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5화
424화-자색의 안개 (1)
백유가 사천맹의 맹주가 된 지 일주일.
설천위는 사천맹의 전각 위에서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고 있었다.
“슬슬 마무리됐나.”
슬슬 피 냄새가 옅어지고 있었다.
얼추 일이 끝났다는 증거.
거기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음, 확실히 더 이상 남아 있는 건 없는 것 같구나.]
요 일주일간 백유가 내실을 다지는 사이, 사천맹을 샅샅이 뒤졌다.
혹시 혈교나 혈사련이 심어 놓은 다른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
술법적인 영역을 넓혀 꽤나 정밀하게 수색했음에도 걸린 건 없었다.
일단 사천맹을 다른 세력의 손에서 건져 내는 건 성공했다고 봐야겠지.
연옥을 열 괴물도 처리했으니, 참으로 알찬 원정이었다.
……문제는 시간을 너무 많이 써 버렸다는 거지만.
“무림맹은 개판이 됐겠지?”
대놓고 이쪽을 견제하기 위해 외부로 보냈던 놈들이다.
흑룡단주는 실종된 상태로 시간이 한참 지났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로 소식이 없으면 사망이라고 여기고 움직이는 놈들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 사존조차 몇 달 실종됐다고 사천맹이 이렇게 개판이 됐는데, 말해 뭐하겠는가.
무림맹은 개판이 났을 거다.
다만, 맹주가 똑바로 버티고 있으니 겉으로는 멀쩡하겠지만.
이쪽을 견제하려는 놈들은 이미 땅을 전부 다지고 반격의 준비까지 끝내 놨을 거다.
“씁.”
쉽지 않겠는데.
정파의 인물로 게임을 할 때의 핵심은 무림맹을 손에 넣는 거다.
사천맹 저리 가라고 할 정도로 썩어 있는 놈들이 가득한 곳이지만, 그 뿌리와 기둥은 여전히 굵고 튼튼하다.
구파일방은 물론, 무림맹의 살점을 채우고 있는 중소 문파의 무인들까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의 큰 전력이 되는 이들이다.
반드시 손에 넣을 필요가 있다.
흑룡단을 만들어 따로 세력을 키운 건 그 시작이었으니까.
무림맹 전체를 손에 쥐고 흔들진 못해도 최소한 뜻이 있는 인간들에게 믿음을 줄 정도는 되어야…….
“천위.”
“응?”
생각에 잠겨 있던 설천위는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올라온 백유가 술병을 흔들었다.
어려워서 잘 못 배우겠다더니 은신술 실력이 뭐 이리 늘었는지.
집중하고 있지 않으면 그냥 놓친다.
[집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네가 저 아해의 기척을 아예 머릿속에서 지워서 그런 것 아니더냐.]
[쯧쯧, 외간 여자에게 이리 홀려선…….]
[사내란 자고로 자신의 등에 짊어질 이를 책임지는 것이야말로…….]
총각이었던 암영의적 이외의 혼들이 떠드는 잔소리에 설천위는 손을 휘휘 저었다.
홀리긴 누가 홀려. 그냥 믿을 수 있는 녀석이니까 신경 쓰지 않는 거지.
혼들의 타박을 무시하며 설천위는 백유가 내민 술잔을 받았다.
“일은 다 끝난 거야?”
“물론. 능력 있는 부하들을 괜히 살려 둔 게 아니잖아?”
짬 때리고 왔다는 말을 참 길게도 하는구나.
조직의 머리에 오르더니 말이 길어졌어.
히죽 웃으며 술병을 내미는 백유를 보며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그녀의 잔을 채웠다.
말없이 술잔이 오가고, 가만히 구름을 바라보던 백유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내일?”
“내일.”
“빨리도 가네.”
“오래 있었던 거지.”
“하긴, 그 여자가 위험한 상황일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붙어 있어 준 게 용하지.”
술잔을 두고 술병을 집어 든 백유는 술병을 흔들며 무릎을 끌어안았다.
한 팔로 무릎을 끌어안고, 그 무릎 위에 볼을 올린 백유가 붉은 얼굴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천위.”
“어.”
“나는…….”
말을 꺼내려다가 다시 삼킨 백유는 한숨과 함께 술기운을 뱉어 냈다.
“역시 됐어.”
“……그래.”
술기운을 날려 버리고 팔을 풀고 허리를 쭉 편 백유가 후련하게 웃는다.
그 모습에 설천위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 순간.
“술기운 따위에 의지하는 건 내 성격에 안 맞지.”
“응?”
그게 무슨…….
순간 파고드는 손을 피하지 못한 설천위는 그 손에 뒷목을 붙잡혔다.
