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3화
412화-맹주 선발 (6)
패기를 깨달은 백유는 여러 가지 시도를 했다.
그중 하나가 흑뢰(黑雷)다.
패기의 성질을 띤 패도적인 뇌기.
강하고 단단하다.
마치 패융과 같은 그 성질에 백유는 꽤나 만족했다.
속도야 뭐, 벼락이니 말할 것도 없고.
상당히 강력한 힘이었기에 백유는 만족했는데.
거기다 설천위의 조언이 곁들어져 새로운 기술을 하나 더 만들어 냈다.
패기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묻는 질문에 설천위가 자신이 사용하는 가장 흉악한 기술 하나를 알려 준 것이다.
설천위가 패기로 낙인을 새기는 기술.
본래는 혼에 악의(惡意)를 새겨 넣는 패악(覇惡)이라는 스킬을 설천위가 응용 발전시킨 기술이다.
단순히 혼에 악의를 새기는 것을 넘어서서 패기를 이용해 이젠 육체의 신경계마저 어그러트리는 기술.
본래의 형태보다 꽤나 발전했기에 설천위는 슬슬 스킬이 변화하거나 새로 생겨야 하는 게 아닌가 여기고 있는, 설천위가 꽤나 애용하는 스킬이다.
그리고 설천위는 패기를 사용하게 된 백유에게 이 낙인의 응용 원리를 가르쳤다.
강력한 심상(心想)과 약간의 영력(靈力) 그리고 패기(覇氣).
그것들을 혼합해 하나의 염(念)을 담아낸 뇌기.
그렇게 만들어진 뇌기(雷氣)는 검고 혼탁했다.
그리고 끈질겼다.
백유가 적의를 품은 대상에게 달라붙어 안으로 파고든다.
설천위에게 들은, 이해하기 쉽지 않은 신경의 개념을 흐트러트리기 위해 움직인다.
피부에 닿는 순간, 그 아래로 파고 들어간 뇌기는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끔찍한 고통을 선사한다.
실제로는 육체에 큰 영향은 없을지라도 그 고통은 숙련된 무인이라고 해도 감당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백유가 직접 자신의 몸으로 확인해 봤으니 그 효과는 확실했다.
그야말로 악의(惡意)로 가득 찬 공격.
적을 죽이는 것에 목표를 두지 않고,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을 목적으로 한 공격.
그렇기에 악뢰(惡雷)다.
맑고 깊이 있는 어둠이 아니라.
질척이고 섬뜩한 어둠을 품은 뇌기.
“짓이겨 주마!”
숨기고 있던 힘으로는 그 악의를 떨쳐 내지 못해 결국 가진 힘을 전부 꺼낸 소준극의 주먹이 쇄도한다.
속도도, 힘도 여태까지와 격이 다른 일격.
스치는 것만으로 살점이 터져 나가고, 뼈가 으스러질 일격이다.
하지만.
“무식해.”
쾅!!
백유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꽂아 넣었다.
자신의 주먹에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소준극의 주먹에 정확하게 자신의 주먹을 때려 박았다.
원래부터 백유가 소준극보다 왜소했고, 이제는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나는 수준인데도.
“하지만 이런 거 싫어하지 않지.”
백유는 한 치도 밀리지 않고 소준극과 주먹을 마주한 채 웃었다.
백유가 허리와 어깨를 튕기자, 소준극 또한 주먹을 거두고 반걸음 물러섰다.
“그렇다면! 하고 싶은 대로 해 주마!”
자세를 다잡고, 무릎을 굽힌 뒤 허리를 살짝 숙인다.
두 다리는 과하지 않게 앞뒤로 약간 벌려서 균형을 잡고.
“흐읍!”
주먹을 휘두른다.
어깨 근육이 백유의 머리만 해진 소준극의 팔 근육이 요동친다.
거대해진 덩치로 자연스럽게 위를 점한 소준극의 주먹은 백유를 향해 말 그대로 내리꽂았다.
그리고 그런 소준극의 주먹을 향해 백유는 망설임 없이 주먹을 쳐올렸다.
서로의 체급 차이를 생각하면 도저히 성사될 것 같지 않은 공방.
심지어 백유가 아래에 위치해 위로 올려 치는 구도다.
힘의 차이는 물론이고, 자세의 차이마저 소준극의 손을 들어 주는 상황.
그렇기에 백유의 무식한 대응에 몇몇 이들은 혀를 찼다.
전투의 흥분에 휩싸여 멍청한 선택을 했다.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는 광경이니까.
“하핫!”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불식시키듯 백유의 주먹은 성공적으로 소준극을 저지했다.
아니, 저지하는 것을 넘어.
“끄으읍!”
밀어냈다.
