눴다.

“호오.”

그리고 그런 유예린의 모습에 거한조차 감탄을 흘러나왔다.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한 것이 아니었다.

상처.

거미줄처럼 새겨진 상처들이 그녀의 팔을 휘감고 있었다.

그중에는 치료 전에는 어떤 상태였을지 쉬이 짐작도 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한 흉터들도 셀 수 없이 많았다.

“숨기지 않겠습니다.”

언제나 옷으로 꽁꽁 숨겨 왔던 흉터를 드러낸 채 유예린은 손에 쥔 소검을 교차시켰다.

“부끄러워한 것은 그이가 아니라 저니까요.”

그 사람이라면, 이런 흉터를 흠으로도 보지 않을 거다.

그럼에도 자신은 부끄러워서 숨겼다.

은(隱)의 무학을 익혔으니까.

음(音)의 무학을 익혔으니까.

흉터를 꽁꽁 싸매고, 아름다운 모습만 보여 주려 애썼다.

그것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에도.

추구해야 하는 것은 미(美)가 아니다.

이 얼굴이 도려내어져 추악한 얼굴이 되어 버림받더라도 상관없다.

어린 시절의 치기는 버려라.

내가 해야 하는 것, 해내야 하는 것은.

“치우겠습니다.”

그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잡것들을 모조리 치워 내는 것이다.

* * *

“유 소저가 천위와 훈련을 같이하지 않았던 이유가 저거 때문인가?”

“얇은 무복은 땀에 젖으면 살짝살짝 안이 보이니까요.”

그 외에도 훈련을 하다 보면 옷이 격하게 움직여 팔 정도는 드러나는 경우가 허다하다.

유예린은 대련 중에도 워낙 깔끔함을 유지해 그 누구도 본 적이 없었지만.

서하영 같은 경우에는 무복의 소매를 헐렁하게 해 놓으면 수시로 팔이 드러났다.

“아미타불……. 정녕 비천(飛天)이로다.”

무해의 감탄에 철백은 어색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비천(飛天)이라 하면 천녀(天女)를 말하는 것인데, 과연…….

‘그런 호칭을 붙여도 되나 모르겠군.’

저 모습이 그런 고상한 이름과는 딱히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소매를 잘라 낸 유예린은 특유의 암경을 사용하지 않고 두 자루의 소검만을 들고 거한에게 달려들었다.

고절한 보법으로 공격을 피하고, 때때로 눈앞에서조차 사라지는 은신술로 단숨에 빈틈을 찌른다.

살존이 정면 승부를 하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기이한 전투술.

그런데 진짜 특이한 점은 그게 아니었다.

유예린의 전투가 보여 주는 특이점은 극에 달한 기예가 아니었다.

“……지독하군요.”

백수아가 자신도 모르게 감탄할 정도로.

유예린의 전투는 정녕 지독했다.

아무리 피한다고 한들, 거한의 강함은 상식을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이다.

한 뼘 차이로 피한다고 한들 그 풍압만으로 몸이 흔들리고 피부가 터져 나간다.

그러나 유예린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다.

팔에 가득한 흉터가 붉은 피로 뒤덮이고 있음에도.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은신을 해서라도 앞으로 나아갔다.

적의 눈을 속여 몸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적의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실패하고 막히면 또 검을 움직인다.

노리는 곳은 오로지 사혈과 급소뿐.

베거나 찌르는 것만으로 죽음에 이르는 곳만을 노린다.

지독하게.

철저하게.

눈에 뵈는 것이 없는 광인처럼 미친 듯이 검을 휘두르는 유예린의 모습은 빠르게 흐트러져 갔다.

옷은 빠르게 해졌고.

단정했던 머리는 마구 흐트러져 조만간에 산발이 될 것 같았다.

곳곳에 튄 붉은 피는 섬뜩한 느낌마저 자아냈다.

하지만.

“아미타불…….”

그 모습이 흉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크하하하! 끝내주는 여자였군!”

적으로 상대하고 있는 거한조차도.

지독할 정도의 살기와 투기를 뿜어대며 돌진해 오는 유예린을 상대하며 거한은 웃음을 터트렸다.

“이런 여자가 있었다니. 과연 요려, 그 천한 것의 유혹을 견뎌 낼 만도 한가!”

“……유혹?”

유예린의 눈이 한층 더 싸늘해진다.

다만 그걸 눈치채지 못한 거한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시간을 끄는 게 목적이었으니 이런 대화는 얼마든지 환영이다.

“요려(妖麗)라고 가랑이 사이에 달린 놈들을 전문으로 낚는 녀석이 있지.”

천박한 말투였으나 유예린은 차마 거한의 말을 끊지 못했다.

궁금했으니까.

“끌려온 놈들은 대체로 하룻밤이면 침대 위에서 해롱거리는데, 그놈은 참 지독하게 거절하더군. 요려 그 계집이 그렇게 분해하는 꼴은 처음이었지! 크하하하!”

“그렇다면 유혹에 실패했다는 이야기군요?”

“그랬지. 솔직히 고자가 아닌가 싶어.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사내새끼가 그렇게 앞에서 가슴을 흔드는데 꿋꿋한 것도 문제가…….”

순간, 목이 따끔거리는 것을 느낀 거한이 거리를 벌렸다.

‘……베였다?’

어떻게?

그런 생각이 든 순간, 거한은 유예린과 눈을 마주치고 피식 웃어 버렸다.

“……그럴 리가 없어요.”

“크하하하! 너도 거절당했던 거냐! 그럼 진짜 고자인지 의심해 봐야겠는데!”

유예린의 목소리에 담긴 분노를 눈치챈 거한이 웃음을 터트리는 순간.

섬뜩할 정도의 예기가 다시 거한의 목을 스쳐 지나갔다.

웬만한 검기 정도는 우습게 튕겨 내던 가죽이 갈라지고, 피가 흐른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상대의 검에는 검기조차 제대로 담겨 있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거한조차 말문이 막힌 그때.

“그 추잡한 혓바닥을 잘라 버리겠어요. 그리고.”

유예린의 두 눈엔 형용할 수 없는 살기가 넘실거렸다.

“유혹했다는 그 계집의 살점도 도려내 드리죠.”

“히끅.”

섬뜩하기 그지없는 유예린의 선언과 함께 들려온 딸꾹질 소리에 모두의 시선이 한 곳으로 향했다.

“……저, 저는 아직 안 건드렸어요.”

먼 곳을 바라보는 백수아의 눈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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