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0화
429화-설가의 수련 (2)
“얕다.”
유예린의 검을 쳐 낸 설주철은 그대로 유예린의 옆구리를 발로 찼다.
순식간에 뒤로 날아가는 유예린.
정확하게 빈틈을 찔린 것에 당황할 법도 했지만, 이미 며칠 동안 수도 없이 겪은 일이었다.
이런 것으로 당황하기에는 그동안 겪은 패배가 너무 많았다.
거기다.
“흐아아아압!!”
“단순하군.”
순식간에 빈틈을 파고든 철백의 주먹을 설주철은 가볍게 흘려 냈다.
무림학관에서도 배우는 설가의 기본 무공 설화수(雪化手)의 일수다.
자신이 배운 무공의 공격이 속절없이 실패한 철백은 이를 악물고 흐름을 되찾으려고 했으나.
“정정하지. 무식하군.”
그런 철백의 복부에 발을 꽂아 넣은 설주철은 그를 날려 버린 직후 자신을 향해 파고드는 창을 쳐 냈다.
“훌륭하다.”
흑룡단과 설주철 사이의 대련 중 거의 유일하게 칭찬을 듣는 서하영의 공격이었으나, 딱 거기까지.
“그러나 믿음이 부족하다.”
설주철의 검은 당연하다는 듯 서하영의 창이 그리는 궤적을 어그러트리고 서하영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흑룡단 상위의 무인들이 털리고, 뒤늦게 파고든 무해마저 설주철이 만든 검에 주먹이 막혀 버린다.
일방적인 싸움.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철백만 겨우 몸을 일으키는 모습에 설주철은 검을 거뒀다.
이미 해가 지고 있으니 딱 알맞은 시간이라 할 수 있었다.
“복기하도록.”
짧은 말을 남기고 물러서는 설주철.
그 뒷모습을 거친 숨을 억누르며 바라보던 철백은 설주철이 사라지고 나서야 억누르고 있던 호흡을 토해냈다.
“하! 진짜 더럽게 강하네!”
“무리(武理)에서도 완전히 밀린다는 건 충격이네요…….”
끙 하며 상체를 일으킨 서하영의 말에 몇몇 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설주철과의 첫 만남.
그가 보여 줬던 전투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짓밟는 방식이었다.
무식할 정도의 강기와 압도적인 냉기의 조화가 만들어 내는 궤멸적인 파괴.
그것이 설주철이 그때 당시 보여 줬던 강함이었다.
그런데, 대련에 들어서니 그때 전투는 귀찮아서 그냥 힘으로 찍어 눌렀을 뿐이라는 듯 단순한 무술만으로 모두의 공격을 파훼했다.
심지어 동시에 달려들어도 아예 상대조차 되지 않았으니…….
“높은 곳에 이르기 위해선 그만큼 튼튼한 내실이 필요하다는 뜻이겠지.”
떨리는 다리를 붙잡고 일어선 유예린은 떨리는 손으로 검을 쥐었다.
“하영아.”
“넵.”
유예린의 부름에 마찬가지로 몸을 떨던 서하영도 자리에서 일어나 창을 쥐었다.
요 며칠간 진행됐던 설주철과의 대련.
설주철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압도적인 기세에 대련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실전에 들어간 것처럼 근육이 굳고 온 신경이 곤두섰다.
고작 대련일 뿐인데, 초절정에 이른 고수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녹초가 될 정도로.
빈틈을 찌르는 공격은 위협적이지 않으나 당하는 순간 죽음을 겪는 것 같은 아찔함이 있었다.
통증이 심한 것은 아니지만, 마치 혼이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 느낌.
‘심상(心象)이겠죠.’
그 정체를 어렴풋이 알고 있기에 유예린은 더욱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닿아야 했다.
그 심상의 영역에.
설천위를 따라가기 위해서, 아니 그를 지키기 위해서.
억누른 광기가 일렁이는 눈동자로 유예린이 자세를 갖췄다.
그녀를 상대하기 위해 창을 쥐고 선 서하영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창을 내밀었다.
“가요!”
단숨에 땅을 박차는 서하영의 창이 유예린의 목을 노리고 파고든다.
지금 당장에라도 숨을 끊을 것 같은 강렬한 기세를 품은 찌르기.
창을 이용한 공격 중에서도 가장 막기 힘든 공격을 거침없이 목에 박아 넣는 서하영의 모습에 놀랄 법도 했지만, 유예린은 곧바로 대응했다.
유예린의 검이 선을 그려 서하영이 만든 창의 궤적을 일그러트린다.
‘……보고 있었네요!’
설주철이 자신의 창을 어그러트렸던 그 일수를 재현해 낸 유예린의 모습에 경악하면서도 서하영은 즉시 손목을 비틀었다.
순식간에 창에 맺힌 회전의 힘이 유예린의 검이 만들어 낸 선을 헤집는다.
