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1화
420화-흑천(黑天) (2)
치솟는 촉수의 틈바구니에서 설천위는 귀령단주를 챙겨 날아올랐다.
흑관으로 만든 발판을 밟고 몇 번이고 위로 솟구쳤다.
“……짜증 나네.”
이건 전혀 생각하지 못한 부분인데.
설마 대주교의 목숨이 봉인의 핵이었을 줄이야.
하긴, 아무리 제물을 썼다곤 해도 조잡한 핵으로는 저런 괴물을 묶어 둘 수 있을 리가 없지.
그리고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가 하나 더.
‘……더럽게 강한데.’
이 정도일 줄은 생각 못 했는데.
설마 게임 속에서 만났던 현열혈귀는 봉인이 길어져 약해졌던 상태였나?
아니면, 대주교의 영육을 흡수함으로써 강해진 건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제대로 된 기준이 없었으니까.
아니, 판단할 이유도 딱히 없나.
예상하지 못했단 실책을 머릿속에서 깔끔하게 지워 버린 설천위는 어느새 거세진 바람에 발아래를 내려봤다.
꽤나 높이 올라온 탓에 거대한 현열혈귀의 형체가 전부 보였다.
무슨 거대한 슬라임처럼 촉수를 휘두르는 현열혈귀의 형체는 상당히 혐오스러워 보였다.
보는 것만으로 절로 거부감이 드는 외형이라고 해야 하나.
붉은 액체는 번들거리고, 안에서 무언가가 끊임없이 꿀렁였다.
단순한 기포인지 아니면 부서진 건물의 잔해인지, 혹은 그 안에 있던 사람의 파편인지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보기 거북한 건 매한가지였다.
거기다.
‘녹이는군.’
소화시키고 있는 거다.
촉수로 찢고 부순 것들을 삼켜서 소화시켜 영력으로 바꾸고 있는 거다.
[높이도 올라갔군.]
차분하게 현열혈귀를 관찰하던 설천위는 거대한 슬라임 위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미간을 찡그렸다.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런 방식이라.
게임에서 꽤나 거대한 촉수 덩어리를 소환하는 건 봤지만…….
현실에서 보면 이런 느낌인가.
아니, 역시 사이즈가 너무 다른데.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귀령단주를 내려놨다.
“…….”
살짝 떨고 있는 것이 높은 곳을 무서워하는 것 같지만, 안타깝게도 챙겨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다만, 이렇게 끌어안고 대피한 이유는 이쪽도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현열혈귀가 폭발적으로 촉수를 쏟아 내는 순간, 귀령단주가 축지로 설천위를 빼내 줬으니까.
다만 멀리 가지 못하고 지하실 입구 정도가 최선이었기에 그 뒤엔 설천위가 끌어안고 공중으로 뛰어오른 것뿐이다.
밖으로 빠지기엔 너무 덩치가 커서 자신도 모르게 위로 솟구쳤다.
급해서 한 행동이지만…….
결과적으로 나쁘진 않은 것 같다.
지상에서 저놈과 마주했으면 너무 거대해서 감도 제대로 안 잡혔을 테니까.
물론, 감을 잡았다고 그럴싸한 해결책이 나오는 건 아니지만.
“이런 괴물이 맹에 잠입해 있었다니…….”
입술을 악문 귀령단주의 목소리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쩌겠습니까. 저쪽도 최선을 다한 계획이었는데. 대주교나 되는 인간의 목숨을 바쳤을 정도이니.”
아무리 귀령단주가 뛰어난 술사라고 한들 알아내는 데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귀령단주는 애초에 퇴마(退魔) 전문이 아니다.
사술 전문이라고 해야 하나, 축지도 그렇고.
사실 인간을 상대하는 데 꽤나 능력이 좋은 술사다.
실제로 이 장원을 막고 있던 혈교도들을 축지를 활용한 술법으로 찢어발겼으니까.
백화단주나 저기 산에 숨어 있는 도사들처럼 악귀를 상대하는 데 특화된 술사가 아니니 어쩔 수 없는 결과다.
적도 그걸 알고 있으니 여기서 이런 짓을 했을 테고.
다 이유가 있어서 이런 일이 벌어진 거다.
무림맹에는 이런 놈을 심을 여유가 없으니 심지 못했을 뿐이고.
여하튼.
“어떻게 상대해야 하나…….”
일반인은 술사와 악귀의 전투에 환상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막 복잡하고 고등한 술법으로 강대한 악귀를 봉인하고, 나아가 소멸시킨다.
멋지지 않은가.
하지만, 안타깝게도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술사와 악귀의 싸움은 대부분이 단순한 힘겨루기다.
고등 술법은 적은 영력으로 최대한 강한 힘을 내기 위한 방식이고, 수많은 술사들이 모여 펼치는 결계는 부족한 힘을 메우기 위한 협력이다.
