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4화
413화-맹주 선발 (7)
순식간이었다.
전도울과 백유의 거친 충돌에 소준극이 얌전히 상황을 지켜보던 일각.
그 일각의 끝 무렵, 그야말로 찰나의 스침과 함께 전도울의 팔이 뜯겨 나갔다.
백유의 몸에는 상처 하나 내지 못하고.
“네년……!”
이를 악문 전도울의 입술 사이로 억눌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팔의 고통.
팔을 잃었다는 상실감.
완벽하게 졌다는 패배감.
온갖 감정과 감각이 뒤엉켜 어떤 감정인지도 제대로 구분하기 힘들 정도였지만.
그런 반면, 사고(思考)는 명료해졌다.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끔찍한 통증은 혈기에 잠식되어 가던 정신을 단박에 일깨웠다.
뜯겨 나간 팔은 물론이고, 피부를 타고 스며드는 뇌기의 고통까지.
냉수에 머리를 푹 담갔다 뺀 것처럼 머릿속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렇기에.
‘……끝났군.’
절망은 거대하게 엄습해 왔다.
숨기고 있던 혈기를 꺼냈음에도 싸움에서 졌다.
심지어 팔을 하나 잃었다.
무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맹주로서의 가치도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까득.
고작.
고작 저딴 어린 계집 때문에……!
“……모든 게, 끝난 건가.”
억눌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독백과 함께 전도울은 고개를 들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백유의 눈은 이미 이쪽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몸을 부풀리고 경계를 끌어올린 소준극을 향하고 있었다.
‘계획했던 건가.’
이쪽의 정치적 중심은 자신이다.
소준극은 어디까지나 협력자의 형태.
자신이 무너진 순간, 이쪽의 정치적 기둥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쪽의 세력은 빠져나갈 것이고, 백유는 새로운 세력을 얻을 것이다.
설령 소준극이 이곳에서 백유와 동수를 이루고 물러선다고 할지라도.
이미 흐름은 백유를 향해 크게 기울어 버렸다.
최선, 차선, 차악, 최악 중에서도 최악의 경우에 걸려 버린 것이다.
백유가 완전히 자신들을 몰아내고 정치적인 입지를 다질 수 있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다.
냉정하게 가라앉은 머리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해 낸 전도울은 천천히 자신의 팔을 지혈했다.
혈을 누르고, 옷을 찢어 어깨 밑을 묶어서 지혈했다.
이제 자신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소준극!”
살기가 짙게 밴 목소리와 함께 전도울이 땅을 박찼다.
그런 전도울과 눈이 마주친 소준극은 고개를 끄덕이며 호응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백유를 향해 달려든 소준극은 망설임 없이 주먹을 휘둘렀다.
몸을 내던진 전도울의 공격.
그리고 그런 전도울조차 뭉갤 기세로 떨어지는 소준극의 주먹.
정녕 죽음을 각오한 것 같은 두 사람의 협공에 백유를 응원하던 이들은 기겁했다.
“이런, 비겁한!”
“패자가 뻔뻔하게……!”
대주들의 입에서 전도울을 욕하는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전도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니, 사실 듣지도 못했다.
그럴 여유가 없었으니까.
한쪽만 남은 팔로 백유에게 돌진하고 있는데, 그럴 정신이 어디 있겠는가.
끌어올린 혈기가 강기처럼 유형화되어 전도울의 주먹을 감싼다.
사람 따윈 우습게 고기 조각으로 만들어 버릴 일격이 백유의 뒤를 노린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지 않은 백유의 뒷목을 노린다.
그리고 그런 전도울을 향해 백유가 고개를 돌렸다.
당연했다.
아무리 그래도 막거나 피해야 하니까.
전도울의 공격은 화경급 고수라도 무시할 수 없는…….
“이래서 약쟁이들은 싫다니까.”
짜증과 함께 부드럽게 뻗은 손이 단숨에 전도울의 팔을 휘감는다.
그 순간, 어느새 접근한 소준극이 거침없이 주먹을 내리꽂았지만.
“착각만 가득해서 말이야.”
소준극의 주먹을 자연스럽게 피해 낸 백유는 그대로 소준극의 뒤를 점했다.
“자기가 정말로 강해진 줄 알아. 자신이 지금 느끼고 있는 것을 진짜라고 확신해.”
“크윽!”
옆구리를 파고든 일격에 신음을 토해내며 소준극은 몸을 돌렸다.
어떻게든 피해서 허리뼈가 부러지는 참극은 피했지만.
‘대체 언제?’