내리꽂은 주먹이 어색한 자세로 올라오기 시작하자, 소준극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 동시에.
‘괴물 년……!’
깨달았다.
소준극도 무(武)의 끝을 바라보고 있는 무인이다.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정도는 충분히 눈치챌 수 있었다.
이쪽의 주먹이 내리꽂히는 순간, 어마어마한 속도로 치솟은 백유의 주먹이 이쪽의 주먹을 가로막았다.
온전히 힘이 다 실리기 전에, 그리고 어깨와 팔이 제대로 펴지기도 전에 이쪽의 주먹이 가로막힌 것이다.
당연히 이쪽의 힘은 크게 손실되고, 백유의 힘은 온전히 전해진다.
심후한 내공을 가진 화경급 이상의 경지에서 이런 사소한 차이는 힘의 우열을 가리기에 충분한 요소다.
조금 전에 느꼈던 불안이 이제 확신으로 바뀐 소준극은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거뒀다.
이쪽의 살을 갉아먹는 것 같은 뇌기에 본능적으로 감추었던 힘을 꺼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곳에서 무조건 결착을 지을 필요는 없었다.
‘흑수단주를 쓰러트렸다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군.’
그렇다면 더더욱 무리해서 싸울 필요가 없었다.
보고로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기에 충분히 할 만하다고 생각했지만, 역시 흑수단주는 요행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는 강자였다.
이 정도의 실력이라면 제대로 붙으면 승률이 고작 5할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 낮은 확률에 목숨을 걸 정도로 소준극은 도박을 좋아하진 않았다.
일단 여기선 적당하게 압박하고 넘어가자.
저 머저리 같은 전도울도 숨기고 있던 패를 꺼냈으니 마냥 손해는 아니었다.
심지어.
‘혈공이라……. 머저리 놈.’
전도울이 숨기고 있던 패가 무엇인지 확인한 소준극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혈교(血敎)는 사파 내에서도 인식이 안 좋다.
이유야 간단하다.
전대 맹주가 혈교를 매우 혐오했기 때문이다.
상당히 많은 사파들이 암암리에 하던 인신매매를 틀어막고, 마약 유통을 막은 것이 혈교를 싫어해서라는 게 정설일 정도니까.
당연히 권력을 쥐고 혈교를 좋은 거래 상대로 보는 가문이나 문파와 달리, 사천맹의 일반 무인들에게 혈교는 인식이 안 좋았다.
그 외의 일반적인 사파 문파에서도 혈교를 혐오하는 정서가 깔려 있었다.
그런 혈교의 무공을 익힌 증거나 마찬가지인 혈기를 풍기고 있으니 전도울의 정치적 생명에 큰 타격을 입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마 자신을 확실하게 짓밟을 수 있는 순간에 사용할 생각이었겠지만…….
그것에 실패한 이상, 우위는 이제 자신의 것이다.
입꼬리를 올린 소준극은 은근슬쩍 백유는 전도울 쪽으로 유도했다.
이득을 본 건 본 것이고, 전도울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보는 것도 중요했다.
혈기를 쓴다는 것을 알아도 실제 실력을 몰라서 당하면 그것만큼 어이없는 일도 없을 테니까.
백유의 등장으로 일이 복잡하게 바뀌었으니 최대한 이용해 먹어야 했다.
전도울 쪽으로 백유를 몰아붙이며, 소준극이 머릿속 계산을 끝낸 순간.
“참 주제를 모르네.”
심드렁한 백유의 목소리와 함께 소준극은 두 눈을 부릅떴다.
어깨에 박힌 단검에서 뇌기가 흘러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대체 언제?
“그 여자만큼 암경(暗勁)을 잘 쓰는 건 아니지만, 기본 가락이란 게 있거든. 그렇게 한눈을 팔면 안 되지?”
장난스럽게 웃으며 거리를 벌린 백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전도울과 마주했다.
“그렇지?”
까득.
붉게 충혈된 눈.
부들부들 떨리는 턱과 손.
얼마나 갈아 대던지 몇 걸음 떨어진 백유에게까지 들릴 정도로 거친 잇소리.
살기를 감추지 않는 거친 기세.
보는 것만으로 섬뜩한 전도울의 두 눈동자와 눈을 마주친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혈풍과 흑뢰가 만신창이가 된 비무대를 완전히 가루로 만들기 시작했다.
* * *
“후우……. 춥군요.”
빙산의 주위.
치열한 전투 끝에 이곳까지 몰린 유예린은 상처투성이의 단원들을 바라봤다.
거듭되는 전투로 지쳐 가는 것이 눈에 훤히 보인다.
그리고 그런 단원들 사이에서 어느새 자연스럽게 붙어 온기를 나누고 있는 이들이 보였다.
