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6화
415화-미완의 재앙 (1)
사천맹 맹주의 자리에 백유가 올라가지 못하면, 게임의 난이도가 크게 올라간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합당한 이유가 없다면 사람들이 납득할 리가 없는데, 모든 게임 유저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도 그럴 것이 납득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백유가 죽고, 사천맹의 정상에 전도울이나 소준극이 올라서는 순간.
절망이 찾아오니까.
순식간에 솟구친 피들이 뭉쳐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천위는 짜증 섞인 얼굴로 귀령단주를 바라봤다.
“확실하다면서요?”
입을 꾹 다문 귀령단주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솔직히 말해서 저걸 어떻게 읽어 내냐고.
사람한테 일일이 나눠서 심어 놓은 걸 어떻게 읽어 낸단 말인가?
하나하나 붙잡고 검사한 것도 아닌데.
“쯧, 그래도 뭐 아직 핵은 안 움직인 것 같네요.”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하늘에서 일렁거리는 존재를 바라봤다.
피로 만들어 낸 슬라임 같은 형체.
꿀렁거리는 형체의 안에는 기이하게 생긴 눈동자가 하나 박혀 있었다.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리고 눈을 치켜떴다.
“뭘 째려봐?”
“왈패냐…….”
참 얕은 설천위의 행동에 고개를 저은 귀령단주는 한숨과 함께 부적을 꺼냈다.
고작 며칠 전에 소식을 접하고 협력하긴 했지만…….
‘능력은 확실해.’
대체 무슨 사술을 부린 건지 은밀하게 움직이던 백유의 세력을 합치고 자신의 술법을 이용해 이곳까지 단숨에 끌어들였다.
마치 모든 것을 읽고 있다는 듯.
판을 짜고 움직였다.
‘혈뇌가 움직이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놀라웠지.’
가장 경계해야 할 혈뇌를 아예 배제한 움직임.
만약, 혈뇌가 정말 칼을 갈고 이쪽을 견제했으면 이런 작전 따위 시작도 못 했을 거다.
혈뇌라면 사전에 모든 가능성을 잘라 냈을 테니까.
‘전도울을 지지하기 시작하고 일 처리가 무뎌졌다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그게 진짜였고, 그걸 믿고 일을 계획하게 될 줄이야.
전혀 상상도 못 했던 일이지.
다만.
‘단순히 무뎌진 건 아닌 것 같군.’
살존의 옆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혈뇌의 두 눈과 마주한 귀령단주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혈뇌가 뭔가 노리는 게 있다면.
‘일단 전력을 아끼는…….’
“차라리 잘됐어.”
귀령단주의 상념을 끊고, 설천위가 손을 휘저었다.
“여기서 전부 지져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어.”
설천위가 손을 뻗은 순간, 하늘이 울렁이기 시작했다.
먹구름이 하늘을 메우고.
작은 섬광이 구름 사이에서 반짝인다.
거대한 굉음은 없었다.
그저.
“……미친.”
하늘이 어둡게 변했을 뿐이다.
허나, 그렇기에 귀령단주는 두 눈을 부릅떴다.
고작 몇 호흡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을 먹구름으로 가득 채운다는 게 말이 된단 말인가?
하늘을, 그리고 날씨를 바꾸는 것이 얼마나 고등 술법인데 이걸 법구나 부적의 도움도 없이 간단하게……!
두 눈을 부릅뜬 귀령단주가 말도 제대로 이어 나가지 못하고 있던 그때.
“이 자식이!”
어느새 자신의 어깨 위에 고개를 내밀고 갸릉거리는 패융의 애교에 설천위가 얼굴을 구겼다.
백유한테 보내 달라고 애교를 부리고 있으니 복잡한 심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다 진짜 뺏기겠어.
한숨과 함께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패융을 보냈다.
일단 이곳은 백유에게 맡길 필요가 있으니까.
어차피 사람이 많아 [암천룡(暗天龍)]은 사용하기도 힘들 테고.
백유에게 보내 주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패융을 백유에게 보낸 설천위는 천천히 하늘을 살폈다.
[네놈. 정답.]
일렁이는 눈동자 밑으로 거품이 일렁이며 입 같은 것이 생겨났다.
아까도 말은 했던 것 같은데, 입은 대체 왜 만드는 거지.
실없는 생각과 함께 설천위는 양팔을 뻗었다.
일단 한번 베어 볼까.
설천위의 등 뒤에서 솟구친 거대한 양팔이 단숨에 서로를 붙잡았다.
그리고.
[흑도(黑刀)]
천천히 벌어지는 손에 생겨난 것은 칠흑의 도(刀).
