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9화
428화-설가의 수련 (1)
“흠, 그러니까 나를 너희 궁으로 초대한다는 건가?”
“예. 궁주님의 초대이니 꼭 함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어조였지만, 설천위는 그 안에 담긴 감정을 읽곤 피식 웃었다.
“따라가지 않으면, 힘으로라도 억지로 끌고 갈 생각인가?”
“그런 야만적인 방법을 저희가 어찌 쓰겠습니까?”
고개를 저은 요려(妖麗)는 담담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홀몸으로 왔기에 흑룡단주님을 제압해서 데리고 갈 정도의 여력은 없습니다.”
혼자 왔다는 요려의 말에도 설천위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심드렁한 눈빛을 보냈다.
이 근처까지는 혼자 왔을지 모르지만, 한참 떨어진 곳에 대기하고 있는 병력은 별개다.
아무리 이쪽의 기감이 넓다곤 해도 한참 떨어진 곳에서 몸을 숨기고 있는 이들을 찾아내긴 쉽지 않으니까.
거기다.
‘이렇게 보게 되는군.’
제7소궁주라면, 설천위도 알고 있다.
천희만락궁을 공략할 때 나오는 중간 보스 중 하나로 무력도 높지만 특유의 술법이 괴랄할 정도로 지독한 보스다.
‘승률은 반반인가…….’
이쪽엔 백수아도 있으니 상황에 따라서는 7할까지도 올려도 되겠네.
충분히 할 만한 싸움이다.
무엇보다 이쪽은 적의 술법을 몇 가지나 알고 있다.
게임으로 봤던 것뿐이지만, 대충이라도 적의 정보를 알고 있는 건 큰 이점이 된다.
전투가 벌어져도 충분히…….
“그저 뒷정리를 한 뒤에 떠날 뿐입니다.”
평온한 얼굴 뒤에서 요려를 가늠하던 설천위는 그녀의 말에 미간을 찡그리고 시선을 모았다.
풍만한 가슴을 자랑이라도 하듯 팔을 모은 요려가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뒷정리?”
“예. 부끄러운 모습을 들켰으니 정리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는 듯 정리를 말하는 그 눈동자는 여전히 영롱하게 반짝였다.
사내를 유혹하는, 매혹적인 눈동자.
“아쉽지만, 자리는 다음에 새로 만들겠습니다.”
작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요려가 고개를 들 때쯤 이미 설천위의 시선에 깃든 강렬한 살의가 요려를 헤집고 있었다.
“지금 협박하는 건가?”
지독한 살의가 깃든 물음.
“후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참으로 아쉽습니다. 다만, 그러네요. 흑룡단주님께서 함께해 주신다면 제가 손이 바빠 뒷정리를 깜빡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부드러운 웃음.
목소리는 너무나 잔잔해서 농담을 건네는 것 같을 정도지만.
“……지독하군요.”
그녀가 말하는 뒷정리가 무엇인지 깨달은 백수아의 눈동자 또한 차갑게 식은 지 오래였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요려가 할 뒷정리라고 해 봤자 한 가지밖에 더 있겠는가.
흔적 지우기.
설천위가 떠나면 이 마을 자체를 지워 버리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애초에 마을 전체를 집어삼킬 작정으로 움직이던 이들이니 실행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군요.”
백수아의 차가운 시선에도 미소를 잃지 않은 요려는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대답했다.
“이쪽의 치태를 보였으니, 스스로 정리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당신…….”
이를 악문 백수아가 살벌하게 뜬 눈으로 단검을 뽑아 드는 순간.
설천위가 손을 들어 백수아를 막았다.
이유를 묻는 백수아의 눈빛에 고개를 젓는 것으로 대답한 설천위는 다시 요려를 바라봤다.
“아까 한 말, 유효한가?”
“함께해 주시면 제 손이 바빠 뒷정리를 못 할 거라는 말씀이신가요?”
다 알고 있다는 듯 여유롭게 웃으며 대답하는 요려를 향해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의 심리를 전부 읽힌 상황이다.
쓸데없는 기 싸움을 하는 것보다는 상황을 타개하는 것이 먼저다.
“그래.”
“물론입니다. 흑룡단주님을 모시기 위해서라면 당연히 그리해야지요.”
방긋 웃으며 대답하는 요려를 잠깐 바라본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지.”
“공자!”
설천위의 대답에 백수아가 발끈했다.
[저자가 약속을 지킬 리 없지 않습니까!]
드물게 화가 난 목소리였지만, 설천위는 전음으로 대답하지 않았다.
“약속은 지켜. 그렇게 만들 생각이니까.”
굳이 전음으로 속삭일 이유가 없으니까.
백수아에게 짧게 시선을 준 설천위는 다시 고개를 돌려 요려를 바라봤다.
“약속해라. 내가 널 따라가는 것을 조건으로 이 마을은 천희만락궁에서 건들지 않겠다고.”
