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1화
410화-맹주 선발 (4)
“그럼 잘 가.”
상큼한 미소와 함께 휘둘러진 단검이 전도울의 목을 노린다.
하지만, 얼굴과 목소리만 상쾌할 뿐 노골적이기 그지없는 살기를 품고 있는 일격에 미처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전도울은 조잡하지 않았다.
“네년!”
잠깐 사이에 목이 날아갈 뻔한 전도울은 노골적인 살기를 풍겼다.
살존에게 압도당해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그건 상대가 살존이기에 어찌할 수 없었던 불가항력이었다.
그러나 상대가 백유라면 얘기가 다르다.
다만.
‘강해졌다.’
조금 전의 일격에 담긴 날카로움은 경계해 마땅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런 상황에서 물러설 순 없는 법.
자세를 다잡은 전도울은 뒤로 물러나려는 다리를 억지로 억누르고,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년, 단검술을 익힌 것이냐?”
“응. 대단하지? 살존 스승님 직전 제자야.”
순순히 다른 이의 무공을 배웠다는 것을 인정하는 백유의 모습에 전도울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미친년처럼 날뛰긴 해도 역시 어린 티가 났다.
“스승님 말고 다른 스승님을 모시다니, 역시 맹을 배신한 배신자는 다르구나.”
중요한 것은 다른 스승을 모셨다는 점이다.
지금 보이는 무공은 바로 그 증거.
이것 하나만으로 백유가 가진, 맹주의 제자라는 정당성은 크게 훼손된다.
정치를 할 줄 모르는 어린 계집 따위, 조금만 흔들어 줘도 충분히 농락…….
“배신? 지금 배신이라고 했어?”
일렁이는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전도울은 말문이 막혀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이년……!’
광기.
공허하게 일렁이는 눈동자 속에 깃든 것은 순수할 정도로 일그러진 광기였다.
“스승님이 혈교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손을 잡은 머저리가 지금 나한테 배신이라고 한 거야?”
삐딱하게 고개를 꺾고 그를 향해 걸어오는 백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무형의 기운이 전도울을 짓눌렀다.
손이 떨리고, 다리가 후들거린다.
백유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를 마주한 전도울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벽을 넘었다……!’
이 어린 광녀(狂女)가 벽을 넘었다.
고작해야 방년의 나이로.
그리고 이건 아주 큰 위협이다.
자신들에겐 없고, 백유에게는 있는 것.
바로 무공이다.
무려 사존(邪尊)이라는 별호를 가진 맹주의 무공.
벼락을 품고 그야말로 하늘의 분노를 재현하는 것 같은 그 경천동지의 무공이 전도울과 소준극에게는 없었다.
그 천둥소리와 섬광을 동경해 맹에 투신한 이들이 몇이었던가.
그런 이들에게 맹주의 무공을 이은 제자는 매혹적인 주군일 수밖에 없었다.
다만, 여태까지는 백유에게 강함이 부족했다.
완전히 지리멸렬한 지지 기반을 메울 정도의 강력한 무력.
그게 없었다.
정치에는 전혀 관심도 없는 데다 오히려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내부의 인원들을 짓밟았던 백유다.
그 반반한 얼굴을 이용해 사람을 끌어모아도 부족한 상황에서 스스로를 궁지로 몰아넣는 행보를 보였으니, 사람들이 따를 리가 없었다.
썩은 동아줄도 어느 정도 길이가 있어 보여야 잡는 거지, 짧아서 구름은커녕 나무에도 못 오를 것 같은 동아줄은 아무도 잡지 않는다.
그래서 백유는 완전히 배제돼 있었는데…….
‘위험하다.’
살궁과 살존이라는 거대한 이름을 등에 업고, 본인의 무력마저 화경에 도달했다?
망설이던 이들이 충분히 넘어갈 수 있을 정도의 이점이다.
짧아서 나무에도 걸칠 수 없을 것 같아 보였던 동아줄이 하늘에 닿다 못해 달을 휘감을 정도로 길고 튼튼해져서 돌아온 꼴이다.
본능적으로 정치적 위기감을 직감한 전도울은 이를 악물었다.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최선은 지금 이 자리에서 백유의 약점을 찾아내고 밝혀서 사회적으로 매장시키는 것.
차선은 백유가 이 자리를 휘어잡을 수 없게 확실히 견제하고, 천천히 정치적으로 압박해 몰아내는 것.
차악은 백유가 이곳에서 눈도장을 확실하게 찍고 경쟁자로 부상하는 것.
최악은 백유가 이 자리에서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자신들을 몰아내는 것이다.
빠르게 머리를 굴린 전도울은 곧바로 현실을 직시하고 움직였다.
최선은 고를 순 없었다.
백유의 약점이야 차고 넘치지만, 문제는 그 차고 넘치는 약점을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너무 대놓고 사고를 치고 다녀서 알 만한 사람들은 전부 알고 있다.
