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0화
419화-흑천(黑天) (1)
늪으로 변한 바닥에 설천위는 즉시 대응했다.
한쪽 발을 빼내 흑관으로 만든 발판을 딛고 섰다.
동시에 반대쪽 발을 빼고, 저쪽에서 술법을 펼치고 있는 귀령단주에게도 발판을 만들어 줬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조치.
그 와중에 파고드는 송곳은 전부 설천위의 갑옷이 막아 냈다.
자세를 똑바로 한 설천위는 주위의 영력이 옅어지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네.’
상황 파악이 끝난 귀령단주가 공간을 움직여 적의 영력을 흩트려 놓고 있었다.
적의 공격은 약해지고, 이쪽은 움직이는 것이 수월해지는 일석이조의 지원.
짬이란 건 역시 무시할 수 없다니까.
이런 적과 싸우는 건 귀령단주라 할지라도 손에 꼽을 정도의 경험일 텐데.
귀령단주의 적절한 지원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앞으로 걸어갔다.
흑관으로 발판을 만들어 내며, 확실하게 나아간다.
늪에서 올라온 촉수가 이쪽의 발목을 붙잡으려 했지만, 몸에 두른 갑옷에서 피어오른 불꽃이 촉수를 불살라 버렸다.
[소령연화(燒靈燃枠)]의 응용.
화경에 오르기 전에는 사용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는데, 화경에 오르고 나니 응용하는 것도 점점 자연스러워졌다.
영력이 섞인 힘이어서 그런가.
스스로의 재능에 감탄하며 설천위는 도를 들었다.
그리고 내리긋는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죄인의 목을 치듯이.
단숨에 내려 그은 일격이 공간을 가른다.
“노골적이군요.”
수십 개의 송곳을 만들어 내 그 일격을 막아 낸 대주교가 옅은 미소와 함께 설천위를 바라봤다.
“설령 이 연결을 끊는다고 한들 바뀌는 건 없습니다. 아무런 소용도 없는 발악입니다.”
“그랬다면 안 지켰겠지.”
현열혈귀와 대주교를 연결한 촉수가 맥동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촉수는 계속해서 대주교의 몸을 먹어 치우고 있었다.
얼굴은 더 이상 먹어 치우고 있지 않았지만, 몸은 그 침식이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고 있었다.
‘최소 상급 술사.’
그런 술사를 현열혈귀가 먹어 치우면?
봉인이 문제가 아니다.
상급 술사의 혼과 육체가 악귀에게 얼마나 훌륭한 먹이인데.
아마 저 봉인 정도는 단박에 끊어 내고 본체를 일으킬 거다.
‘죽이든가, 끊어 내든가.’
둘 중 하나는 해내야 했다.
차갑게 가라앉은 눈으로 도를 세운 설천위는 대주교를 바라봤다.
상급 술사나 되는 놈이 망설임 없이 제 모든 것을 악귀한테 바치다니.
광신도는 이래서 싫다니까.
말로 하는 도발…… 은 딱히 의미가 없겠군.
대주교쯤 되면 이미 자기 세뇌가 완전히 끝난 놈일 테니까.
무슨 짓을 해도 흔들리지 않을 거다.
죽이자.
이미 빨려 들어간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죽인 다음에 그 혼을 이쪽이 빨아들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대주교쯤이나 되는 인간의 혼을 흡수하면 조금 속이 더부룩해지긴 하겠지만, 현열혈귀의 주둥이로 들어가는 것보단 낫겠지.
생각을 빠르게 정리한 설천위는 바로 움직였다.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에도 적은 계속해서 공격을 해 와 움직임이 멈췄던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방어가 아니라 공격에 나섰다.
턱을 노리고 솟구치는 송곳을 손으로 막아 내고, 앞으로 나아간다.
도(刀)에 깃든 [소령연화(燒靈燃枠)]의 불길이 거세게 타오른다.
다가오는 송곳도, 촉수도.
전부 베어 낸다.
부서진 파편이 갑옷을 두들겼지만, 설천위는 아무런 피해도 없다는 듯 덤덤하게 앞으로 나아갔다.
절대 멈추지 않는 전진.
그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이미 보통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섰다.
두 눈에서 뿜어지는 정광에 대주교는 헛웃음을 삼켰다.
“정녕 말도 안 되는 괴물이로군요.”
이쪽을 똑바로 바라보는 두 눈동자가 마치 혼을 꿰뚫는 것 같다.
존재 자체를 짓누르고, 영혼을 짓밟는 것 같은 눈동자.
저게, 이제 고작 약관에 이른 어린 무인이 품을 수 있는 눈이란 말인가.
‘그분께서 주시하고 있는 이유를 알겠군.’
듣자 하니, 사혈천과 혈사련도 꽤나 심혈을 기울여 지켜보고 있다고 했던가.
고개를 끄덕인 대주교는 술법을 펼쳤다.
송곳이 끝도 없이 생겨나 설천위를 노린다.