“물론, 얼마든지…….”
“궁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해라.”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던 요려의 얼굴이 처음으로 굳었다.
표정 자체는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눈이 웃고 있지 않았다.
“왜, 안 되냐?”
반대로 설천위는 그런 요려의 반응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게임의 설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가 본데.’
천희만락궁의 궁주는 자존심이 강하다.
그리고 소궁주는 그런 궁주가 만들어 낸 자식과도 같은 존재들이다.
배가 아파서 낳은 자식은 아니고, 궁주가 술법을 통해 만들어 낸 존재들이 바로 소궁주다.
즉, 소궁주에게 궁주는 창조주와 같고 몇몇 특이 케이스를 제외하면 소궁주의 충성심은 과잉의 영역에 도달해 있다.
궁주의 이름을 걸고 맹세하는 순간, 녀석들이 하는 맹세에는 확실한 효력이 생긴다.
“맹세하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가볍게 탁자를 두들기며 설천위가 천천히 기세를 일으켰다.
공간 자체를 짓누르는 것 같은 패기의 발현.
그 안에 담긴 지독할 정도의 살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그 끝에 나오는 결과가 비극일지라도 나는 최선을 선택할 거다.”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너만큼은 확실하게 죽인다.
그 여파로 이 마을이 망가지고, 수많은 목숨이 사라지겠지만.
요려는 죽는다.
그 단 하나의 결과만큼은 절대로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로 이쪽을 응시하는 설천위를 가만히 바라보던 요려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조건을 받아들이지요. 궁주님의 이름으로 맹세하겠습니다.”
“좋아. 이제야 말이 통하는군.”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세.
조금 전까지의 위협이 마치 거짓말이라는 것처럼 사라진 기세에 요려는 더욱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럼 지금 바로 움직이시지요.”
“그래.”
“공자님……!”
순순히 자리에서 일어나는 설천위를 백수아가 붙잡았다.
궁주는 저런 강자를 하수인으로 부리는 존재다.
섣불리 적진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선택인지 굳이 말로 할 것도 없었다.
백수아가 다시 입을 열려는 순간.
“부탁 좀 할게.”
백수아의 말을 끊고, 설천위가 작은 주머니 하나를 백수아에게 건넸다.
“이것 좀 우리 부단주한테 전해 줘.”
“부단주라면…….”
“부탁 좀 할게.”
웃으며 백수아의 어깨를 두드린 설천위는 그대로 요려에게 다가갔다.
“같이 가지 않으시나요?”
“왜? 같이 가야 하나?”
“아뇨. 그렇진 않습니다. 궁주님의 초대는 애초에 흑룡단주님이시니까요. 무엇보다 조건으로 거신 것은 흑룡단주님 한 분뿐이지 않습니까.”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손을 내미는 요려를 잠시 바라본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며 손을 잡았다.
“눈치가 빠른 녀석들은 이래서 싫어.”
설천위가 손을 잡는 순간, 강렬한 힘이 일렁이는 것과 함께 두 사람이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축지술.”
아득한 경지에 오른 술사들만이 사용한다는 술법.
사천맹의 귀령단주가 사용할 순 있으나 제약이 심하고 조금만 장거리를 이동해도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고 하는 술법.
그 술법을 이리도 자연스럽게…….
적의 역량을 다시금 가늠한 백수아는 설천위가 넘겨준 주머니를 손에 꽉 쥐며 일어섰다.
“반드시 찾으러 가겠습니다.”
* * *
“흠, 역시 상당히 괜찮은데?”
설가의 연무장.
널브러진 흑룡단 단원들 사이에 선 설천운은 호쾌하게 웃으며 목검으로 어깨를 두들겼다.
“얼마나 수련을 열심히 한 건지 눈에 보여. 솔직히 말해서 감탄했어.”
정말로 감탄했다는 듯 호쾌하게 웃고 있는 설천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특히.
“대주급 이상은 솔직히 말해서 기대 이상이야.”
“……아미타불. 부족할 따름입니다.”
“아니, 충분히 괜찮습니다. 대사.”
비척이며 일어서는 무해를 보며 설천운은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
“부상이 상당히 깊었던 것으로 아는데, 이 정도면 훌륭하지요.”
“아미타불…….”
부상 이야기에 무해는 오히려 고개를 숙이고 불호를 외웠다.
그 모습에 그를 따르던 불살대는 마찬가지로 고개를 숙였다.
격전을 치른 뒤였다곤 하나 유예린을 따라 남하해서 적들과 조우했을 때 불살대는 이렇다 할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불살(不殺)의 신념 때문에 적을 죽이지 못하니 그야말로 제 몸을 지키는 데 필사적이었으니까.
유예린은 자리를 지켜 준 것만으로 동료의 등을 지킨 것이니 충분하다며 그들을 위로했지만…….
“이대로…….”