완전히 방심한 상태에서 그보다 훨씬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진 백유의 기습이 만들어 낸 완벽한 지르기.
순식간에 뒷목을 잡혀서 고정된 설천위가 두 눈을 부릅뜨는 순간.
달콤한 향기가 콧속으로 훅 들어왔다.
동시에 부드러운 감촉까지.
꽤나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을 때.
“꺄하하하! 역시! 뺏는 게 좋네! 이래서 사파인가?”
반질거리는 입술을 소매로 훔친 백유가 히죽 웃었다.
“……아저씨냐.”
“흥, 자리에 없는 녀석이 잘못이지.”
설천위의 말 같은 건 가볍게 무시한 백유는 코웃음을 치며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저쪽에서 싫다고 하면 얼마든지 와.”
“……나만 쓰레기가 되는 거잖아, 그거.”
이게 외도(外道)지 뭐가 외도냐.
한 손으로 눈을 덮은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에이, 싫지도 않았으면서.”
“그건……. 후, 말을 말자.”
“괜찮아, 괜찮아! 요즘 시대에 이처(二妻) 정도야……. 흠, 삼처(三妻)인가?”
“삼처는 뭔 헛소리냐, 또?”
“경쟁자가 꽤 많더라고.”
“많긴 뭐가 많아.”
없어, 그런 경쟁자.
짜증이 담긴 눈동자로 백유를 노려보다가 이내 한숨과 함께 털어 낸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펜스 룰을 못 지킨 내 잘못이지…….”
“펜스 룰? 그게 뭐냐?”
“있어. 그런 게. 가정을 지닌 남자의 기본 소양이라고 해야 하나…….”
“가정도 없는 게 뭐라는 거야.”
아.
아, 아직 미혼이지?
약혼자가 있는 건 또 다른…….
‘다르긴 개뿔이 달라.’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백유가 내민 서신을 받아 들었다.
“이건?”
“그 여자한테 줘. 내용은 보지 말고. 여자끼리의 대화 같은 거니까.”
걸즈 토크의 서신 버전이냐.
대체 무슨 내용이 쓰여 있을지 감도 안 잡혀서 오히려 무서운데…….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고개를 저으며 서신을 품에 넣었다.
“돌아가면 전해 줄게.”
“좋아. 그럼 다음에 만날 땐…….”
슬쩍 설천위를 위아래로 훑은 백유가 소매로 침을 닦았다.
“확정으로 만들어야지.”
“뭘?”
“알면서.”
히히 웃으며 손가락으로 설천위의 옆구리를 찌른 백유가 몸을 배배 꼬았다.
“정 궁금하면 지금 알려 줄…….”
“대체 살존 아줌마가 무슨 충고를 한 거냐고!”
왜 이렇게 저돌적이야!
재빨리 거리를 벌린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살짝 거리를 벌리니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백유가 손을 거뒀다.
그 모습에 거듭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조금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함께 움직여야 할 때가 올 거야.”
“움직여야 할 때?”
“그래. 정신 나간 놈들이 제대로 날뛸 거거든.”
이번 사천맹 사태 자체가 그 시작 중 하나이니까.
“그러니 준비해 둬. 지금 상태로 오면, 두고 갈 거니까.”
“꺄하하하하!!”
설천위의 경고에 백유는 웃음을 터트렸다.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었다.
“천위.”
그리고 어느새 웃음이 사그라든 백유의 날카로운 두 눈이 설천위를 향했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검은 두 눈동자가 아득할 정도로 멀어진다.
그 안에 담긴 것은.
“그래, 실없는 소리를 했네.”
독(毒)과 악(惡)으로 가득 찬 세상을 품는 흑천(黑天)이었다.
* * *
“그런 건가.”
강서성의 한 객잔.
정자세로 앉아 있음에도 오만하게 앉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년인의 앞에 무릎을 꿇은 여미려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런 겁니다.”
떨고 싶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몸이 떨리는 오한이 멈추지 않았으니까.
상대는 어떤 기운도 일으키지 않고 그냥 앉아 있을 뿐인데도.
“아버님, 이번에는 그냥 보내 주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나마 여미려가 제정신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사람의 말에 여미려는 작게 안도했다.
마주하는 것만으로 벌벌 떨리는 저 괴물을 상대로 저렇게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니.
‘역시 그 남자의 안주인다운 풍모……!’
우리의 대장은 역시 조금 힘들지도!
담담하게 앉아 있는 유예린의 모습에 여미려가 감탄하는 사이, 고개를 돌려 유예린과 눈을 마주한 설주철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백유란 녀석이 사천맹의 맹주가 된다면, 그러는 것이 맞겠지.”
고개를 끄덕인 설주철은 다시 여미려를 바라봤다.
