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4화
423화-흑천(黑天) (5)
----------
현열혈귀(玄裂血鬼)의 부활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목표 달성!
보상이 정산됩니다.
경험치가 상승합니다.
스킬 포인트를 획득합니다.
----------
이건 또 나쁘지 않은 보상이네.
완전히 무너져 내리는 현열혈귀의 잔해 밑에서 알림창을 확인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았다.
스킬 포인트야 뭐, 쓸 수 있는 데 쓰면 되고.
경험치는…….
‘오 쉣.’
장난 아닌데?
조만간에 스탯 하나 더 올릴 수 있겠는데?
게임처럼 무한 사냥을 할 순 없으니 레벨업이 정말 굼뜨기에 이 정도면 충분히 기꺼운 성장이다.
애초에 스탯이 높으며 높을수록 레벨을 올리기 힘든 구조이니 솔직히 레벨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고.
스탯과 스킬만 적정 수준에 도달하면 되니까.
무엇보다 중요한 건 현열혈귀의 부활을 저지했다는 저 문구다.
앞으로 진짜 재앙이 될 녀석을 저지하는 데 성공했으니 충분히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이대로 다른 놈들도 제때 처리하면…….
‘꽤나 쉽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연옥이 제대로 열리는 것만 막으면 난이도는 크게 줄어드니까.
후에 나올 괴물 놈들도 뭐, 상황에 따라서 충분히…….
“에잉, 맛있는 부분은 다 뺏겼네.”
생각에 빠져 있던 설천위는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백유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애초에 술사가 해야 할 일이니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고개를 들어 천천히 내려오는 귀령단주를 바라본 백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술사가 도(刀)로 악귀를 베어 버린다는 이야기는 듣도 보도 못했다고.”
“사람마다 할 수 있는 게 다른 것뿐이야.”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저쪽에서 대기 중인 이들을 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장악은 끝났나 보네?”
“물론. 사부님과 사형(師兄)도 움직였으니 오늘 안에 정리될 거야.”
“사형(師兄)이 뭐냐? 사저(師姐)라고 불러야지.”
“왜? 이쪽이 좀 더 입에 달라붙지 않아?”
“……네 맘대로 해라.”
하긴 호칭이야 부르고 불리는 사람의 마음이지.
히히 웃는 백유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새 다시 넘어온 패융이 그립다는 듯 백유를 보며 낑낑거렸다.
이러다가 진짜 뺏기는 건 아니겠지?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지.
“여기 일은 끝났으니, 빨리 움직여서 일이나 마무리 지어. 살존 어른과 백수아에게만 맡길 생각은 아니겠지?”
“흐흥.”
설천위의 물음에 입꼬리를 올린 백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렇게 부드럽게 보내 줄 순 없지.”
* * *
“이건 일이 좀 복잡하게 됐는데…….”
사천맹의 담벼락.
그곳에 앉아 있던 사내는 쓴웃음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툭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몸을 돌려 달린다.
상황이 진정됐으니 너무 오래 있으면 들킬 우려가 있었다.
빠르게 사천맹의 영역을 빠져나간 사내는 그대로 도시를 나와서 작은 야산에 도착했다.
“오셨습니까?”
“상황은 어떻게 됐습니까?”
산의 정상에 도착하자, 숨어 있던 이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늘색의 무복을 입은 무인들.
설가의 무력대인 북풍대의 무인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을 이끄는 대주인 설천운은 부하들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였다.
“글렀지. 뭐.”
“……아아.”
“완전히 끝난 겁니까?”
“그래, 사화가 사천맹을 먹었어.”
“으음.”
사화가 사천맹을 먹었다는 설천운의 말에 부하들은 신음을 흘렸다.
사실 그리 나쁜 상황은 아니긴 하다.
설가(雪家)가 피 튀기는 전쟁을 멈춘 이유 중 하나는 전대 맹주인 구령학의 성향 때문이었다.
선을 지키는 사파(邪派).
일반 백성은 건드리지 않고, 인간의 도리를 벗어나는 짓은 하지 않는다.
그런 형태로 사파를 운영해 왔기에 설가는 전쟁을 멈췄다.
물론, 그런 상황에서도 미친 짓거리를 하는 놈들은 따로 찾아가 응징을 해 줬지만.
여하튼, 그렇기에 구령학의 다음 맹주가 누가 될지는 설가의 큰 관심사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돼먹지 못한 놈이 맹주가 된다면 가주가 움직일 테니까.
전쟁을 두려워하진 않지만 흐르는 피가 많아질 것이 뻔한데, 누군들 기쁘겠는가.
그래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그래도 전도울이나 소준극 같은 개잡놈들이 맹주가 되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습니까?”
