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6화
425화-자색의 안개 (2)
“후.”
아무도 없는 가도(街道) 위.
홀로 걸어가던 설천위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백유한테 기습 키스를 당하고, 다음 날 새벽에 바로 출발했다.
인사는 따로 하지 않았지만, 뭐 다음에 또 볼 거니까 상관없겠거니 했는데…….
“그만 나와.”
“언제부터 알아채셨나요?”
“방금 전부터.”
본인이 인기척을 내고는 능청스럽기는…….
“흐음, 저한테 강제력이 없다는 건 정말인가 보네요.”
“그러니까 누누이 말했잖아.”
숨어 있으면 위치를 아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의 결속이라고.
잔잔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백수아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설천위는 하늘을 올려다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됐고, 나뭇가지나 주워 와. 오늘은 여기서 노숙해야 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명령이었지만, 딱히 불만이 없는 듯 백수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나뭇가지를 줍기 위해 떠났다.
백수아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바라보던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으며 노숙 준비를 했다.
잠자리를 마련하고, 식재료를 손질하고.
금세 나뭇가지를 모아 온 백수아를 두고 불을 피웠다.
“요리는 제가 할게요. 자신 있거든요.”
“흐음, 그래. 뭐 해 주면 나야 좋지.”
편한 게 짱이니까.
요리를 해 주겠다는 백수아에게 재료와 도구를 넘긴 설천위는 즉시 자리를 잡고 명상에 들어갔다.
경지가 오르고 자성영역까지 깨닫는 등 꽤 여러 가지 일이 있었는데, 진득하게 정비할 시간이 여태껏 없었다.
백유가 맹주에 오른 뒤에도 사천맹에 남아 있을지 모르는 위험 요소들을 수색하느라 바빴고.
수련은 최대한 빼먹지 않고 했지만, 역시 뭔가 부족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무림맹으로 돌아가는 길. 조급하게 갈 생각은 없으니 가면서 이번에 얻은 것들을 추스르는 시간을 가질 생각이다.
‘유 매가 무사하다는 확인도 했고.’
사천맹에 들어온 보고들 중 북존이 흑룡단을 구했다는 소식이 있었고, 그중에서도 부단주인 유예린은 무사하다는 소식도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북존의 강함을 믿고 움직인 거였지만 그래도 불안감이 남아 있었는데…….
‘후.’
긴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
[흥, 마님한테 다 이를 거예요.]
[음음, 사람이 줏대가 있어야지…….]
[자고로 한 사람을 책임지기로 했으면 사내는 뒤를 돌아보지 않아야 하는…….]
“꺼져!”
이 인간들이 진짜!
히죽히죽 웃으며 이쪽을 놀리는 혼들을 털어 낸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눈을 떴다.
명상도 제대로 못 하겠네.
임시로 만든 자성영역을 가다듬어 진짜를 만들 준비를 해야 하는데.
뭐, 그나마 가까운 건 [흑천(黑天)]이긴 한데…….
그거야 두고 봐야 할 일이고.
사람의 일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니까.
일단 이번에 얻은 것들을 전부 갈무리하면서 곰곰이 생각해 봐야지.
“다 됐어요!”
일어서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더니 백수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특유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서 그릇을 내미는 백수아.
그녀가 내민 그릇을 받아 든 설천위는 그녀가 떠 준 죽을 입에 넣었다.
“음!”
“맛있죠?”
“……맛있네.”
백유랑 좋은 승부가 될 것 같은데?
원래 백수아가 요리를 잘한다는 설정이 있었나?
“제 어릴 적 꿈이 좋은 어머니가 되는 거였거든요.”
“……갑자기?”
“제 어머니도 요리를 잘하시거든요.”
“살존께서?”
“네.”
그건 또 몰랐던 이야기네.
요리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고개를 갸웃한 설천위는 죽을 입에 넣으며 백수아를 바라봤다.
무슨 영향 때문일까. 흑단같이 검었던 머리의 곳곳이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노인의 흰머리처럼 푸석푸석한 것이 아니라 윤기가 흐르는 백발이었지만.
마치 흰색으로 브리지를 넣은 것처럼 앞머리를 중심으로 머리의 곳곳이 새하얗다.
“이상한가요?”
자신의 머리를 바라보는 것을 알아챘는지 백수아가 웃으며 머리를 집었다.
“어머니보다 먼저 흰머리가 날 줄은 몰랐네요.”
웃으며 하얗게 변한 옆머리를 만지작거린 백수아는 담담한 얼굴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보기 싫으시면 염색을…….”
“할 필요 없어. 고작 머리 색 따위로 흔들릴 외모는 아니니까.”
보기 싫긴, 오히려 좋은 편이지.