설주철은 극에 달한 제어와 통찰력으로 완벽하게 이쪽의 궤적을 무너트렸지만, 유예린은 아직 그 정도는 아닐 터.
이 정도는 힘으로 돌파할 수 있……!
설주철이 말한 대로 자신의 실력을 믿고 그대로 밀어붙이는 순간.
유예린의 검이 사라졌다.
‘아차!’
자신이 들었던 충고를 유예린도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서하영은 즉시 창을 비틀었다.
이쪽이 스스로를 믿고 밀어붙이면 그에 맞춰 대응하는 것이 당연한 이치.
일단 기습을 방어하자.
그다음에 확실하게…….
순간.
머릿속을 번뜩이는 생각에 서하영은 창을 비틀던 것을 멈췄다.
나는 아직도 내 창을 믿지 못하고 있나?
적에게 휘둘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깨달음은 순간이었고, 행동 또한 순식간이었다.
앞으로 내밀었던 왼발을 뒤로 당기고, 창을 든 팔을 옆구리에 붙여 몸 전체에 회전을 더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자세의 변경.
그리고.
콰가가가가가가각!!
압도적인 바람을 품은 창이 모든 것을 분쇄하며 나아갔다.
서하영의 빈틈을 찌르기 위해 움직였던 유예린의 검이 바람에 휘말려 튕겨 나갔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분쇄하며 나아간 창이 멈춘 것은.
주르륵.
유예린의 목에서 한 줄기의 피가 흘러내린 뒤였다.
“어, 언니!”
창끝이 살짝 유예린의 목을 파고든 것을 발견한 서하영이 창백해져서 창을 거두고 달려왔지만, 유예린이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았다.
“괜찮아.”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목의 피를 닦아 낸 유예린이 빙긋 웃었다.
“내가 졌네. 방금 일격은 정말 훌륭했어. 하영아.”
“저, 정말이요?”
유예린의 칭찬에 서하영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만 붉게 물든 유예린의 손수건을 보고 다시 빠르게 안색이 어두워졌다.
“……언니.”
“수련하면서 상처야 흔하니까 신경 쓰지 마렴.”
“하지만…….”
“제어에 실패한 것을 보니 아직 완전하지 않은 것 같은데, 조금 더 연습해야 하지 않겠니?”
걱정하는 서하영의 말을 끊으며 웃은 유예린은 어느새 피가 멎은 목에서 손수건을 떼 품에 넣었다.
“오늘은 나도 지쳤으니 이만 쉬러 가 볼게.”
“네. 저는 조금만 더 복기하고 들어갈게요.”
“그래.”
고개를 끄덕이는 서하영에게 작게 웃어 준 유예린은 그대로 연무장을 나와 흑룡단 여성들이 묵고 있는 별실로 향했다.
평소와 달리 일찍 돌아온 탓일까.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당황하는 시종들에게 괜찮다며 웃어 준 유예린은 물이 끓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직접 냉수를 채워 욕조 안에 몸을 넣었다.
차가운 냉기가 피부를 타고 올라온다.
흉터로 가득한 꼴불견의 몸을 내려다봤다.
애써서 얼굴에는 흉터가 없지만, 지독한 수련이 만들어 낸 흉터는 이렇게 성장한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차가운 물을 손을 떠서 머리에 끼얹는다.
몇 번을 반복하니 점점 더 정신이 맑게 깨어난다.
정신이 또렷해지면 또렷해질수록.
뚜둑.
주먹에 들어가는 힘이 강해졌다.
“……뒤처지면 안 돼.”
북존의 수업은 과연 명불허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지만, 고작 며칠 만에 흑룡단이 강해진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특히 서하영.
무술(武術)의 형은 거의 완벽에 가까웠던 서하영에게 부족했던 전투 감각을 설주철은 고작 며칠 만에 극적으로 끌어올려 줬다.
기본적으로 선한 서하영의 성격이 만들어 내는 망설임.
누군가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서 나오는 약간의 지연.
그것이 오늘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이쪽의 자잘한 공격 따위는 압도적으로 분쇄하고 창끝이 목에 닿을 정도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철백도 부족했던 부분이 확실하게 성장하고 있었다.
무해도 마찬가지.
그 외에 흑룡단의 모두가 확실하게 실력이 향상되고 있었다.
자신만 빼고.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안 돼.”
감정이 요동친다.
이대로 뒤로 처지면, 그 사람의 곁에 설 수 없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불안감 때문인지, 훈련의 고됨 때문인지, 아니면 냉수의 차가움 때문인지 손이 절로 떨려 온다.
그 손을 붙잡고 손톱을 입에 문다.
뜯으면 안 된다.
보기 흉해지니까.
손은 그에게 보일 수 있는 부위니까.
흉해지면 안 된다.
깨물지도 못하고 떨리는 손을 입술에 붙인 유예린의 두 눈이 격하게 흔들리는 그 순간.
