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2화
411화-맹주 선발 (5)
“오오오! 맹주님의 무공이다!!”
“뇌성(雷聲)이 울려 퍼진다!!”
백유가 위천공(危天功)을 행하는 것과 동시에 울려 퍼지는 우렛소리에 관중들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최근 몇 년간 본 적 없었던 맹주의 독문무공이다.
맹주 본인은 이미 신화적 존재가 되어 실제로 무공을 선보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그 제자들은 하나같이 그의 독문무공을 전수 받지 못했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독문무공을 전수 받은 제자 백유는 자신이 만든 작은 대(隊)를 이끌고 기행을 일삼았으니…….
그런데 이제는 기억조차 희미해진 뇌성(雷聲)을 직접 들으니 어찌 가슴이 떨리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맹주의 무공을 직접 보고 들은 적 없던 젊은 대주들의 심장은 크게 벌렁거리고 있었다.
정파의 기세에 밀려 지리멸렬한 사파.
정파가 자신들의 결속을 위해 일부러 남겨 놨다는 소문이 나올 만큼 허울뿐인 사천맹과 흑룡학관.
거대한 적에게 고개를 돌리고 그저 자기들끼리 제 살 파먹기에만 열중하던 해충들.
그런 해충들을 모든 사파인들이 방치하고 있었다.
아니, 동조하고 있었다.
사파인은 그 본질이 이기적인 인간.
애초에 사파(邪派)라고 불리는 이유가 그들의 무공이 간사(奸邪)하기 때문이다.
거짓으로 사람을 속이고, 때에 따라 그 태도를 바꾸는 인간처럼.
앞에서는 적을 속이고, 자신을 위해서라면 그 누구의 목이라도 물어뜯는 무공을 익힌 인간들이 사파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상대가 비록 악(惡)이라도 웃으며 적극적으로 동조할 수 있는 인간들이 바로 사파란 소리다.
하지만, 그렇기에 사파는 서서히 무너져 갔다.
아니, 무너져 있었다.
그런 사파를, 스스로를 좀먹다 무너져 버린 벌레들을 끌어모은 것이 지금의 맹주다.
스스로 허기졌다고 착각하는 벌레들을 아니, 인간들의 머리를 깨웠다.
물론, 벼락으로 머리를 지져 깨운 것이니 그 과정에서 잿더미가 된 인간들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강력한 무력만으로 바닥을 기던 벌레들을 사람으로 바꾸고, 그들이 설 자리를 만들었다.
그러니 사람으로서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의 흑룡학관이 무림학관과 견줄 수 있을 만큼 이름값을 지니게 된 것도 사천맹이 강해졌기 때문이다.
그 모든 위업을 혼자 이룬 인물이 인정하고 자신의 무공을 전수한 유일한 후계자라니.
어찌 가슴이 떨리지 않겠는가.
저 등 뒤에 서면 혹시 새롭게 적힐 전설의 행렬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젊은이들의 웅심(雄心)이 들끓었다.
그렇기에.
“우리 혈뇌는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할까?”
어느새 침묵으로 가득한 참모석과 단주석을 바라보며 살존은 싱글싱글 웃었다.
그녀의 웃음만으로 연주택은 움찔했고, 단주석의 인물들은 눈치를 봤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그 맹주와 동렬에 선 무인이 바로 살존(殺尊)이다.
아니, 실력이 낮은 이들에겐 맹주보다 더한 공포심을 안겨 주는 존재가 바로 살존이다.
자신보다 강한 이조차 암습으로 죽일 수 있는 것이 살수인데, 살존은 살수이면서 동시에 현경(玄境)에 이른 괴물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자리의 그 누구도 그녀가 뻗는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을 터.
그런 괴물이 웃으며 살기를 흘리고 있으니, 어느 누가 긴장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살수가 살기를 흘린다.
이는 보통 실력이 조잡하다는 증거이지만…….
“백유 님의 실력이 뛰어나서 감탄하고 있었습니다.”
살존의 경우엔 얘기가 다르다.
숨기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숨기지 않는 것이니까.
그런 인물이 노골적으로 살기를 풍기고 있다는 것이 무슨 의미겠는가.
혈뇌의 대답에 단주와 가주들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살존이 백유를 후원하기로 한 이상, 섣부른 발언은…….
“하지만, 부족하군요.”
‘……혈뇌!’
대놓고 어깃장을 놓는 혈뇌의 모습에 몇몇 가주들이 눈을 부릅떴다.
아니, 지금 최대한 비위를 맞춰도 모자랄 판에……!
“흐응? 부족해?”
거봐!
딱 봐도 불편해하는 것 같잖아!
몇몇 가주와 단주들이 불안감으로 입술을 씹는 사이.