현대에서 살던 감각 때문인지 다채로운 머리 색을 보면 오히려 호감이 생긴다.
물론 현대에서도 보기 힘든 형태의 머리였지만.
아무튼.
“너 정도 은신술이면 머리카락 색이 다른 것 정도는 상관없잖아?”
“……그렇죠.”
잔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백수아는 죽을 더 떠서 설천위에게 내밀었다.
무인인 만큼 먹을 수 있는 양이 많아서 넙죽 받아 든 설천위는 죽을 먹으며 검게 물든 하늘을 올려다봤다.
별이 촘촘히 박힌 하늘.
언제 봐도 참 마음에 드는 풍경이다.
잠시 하늘을 바라보던 설천위는 앞에서 퍼져 오는 향긋한 꽃 냄새에 현실로 돌아왔다.
“……진짜 따라올 거야?”
“네. 구명의 은을 갚기 위해서니까요.”
“백유도 도왔는데, 걔나 좀 도와주지?”
나보다는 걔가 더 필요할 텐데.
“그분에게 갚을 은(恩)은 얼마 전에 청산했습니다.”
“……그 정도로 많이 죽였어?”
“네.”
어째 피 냄새가 진동을 하더라니…….
뭐, 죽여도 싼 놈들뿐이었으니 찝찝하거나 하진 않지만.
잔잔하게 웃고 있는 백수아를 바라본 설천위는 고개를 저으며 그릇을 내려놨다.
“그래, 하고 싶은 대로 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살 수 있게 피똥을 싸면서 살려 놓은 거니까.”
“어머, 그러셨나요? 그럼 장에 좋은…….”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잠이나 자자.”
장난스럽게 웃는 백수아에게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미리 준비해 놓은 잠자리에 누웠다.
살존을 끌어들이려고 살린 백수아다.
이쪽도 목적이 있었기에 은혜고 뭐고 딱히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데…….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발을 까딱이며 눈을 감았다.
‘가서 뭐라고 설명, 아니 빌지…….’
죽고 싶진 않은데…….
앞날이 깜깜했다.
눈을 감은 지금 보이는 것처럼.
* * *
백수아와 함께하는 여정은 잔잔했다.
산적이야 뭐, 가볍게 어루만져 주면 용돈도 나오는 좋은 수금원이었고.
백수아의 미모에 홀려 시비를 거는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품 안에 돈이 넉넉하고, 시간도 넉넉해 마음마저 여유로워질 정도.
그렇게 느긋한 여행을 즐기고 있을 때쯤.
“또또…….”
“올해로 몇 명인지 모르겠네…….”
작은 마을에 도착한 설천위는 우중충한 분위기에 미간을 찡그렸다.
곳곳에서 들리는 탄식.
“관리가 안 되고 있는 곳이군.”
강서성의 작은 마을인 이곳은 이렇다 할 세력도 없는 진짜 시골이었다.
제대로 된 사파도 없어서 사천맹의 관심조차 받지 못하는 곳.
있는 놈들이라고 해 봐야 흑도라는 탈을 쓴 양아치들뿐이다.
“아무래도 실종자가 있는 것 같군요.”
“그것도 꽤 다수로.”
이런 일을 하는 건 보통 혈교 아니면 혈사련, 사혈천이다.
그놈들은 사람을 제물로 삼아 힘을 키우는 놈들이니까.
진의단 머저리들은 여기서 이러고 있진 않을 테고, 천명회는 황궁에 있으니 당연히 아니고…….
“흠.”
역시 가는 길이 순탄치가 않네.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걸음을 옮겼다.
마을에 하나 있는 객잔에 들어가 소면을 시키고 자리에 앉는다.
맞은편에 앉은 백수아가 잔잔한 미소와 함께 차를 따랐다.
“그래서, 어찌하실 건가요? 대협.”
“그런 호칭은 그만둬.”
소름이 끼칠 것 같으니까.
백수아의 장난기 서린 목소리에 손을 휘휘 저은 설천위는 차를 한 모금 마시며 주위를 둘러봤다.
혀를 차는 소리가 들리고, 우중충한 공기가 객잔 안에도 퍼져 있다.
이곳에 음식을 먹으러 오는 이들조차도 근심이 있다는 증거.
“밤에 움직이는 녀석들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걱정하면서 이런 객잔에 음식을 먹으러 오는 건 크게 두 가지지. 미쳤거나 안전하다는 믿음이 있거나.”
이 경우엔 후자다.
실종은 밤에만 일어나니, 아직 해가 떠 있는 지금은 돌아다녀도 된다는 믿음이 있어서 객잔에 손님이 있는 거다.
그리고 그런 설천위의 추측이 옳았다는 듯, 해가 지기 전에 모든 손님이 객잔을 빠져나갔다.