그런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단순히 빠르다는 것을 넘어 은밀하기까지 한 움직임.
읽어 낼 수가 없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을 인정한 소준극은 전신에 힘을 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방어에 집중해서 기회를 만든다.
“이것 봐. 아직도 착각하고 있잖아.”
몸을 웅크리고 방어에 몰두하는 소준극의 모습에 백유가 고개를 저었다.
“조잡하다니까.”
웅크린 소준극의 팔 위로 백유의 단검이 파고들었다.
가죽을 가르고, 근육을 찢는다.
단숨에 파고든 단검에서 일어나는 검은 벼락에 살 익는 냄새가 퍼졌다.
“크아아아아아!”
만신창이가 된 팔을 휘저으며 달려오는 전도울의 모습에 백유는 어깨를 으쓱였다.
소준극의 팔에 꽂아 넣은 단검을 손에서 놓은 백유는 그대로 양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치 달려오는 전도울을 끌어안아 줄 것처럼 부드럽게.
기이하리만치 자비로운 미소와 함께.
뿌득!
달려오는 전도울의 목을 돌려 버렸다.
대체 언제, 어떻게.
몸을 가린 팔 사이로 희미하게 보인 백유의 손놀림에 소준극은 이를 악물었다.
대체.
“대체 무슨 짓을 한 것이냐……!”
어찌 이럴 수 있단 말인가.
고작해야 이제 막 화경에 오른 애송이가 어찌……!
이를 악물고 노려보는 소준극의 모습에 백유는 빙긋 웃으며 품에 안은 전도울의 시체를 내려놓았다.
“격의 차이?”
* * *
“……허어.”
단주들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침음과 함께 단주석과 참모석의 공기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경지가 부족한 이들은 일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만 직감했지만.
경지에 오른 이들은 확실하게 상황을 인지했다.
“……말도 안 되는군.”
“벽을 뛰어넘은 수준이 아니란 말인가.”
자신이 상대했더라면, 얼마나 버텼을까?
그런 생각이 절로 떠오를 정도의 압도적인 공방이다.
“저런 조잡한 인형으로 일이 해결될 거라고 생각한 건가~?”
맹주석의 팔걸이에 앉아 부드럽게 미소를 지은 살존이 참모들을 바라봤다.
“응? 말해 봐? 정말 궁금해서 그래. 저런 조잡한 방법으로 어설픈 강기나 만들어 내는 놈들이 정말 맹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백유가 압도적으로 두 사람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간단하다.
두 사람은 빌린 힘을 조잡하게 다뤘고.
백유는 자신의 힘을 완벽하게 다뤘다.
이 단순한 차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격차를 만들어 낸 것이다.
빌린 힘으로 만들어 낸 강기는 조잡하다.
강도도 약하고, 파괴력도 부족하다.
임독양맥이 타동되지 않은 육체는 기의 수발이 더디다.
방어도 느리고, 공격도 느리다.
무학(武學)의 수준이 부족하면 빈틈이 늘어난다.
공격은 어설퍼지고, 방어는 허술해진다.
부족한 힘에 반응도 느리고, 허술하기까지 하다.
싸움이 길어질 이유가 하등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꽤나 긴 시간 동안 백유는 두 사람과 싸웠다.
혹시 모를 함정조차 배제하기 위해.
두 사람의 무공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겪어 읽어 냈다.
이미 한참 우위에 서 있는 백유가 상대의 움직임까지 전부 읽어 내게 된 시점에서.
두 사람의 승리는 불가능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때? 연가의 애송이.”
“……예, 예?”
“네가 생각하기엔 어떠냐고. 정말 네가 지지하는 저 애송이가 다음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나?”
묘하게 웃음기가 섞인 물음에 연주택은 제대로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의 입장상 아니라고 대답해야 하는데, 살존의 면전에 대고 그럴 용기가 없었다.
무엇보다.
‘빌어먹을!’
그렇게 대답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이라도 소준극은 끊어 내고 그쪽에 붙는 것이 맞나?
하지만, 그 백유인데?
이쪽 사업장들이 완전히 개박살이 날 거다.
소준극이 있기에 가능했던 사업이 몇 개인데……!
거기디 그 사업에 동조하던 문파와 가문들의 불만은 또 어떻게…….
연주택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보는 그때.
“그만! 그만! 내가 졌다.”
연주택보다 먼저 현실을 직시한 소준극이 꼬리를 내렸다.
손을 앞으로 뻗고 고개를 낮췄다.
