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3화
422화-흑천(黑天) (4)
등장과 함께 촉수를 베어 버린 백유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한참 높은 하늘 위에 있는 설천위에게도 또렷하게 들릴 정도의 목소리.
앞선 전투로 내상을 입었음에도 그 목소리에는 한 점의 떨림조차 느낄 수 없었다.
“이건 또 뭔지 궁금하네!”
연이어 달려드는 촉수들을 베어 내며, 백유는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붉은 대지와 공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현열혈귀의 영역(靈域)으로 들어간다.
“큭!”
“이건……!”
그녀의 뒤를 따르던 이들은 붉은 대지를 밟는 순간, 움찔하더니 머뭇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생기(生氣)를……!’
이 붉은 대지는 단순한 시각적 위협이 아닌, 실제로 생명체의 목숨을 앗아 가는 죽음의 대지임을.
심지어 땅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숨을 쉬고, 피부와 맞닿는 공기조차도 이쪽의 생기를 빨아 가고 있었다.
“약한 놈들은 물러서.”
담담하게 걸어가는 백유는 고개를 돌려 빙긋 웃었다.
다만, 그것은 능력이 부족한 부하들을 걱정하고 위로하는 미소는 아니었다.
“자신의 목숨줄도 못 쥐고 있는 녀석이 무슨 사파 노릇이냐?”
자고로 사파(邪派)라 함은 본인의 손에 쥔 것은 필사적으로 붙들고 늘어져야 하는 법.
그것이 돈이든 목숨이든.
자기 밥그릇은커녕 목숨조차 챙기지 못하는 머저리는 따라올 자격조차 없다.
섬뜩한 백유의 미소와 마주한 이들은 자신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단순히 무시를 당해서 기분이 나빠진 게 아니었다.
인정받지 못했다는 것이 분할 뿐이었다.
자신들이 따르기로 결정한 이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다니.
사파를 떠나 무인(武人)으로서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흐흐핫!”
그렇기에 가장 먼저 묵직한 걸음과 함께 백유의 뒤로 따라붙은 야귀단주의 웃음에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꽤나 긴 시간 동안, 감옥에 갇혀 초췌해진 몰골임에도 형형한 안광을 뿜어내는 야귀단주는 거침없는 걸음으로 나아갔다.
“사파란 놈이 자기 밥그릇을 뺏길 순 없지!”
몸이 상해서, 생기를 빨아들이는 이 땅에서 그 누구보다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야귀단주가 웃으며 백유의 뒤에 섰다.
그리고.
“참으로 역겨운 공간이군요.”
담담한 목소리, 차분한 걸음.
야귀단주와 거의 동시에 백유의 뒤에 선 혈뇌가 웃었다.
당연하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백유의 뒤에 선 두 사람의 모습에 다른 이들은 다시 한번 이를 악물었다.
내공을 움직여 생기를 보호하고, 억지로 발을 뗀다.
앞으로 나아간다.
자신들은 저 등을 따라가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한 이들이 아닌가.
적랑대주 성무경이 앞으로 나아갔다.
학관 시절에는 미친 인간이라 여겼고, 끝 무렵에야 혹시나 하는 생각을 가졌던 그 등을 향해.
“적랑대!!”
“우리는 송곳니!”
“적을 물어뜯는 최흉의 이빨!”
그런 성무경의 뒤를 따라 거칠게 포효하는 적랑대가 따라붙었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백유를 따르기로 결정했던 이들이 전원 백유의 등을 바라보며 섰다.
생기를 빨아 가는 대지조차, 죽음으로 이끄는 공기조차.
그들에겐 더 이상 벽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의 벽은 오로지 하나.
자신들의 앞에 서 있는 저 등뿐이었으니까!
“꺄하하하하하하!!”
자신의 뒤를 따라 붉은 대지 위에 선 이들을 보며 백유는 웃음을 터트렸다.
앞으로 나아가며 베어 낸 촉수의 잔해들이 꿈틀거리며 재생을 시작했지만, 망설임 없이 짓밟았다.
으깨 버린 촉수의 파편에서 다리를 들어 올리며, 백유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흑성! 길을 열어라!”
당당한 요구.
당연히 상대가 해낼 수 있을 거라고, 해 줄 거라고 믿고 있는 그 요구에 하늘에 떠 있던 설천위는 피식 웃음을 지었다.
“여전하네.”
다만, 안타깝게도 그리 쉽진 않았다.
영역(靈域)이란 공간의 지배.