기술은 정말 뛰어나지만, 그 모든 것이 힘을 키우기 위해 사용되는 것들이다.
즉, 악귀와의 전투에서 필요한 것은 압도적인 화력과 방어력.
이 두 가지란 소리다.
그렇기에.
“더럽게 크네…….”
저렇게 덩치가 큰 악귀는 애를 먹을 수밖에 없다.
심지어.
단순한 영체 상태를 넘어 실체화한 놈이다.
이 일대를 완전히 때려 부수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그냥 공격으론 어림도 없겠는데.’
답이 안 보였다.
일단 가장 할 만해 보이는 방법은 [암천룡(暗天龍)]을 불러내는 건데…….
일단 패융이 백유한테 있는 데다 아무리 봐도 [암천룡(暗天龍)]으로는 부족해 보인다.
생각을 거듭하며 설천위는 일단 도(刀)를 들었다.
그리고 휘두른다.
아래를 향해 [소령연화(燒靈燃枠)]를 담은 참격을 날렸다.
그야말로 가볍게 몸체를 가른 참격은 그대로 쭉쭉 나아가나 싶었지만, 어느 순간 마치 물에 빠진 솜사탕처럼 순식간에 흩어졌다.
심지어 [소령연화(燒靈燃枠)]로 남긴 불길조차 꿀렁이는 붉은 액체에 먹혀 사그라들었다.
방어력도 높고, 재생력도 장난이 아니다.
불사(不死)의 특성을 재현한 것만 같은 모습.
‘……천 년 전이라고 했던가.’
무슨 배경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확실한 건 현열혈귀가 살아온 세월이 심상치 않다는 것이다.
그만한 세월을 버틸 수 있었던 이유.
아마 단순한 강함 때문은 아닐 거다.
“……대규모 결계를 펼치겠다.”
고민하는 사이, 옆에서 결심을 굳힌 귀령단주의 말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결계요?”
“이 이상 놔두면 놈이 끊임없이 사람을 잡아먹을 거다.”
귀령단주의 말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맞는 말이다.
놈은 지금도 촉수를 뻗어 주위에 있는 인간들을 잡아먹고 있었으니까.
흑관으로 조금씩 보호하고 있긴 했지만, 아무래도 한계가 명확했다.
이렇게 먼 거리에서 펼친 흑관은 얼마 버티지 못했으니까.
“놈을 격리하고, 그다음에 술사와 무인들을 모아 공격하면…….”
“늦어요.”
귀령단주의 말을 끊은 설천위는 다시 아래를 내려봤다.
끌려가는 이들이 보인다.
무인인지 하인인지 너무 많아서 구분도 힘들 정도였다.
이대로 놔두면 순식간에 몸을 불려 사천맹 전체를 먹어 치우겠지.
“시간을 끌어 드리죠.”
손을 앞으로 뻗으며 설천위는 가볍게 숨을 골랐다.
“놈을 속박해 주세요.”
“무리다. 내 힘만으론 저런 괴물을 묶는 건…….”
귀령단주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무리인 것은 무리인 것이다.
자신의 주제를 아는 것은 전장에서 가장 필요한 덕목.
쓸데없는 오만으로 동료들을 사지로 몰고 갈 수는 없는…….
“가능하게 만들어 드릴 테니 부탁드려요.”
“그게 무슨……!”
가능하게 만들어 준다니.
이 무슨 장난 같은 말이란 말인가.
술법이란 것이 불가능한 것을 뚝딱 가능하게 만드는 그런…….
“하아아아아.”
불만을 뱉어내려던 귀령단주는 섬뜩한 느낌에 입을 다물었다.
길게 숨을 뱉어내는 설천위의 몸에서 검은 뇌전이 일렁였다.
‘……뇌전?’
설천위가 뇌공(雷功)을 익혔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설마 그 계집에게서 뇌전 계열의 술법을 배우기라도 한 건가?
하지만…… 그 계집이 쓰는 술법은 남에게 가르쳐 줄 만한 것이 아닐 텐데?
이놈이 그 계집의 제자도 아니고…….
‘설마?’
애인인가?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귀령단주가 입을 다무는 순간.
앞으로 뻗었던 손을 가슴 앞까지 당긴 설천위는 주먹을 쥔 채 천천히 눈을 떴다.
일렁이는 푸른 뇌전이 그의 눈에서 튀어 오른다.
“처음이라 잘될지 모르겠군.”
원리는 같다.
다만, 그 축이 달라진 것일 뿐.
가슴 앞에 움켜쥔 주먹에서부터 검은 구체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서서히 크기를 불리던 검은 구체는 이내 엄청난 속도로 팽창해 공간을 집어삼켰다.
단숨에.
하늘을.