그런 건 정치적 약점이 될 수 없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비난거리로 이용할 수야 있겠지만, 무의미한 설전만 이어질 뿐이다.
애초에 백유라는 인물 자체가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고 무식하게 나아가는 고고한 점이 매력인 인간이니까.
그러니, 차선을 고른다.
“사화 백유.”
낮게 가라앉은, 근엄한 목소리로 전도울은 백유의 이름을 불렀다.
“네 죄는 네가 알 것이다. 맹주님의 제자라는 점을 고려해 판결 없는 사형은 없을 테니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그 말에 사람들이 술렁였다.
그러고 보니, 분명히 이 선발전이 시작되기 전에 전도울이 말했다.
사화가 사천맹의 기둥을 쓰러트렸노라고.
흑수(黑獸)라는 사천맹의 기둥이 배신자에게 꺾였노라고.
이 두 말을 이으면, 결과는 간단하게 도출된다.
사화가 흑수단 단주를 죽였다.
그것도 배신이라는 죄를 저지른 사화를 처단하기 위해 나섰던 흑수를.
원래라면 사화는 흑수단주를 죽이지 말고 그의 손에 잡혀서 재판을 받았어야 옳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맹주님의 제자라는 특권 의식에 사로잡히고, 그런 오만을 지탱해 줄 무력까지 갖춰서 맹의 규칙과 법도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무리 사파의 무리라고 하더라도 사천맹은 하나의 조직이다.
그 안에서 규율과 법도가 지켜지지 않는다면, 결코 하나로 뭉쳐질 수 없다.
규율과 법도는 공정해야 하고.
그에 따른 책임 또한 평등하게 져야 한다.
순식간에 여론이 바뀌는 것을 느낀 전도울은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 순순히 양손을 내밀어라.
포박한 뒤 가두고 최대한 여론과 증거를 조작해 그대로 매장해 주…….
“죄는 개뿔.”
“……뭐라?”
“죄는 무슨 죄? 난 떳떳하거든.”
어깨를 으쓱이며, 단검을 순식간에 검지와 엄지 사이에 낀 백유가 웃었다.
“죄는 너희가 많지.”
히죽 웃으며, 묵묵히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소준극과 눈을 마주친 백유는 왼손에도 단검을 꺼냈다.
마치 곡예처럼 나타나는 단검들.
“하지만, 말로 떠드는 시시비비는 우리와는 관계없는 이야기지.”
어느새 단검이 사라진 양손을 흔들며 백유는 싱긋 웃었다.
“그러니, 생사결로 가자.”
“네년, 제정신인 거냐?”
“제정신? 그럼~. 물론 제정신이고말고.”
암, 제정신이고말고.
자신이 제정신이 아니라면 대체 누가 제정신이란 말인가?
“증거가 없을 때, 사파에서 옳은 것은 누구?”
두 눈은 이미 소준극과 전도울을 향하고 있지 않았다.
단주들과 칠가, 아니 이젠 육가(六家)가 되어 버린 이들을 바라본다.
“응? 이런 상황에서 옳은 건 누구야?”
장난스럽게 웃으며 묻는 백유와 두 눈이 정면으로 마주친 노인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생사결이오. 소저.”
“역시! 나이가 많으면 아는 게 많아!”
아이처럼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백유가 다시 뒤를 도는 순간.
“네년!”
어김없이 목을 파고든 공격에 훌쩍 뒤로 물러난 전도울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목에 생긴 얇은 실선에서 피가 한 방울 흘러내린다.
흉악스럽게 일그러진 전도울의 얼굴에서 살기가 흘러넘친다.
“망종이 따로 없구나.”
정치적 상황도, 주위의 시선도 더 이상 신경 쓰지 않는다.
그의 머릿속에 든 것이라고는 자신의 고집뿐.
이런 어린것에게 밀려 대업을 실패한다고?
“오냐. 바라는 대로 해 주마.”
목의 피를 훔쳐 내고, 주먹을 움켜쥔 전도울이 진득한 살기를 흘려보냈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무력으로 짓밟는다.
만약 전투가 지지부진해져서 이쪽이 밀리거나 혹은 압도하지 못하면 차악의 경우가 될 가능성이 크지만.
어차피 최선과 차선 둘 다 이미 글러 먹은 상황이다.
그나마 최악과 차악 사이에서 저울질을 할 수 있는 이 선택이 맞다.
무엇보다.
까드득.
저 짜증 나는 안면을 뭉개 버려야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몸뚱이만큼은 훌륭하니 끌고 가서 노리개로 써 주마.
살기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평소의 냉정한 사고가 불가능해진 전도울이 노골적인 살기와 음심을 풍기는 사이.
상황을 지켜보던 소준극은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하고 있었다.
백유와 전도울이 생사결을 시작하게 된 듯한 상황.