상대가 지배하고 있는 공간을 이쪽이 침범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쪽의 영역으로 들어온 촉수를 베고, 그 촉수를 통해 이쪽의 힘을 밀어 넣는 것 정도는 가능하지만.
백유랑 다른 사파의 일원들이 서 있는 곳까지 영역을 확장하는 건 좀…….
명쾌하게 떠오르지 않는 해답에 설천위는 작게 미간을 찡그리고 백유를 내려다봤다.
이쪽이 해 줄 거라고 확신하는 것처럼 거침없이 나아가는 모습.
저렇게까지 흔들림 없는 신뢰를 보여 주니 무시할 수도 없고.
“어찌한다…….”
이대로 길어지면 내공이 부족한 무인들부터 차례로 생기가 빨릴 거다.
이쪽의 전력은 줄고, 상대는 강해지는 최악의 수.
‘현열혈귀의 까다로운 점이지.’
파괴적인 권능은 없지만, 생물의 생기와 피를 흡수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불사(不死)의 힘이었다.
게임에선 회복 감소 디버프를 걸고, 소수의 정예를 동원해 폭발적인 화력으로 깨부수는 것이 정석인데…….
상대의 크기도, 이쪽의 상황도 그런 정석과는 전혀 맞지 않으니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흑천으로 회복 감소를 넘어 회복 불가의 디버프를 걸 수 있으니 그걸 이용하면 되는데…….
미간을 찡그리던 설천위는 이내 기이한 감각에 눈을 크게 떴다.
저 밑에서 느껴지는 힘.
“……패융?”
으르렁거리는 용의 울음소리와 함께 백유의 몸에서 검은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허허, 왕(王)의 자질이로다.]
[사파의 하늘에 떠 있기엔 정말 아까운 별이로구나.]
혼들의 감탄이 터져 나왔다.
앞으로 나아가는 백유.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류는 이내 바람이 되고, 벽이 되어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들을 감쌌다.
그녀가 익힌 위천공의 공능이 아니었다.
그녀가 품은 패도의 힘이었다.
자신을 따라오라는 듯 그녀의 몸에서 흘러나온 패기(覇氣)가 바람의 형태로 길을 만들었다.
그녀의 뒤를 따르는 이들이 그녀의 등만을 보고 걸을 수 있게.
“주인공은 주인공이네.”
저런 포텐셜을 가진 이가 앞으로 몇이나 더 있는 건가.
헛웃음을 흘린 설천위는 손을 뻗었다.
조금 전까지 답이 없던 상황을 해결할 답이 보였다.
뻗은 손에서 의지가 나아간다.
붉은 공간을 지나 백유에게 닿은 의지는 그녀에게 깃든 용을 깨웠다.
[크르르르르르르.]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와 함께 백유의 몸을 휘감고 흘러나오던 패기가 용의 형상으로 변한다.
“아아……!”
뒤를 따르던 이들 중 누군가가 홀린 듯 숨을 토해 냈다.
신음처럼 들리는 목소리와 함께.
무릎이 꺾여 땅에 닿는 소리가 들린다.
촉수가 날뛰고 붉은 공간이 생기를 빨아들이는 지옥 속에 찾아온 고요를 뚫고.
경외(敬畏)가 퍼져 나간다.
“쓸데없는 짓을 하기는.”
일제히 무릎을 꿇은 부하들을 돌아보며 백유가 웃었다.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는데, 뭣들 해? 안 일어서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웃고 있지만, 무릎을 꿇었던 이들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스를 수 없었으니까.
거슬러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사존(邪尊) 구령학과는 다르다.
그가 정말 압도적인 힘으로 공포를 심었다면.
백유를 향하는 것은 단순한 공포가 아니었다.
그 등을 공경하면서(敬).
그 등을 두려워하는(畏).
말 그대로 경외(敬畏)의 대상.
공포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경외에 홀려 따라가는 것이다.
마치 하늘을 동경해 따르는 이들처럼.
검은 용과 같은 패기를 두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백유가 자신에게 달려드는 촉수를 붙잡았다.
그리고 말 그대로 손으로 찢어 버린 촉수가 갈기갈기 부서진다.
찢어져 파편이 되었어야 할 촉수가 회색의 잔해가 되어 흩어졌다.
[네노오옴!]
그 광경에 설천위가 무엇을 할지 깨달은 현열혈귀의 두 눈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분신으로 자성영역을 펼치는 괴물 같은 술사들은 몇 번 본 적이 있지만.
식령(式靈)을 이용해서, 그것도 타인의 의지를 축으로 자성영역을 펼치는 것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 긴긴 세월을 인세에서 살아왔음에도!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이를 악문 현열혈귀는 움직였다.