“다만, 그것은 백유란 녀석이 맹주의 자리에 올랐을 때의 이야기다.”
“히끅.”
딸꾹질이 절로 나오는 발언에 여미려가 입을 손으로 가렸지만, 이미 시작된 딸꾹질은 멈추질 않았다.
기세 한 점 일으키지 않고 있는데…….
‘무슨 사람의 눈이……!’
지금 당장이라도 지려 버릴 것처럼 차갑고 날카롭다.
자신도 모르게 허벅지를 비비며 여미려는 고개를 숙였다.
“대장은 반드시 맹주의 자리에 올랐을 것입니다.”
“…….”
떨면서도 확신이 깃든 목소리에 설주철은 가만히 여미려의 뒤통수를 내려다봤다.
그 시선을 느끼고 흠칫흠칫 떨었지만, 여미려는 꿋꿋이 자세를 유지했다.
그 모습에 한숨을 내쉰 유예린이 다시 중재를 시작하려는 찰나.
“아버지.”
“왔느냐?”
창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방 안에 있던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곳으로 향했다.
자연스럽게 창문을 넘어 들어오는 사내.
“아주버님.”
“오, 제수씨.”
어색하다고 할 땐 언제고 자연스럽게 손을 흔드는 설천운의 모습에 유예린은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 인사를 받은 설천운은 웃으며 고개를 돌려 설주철을 바라봤다.
“확인했습니다. 사화가 사천맹을 먹었어요.”
“그건 의외구나.”
“살존의 지원에다가 때마침 도착한 녀석들이 단숨에 들이닥쳐 순식간에 장악했습니다. 보아하니 귀령단주도 힘을 보탠 것 같습니다.”
귀령단주도 손을 보탰다는 말이 나왔지만, 여미려는 흔들리지 않았다.
그 반응을 읽은 다른 이들의 표정이 묘해지는 순간.
“설 가가의 상태는…….”
“걔는 뭐, 멀쩡하던데요. 벽도 넘은 것 같고.”
“……벽을요?”
설천위가 강기를 쓸 순 있었지만 아직 화경에 도달한 건 아님을 알고 있던 유예린은 설천운의 말에 작게 안도했다.
“그렇다면 다행…….”
“근데 그 백유라는 아이 말고도 옆에 딱 달라붙어 있던 여자가 있던데?”
빠득.
무언가 부서졌다.
흠칫한 설천운이 돌아보기도 전에 어느새 손에서 가루를 털어 낸 유예린이 방긋 웃었다.
“누구죠?”
“……은신술이 장난이 아닌 걸로 봐선 소문으로 들은 살존의 딸이 아닌가…….”
“그렇군요.”
그런 표정이 아닌데?
받아들인 얼굴이 아닌데?
싸늘하기 그지없는 유예린의 눈빛에 설천운은 살짝 물러났다.
“아버지, 그런 의미에서 일단은 건드릴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흠.”
설천운의 말에 잠시 침묵한 설주철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퇴각한다.”
* * *
“흐응? 사천맹이?”
“예. 사화라는 어린 계집에게 평정되었다고 합니다.”
“무림맹은?”
“흑룡단의 개별적인 움직임은 있었지만, 무림맹의 공식적인 반응은 없었습니다.”
“과연, 그 엉덩이 무거운 늙은이들은 아직도 그러고 있는 건가.”
고개를 주억거린 사내는 곰방대를 빨아 연기를 내뱉었다.
“나쁘지 않은 상황이구나.”
툭툭 재를 털어 낸 사내는 하얀 분이 칠해진 얼굴로 웃었다.
“조금 크게 움직일 때가 된 것 같아.”
분홍색 연기가 피어오르며 방 안을 자욱하게 채운다.
[통천(通天)의 시기가 오고 있다.]
어느새 흐릿해진 공간 속에서 기이한 목소리가 울려 퍼진다.
사내에게 보고를 올리던 남자는 몸을 떨며 머리를 낮췄다.
양팔과 양다리를 땅에 붙이고 머리마저 땅에 닿을 정도로 깊게 숙인 남자는 감읍하며 대답했다.
“모든 것을 걸고 준비하겠나이다!”
[당연하다. 하늘이 열리고, 지옥으로 향하는 길이 뚫리는 그날.]
일렁이는 연기가 형체를 이루며, 와불(臥佛)의 모습처럼 누운 인영에서 후광이 뻗어 나온다.
고개를 숙이고도 그 빛을 느낀 남자가 감격에 몸을 떠는 그때.
[나는 잃어버렸던 것들을 되찾을 것이다.]
북풍조차 따스하게 느껴질 정도로 섬뜩한 목소리가 연기 속에서 피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