동시에 여태까지는 없었던 붉은 사슬이 생겨나 설천위를 휘감았다.
설령 불이라고 한들 타지 않는 금속의 성질을 띤 사슬을 이용한 구속.
조금 정도는 시간을 끌 수 있을…….
“흥.”
설천위의 등 뒤에서 들린 코웃음과 함께 사슬이 무너진다.
눈앞에 있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깜박하고 있던 귀령단주의 힘이다.
‘불리하군요.’
귀령단주와 자신을 비교하면 술사로서의 역량은 거의 동급.
이쪽은 현열혈귀의 힘을 빌리고 있으니 일 대 일이라면 압도적으로 짓누를 수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러지 못한다.
지금 당장 걸어오는 괴물 녀석을 막는 데 온 힘을 쏟기에도 바쁘니까.
현열혈귀가 귀령단주를 맡아 주면 최선이겠지만…….
‘무리군요.’
비틀린 웃음만 흘리며 촉수를 휘두르고 있는 꼴을 보아하니 전혀 도와줄 것 같은 눈치가 아니었다.
하긴, 자신이 현열혈귀의 입장이라도 그럴 테지.
고개를 끄덕인 대주교는 빠르게 포기하고 술법을 펼쳤다.
속박 계열의 술법은 귀령단주가 해제해 버린다.
애초에 설천위가 상대라면 그리 길게 붙잡고 있는 것도 힘들 테니 차라리 공격을 퍼붓는 게 낫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끌기 위해선 그게 낫다.
대주교는 가진 영력을 끌어올려 미친 듯이 송곳을 만들어 냈다.
저쪽이 영력을 뿜어내 이쪽의 영력을 흩트려 놓았기에 위력이 감소했지만, 반대로 말하면 이쪽이 영력을 더 때려 박으면 부족한 위력을 보완할 수 있다는 소리다.
“흠.”
강도가 증가한 송곳에 드디어 설천위의 걸음이 멈췄다.
망설임 없이 방 안으로 들어오던 움직임을 막아 내는 데 성공했지만, 대주교는 방심하지 않았다.
‘이유가 있을 거다.’
상대는 고위 술사이면서도 화경에 오른 무인.
고작해야 스무 걸음 정도의 넓이를 가진 이 지하실을 단박에 주파하는 것 정도는 쉬운 일일 터.
그런데도 이쪽이 공격할 기회를 주기라도 하는 듯 천천히 접근해 왔다.
분명 노리는 것이 있는 행동이다.
눈을 가늘게 뜬 대주교는 주위로 끊임없이 영력을 뿜어냈다.
낭비하는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지금은 효율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럴 여유도 없었고.
영력을 뿌리며 최대한 경계를 끌어올린 대주교는 계속해서 송곳을 만들어 설천위를 공격했다.
앞으로 조금.
조금만 더 시간을 끌면…….
“대충 이 정도인가.”
순간,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대주교는 눈을 부릅떴다.
설천위가 도(刀)를 쥔 채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것은 여유.
그리고.
“……언제?”
어느새 베인 한쪽 팔이 땅에 떨어진다.
“혹시나 해서 천천히 움직였는데, 당신 진짜 여기에 혼자 있네?”
대놓고 모습을 드러내기에 숨겨 둔 한 수가 있나 싶어 천천히 움직였는데…….
정말로 혼자 있을 줄이야.
아니, 현열혈귀가 있으니 혼자는 아니지만.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군.”
고작해야 현열혈귀와 융합한 것만으로 쓰러트릴 수 있다고 생각한 건가?
너무 얕보인 것 같은데.
어깨를 으쓱이며, 설천위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다만, 여태까지의 일보(一步)와는 달랐다.
[섬뢰풍영보(閃雷風影步)]
천마조차 인정한 속도와 은밀함을 품은 경신법이 설천위의 몸을 앞으로 쭉 밀어낸다.
술사인 대주교는 제대로 읽어 내는 것조차 불가능한 속도와 자연스러움.
“이렇게 갇힌 공간에서 술사가 무인 앞에 나서다니, 너무 간이 배 밖으로 나왔는데.”
대주교의 심장에 도를 박아 넣으며, 설천위는 담담하게 도를 비틀었다.
“큭, 무인이라니……. 술사가 아닌 겁니까?”
심장이 꿰뚫려 비틀리는 고통 속에서도 대주교는 입꼬리를 비틀며 되물었다.
이미 현열혈귀와의 융화가 거의 끝나서 인간을 반쯤 벗어났기에 가능한 여분의 생명.
그 생명을 이용해 대주교는 설천위를 똑바로 바라봤다.
“설천위. 강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정말 괴물이 됐군요.”
단주급의 강자라는 건 알았지만, 이제는 그 정도 수준으로 판단할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완전히 벽을 넘은 무(武)와 상급의 술사조차 애먹을 정도의 견고한 술(術).
이런 괴물이 대체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니, 대체 왜 몇 년 전까진 그 존재조차 몰랐는지 모르겠지만…….
“하지만, 아직 어리군요.”
