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9화
418화-미완의 재앙 (4)
가장 강한 봉인이 있는 곳.
영력을 철저하게 가릴 수 있는 조치가 취해져 있는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진즉에 사천맹에 있는 술사들에게 들켰을 테니까.
귀령단주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깨달은 설천위는 거침없이 잔해 위를 걸어 지하로 향했다.
조심스럽게 따라오는 귀령단주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굳이 신경 쓰진 않았다.
아무리 술사라곤 해도 이 정도 잔해 위를 걷지도 못할 정도로 몸치는 아닐 테니까.
단주급이나 되는 인물이 체술을 완전히 소홀히 했을 리가 없다.
“흠.”
지하에 도달하니, 온갖 부적이 붙어 있는 통로가 보였다.
부적이 빼곡하게 붙어 있진 않지만, 부적과 부적 사이의 공간이 그리 넓지 않았다.
꽤나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결계다.
부적이란 것도 나름 법구의 일종인지라 들어가는 재료, 영력, 심력 등에 따라 그 효과가 달라지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복도에 붙은 부적들은 모두 상당한 상품(上品)이다.
재료도 좋은 걸 썼고, 담겨 있는 영력도 상당하다.
그런 좋은 부적들을 써서 복도부터 그 존재를 감추는 봉인이라…….
‘당첨인가.’
등을 돌려 어느새 완전히 내려온 귀령단주를 바라본 설천위는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귀령단주.
역시 능력이 있다.
게임 속에서는 대부분 적으로 만나서 자세한 건 잘 모르지만, 능력이 있다는 건 확실히 알겠다.
‘흑운을 부르는 술법을 좀 알려 줘야겠어.’
내가 없어도 백유가 [흑뢰천역(黑雷闡域)]을 사용할 수 있게.
귀령단주 정도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익히겠지.
이 일이 끝나고 사천맹에 얼마나 머물러야 할지 계산하며, 설천위는 앞으로 걸어갔다.
[으음, 이건…….]
그리고 어느 붉은 문 앞에 도달하자, 천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신들이 할 일은 딱히 없다고 조용히 있던 양반이 갑자기 무슨 일이지?
천마의 반응에 고개를 돌린 건 당연히 설천위만은 아니었다.
“……꽤나 강대한 수호령이구나.”
천마의 그릇을 읽어 낸 귀령단주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말했다.
혼의 크기를 잴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은 단주의 기본 소양.
천마의 강함을 눈치챈 귀령단주가 감탄했지만, 설천위는 딱히 듣고 있지 않았다.
“문제라도 있나요?”
[……아무래도 그놈들의 흔적 같구나.]
그놈들?
고개를 갸웃한 설천위는 아예 천마를 바라봤다.
“그놈들이라면요?”
[연옥(煉獄)의 잡귀들.]
연옥(煉獄).
그 단어를 천마에게서 들을 줄 몰랐던 설천위는 고개를 꺾었다.
“잡귀라고 불릴 만한 녀석들은 연옥에 못 있을 텐데요.”
[그런 놈들을 잡귀라 부르지 않고 뭐라 부르겠느냐?]
마치 연옥이 어떤 곳인지 알고 있다는 듯한 설천위의 대답에도 천마는 웃으며 혀를 찼다.
[위험한 놈들이다. 봉인된 것을 보아하니 어설프게 현신한 것 같지만…….]
그럼에도 재(災)의 악귀다.
천마의 뒷말을 짐작하며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제가 그런 거 신경 쓰면서 달려드는 인간은 아니잖아요.”
웃으며 손을 휘저은 설천위는 거침없이 문을 열었다.
굳건한 육체가 가볍게 철문을 밀어낸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붉은 방이었다.
하나같이, 모든 것이 붉은 방.
[네놈. 위험.]
그 안에서 꿈틀거리는 존재가 일렁이며 이쪽을 노려봤다.
하나뿐인 눈이 번뜩이며 강한 살기를 흘린다.
“생각보다 더 쉽겠는데?”
붉은 구체안에 갇힌 존재는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전신을 사슬로 꽁꽁 싸맨 채 한쪽 눈만을 뜬 채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확실했다.
봉인 당한 상태 그대로다.
그렇기에.
“설천위!”
귀령단주의 외침에 설천위는 즉각 반응했다.
말로는 쉽겠다고 말하면서도 단 한 순간도 방심하지 않았다는 듯.
순식간에 흑관으로 사방을 감싼 설천위는 고개를 틀었다.
흑관을 뚫고 들어온 붉은 송곳에 베인 볼에서 핏방울이 흐른다.
볼을 타고 턱에 닿아 떨어지는 핏방울.
[미미(美味).]