패배를 인정하는 모습.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전도울과 합공까지 해도 이기지 못했는데, 혼자 남은 지금 이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지금은 몸을 빼야 돼.’
이 이상 싸움을 지속했다가 회복 불가능한 치명상을 입어선 안 됐다.
그렇게 되면 진짜로 재기가 불가능해진다.
지금이라면 백유에게 완전히 주도권을 내주긴 해도 어떻게든 뒤에서 움직일 수 있다.
혈뇌도 자신들의 계획이 무너졌으니 이쪽으로 손을 뻗을 터.
두 참모의 도움과 그쪽이 짊어진 세력의 힘을 활용하면 충분히 정치적으로 백유를 고립시킬 수 있다.
밑의 것들이야 백유를 지지하겠지만, 당장 이익이 눈앞에 걸린 문파와 가문은 이쪽에 붙을 터.
그렇게 되면 얼마든지 역전할 수 있다.
“우아아아아아아!!”
“사화! 사화!”
소준극의 패배 선언에 연병장의 공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홀로 맹주의 무공을 이은 제자가 다른 두 제자를 압도적으로 꺾어 버린 것이다.
어찌 흥분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백유가 여태까지 해 온 기행마저 머릿속에서 깨끗이 지워진 대주들이 그녀에게 열광하는 그 순간.
“누구 마음대로 끝내는 거지?”
삐딱하게 고개를 꺾은 백유의 한마디에 침묵이 찾아왔다.
담담한 목소리가 넓은 비무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아니.
목소리가 문제가 아니었다.
“내가 맨 처음 뭐라고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거야?”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눈을 바닥으로 깔게 만드는 압도적인 기세.
경외(敬畏)라.
그것은 공포 속에서 피어나는 공경이다.
환호하던 관중들마저 침묵해 버린 고요 속에서.
백유는 이를 악물고 떨고 있는 소준극을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말했잖아? 생사결이라고.”
섬뜩한 미소와 함께 백유의 몸에서 살기가 섞여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살을 저미는 것 같은, 차갑고 예리한 살기.
관중석에 있는 이들 중 경지가 낮은 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내상을 입을 정도로.
패기(覇氣)를 품은 백유의 살기는 거대한 힘이 되어 모두를 짓눌렀다.
“나는 너희를 인정할 생각이 없어. 그러니 둘 중 하나다.”
한 걸음.
소준극을 향해 다가간다.
“내가 죽거나 너희가 죽거나.”
또 한 걸음.
“내가 다스리는 하늘 아래 피를 빨아먹으며 기생하는 벌레는 필요 없다.”
또 한 걸음.
“내가 다스리는 하늘 아래 인두겁을 쓰고 약자를 짓밟는 짐승은 필요 없다.”
또 한 걸음.
“나는 흑룡에서 태어나 이 검은 대지의 하늘에 서는 자.”
또 한 걸음.
“내가 바로.”
또 한 걸음.
어느새 소준극의 코앞에 도착한 백유가 손을 뻗었다.
굳어 있는 소준극의 목을 백유의 손이 닿았다.
부드럽게, 마치 친구의 어깨를 두들기듯 가볍게 닿은 손이 가죽을 가르고 살점을 쥐어뜯는다.
“끄으으윽!”
소준극의 목을 뜯어낸 백유는 그 살점을 바닥에 떨어트려 짓밟으면서 선언했다.
“사파의 하늘이다.”
* * *
오만하기 그지없는 선언.
그리고 찾아온 무거운 침묵.
백유의 기세에 압도된 일반 대주들은 물론, 단주들과 가주들마저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순간.
“노옴! 아주 오만하구나!!”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비무장을 뒤흔들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호통을 치며 앞으로 나선 연주택이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백유마저 고개를 돌려 연주택을 바라보는 상황.
모두의 시선을 한 몸에 받은 연주택은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곳엔 우리 사파를 지탱하는 수많은 영웅들이 있거늘 감히 아무것도 하지 않은 어린 계집이 하늘을 자칭하는 것이냐!”
호통을 내지르는 연주택의 목소리가 비무장 곳곳으로 울려 퍼졌다.
“무엇들 하는가! 저 오만한 계집의 장난질에 휘둘리기만 할 것인가!!”
하나둘 무기를 들고 일어서는 무인들.
붉게 물든 그들의 눈동자와 같이 붉은 눈동자로 백유를 노려보며 연주택이 입을 열었다.
“지금이 바로 사파의 법도가 바로 설 때다!!”
연주택의 찢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병장기를 쥔 무인들이 백유를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