이대로 지켜보자니 전도울로는 불안하고, 개입하자니 역시 명분이…….
“뭐 해?”
고민하던 순간, 자신을 바라보며 묻는 백유와 두 눈이 마주친 소준극은 헛웃음을 흘렸다.
자신이 아무래도 큰 착각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빨리 시작하자. 너희 어차피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애송이들이잖아?”
“이년이……!”
도발.
그와 동시에 전도울이 땅을 박찬다.
이어지는 도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 달려든 전도울의 주먹이 백유의 안면을 노린다.
물론, 전도울이 최후의 이성이 남아서 무기를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애초에 맹주의 제자들은 그 무공을 잇진 못해도 적수공권을 사용하는 맹주를 존경하는 의미에서 전원이 무기를 쓰지 않는 적수공권의 무인이니까.
백유가 단검을 사용한 순간, 전도울이 괜히 무공으로 스승을 배신했다고 몰아가려고 했던 게 아니었다.
그리고 그런 만큼 당연히 전도울도, 소준극도 무기를 쓰지 않았다.
순식간에 파고든 전도울의 주먹을 백유가 피해 내는 순간, 그대로 상체를 밀어 넣으며 전도울은 팔꿈치를 휘둘렀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연스러운 연계.
그 연계를 단검과 팔로 받아 낸 백유는 그대로 몸을 틀어 왼손을 움직였다.
전도울의 급소를 노리고 파고드는 일격.
남은 손을 들어 올린 전도울이 겨우 방어에 성공하는 순간, 어느새 거리를 좁힌 소준극의 발이 백유의 턱 끝을 스친다.
잘못하면 전도울도 휘말릴 정도의 거리와 위력이었지만.
“꺄하! 좋네!”
백유도, 전도울도, 소준극도 그걸 신경 쓰진 않았다.
그저 철저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골라 적을 파괴하려 움직일 뿐.
순식간에 세 사람의 손발이 뒤섞이며 거친 기파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청석을 깔아 만든 비무대가 순식간에 박살이 나 파편이 된 청석 가루가 흩날렸고.
충격의 여파가 관중석까지 미쳐 몇몇 무인들이 직접 내공을 일으켜 힘을 해소해 내기까지 했다.
“허어.”
“대체 언제 이리…….”
그야말로 고절(高絶)하다는 말이 어울리는 공방의 향연.
높은 경지에 오른 체술은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 감탄이 절로 나오는 것이구나.
새로운 사실을 깨달은 대주들이 감탄을 연신 흘리는 사이.
소준극과 전도울의 공격이 착실하게 백유을 압박했다.
한 손으로는 두 손을 감당해 내기 힘들고, 두 손으로는 네 손을 감당해 내기 더욱 힘든 법이다.
아무리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고 할지라도 크게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의 적들을 둘이나 상대하는 건 역시…….
백유의 몸에 조금씩 전도울과 소준극의 공격이 먹히는 것을 깨달은 몇몇 무인들이 나지막이 탄식을 토해 내는 순간.
“꺄하하하하!”
쿠르릉.
백유가 터트린 웃음과 함께 뇌성이 울려 퍼졌다.
마치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 끼기라도 한 것처럼 우렁찬 굉음과 함께.
“큭!”
“네년!”
번뜩이는 섬광에 지져진 전도울과 소준극이 놀라서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근육을 쥐어짜고, 피부를 울게 만드는 전격의 고통이다 보니 반사적으로 물러난 것이다.
자신들이 고통에 져서 물러섰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낀 두 사람이 이를 악무는 모습을 보고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 슬슬 제대로 시작하자고. 피 냄새가 나는 사형들?”
* * *
“흐응.”
뇌성과 함께 본격적으로 생사결을 시작한 백유의 모습을 지켜보던 살존은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좌우를 돌아봤다.
불안감을 감추지 못하는 연주택의 눈동자가 격렬하게 흔들린다.
역시 참모감은 아니다.
고개를 돌리니 조용히 가라앉은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도백이 보였다.
저쪽은 좀 쓸 만해 보이네.
만족스러운 모습에 고개를 끄덕인 살존은 이번엔 혈뇌를 바라봤다.
아름다운 얼굴을 차가운 가면으로 무장한 혈뇌의 무기질적인 눈빛이 비무대를 응시한다.
전도울을 위하는 마음 따윈 터럭만큼도 보이지 않는 눈빛.
그 눈을 따라가던 살존은 이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아아, 못 이기겠네.”
모두가 비무대 위를 집중하고 있는 이 순간, 혈뇌의 눈동자는 비무장의 한구석으로 향하고 있었다.
백유와 함께 등장했지만, 아무도 시선을 두지 않았던 인물.
검은 가면을 쓴 채 조용히 벽에 기대어 있는 사내의 정체를 혈뇌는 낱낱이 파헤치겠다는 듯 노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