대지를.
그 사이를 메운다.
파직! 파직!
호흡에서 내뱉는 뇌전이 검게 변한 설천위가 천천히 손을 머리 옆으로 올렸다.
마치 투창의 자세를 잡듯.
“……이, 무슨!”
그리고 설천위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귀령단주가 두 눈을 부릅떴다.
하늘에 낀 먹구름이 우렛소리를 내며 일렁인다.
그리고.
콰가가가강!
무시무시한 벼락이 귀령단주의 옆을 꿰뚫었다.
그 자리에 서 있던 설천위가 그대로 소사체로 발견될 것만 같은 엄청난 위력의 벼락.
질끈 눈을 감았던 귀령단주는 조심스럽게 눈을 뜨고 나서야 억눌린 숨을 토해 냈다.
‘이런 괴물……!’
전신에 파직거리는 뇌전을 휘감은 설천위의 손엔 벼락으로 만든 창이 들려 있었다.
여전히 벗고 있지 않은 설천위의 가면 위로 벼락과 같은 문양이 퍼져나간다.
[자성영역(自省靈域)]
[흑천만뢰(黑天萬雷)]
손에 쥔 벼락을 집어던진다.
천신(天神)의 분노처럼 집어던진 벼락이 현열혈귀의 거체에 꽂힌다.
여태까지 설천위가 날렸던 참격은 가렵다는 듯 흡수했던 촉수가 비틀린다.
마치 마른오징어를 불에 굽는 것처럼 뒤틀린 촉수가 비명을 지르는 듯 부들거렸다.
[네놈……!]
그리고 그제야 놀란 듯한 현열혈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몸이 크니 둔한 모양이군.”
그런 현열혈귀를 비웃으며 설천위는 다시 한번 벼락을 손에 쥐었다.
“처음 만드는 거라 조금 미숙하니까 봐달라고.”
웃으며 다시 한번 벼락을 쏘아 낸 설천위는 그사이에 눈짓으로 귀령단주에게 신호를 보냈다.
말도 안 되는 광경에 넋을 놓고 지켜보고 있던 귀령단주는 그 시선에 번뜩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자성영역(自省靈域)으로 놈을 괴롭히고, 의식을 한 곳으로 집중시킬 수 있다면.
‘해내겠어.’
못 할 것도 없지.
이를 악문 귀령단주는 부적과 몇 개의 도구를 꺼내 뿌리곤 즉시 인을 맺고 눈을 감았다.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주문과 함께 공간이 일그러져 도구와 부적이 그녀가 원하는 위치로 이동한다.
집중을 시작한 그녀는 이내 주위의 우렛소리조차 잊고 술법에 빠져들었다.
귀령단주가 본격적으로 준비에 들어간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다시 벼락을 불러냈다.
몸 전체를 꿰뚫고 지나가는 뇌전의 통증에 절로 입꼬리가 비틀렸다.
백유는 아마 무공을 사용할 때 항상 이런 느낌이겠지.
벽을 넘은 지금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뭐 어찌 됐든.
“나쁘지 않아.”
뇌전을 이용한 술법으로 펼친 자성영역(自省靈域)이 성공한 건 꽤나 고무적이다.
솔직히 말해서 반쯤은 도박이었으니까.
뭐, 그만큼 확실하게 이미지가 잡혔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백유한테 감사해야겠어.
벼락을 털어 내며, 설천위는 현열혈귀를 바라봤다.
몇 번이나 벼락이 꽂혔는데도 그 크기는 별로 줄지 않았다.
‘역시 이런 공격으로는 무리인가.’
압도적인 화력이 필요했다.
귀령단주가 적을 속박해 준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속박된 놈을 확실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공격이 필요했다.
이 뇌전도 좋지만…….
“후우, 조금 뒤로 미루지.”
발밑까지 솟구친 촉수를 벼락으로 떨어트린 설천위는 저릿저릿한 팔을 억지로 움직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일단 통구이로 만드는 걸 목표로 삼아 볼까.”
그의 손에 잡히지 않은 벼락이 떨어져 현열혈귀의 몸을 꿰뚫었다.
흑천만뢰(黑天萬雷).
그가 떠올리고 재현한 것은 검은 하늘을 물들이는 일만의 벼락.
쿠릉! 쿠르르릉!
하늘이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먹구름이 품은 벼락은 더욱 거세게 일어났다.
뇌전을 휘감은 설천위의 머리카락이 솟구치고, 손에 쥔 벼락을 던지며 설천위는 다른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었다.
또다시 생겨난 벼락이 손에 잡히고.
콰가가각!
망설임 없이 던진다.
던지고 또 던진다.
미친 듯이.
[……백유, 그 아이에게 뭐라 할 입장이 아니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천마의 한숨은 우렛소리에 파묻혀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