“저어……. 손님 오늘 묵고 가시는 겁니까?”
“음, 밤 산책을 조금 할 생각이었습니다만.”
“그…… 장사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웬만하면 오늘은 이만 주무시는 게 나으실 겁니다요.”
생각했던 것과 달리 먼저 다가온 객잔 주인의 권유에 설천위는 담담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그것이…… 최근 밤에 흉흉한 일이 자꾸 일어나고 있습니다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사람이 사라져서…….”
이어지는 객잔 주인의 설명은 판에 박은 것처럼 뻔했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있고, 관에서 순찰을 돌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다는 것.
오히려 순찰을 돌던 포쾌가 실종되어 관에서도 쉬쉬하며 무시만 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그러니 오늘은 이만 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마침 방도 남아 있으니…….”
“음, 그렇게까지 걱정해 주시니 받아들이는 게 옳겠죠. 충고 감사합니다.”
“어우! 아뇨, 아뇨! 그냥 노파심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설천위의 감사에 손을 휘저은 객잔 주인은 웃으며 방을 알려 줬다.
그리고.
“……왜 침대가 하나지?”
객잔 주인이 알려 준 방에 도착한 설천위는 식은땀을 흘리며 뒤를 돌아봤다.
“어머?”
묘한 웃음을 짓고 있는 백수아.
그리고.
‘이 양반이…….’
얘기에 집중하느라 차마 다른 방을 달라고 하지 못한 게 실수였다.
깨달은 뒤에는 혹시 모를 습격이 있을지도 모르니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해 그냥 올라온 건데…….
침대가 하나일 줄은 몰랐지!
“이거 참……. 이런 식으로 적극적이시면 저도 어쩔 수 없이…….”
“어쩔 수 없긴 뭐가 어쩔 수 없어!”
씁.
장난스럽게 웃으며 앞섶을 만지작거리는 백수아에게 눈을 부릅뜬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의자에 앉았다.
“됐고, 네가 침대에서 자. 난 명상이나 할 테니까.”
“아무리 운기조식으로 피로를 날린다고 해도 일단 수면은 취하시는 게 좋을 텐데요.”
“단련을 얼마나 했는데. 그런 걱정 말고 자기나 하쇼.”
대충 팔을 휘저은 설천위는 자리에 앉아 필기구를 꺼냈다.
붓을 꺼내 먹물을 먹이고, 작은 종이에 무언가를 써 내려간다.
“명상하신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이것도 명상이야.”
배운 게 그리 많지 않아서 이거라도 이렇게 갈고닦을 필요가 있거든.
차분하게, 하지만 신속하게 붓을 놀리며 설천위는 집중해 갔다.
백수아를 구하며 손에 넣은 손휘의 혼은 아직도 소화 중이다.
내면에서 천마를 비롯한 혼들이 적극적으로 대화를 시도하고 있으니 조만간에 결과가 나오겠지.
그 외에도 아직 정리하지 못한 혼들이 많다.
거기다.
‘커지고 있어.’
[혼원패공(魂元覇功)]의 경지가 꾸준히 올라가면서 혼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꽤나 많은 혼들을 먹어 치웠음에도 아직 여유롭다고 느낄 정도로.
‘혈패황은 세는 것도 힘들 정도의 혼을 거느리고 있다고 했지.’
설정 속에서 나온 존재이니 어떤 힘을 쓰고, 얼마나 강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무림 전체랑 싸웠다는 게 가능성이 있어 보여서 더 아찔하네.’
현경의 무인조차 짓밟을 수 있는 압도적인 폭력이 그에겐 있었다는 거겠지.
그리고 그 뿌리가 되는 게 바로 이 [혼원패공(魂元覇功)]일 테고.
다룰 수 있는 혼이 많아지고.
혼의 실체화가 자유로워지게 된다면.
‘일인군단. 그 말이 실현되겠지.’
이번에 백유를 도울 땐 굳이 꺼낼 필요도 없었고,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커서 숨겼지만.
전에 혈천이라는 놈을 상대하며 성공했던 완전한 실체화는 점점 더 손에 닿고 있었다.
자성영역(自省靈域)을 그쪽으로 발전시키는 것도 생각해 볼 정도로.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돌아가면 백화단주에게 제대로 된 술법을 배우는 것도 나쁘지 않겠…….
“공자.”
순간, 자신을 부르는 차가운 목소리에 집중에서 깬 설천위는 놀라 숨을 삼켰다.
“……이게 뭐야?”
자줏빛 연기가 희미하게 방 안을 흘러 다니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즉시 창문으로 다가가 창을 여니 확실하게 보였다.
“……그놈들이었어?”
달콤한 향이 마을 전체에 가득 퍼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