회복이 막히긴 했으나, 이쪽의 힘은 회복뿐만이 아니다.
거체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물량과 힘.
그것만으로도 저런 인간들 정도는 얼마든지……!
“아니지.”
격렬하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현열혈귀의 촉수를 보며 설천위는 혀를 쯧쯧 찼다.
“이미 공략은 끝났거든?”
현열혈귀가 강한 거?
맞다.
회복의 힘을 빼고서라도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무수히 많은 촉수와 압도적인 거체는 충분히 공포의 대상이다.
보통의 방법으로는 이기기는커녕, 도망치는 것도 힘들겠지.
하지만.
그래 봤자 재(災)다.
멸(滅)에 도달하지 못한, 손에 닿는 재해일 뿐이다.
설천위는 미친 듯이 흑관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밑에서 싸우고 있는 이들의 방패가 되어 줄 흑관을.
백유를 따르던 이들은 위험한 순간 자신들을 지켜 주는 흑관의 존재를 눈치채고 거침없이 나아가기 시작했다.
촉수를 베고 베어서 드디어 본체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런 본체에 닿은 백유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내질러 본체를 분쇄하기 시작했다.
백유의 손에 닿은 부분이 회색으로 변하며 바스러진다.
[이놈드으을!]
그 광경에 현열혈귀가 촉수를 뻗어 내는 것은 물론, 그 거대한 몸체까지 움직여 백유를 집어삼키려 했지만.
“안 되지.”
설천위가 만들어 낸 흑관이 그 발악을 비웃었다.
뻗어 내는 촉수의 숫자를 크게 줄여 백유와 부하들이 방어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거체의 움직임을 방해해 백유가 얼마든지 피할 수 있도록 틈을 만들었다.
“이야, 좋은 샌드백이네.”
손발을 틀어막으니 이 정도로 손맛이 좋은 샌드백이 되는구나.
일방적으로 몰리는 현열혈귀의 모습을 보면서 설천위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는 그때.
“됐다.”
그의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거대한 오각의 별이 생겨났다.
현열혈귀를 중심으로 생겨난 거대한 원진과 그 안에 새겨진 오각의 별.
“오행천견진(五行擅絹陣).”
공간을 장악한 귀령단주의 영력이 현열혈귀를 속박했다.
영력이 묶이고, 존재가 결박을 당한다.
[크아아아아아아!]
현열혈귀가 괴성을 내지르는 것과 동시에 놈이 만들어 낸 영역이 떨렸다.
이 정도 속박 따위는 얼마든지 부술 수 있다는 듯 격하게 요동치는 현열혈귀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손을 들었다.
“슬슬 끝낼까.”
그 손에 잡힌 것은 흑관으로 만들어 낸 도(刀).
도를 손에 쥔 채, 잔잔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현열혈귀를 내려다보며 설천위는 웃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뛰어내린다.
순식간에 허공으로 던져진 설천위의 몸이 빠른 속도로 낙하한다.
[노오옴!]
자신의 영역에서 벗어나 이쪽을 향해 떨어지는 설천위의 모습에 현열혈귀가 발악하듯 영력을 움직였다.
이건 기회다.
저 오만한 놈이 이 술법에 당해 자신이 묶여 있다고 생각하고 달려드는 지금이야말로 유일한 기회다.
놈만 처리하면, 이 지긋지긋한 영역은 사라진다.
회복의 권능만 돌아오면 이런 잡스러운 놈들 따위는 얼마든지 집어삼킬 수 있…….
“너, 뭔가 착각하고 있지 않냐?”
떨어져 내리는 설천위와 눈이 마주친다.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 뒤로 검은 하늘이 요동친다.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현열혈귀는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놈은 이겼다는 자만심에 자신의 영역을 뛰쳐나온 것이 아니라.
[살악(殺握) 흑도(黑刀)]
자신의 영역을 끌고 나온 것이었다.
[흑천(黑天)의 형(形)]
자성영역(自省靈域)을 마치 강기처럼 두른 거대한 도(刀)가 공간을 가른다.
밑에서 날뛰는 벌레들에게 깎이고, 술사에게 묶여 끌어낼 수 있는 힘이 제약된 지금.
그 일격을 막을 수 있는 수단이 현열혈귀에게는 없었다.
거대한 도가 공간을 지우는 것처럼 현열혈귀를 양단한다.
인간의 상체와 같은 형태를 가진 머리부터 저 땅에 닿는 거대한 몸체의 바닥까지.
단 일격에.
[괴…… 물…….]
갈라졌다.
검은 하늘이 쪼개지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