“있니?”
욕실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유예린의 떨림이 순식간에 멎었다.
안심해서가 아니다.
더한 긴장이 여태까지의 심리 상태를 집어삼켰기 때문이다.
“드, 들어오셔도 됩니다.”
유예린으로선 드물게 떨리는 목소리.
그리고 그녀의 허락에 천천히 열리는 문으로 중년 여인이 들어왔다.
얼핏 삼십 대 중반 정도라고 해도 될 정도의 미인.
설가의 안주인.
설주철의 첫째 부인.
“냉수에 씻는 거니?”
정유화.
질문은 분명 부드러운데, 목소리와 표정이 차가워 도저히 속을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예, 예. 어머니.”
설천위의 어머니.
천위 본인은 어색하게 여기긴 해도 그녀가 설천위의 어머니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즉.
시어머니……!
조금 전까지의 긴장과 강박적 사고마저 전부 날아가 버린 유예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인이라 그런지 씩씩하구나.”
천천히 걸어온 정유화는 거침없이 유예린이 들어가 있는 목욕물에 손을 집어넣었다.
“어머니, 더럽…….”
“씩씩한 무인이어도 여자아이라면 너무 찬물에 오래 있으면 안 된다.”
내공을 이용한 산매진화로 순식간에 물이 따뜻하게 변했다.
과하게 온도를 올리지 않고, 사람 하나가 들어간 목욕물을 골고루 덥히는 일품의 실력.
‘……혈월화(血月花).’
무공을 제대로 익히지 않았던 설천위의 친모와 달리 상승의 경지까지 올랐던 명성을 지닌 여인다운 솜씨다.
거기다 세월이 지났음에도 이런 실력이라면…….
‘화경 혹은 그 이상.’
세간은 이미 그녀를 잊었지만, 그 무력은 훨씬 더 강해져 있었다.
유예린이 그녀의 실력에 감탄하는 사이, 정유화는 어느새 수건을 들고 그녀의 등에 손을 올렸다.
“어, 어머니?”
“……고민으로 가득한 몸이구나.”
조심스럽게 등을 어루만지는 그녀의 손의 감촉이 느껴진다.
우둘투둘한 흉터를 쓸고 지나가는 손길.
이 보기 흉한 몸을 보이는 것이 부끄러워 조금 떨어지려는 순간.
“기다리는 것은 힘들지 않으냐?”
“……예?”
“자신을 억누르고 그저 한결같이 무언가를 위해 인내하는 것은 무인이라고 해도 힘든 일이지.”
떨어지려는 유예린을 부드럽게 붙잡고 흉터를 쓸어내리는 정유화의 목소리는 여전히 딱딱했지만.
“……저는 괜찮습니다.”
유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드러냈다.
“저는 기다릴 수 있습니다. 지켜볼 수 있습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기다릴 수 있다.
그래.
자신은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다.
그를 지켜보는 것만으로.
그가 행복해지는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할 수 있으니까요.”
“거짓말이구나.”
희미하게 웃었던 유예린의 미소가 칼같이 들어온 정유화의 한마디에 깨졌다.
자신의 확고부동한 믿음을 부정당한 것 같은 느낌.
어려워하던 정유화를 상대로 표정이 굳어 버릴 정도로 감정의 변화는 강렬했으나.
“이 세상에 사랑하는 이를 두고 지켜만 보는 것으로 만족하는 여인은 없단다.”
정유화는 확신이 담긴 눈동자로 유예린을 응시했다.
“나 또한 그러했고, 그 아이 또한 그러했으며, 너 또한 그러할 것이다.”
그 아이.
그게 누굴 뜻하는 건지 어렴풋이 짐작한 유예린은 자신도 모르게 입을 다물었다.
“나는 천성이 경직되어 있어 그 아이에게 필요 이상으로 다가가지 않았다. 내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지. 그것이 내가 지은 가장 큰 죄이니라.”
설천운이 봤다면 놀랄 정도로 길게 말을 한 정유화였지만, 그 놀라움을 알아줄 이는 이곳에 없었다.
“감춘다고 하여 그것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고, 억누른다고 하여 그것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담담하게, 허나 확고하게 선언했다.
“드러낼 감정은 드러내거라. 그것이 네가 숨기고자 하는 감정의 그림자가 되어 줄 것이니.”
유예린의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 * *
“와…….”
심산유곡의 오지.
그곳에 세워진 비현실적인 거대한 건축물.
그 아래에 선 설천위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처럼 고개를 꺾어야 보이는 절벽의 꼭대기에 매달린 궁을 보며 감탄했다.
하늘? 보이지도 않았다.
궁에서부터 피어오르는 보라색의 안개가 하늘 전체를 뒤덮고 있었으니까.
“조졌네…….”
저 괴물을 상대로 어떻게 버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