이번에는 이쪽의 승리다.
생기가 꺼져 가는 눈으로 설천위를 올려다본 대주교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이제는 말조차 이어 갈 여력이 없어 허물어지는 육체.
그리고.
“물러서라!”
귀령단주의 경고와 함께 설천위의 몸이 벽으로 처박혔다.
“끄윽.”
무너진 벽의 잔해 속에서 몸을 일으킨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몸에 두르고 있던 흑관의 갑주는 그대로였는데도 이 충격이라니.
상상을 초월한 위력에 흔들리는 머리를 짚은 설천위는 똑바로 두 눈을 떴다.
그리고.
[어리석구나.]
단어로만 말하던 놈이 자연스럽게 말한다.
어느새 산산조각이 나 흩어진 사슬의 잔해 위에서 여전히 거꾸로 구체안에 갇혀 있는 놈의 눈이 이쪽을 향한다.
[인간은, 여전히 어리석은 생물이야.]
천천히 팔다리를 펴며, 현열혈귀는 웃었다.
[그렇기에 재미있는 것이지만 말이야.]
천천히 몸이 돌아가 똑바로 선 현열혈귀의 발이 땅을 딛는다.
그 순간.
콰가가가각!
사방에서 솟구친 촉수가 단숨에 지하실의 천장을 꿰뚫고 지상으로 치솟았다.
[천 년 전에도, 지금도 너희는 여전히 어리석고 재미있구나.]
* * *
“꺄하하하!!”
미친 듯이 광소를 터트리는 백유의 손이 철공의 태도(太刀)를 붙잡는다.
이미 몇 번이나 베여 걸레짝처럼 변한 손으로 백유는 망설임 없이 태도를 붙잡았다.
그리고.
쩡!
백유의 손 이상으로 망가졌던 철공의 태도가 허무하리만치 손쉽게 부러졌다.
금속음과 함께 반으로 토막 난 도신이 땅에 떨어지고.
“커헉!”
파고든 백유의 무릎이 철공의 명치를 꿰뚫었다.
가슴뼈가 으스러지고, 척추가 꺾이는 충격에 철공의 입에서 터진 마른기침은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끄윽……!”
“고작해야 잡귀의 하수인 노릇이나 하는 놈치고는 꽤 오래 버텼네.”
무너지는 철공의 머리채를 붙잡아 들어 올린 백유는 웃으며 주먹을 쥐었다.
말은 여유롭게 하고 있지만, 백유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패융의 도움을 받았다곤 하지만, 이전에 전도울과 소준극을 상대로 싸웠다.
힘과 체력을 소모한 상태에서 철공과 싸웠으니 그 싸움이 쉬웠을 리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백유는 홀로 싸웠다.
패융에게 도움을 받은 것은 패기(覇氣)의 증폭뿐.
전투 자체는 오로지 혼자만의 능력으로 치러 냈다.
“그럼 끝내자.”
“네, 년……!”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철공의 안면에 주먹을 내리꽂은 백유는 망설임 없이 손목을 틀었다.
인간을 뛰어넘은 근력에 내공의 힘까지 더해진 주먹은 단단한 철공의 머리를 단숨에 뼈와 고기 조각으로 바꿔 놓았다.
으스러져 형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 철공의 얼굴이 땅에 처박힌다.
철공의 머리를 놓고 뒤를 돈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어느새 전투가 끝나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이거, 내가 가장 늦었군. 미안하게 됐어.”
웃으며 손을 흔드는 백유.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은 이들이 고개를 숙였다.
부상을 입은 자도, 멀쩡한 자도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외쳤다.
가장 앞에 부복한 두 사람 중 하나인 야귀단주가 선창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맹주님을 뵙습니다!”
야귀단주의 선창을 따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외침과 함께 백유는 가장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다른 한 명을 바라봤다.
“어때, 이 정도면 합격인가?”
“훌륭합니다.”
담담한 목소리로 고개를 숙인 혈뇌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백유를 바라봤다.
똑바로 두 눈을 마주한다.
그 안에 담긴 것을 읽어 내며 혈뇌는 단검을 들었다.
“맹을 어지럽힌 속죄로…….”
단숨에 자신의 팔을 잘라 내려는 혈뇌의 단검이 멈췄다.
어느새 혈뇌의 팔을 휘감고 단검을 이로 문 패융이 으르렁거렸다.
“내 밑으로 들어왔으면, 함부로 몸에 손대지 마. 난 내 거에 손대는 거 별로 안 좋아하거든.”
혈뇌의 단검을 손에서 빼낸 백유는 웃으며 혈뇌의 앞에 쪼그려 앉았다.
“그럼, 말해 봐. 우리 대단하신 사파의 지낭께선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
콰가가가강!!
사천맹 전체가 떨릴 정도의 크나큰 충격.
그리고 상당히 먼 거리임이 확실한데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거대한 붉은 무언가.
거기에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기운에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저것도 그 계획에 포함돼 있는 건가?”
화끈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