“역시 불살 같은 건…….”
자괴감이 그들을 잠식하는 것을 막을 순 없었다.
불살의 신념을 지키며 싸웠으나, 이쪽에도 희생자가 나왔다.
한솥밥을 먹던 동료가 적의 손에 죽었는데, 이쪽은 적을 죽이지 않고 제압만 하려고 하고 있으니.
과감하게 손을 썼다면 살았을지도 모르는데…….
그런 생각이 들수록 자신감은 떨어지고, 긍지는 약해졌다.
불살(不殺)이란 것이 사실은 무가치한 것이 아닐까.
무가치한 것에 목을 매다가 정작 지켜야 할 이들을 지키지 못하는 것 아닐까.
대원들의 중얼거림에 무해는 또다시 나오려는 불호를 삼키고 일어섰다.
“부처께서는 불살(不殺)을 말하셨습니다.”
천천히 자세를 잡는다.
양손을 허리춤으로.
다리는 벌리고, 보폭은 넉넉하게 가진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는 부처가 있습니다. 불살(不殺)이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처를 지키는 일.”
호흡을 가다듬고 주먹을 뻗는다.
느리지만, 단단함과 무거움을 품은 주먹이 설천운을 향해 나아간다.
“세상을 바로잡는 첫걸음은 자신의 내면에 있는 부처를 깨우는 것입니다.”
어느새 완전히 펴진 팔과 함께 묵직한 파동이 울려 퍼진다.
자신에게 되새기는 것처럼.
낮게 가라앉은 무해의 눈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나쁘지 않군.”
그렇기에 눈치채는 것이 늦었다.
자신의 주먹을 막아 낸 상대가 누구인지.
“부, 북존을 뵙습니다.”
한 손으로 무해의 주먹을 받아 낸 설주철은 무해의 인사에 가볍게 손을 터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당황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불살대를 한 번 보곤, 옆에 서서 고개를 숙이는 유예린을 봤다.
“신념을 지키는 데 필요한 것은 불굴(不屈)의 강함이다.”
가볍게 발을 구르는 것으로 흑룡단의 전원이 살짝 떠올랐다.
몸이 허공에 뜨자 본능적으로 자세를 다잡은 흑룡단 전원이 자리에서 섰다.
“만년을 견뎌 내는 빙하처럼 절대 녹지 않는 신념을 품었다면.”
스멀스멀 올라오는 오한에 흑룡단이 몸을 떠는 순간.
누구보다 먼저 움직인 유예린이 무해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고.
쾅!!
“버텨 보아라.”
설주철의 검을 막아 낸 유예린의 몸이 순식간에 튕겨 나간다.
그 직후 파고든 철백의 주먹이 설주철의 턱을 노렸으나.
“컥!”
드물게 신음을 뱉은 철백이 주먹을 내질렀던 자세 그대로 튕겨 나갔다.
조금 늦게 창을 내질렀던 서하영도 마찬가지.
가장 늦게 움직인 무해마저 튕겨 나가고.
“시작하지.”
설주철과의 대련이 시작됐다.
* * *
“어휴, 살벌해.”
자연스럽게 설주철에게 흑룡단을 맡긴 설천운은 부들부들 떨며 의자에 앉았다.
연무장 구석에 있는, 본관과 통하는 길이 있는 작은 건물.
휴식을 위한 공간이지만, 대부분의 무인들은 이곳을 쓰지 않았다.
그 이유는…….
“어머니, 또 말없이 보고만 계십니까?”
“이것으로 충분하다.”
“……부부는 닮는다더니 똑같아, 똑같아.”
감정 표현이 없는 게 어찌 이리 똑같은지.
조용히 앉아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는 자신의 어머니를 살핀 설천운은 한숨과 함께 몸을 기댔다.
“천위가 오면, 할 말은 정하셨어요?”
“…….”
“또, 또 침묵.”
말없이 그저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를 보며 고개를 저은 설천운은 한숨과 함께 찻잔을 들었다.
‘이러니 천위가 그렇게 될 때까지 몰랐지.’
방임주의라는 가풍 아래, 자식들에게 간섭하는 것을 멀리해 천강이가 삐뚤어진 것도, 천위가 망가져 가는 것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은밀하게 챙겨 주면 뭐 하나. 본인들은 모르고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데.
그나마 정신을 차린 자신이 어느 정도 나이가 든 천강이와 천위를 분리해서 다행이었지…….
‘뭐, 나도 비슷한가.’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될 거란 생각에 방치했던 건 똑같았으니까.
아니, 오히려 알고도 그랬으니 더 심한가.
한숨을 내쉰 설천운은 흑룡단을 상대하고 있는 설주철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며칠 동안 자신을 내세워 대련을 시켜서 각자의 특성을 전부 파악한 뒤에 하는 지도 대련.
“말로 생색이나 좀 내든가…….”
답답해서 내가 제 명에 못 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