혈뇌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돌려 살존을 바라봤다.
“예. 부족합니다. 사천맹주는 절대적인 지휘관입니다. 그렇기에 필요한 역량이란 것이 있습니다.”
단순한 무력으론 안 된다.
그렇게 말하는 혈뇌의 모습에 살존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그냥 무력으로 해결할 거라면 흑수(黑獸), 그 인간이 다음 맹주가 됐겠지.”
흑수단주 기규종.
사람을 잡아먹는 짐승이었던 그를 직접 제압해 사냥개로 길들인 것이 사존이다.
오로지 맹주의 명만을 따르던 사냥개.
“본성이 짐승인 괴물이 사람의 머리 위에 설 순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자리를 비우자 그 본성을 드러낸 짐승은 도저히 사람의 머리 위에 설 존재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참모진은 그를 맹주로 세우지 않았다.
무력은 확실하지만, 그에겐 사람을 아우를 그릇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명성, 자질, 세력. 이 모든 것들이 다음 맹주에게 필요합니다.”
사존(邪尊)이 이 사파의 하늘에서 독존(獨尊)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정녕 홀로 존귀했기 때문이다.
살존이라는, 어둠 속에 숨은 강자를 제외하면 이 사파에서 그에게 덤빌 수 있는 강자는 없었다.
하물며, 그와 견줄 수 있는 정파의 고수들은 헛기침을 하며 자신들의 안방에 틀어박혀 있는 고루한 인간들.
왕성하게 활동하는 사존은 사파에서 홀로 존귀했다.
그렇기에 그에겐 세력이 필요 없었다.
그는 홀로 집단과 맞먹는 괴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백유에겐 부족한 것투성이다.
전란이 없었으니 적아를 가리지 않는 명성이 없었고.
자질은 있을지 모르나, 검증된 능력은 한정적이다.
세력은 두말할 것도 없고.
쥐꼬리만 하게 그녀를 따르는 잡졸들만 있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혈뇌는 그녀를 지지하지 않았다.
그녀를 맹주로 세우길 거부했다.
“그 모든 게 있다면, 우리 혈뇌는 순순히 내 제자를 지지하려나?”
“……불가능합니다.”
불가능하다.
살존의 질문에 잠깐의 침묵 끝에 입을 연 혈뇌는 고개를 저었다.
“고작 두 사형을 꺾은 것은 명성이 될 수 없고, 사람을 이끄는 그릇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세력은 말할 것도 없지요.”
담담하게 살존의 물음을 부정하며 혈뇌는 살존을 바라봤다.
“설령 살궁이 저 아이의 뒤에 선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살궁이 뒤에 선다.
그럼에도 불가능하다는 말.
혈뇌의 그 말에 몇몇 단주와 가주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살궁은 곧 살존이다.
그런데 살존의 면전에서 살궁을 무시하는 언사라니.
살존의 세력 따위는 아무런 이점도 되지 못한다고 선언하는 것이 얼마나…….
살 떨리도록 담담한 혈뇌의 말에 침묵이 냉기처럼 내려앉은 그때.
“꺄하하하! 응, 그래. 살궁만으론 안 되지.”
오히려 웃음을 터트린 살존의 살기가 옅어졌다.
정녕 그 대답에 만족했다는 듯.
“뭐, 우리 살궁이 저 아이의 뒤를 따르기로 한 건 맞지만.”
……만족 안 했나? 화난 건가?
살존의 말에 몇몇 이들이 눈치를 살피던 그때.
“그럼, 일단 하나씩 증명해 볼까?”
히죽 웃은 살존은 점점 더 치열해지고 있는 비무대 위를 바라봤다.
“명성부터 시작하자고.”
* * *
백유가 뇌기를 꺼낸 뒤로 전도울과 소준극은 적극적인 공격을 줄였다.
자칫 잘못했다가 내부로 깊숙이 파고든 상태에서 뇌기에 몸이 굳어 버리면 그야말로 치명적일 테니까.
대신 방법을 바꿨다.
철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압박하는 형태의 연계를 펼쳤다.
둘 다 음지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처지라서 서로의 패를 전부 공개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상대의 무공에 대해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적당히 서로를 방해하지 않는 선에서 펼치는 연계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했다.
‘……숨기고 있군.’
하지만 그렇기에 알 수 있는 것도 있는 법.
소준극과 협공하던 전도울은 여유로운 소준극의 움직임에 그가 실력을 숨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은 소준극도 마찬가지.
소준극 역시 전도울이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둘의 움직임은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했다.
지금 당장은 백유라는 적의 등장으로 협력하고 있지만, 언제 서로의 등을 노릴지 알 수 없는 사이.