“아으, 이러다 얼어 죽는 게 먼저가 아닌가 싶네요.”
후회가 가득한 목소리로 한탄하는 여인, 여미려에게 다가간 유예린은 조용히 그녀의 곁에 앉았다.
“이쯤 되면 슬슬 말해 줄 때도 되지 않았나요?”
“……어떤걸요?”
“우리가 버텨야 하는 시간이요.”
백유의 행적을 모른다는 듯 말했던 여미려이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사화의 지낭(智囊)이 감추고 있던 것을 슬슬 풀어놓아야 할 때인 것 같은데요.”
사화(邪花)의 지낭(智囊).
학관을 졸업하고 막무가내로 같은 사파를 사냥하고 다니던 백유가 최근까지도 사파의 적이 되지 않았던 이유.
단순히 맹주의 제자라서가 아니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이가 끊임없이 정보를 만들고, 소문을 퍼트려 여론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그럴 만했다.’ 혹은 ‘뭐, 상관없지 않나?’
이런 식의 평가와 생각이 퍼지도록 끊임없이 움직인 이들이 있었다.
유예린은 그것을 만들어 낸 이가 바로 여미려라고 확신했다.
몇 가지 정보 그리고 설천위에게서 얻은 정보를 토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이 막무가내나 다름없는 계획을 세웠고, 합류를 허락했다.
여태까지는 일부러 알면서도 눈감아 줬지만.
“우리라고 해서 여기에서 무한정 버틸 순 없어요.”
상황이 바뀌었다.
적들은 왠지 모르겠지만 빙산 쪽으론 일정 거리 이상 접근하지 않아서 이렇게 휴식을 취할 수 있지만, 이쪽을 노리는 적들의 숫자가 상당했다.
고작 백 명 남짓한 숫자로 뚫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뚫는 것이야 가능하겠지만, 일부의 고수만 빠져나가고 나머지는 전부 발이 묶여 죽고 말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냉기 속에서 무한정 버티며 죽음을 기다릴 수도 없는 노릇.
상황에 따라서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포위망을 뚫어야 할 것이다.
그래.
“상황에 따라서 다르겠지만요.”
“……하아.”
유예린의 잔잔한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내쉰 여미려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봤다.
별이 촘촘히 박힌 밤하늘.
“뒤가 없는 대장을 따르면 무슨 능력이 느는지 아시나요?”
“음, 그건 잘 모르겠군요.”
저는 뒤가 없는 대장 역할이라.
뒷말을 가볍게 삼킨 유예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뼈가 시릴 정도의 냉기 속에서도 잔잔한 미소를 유지하고 있는 유예린의 모습에 여미려는 고개를 저었다.
“우리 대장님은 어떻게 연적도 강하…….”
“거기까지.”
부드럽게 여미려의 입술에 손을 올린 유예린이 빙긋 웃었다.
“지금은 그 얘기를 듣고 싶지 않군요.”
“……죄송.”
“자, 본론으로 돌아가죠.”
여미려의 사죄조차 중간에 끊어 버린 유예린은 묘하게 날카로워진 눈빛으로 웃었다.
“……뒤가 없는 대장을 따르다 보면 뒤처리를 하는 능력이 늘어나죠. 눈치도 늘고요.”
“과연, 그래서요?”
“움직일 녀석들은 벌써 움직였습니다.”
“호오.”
움직였다?
“이쪽은 미끼인가요?”
“저, 나름 2인자거든요.”
“그렇군요.”
이쪽은 휘말린 건가요.
과연 사파답다고 생각한 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애초에 이쪽의 목적도 비슷했으니 딱히 탓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정보의 흐름이 매우 빠른가 보군요?”
“약간의 정보로 거의 추측해서 움직이고 있는 거죠.”
어깨를 으쓱인 여미려는 작게 웃었다.
“우리 대장은 생각보다 하는 짓이 뻔하거든요.”
일관되게 미친 방향으로 흘러가지.
* * *
“캬하하하!!”
거칠기 그지없는 웃음소리와 함께 백유가 볼에 튄 피를 닦아 냈다.
“생각보다 더 시시하네, 응? 사형? 좀 더 분발해 보지 않을래?”
조롱이 가득한 목소리.
그리고.
까득! 까득!
이제는 이가 부러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를 악문 전도울의 두 눈에 귀기가 일렁였다.
그리고 경쟁자의 치욕에 웃어야 할 소준극마저 웃음기 없는 무표정으로 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백유의 흑뢰와 전도울의 혈풍이 뒤엉키고 고작 일각.
“이런 시시한 선물로는 이 우제(愚弟)는 만족 못 한다니까, 사형?”
팔꿈치부터 뜯어낸 전도울의 팔이 먼지투성이의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