“그거야 모를 일이지. 사화도 미쳤다고 소문이 자자하니까.”
여태까지 들려온 소문만 들으면 구령학과 매우 비슷한 성향을 가진 건 확실하지만, 사람의 속이야 알 수 없는 일이다.
권력을 쥐면 어떻게 바뀔지도 모르고.
다만.
“그 녀석이 손을 보태고 있으니 일단은 믿는 수밖에 없나?”
“그 녀석이면 막내 도련님 말씀입니까?”
“그분이 무림맹의 단주가 될 줄은 진짜 상상도 못 했는데…….”
부하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운은 조금 전에 봤던 설천위의 모습을 떠올리고 피식 웃었다.
‘이거 이제 지겠는데.’
거대한 괴물을 단숨에 갈라 버리는 일격.
솔직히 말해서, 자신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거기다 술법까지 다루니 아마 제대로 붙는다면 승산은 상당히 낮아지겠지.
“나쁘지 않은 기분이야.”
동생이 자신을 뛰어넘을 정도로 강해졌다는 사실에 질투보다는 오히려 뿌듯함이 들었다.
더럽게 무뚝뚝한 아버지 대신 키웠던 막내라서 그런가.
물론 자신도 아버지를 닮아 무뚝뚝해서 어린 녀석에게 크게 신경 써 주지 못했지만…….
원래 피가 그런 것을 어찌하겠는가.
다른 동생들도 그랬는데.
심지어 어머니조차 그랬으니…….
그 어린것이 기죽으며 크는 것도 이해는 됐다.
심지어 무가에서 태어난 주제에 무재(武才)가 바닥을 기었으니.
무뚝뚝하다 못해 싸늘한 아버지에게 상처를 받고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갈 정도이니까.
“일단, 물러난다.”
“알겠습니다.”
“그럼, 가주님을 찾으러 가면 되겠습니까?”
“으음……. 그것도 그렇군.”
며느리를 지키겠다고 달려간 양반이니 찾으러 가는 게 맞긴 한데…….
“일단, 위로 올라가고 난 뒤에 생각하자고.”
여기 일은 동생한테 맡겨 두면 되겠지.
* * *
맹주의 집무실.
어느새 어두워진 하늘 아래 모인 이들의 면면은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살존과 백수아부터 혈뇌, 야귀단주, 귀령단주에다 설천위와 백유까지.
“그래서, 당신도 사존 어르신이 어디에 계신지는 모른다?”
“예. 그렇습니다.”
그들 사이에서 의자에 기댄 설천위는 혈뇌의 대답에 가볍게 가면을 두드렸다.
“사망하셨을 가능성은?”
“3할입니다.”
“높군.”
구령학이나 되는 사람이 사망할 가능성이 3할이라면, 어마어마하게 높은 거다.
그만한 강자는 무슨 짓을 해도 이승을 구를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까.
“이렇게 길게 자리를 비우신 것도 사실은 처음입니다.”
가끔 2주에서 3주, 길면 두세 달 정도 자리를 비우긴 했지만 이렇게 긴 것은 처음이었다.
그렇기에 혈뇌는 구령학의 죽음에 3할이라는 수치를 매긴 것이다.
“스승님의 수색이 그럼 첫 번째겠네.”
“그건…….”
이제 막 맹주의 자리에 오른 백유의 말에 혈뇌가 말끝을 흐렸다.
아무리 백유라고 하지만 이제 막 권력을 쥐었는데 그 권력의 가장 큰 방해물이 될 전대 맹주를 찾겠다고 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에이, 아직 그 할배는 있어야 해. 무림맹의 그 괴물을 견제하려면 어쩔 수 없어.”
“난 혼자고, 저쪽은 셋이니까.”
살존의 담담한 대답에 백유는 고개를 끄덕였다.
살존이 버티고 있으니 무림맹주가 덮어놓고 움직이진 않겠지만, 견제할 힘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크다.
주도권을 완전히 뺏기면 정말 죽도 밥도 안 되는 상황이 벌어질 테니까.
“그런 의미에서 일단 내실부터 다지도록 하자고.”
“투옥한 단주와 대주들 중에서 선별할 이들의 정보를 보고서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응, 부탁해.”
단주나 대주를 모조리 죽인 건 당연히 아니었다.
살존과 백수아가 움직여 죽인 것은 정말 제대로 혈교와 혈사련에 기생해 꿀물을 빨던 놈들이다.
그 꿀물이 피와 죽음으로 이루어진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단물처럼 빨던 인두겁을 쓴 벌레들의 목만을 땄을 뿐이다.