[소령연화(燒靈燃枠)]
이내 그 도(刀) 위로 피어오르는 칠흑의 불꽃이 검은 꽃잎이 되어 흩날렸다.
“……하.”
그 기이한 광경에 귀령단주는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무식한 무인들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지.
“이런 미친 괴물이 있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귀령단주는 반걸음 물러섰다.
지금은 아군이라는 것을 알아도 도저히 곁에 서 있을 용기가 안 났다.
싸운다면?
‘……한 식경(약 30분) 정도.’
그 이상은 버틸 자신이 없다.
이딴 괴물을 대체 누가 만들었단 말인가?
등과 어깨에서 치솟은 팔은 영력에 기이한 힘을 뭉쳐 만들어 낸 실체를 지닌 술법이다.
일종의 식령이라고 봐도 되는 기술.
거기다 그 팔이 손에 쥔 도(刀).
술법으로 만들어 낸 도(刀)다.
물론, 없진 않다.
술사 중에 영력으로 무기를 만들어 내는 이들이.
함께 조를 짠 무인에게 그 무기를 맡기고 자신은 보조에 전념하는 술사들도 있다.
생각보다 괜찮은 조합이다.
영력을 품은 무기를 손에 쥔 덕에 영체를 보고 만질 수 있게 된 무인은 생각보다 뛰어난 전력이니까.
하지만.
그 어떤 술사도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저런 실체를 만들어 내지 않는다.
만들어 내지 못하는 게 아니다.
못 만드는 술사가 대부분이겠지만, 설령 만들 수 있다고 하더라도 저런 식으로 만들어 내진 않는다.
이유야 간단하다.
더럽게 비효율적이니까.
영력을 뭉치고 실체화하는 것은 상당한 정신력을 요한다.
하물며, 그것을 무기의 형태로 만들 것이라면 반드시 일정 수준 이상의 강도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휘두르는 순간 부서지는, 사용자의 자살을 유도하는 무기가 될 테니까.
그렇기에 일정 이상의 강도를 확보하고,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 저런 병장기를 만드는 술사는 반드시 매개체를 이용한다.
검의 손잡이라든가, 창의 날이라든가 하는 물건들에 술식을 새기고 영력을 쏟아부어 법구화해서 이용한다.
그게 당연한 일인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저렇게 거대하게 만들어 낸다고?
거기다 화강(化罡)?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응?
술사가 무기를 만들어서 본인이 싸운다는 이야기야 들어 본 적 없는 건 아니지만, 화강까지 다룬다는 건 살면서 처음 듣는다고.
너무나 비현실적인 광경에 짜증이 난 귀령단주는 이내 제정신을 되찾았다.
지금 그런 생각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니까.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도(刀)를 휘두르고 있는 설천위가 보였다.
정확히는 그의 등 뒤에 달린 거대한 팔들이 보인 거지만.
아무튼, 정확하게 휘두른 도(刀)는 그대로 피로 만들어진 괴물을 갈랐다.
다만, 대부분 액체 형태를 한 괴이가 그렇듯 순식간에 재생을…….
“……못 하네?”
응.
못 하네.
왜 못 하지?
고개를 드는 의문에 자세히 적을 살핀 귀령단주는 이내 그 원인을 파악했다.
설천위가 도에 휘감은 화강(化罡)이 괴이의 단면을 태우고 있었다.
다만, 끊임없이 재생을 반복하는 중인지 단면에 붙었던 불은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쯧, 역시 무리인가.”
[위험. 긴급.]
일렁이는 괴이의 상태를 살핀 설천위는 혀를 차며 움직였다.
“귀령단주님.”
“……응.”
“본체를 찾아 주세요. 이렇게 움직였다면, 아마 본체도 봉인을 풀었을 겁니다.”
“알겠어.”
고개를 끄덕인 귀령단주의 몸이 공간이 일그러지는 것과 함께 사라졌다.
축지(縮地).
아득한 수준의 고등 술법인 축지를 직접 두 눈으로 살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배우지 않고 쓰는 건 무리겠네.’
수십 년 정도 때려 박으면 가능은 하겠지만, 그건 너무 시간 낭비다.
이 일이 끝나면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뭐, 그건 그렇고.
“하핫!”
패융을 휘감고, 검은 벼락을 쏟아 내며 철공을 몰아붙이는 백유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 오래 안 걸리겠네.”
철공이면, 혈사련의 삼공 중 하나이지만.
고작해야 삼공이다.
노공과 같은 항렬의 무인.
약한 건 아니지만, 지금 백유의 적수가 되기엔 한참 부족한 적이다.
지금 이곳 사천맹에서 해결해야 할 일은 크게 두 가지.
백유가 맹주가 되는 것.