섣불리 손에 쥔 패를 들킬 수는 없…….
“뭐 하는 짓들이야?”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와 함께 소준극은 본능적으로 턱을 뒤로 젖혔다.
강렬한 뇌기가 코앞을 스쳐 지나간다.
곧바로 이어서 허리를 숙이고 상체를 틀었다.
그 자리를 스쳐 지나가는 백유의 발차기가 섬뜩하게 공간을 갈랐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생긴 백유의 빈틈을 전도울이 파고들었지만.
“얕아. 머저리.”
소극적인 움직임에서 벗어나지 못한 전도울의 공격은 느리고 무뎠기에 백유는 가볍게 막아 냈다.
그와 동시에 막아 낸 손에서 흘러간 뇌기에 전도울이 깜짝 놀라 거리를 벌렸다.
“하아, 정말 이렇게 시시한 싸움을 원하진 않았는데.”
짜증이 담긴 목소리와 함께 허공에서 빙글 몸을 돌린 백유가 가볍게 땅을 밟았다.
그사이에 자세를 고친 전도울과 소준극이 백유를 노려봤다.
시시해?
자존심을 긁는 말에 부아가 불쑥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 가진 패를 전부 드러낼 순 없었다.
애초에 이 위기야 대충만 넘겨도 충분했으니까.
이번 맹주 선발전은 흐지부지 무산되겠지만, 그다음에 이어지는 정치는 완전히 이쪽의 것이다.
적당히 백유를 제압하기만 하면 충분히…….
“이런 식으로 할 거면 그만하자고.”
귀찮음이 담긴 어조로 백유는 들고 있던 단검을 소매 속으로 감췄다.
“시시해.”
어느새 짜증으로 변한 목소리와 함께.
쿠르릉.
뇌성이 울려 퍼졌다.
여태까지 백유가 힘을 사용할 때 울려 퍼지던 뇌성과는 묘하게 다른.
마치 먼 곳에서 시작된 것 같은 먹먹한 뇌성(雷聲).
무언가가 이상하다고 느낀 순간.
검은 벼락이 두 사람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커헉!”
“크헉!”
본능적으로 자신의 얼굴과 가슴을 양팔로 가렸던 전도울과 소준극이 마른기침을 토해냈다.
저릿저릿한 팔에서 아찔한 고통이 치밀어 오른다.
“아, 귀찮게 왜 막아? 어차피 제대로 싸울 생각도 없으면서.”
허나,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고통에 소리칠 시간조차 주지 않았다.
필사적으로 몸을 틀어 주먹을 휘두른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임을 몸과 본능이 기억하고 움직였다.
콰득!!
주먹에 처박힌 검은 벼락이 일그러진다.
너무나 손쉽게 검은 벼락을 분쇄했으나.
“끄으으윽!!”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검은 벼락의 파편은 마치 생살을 갈가리 찢어 낸 듯한 고통을 선사했다.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 낸 전도울은 고개를 들었다.
갑작스런 초고속 이동.
인지하는 것조차 늦었다는 것은.
‘……살존의 무공!’
단순히 단검술만 전수 받은 게 아닌가……!
이를 악문 전도울은 바로 이어질 다음 공격에 대비했다.
허나.
“뭐야, 싸울 생각이 든 거야?”
“네녀어언……!”
거대한 근육으로 옷을 찢어 버린 소준극이 백유와 대치하고 있었다.
검은 벼락의 고통을 튕겨 내듯 번들거리는 구릿빛 육체.
지금껏 조용하고 소극적인 모습만 보였던 소준극의 몸이라고는 믿기 힘든 근육의 향연.
소준극이 본심을 드러내기로 했음을 깨달은 전도울은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잘하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이득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먼저 인내심이 바닥난 소준극을 비웃으며 전도울이 몸 안으로 파고드는 흑뢰를 밀어내던 순간.
‘……어?’
이상함을 감지한 전도울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그리고 뒤늦게 상황 파악이 끝난 전도울의 모습에 으르렁대며 백유를 압박하던 소준극이 그를 비웃었다.
“이제 상황 파악이 좀 됐나?”
피부를 타고 흐르는 검은 뇌기.
흩어지지도, 지워지지도 않는다.
엄습해 오는 고통에 전도울마저 지금껏 감추고 있던 힘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지 않고선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종류의 고통이었으니까.
“꺄하하! 뭐야? 시시하게 죽을 줄 알았더니, 역시 나름 한가락 하는구나?”
전도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혈기에 입꼬리를 올린 백유는 붙잡고 있던 소준극의 주먹을 놓았다.
“악뢰(惡雷)라고 해. 성질 더럽지?”
검은 뇌기가 탐욕스럽게 적을 향해 송곳니를 박아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