“가문과 문파들도 모아 줘. 슬슬 우리도 제대로 뭉칠 때가 됐으니까.”
“알겠습니다.”
백유의 지시에 별다른 이견 없이 혈뇌는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내린 지시를 모두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느껴지는 목소리.
그런 그녀를 잠시 바라보던 백유는 웃으며 혈뇌의 두 눈을 바라봤다.
“그럼, 가장 중요한 부분을 말해 줄래?”
담담하기 그지없는 눈동자.
그 안에 담긴 스산한 살기에 혈뇌는 오히려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제 역할과 제가 해 온 일 전부를.”
* * *
달조차 숨은 캄캄한 밤의 일이었다.
주에 한 번 하는 보고를 위해 움직이던 혈뇌는 어이없는 이유로 보고를 올리던 광경을 들키고 말았다.
정말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달밤에 술을 마시던 맹주가 그녀의 모습을 목격했으니까.
철저하게 주위를 살피고 움직였음에도,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술을 마시던 맹주를 알아채는 건 불가능했다.
너무나도 허무하게 들켜 버린 정체.
혈교의 간첩이란 것을 들켜서 죽음을 각오한 그때.
“벌레의 냄새가 나는구나.”
머리를 번뜩이는 뇌전과 함께 타들어 갈 것 같은 고통이 찾아왔다.
전신이 오그라들고, 뇌가 불에 익는 것 같은 끔찍한 고통.
그리고.
“아…….”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의 머리를 옥죄던 벌레는 사라져 있었다.
흐릿하던 사고가 정상적으로 굴러가기 시작했고, 차가운 이성이 돌아왔다.
혈교의 혈충에 의해 지배를 당하고 있던 무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네가 전에 올린 계획, 실행하도록.”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보며 구령학이 웃었다.
이제 막 사천맹의 정상에 올라 바닥을 다지던 구령학은 자신이 혈교의 첩자임을 알고도 웃으며 일을 맡겼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아직도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의 덕에 혈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그랬기에 혈뇌는 더더욱 혈교의 손을 놓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분을 위해서였습니다.”
혈교가 가장 눈독을 들이고 있는 사파의 정상에 선 은인을 위해.
빠져나온 독의 늪에 다시 발을 담갔다.
“그분이 돌아오지 않고, 완전히 썩어 버린 오물이 중심에 자리를 잡으면 모든 것을 지워 버릴 생각이었습니다.”
“현열혈귀를 방치한 것도?”
“폭탄의 하나였습니다.”
담담한 혈뇌의 고백에 야귀단주의 눈에 스산한 살기가 맺혔다.
“그러니까 맹주가 잘못 뽑히면 사천맹 전체를 지울 생각이었다? 네가 직접 전도울 그 개잡놈을 지지해 놓고?”
“폭탄을 심기 위해선 폭탄을 들고 나를 하인이 필요한 법이지요.”
담담한 혈뇌의 대답에 야귀단주는 헛웃음을 흘리며 기운을 풀었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그렇기에 이 자리에 있는 것입니다.”
구령학의 곁에서 그와 그가 만들어 낸 업적을 지키기 위해서 밤낮없이 일했다.
혈교의 정보를 얻고, 혈교에 정보를 풀고.
음지의 세력들과 만나서 끊임없이 상황을 조율하고.
어느 순간부터 구령학의 손조차 닿지 않게 된 어둠을 단숨에 일소하기 위해 오히려 어둠을 끌어모았다.
“팔을 자르려고 했던 건 그래서였구나.”
어둠을 일소하기 위해 어둠에 물들었기에.
그 죗값으로 팔을 내어 줄 생각이었구나.
피식 웃은 백유는 혈뇌를 보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난 혈뇌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가 그 앞에 무릎 꿇었다.
“지금이라도 이 목숨을 거두신다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습니다.”
선을 넘는 악(惡)을 절대 용서치 않는 백유의 행보는 이전부터 있었던 일이다.
벽을 넘지 못한 무인이었을 때조차 앞뒤 가리지 않고 날뛰었던 백유인데, 지금이라면 당연히…….
죽음을 각오한 혈뇌가 고개를 숙인 그때.
“죽이긴 왜 죽여?”
백유는 오히려 부드럽게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품에 끌어안았다.
“노력한 사람은 칭찬해 줘야지.”
혈뇌의 머리를 품에 안은 백유는 웃으며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네가 몸이 썩어 가는 고통을 참으며 모아 놓은 오물은 내가 치워 줄게.”
말없이 고개를 깊이 숙이는 혈뇌의 등을 어루만지며, 백유는 웃었다.
“나라는 하늘 아래, 썩은 오물로 가득 찬 연못은 더 이상 필요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