사천맹에 자리 잡은 재(災)를 제거하는 것.
까득.
무려 유예린을 두고 이쪽으로 온 거다.
확실하게 일을 매듭짓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다.
아니, 만족 정도가 아니지.
반드시 매듭짓는다.
사천맹이 개판이 되는 순간, 이곳에 자리 잡은 재(災)는 멸(滅)이 된다.
악귀의 끝판왕. 저 밑의 연옥에 있는 존재들 혹은 저 천상에 있는 선인들과 동급인.
신(神)의 영역에 이른 절망.
그게 탄생하는 것만은 무조건 막아야 했다.
그런 존재가 하나씩 늘어날 때마다 연옥이 열리는 크기는 커지고, 진짜 말도 안 되는 괴물들이 튀어나온다.
강적을 못 잡았더니 더 강한 적이 튀어나오는 미친 똥겜 밸런스.
그게 바로 육도(六道)의 후반부다.
“무조건 막는다.”
다행히 대충 정체 정도는 안다.
상황이 생각보다 더 빠르게 흘러가는 바람에 예상과 다른 부분이 몇 가지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덕에 적이 더 강해지기 전에 이곳에 도달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백유는 웬만해선 이 선발전에 끼지도 못하니까.
전도울이 맹주에 오르고, 정사대전이 시작된다.
백유는 전장을 전전하며 수많은 전공을 세우고 경지를 올린다.
그렇게 되고 난 뒤에야 맹주의 자리를 차지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실패하면 모든 게 날아가지만.
여하튼.
게임의 진행과 달리 압도적인 속도로 강해진 백유 덕에 완전히 허를 찔러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일이 좀 꼬여서 유예린 쪽도 위험하게 됐지만…….
‘그쪽은 뭐……. 그 인간을 믿어야지.’
이쪽에서 날뛰면 오히려 그쪽은 크게 위험할 일이 없다.
그러니 일단 미뤄 두고.
“후우.”
이곳에 도착한 순간부터 사방으로 퍼트리던 영력에 집중했다.
귀령단주가 그랬듯, 하나하나 검사하는 것이 아니라면 사람의 안에 심어진 씨앗을 발견하는 것은 힘들다.
하지만.
“흑사.”
[명을 받듭니다.]
씨앗을 심은 놈들 정도는 찾아낼 수 있다.
흑사를 보낸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모았다.
재(災)를 향한 경계는 이 정도로만 하고.
지금은 일단 눈앞에 있는 일에 집중해야겠지.
완전히 손을 포갠 설천위는 도망치기 시작한 이들을 향해 손끝을 겨눴다.
천구(天拘)를 사람에게 실험해 볼 좋은 기회다.
실체가 있는 종려에게 사용해 보긴 했지만, 역시 산 사람에게 시도하는 건 다른 일이니까.
어느새 다시 보통 수준의 몸으로 돌아와 자신을 치료하고 호위해 주는 이들 사이에 섞인 소준극을 보며 설천위는 천천히 영력을 끌어올렸다.
일단, 가볍게 일구(一拘)부터 사구(四拘) 정도까지만 해 볼까.
전부 통하면, 거기까지만 가도 죽을 것 같은…….
“내 말은 귓구멍으로 들었냐아아아!!”
순간, 천지가 울리는 굉음과 함께 검은 벼락이 된 백유가 단숨에 소준극의 머리 위에 도달했다.
자신의 머리 위에서 들리는 소리에 소준극이 당황해서 고개를 치켜드는 순간.
“너나 나 둘 중 하나가 죽기 전엔 못 나간다고 했지?”
거침없이 손을 뻗은 백유가 그대로 소준극의 머리를 땅에 내리꽂았다.
힘겹게 백유와 싸우다가 허무하게 백유를 놓친 철공의 시선이 허공을 맴돌다가 백유에게 닿았다.
상황 파악을 못 하고 당황하는 소준극의 호위들을 말 그대로 숯덩이로 지져 버린 백유는 소준극의 머리채를 붙잡고 들어 올렸다.
“이런 순간에 도망치지 말라고. 사형, 응? 끝을 봐야지?”
미소가 섞인 얼굴로 피투성이가 된 소준극의 뺨을 톡톡 두들긴 백유는 그대로 소준극의 머리를 내리찍었다.
조금 전과는 다른, 파괴적인 힘으로.
산산조각이 난 뼈와 살점, 뇌수가 튀고.
피와 살점이 묻은 발을 털며 일어난 백유는 어깨를 으쓱이며 철공을 바라봤다.
“아, 아저씨 다시 할까?”
해맑게 웃으며 다시 단검을 쥐는 백유.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철공은 중얼거렸다.
“미친년…….”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