붉은 구체안에서 인간이라면 목이 부러져 죽었을 각도로 머리를 비튼 존재가 웃음을 흘렸다.
숨이 막힐 정도의 영력이 지하실 안을 가득 메운다.
숨을 쉬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듯 빠르게 차오른 영력은 무형의 살의를 품었다.
그리고.
“하.”
찔러 들어온다.
허공에서 생겨난 송곳을 흑관으로 막아 낸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살악(殺握)]을 꺼냈다.
등에서 솟구친 팔은 한 자루의 흑도(黑刀)를 손에 쥐고 휘두르기 시작했다.
날아오는 송곳들을 쳐 낸다.
“이건 생각보다 더한데.”
단순히 의지만으로 만들어 내는 송곳이 흑관을 꿰뚫을 정도라.
생각보다 더 강한 현열혈귀의 능력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조용히 주문을 외우고 있는 귀령단주를 바라봤다.
자신이 방어에 성공한 것을 확인한 순간, 즉시 술법의 준비에 들어가는 대담함.
할 땐 하는 사람이란 말이네.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다시 현열혈귀에게 집중했다.
뭐가 됐든 놈이 해 오는 공격을 막아 내는 게 이쪽의 일이라면 얼마든지 해 줄 수 있다.
딱 봐도 봉인 당한 탓에 이런 공격밖에 못 하는 것 같은데, 그 정도면 얼마든지…….
‘……이상한데.’
흑관에 박힌 송곳을 눈에 담은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현열혈귀의 공격은 이런 형태가 아니었다.
촉수 혹은 늪의 형태로 광범위하게 일대를 쓸어버리는 것이 특징이다.
빙공이나 빙결계 술법이 효과가 좋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고.
촉수는 얼린 다음에 부수면 되고, 늪은 얼려 버리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으니까.
그렇기에 이런 형태의 공격은 없었다.
흑관조차 꿰뚫을 정도의 날카로움과 단단함을 가진 송곳 따위.
현열혈귀의 능력에 없었다.
“미친.”
순간 몸을 돌린 설천위는 이제 막 술법을 완성해 가는 귀령단주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즉시 문을 향해 달렸다.
당황한 귀령단주가 급하게 술법을 취소하고 호통을 치려는 순간.
콰가가가각!
사방에서 솟구친 송곳이 설천위와 귀령단주가 있던 장소를 꿰뚫었다.
아니, 꿰뚫다 못해 빼곡하게 채웠다.
만약 저 안에 있었다면…….
섬뜩한 생각에 혀를 찬 설천위는 즉시 [살악(殺握)]을 휘둘렀다.
흑도가 거침없이 문을 베어 버린다.
깡!
하지만, 들려오는 소리는 절삭음이 아니라 금속이 튕겨 나온 소리였다.
“무리입니다. 완전히 가뒀으니까요.”
안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천천히 몸을 돌린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현열혈귀의 촉수에 몸이 반쯤 먹힌 인간이 웃으며 다가온다.
반 정도 남은 하인 옷.
40대 정도의 나이.
몇 없는 정보로 적의 특징을 떠올린 설천위는 한숨과 함께 상대를 노려봤다.
“대주교냐?”
“대단하군요. 어떻게 아셨죠?”
“이런 미친 짓이 가능한 녀석들은 몇 없으니까.”
현열혈귀와 융합하다니.
얼마나 정신이 나갔으면, 이런 짓까지 한단 말인가.
한숨을 내쉰 설천위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뻗었다.
“다른 놈들이 허락했을 리가 없을 것 같은데.”
“뭐, 그렇죠. 이 봉인은 협력 관계로 유지하던 것이니까요.”
현열혈귀의 제공은 사혈천이.
그 관리는 혈교와 혈사련이 함께 맡았다.
애초에 사천맹을 먹어 치우기 위해 일시적으로 손을 잡았던 관계다.
다른 곳에서는 박 터지게 싸워도 서로가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손을 잡을 수 있는 관계.
그렇게 준비한 계획인데.
“이렇게 협력하고도 계획이 물거품이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죠.”
아랫것들은 잘 모르지만, 사실 혈사련, 혈교, 사혈천의 계획엔 큰 공통점이 있다.
연옥(煉獄).
그들 각자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연옥으로 통하는 통로를 열고 넓힐 필요가 있었다.
물론, 그 끝에 나오는 결과물은 서로 완전히 다르지만.
어쨌든, 그런 공통점을 가졌기에 혈사련과 혈교는 기꺼이 협력했다.
사천맹을 먹어 치우고, 현열혈귀를 키워 연옥을 넓힌다.
사천맹을 먹어 치우는 건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조금의 손해는 있지만, 사천맹은 결국 정파를 자극하고 그 힘을 갉아먹기 위한 도구일 뿐.
누가 손에 쥐고 휘두르든 상관이 없었다.
그렇기에 손을 잡고 여기까지 상황을 끌고 왔던 것인데…….
“저희가 주도권을 쥐고 있었기에 제가 직접 움직였습니다.”
혈사련의 철공이 비무장에 붙잡혀 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여하튼, 주도권은 혈교가 가지고 있었기에 대주교는 직접 현열혈귀에게 접근했다.
애초에 현열혈귀를 데리고 와서 이렇게까지 일을 한 첫 번째 이유가 무엇인가.
그를 완전히 깨워 연옥의 문을 열기 위해서가 아닌가.
그를 제어할 수단까지 확실하게 만들어 두고 움직이고 싶었지만…….
상황이 이렇게 된 이상,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하!”
혼탁해진 대주교의 눈빛에 대충 상황 파악이 끝난 설천위는 자신의 이마를 탁 쳤다.
착각하고 있었던 거다.
이래서 배경 스토리를 제대로 읽어 놨어야 했던 건데.
현열혈귀는 애초에 약해진 적이 없었다.
힘을 키우기 위해 분신을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그저.
그를 제어하려고 피똥 싸는 혈사련과 혈교의 방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분신만으로 놀았던 것뿐이다.
어쩐지 본체가 항상 강하더라.
혀를 찬 설천위는 똑바로 서서 대주교와 현열혈귀를 바라봤다.
시간적으로 융합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터.
그렇다면 기회야 얼마든지 있다.
“아줌마.”
“응. ……아줌마?”
“주변 정리 좀 부탁할게요.”
“그래……. 대체 누가 아줌마야!”
아줌마라는 말에 화내면 아줌마예요.
귀령단주에게 대충 손을 휘저어 준 설천위는 앞으로 걸어갔다.
허공에서 솟구친 송곳을 흑관으로 막아 낸다.
[마치 네 흑관을 보는 것 같구나.]
허공에서 갑자기 생겨난다는 점을 말하는 건가.
천마의 평가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비슷해 보인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비슷한 원리라면.
“이런 느낌인가.”
영력을 마음껏 풀어놓기 시작한 설천위는 담담히 걸어 나갔다.
허공에서 솟구치는 송곳을 흑관이 가로막는다.
쩡!
마치 유리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와 함께 흑관과 송곳이 파편이 되어 흩날린다.
“……괴물이군요.”
“평소에 비슷한 방식으로 써서.”
단숨에 송곳의 핵심을 꿰뚫은 설천위의 모습에 대주교의 얼굴이 굳어졌다.
현열혈귀와 융합해 얻은 압도적인 영력 제어로 만들어 낸 공격이다.
그걸 이리도 간단하게…….
“정말 괴물이로군요.”
“너희한테 듣고 싶은 말은 아닌데.”
손을 휘저으며, 도(刀)를 쥔 설천위는 웃으며 영력을 휘감았다.
흑관이 형태를 바꿔 갑옷이 되고.
설천위가 쥔 도(刀)에 덧씌워져 그 크기를 1.5배로 키운다.
쩡!
허공에서 솟구친 송곳이 갑옷에 막혀 파편이 되어 흩어진다.
“원리만 알면 공략은 어렵지 않지.”
흑관의 방어력이 올라간 것이 아니다.
송곳의 강도가 약해진 거다.
저쪽이 방 안에 퍼트린 영력으로 송곳을 만들어 낸다는 것을 알았으니, 이쪽도 영력을 퍼트려 그 결집을 흐트러트렸다.
간단한 공략이다.
“……진짜 말도 안 되는데.”
뒤에서 귀령단주의 불신 가득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그쪽에 신경 쓸 틈은 없었으니까.
대주교가 현열혈귀와 일체화하며 만들어 낸 공격은 파훼했지만.
[희희(嬉嬉).]
저쪽은 해결되지 않았으니까.
대주교의 옆, 붉은 구체안에 갇힌 현열혈귀가 기이한 웃음을 흘리며 몸을 움직였다.
마치 액체 안에 담겨 있는 것처럼 이리저리 회전하던 몸은 이내 완전히 위아래가 바뀌고서야 멈췄다.
그사이에 몇 번 참격을 날렸지만.
“조급하군요.”
대주교가 만들어 낸 송곳에 전부 막혔다.
나름 날고 기는 강자라 이거지.
한숨과 함께 앞으로 나아간 설천위는 거꾸로 뒤집힌 상태에서도 똑바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현열혈귀와 눈이 마주쳤다.
[네놈. 그릇.]
입꼬리를 비튼 현열혈귀의 목소리와 함께.
철벅.
바닥이 질척이는 늪으로 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