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407화 (407/624)

제407화

406화-빙산 (5)

거대한 빙산의 등장에 유예린마저 검을 멈춘 순간.

솟구친 철백의 일격이 모곡을 밀어냈다.

아슬아슬하게 방어에 성공한 모곡의 몸이 허공을 가르고 땅에 떨어진다.

“부단주.”

그런 모곡을 바라보며 철백은 피투성이의 주먹을 뻗었다.

말을 덧붙이진 않는다.

필요하지 않으니까.

땅을 박찬 철백이 모곡을 향해 뻗은 주먹을 때려 박고.

그 뒤를 유예린이 따른다.

‘합류해야 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합류를 최우선으로 움직이는 게 맞다.

애초에 이쪽이 세운 계획의 중간 마무리는 합류였다.

양쪽으로 사천맹의 시선을 끌어 힘을 분산시킨다는 계획은 이미 끝났다.

저 거대한 빙산에 가둘 만한 대상이라곤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의아한 점은 설가를 상대로 왜 빙산이냐는 것이지만…….

그런 의문은 일단 접어 둘 때다.

지금 중요한 건 ‘왜’가 아니니까.

이유를 따지는 건 그다음이다.

지금 이 상황을 타개할 방법을 떠올리고, 즉시 실행에 옮겨야 한다.

그리고 그 시작은.

“제압할게요!”

“흡!”

모곡을 붙잡는 거다.

사천맹의 단주는 인질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

설령 팔 하나 정도는 잘라 낼지라도.

“겁이 없군.”

유예린의 외침에 다가온 철백의 주먹을 막아 낸 모곡은 헛웃음을 흘렸다.

감히 누가 누굴 제압해?

철컥.

허리춤에 찬 도에 들어간 도가 도집과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카가가각!

거친 쇳소리가 울려 퍼진다.

양팔을 교차한 철백의 방어를 모곡의 도가 긁어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도와 팔이 부딪혔는데도 쇳소리가 나는 기이한 상황이지만.

“흐읍!!”

철백도, 모곡도 이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이미 상대의 수준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으니까.

‘그새 더 단단해졌군.’

피부를 베고 근육에 막혔다는 것을 손맛으로 깨달은 모곡은 착실하게 거리를 벌렸다.

당연히 철백이 따라붙었지만, 거기까지다.

이쪽이 마음먹고 거리를 벌리면 철백이라고 할지라도 따라잡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

문제는…….

‘소문대로군.’

소리 소문 없이 파고드는 유예린의 암경(暗勁)이다.

그야말로 암경의 극치라고 해야 할까.

이쪽의 감각을 속이고 파고드는 일격은 죽음에 직면한 무인의 육감이 아니면 피하기 힘들 정도로 은밀했다.

그야말로 마지막의 마지막에 도달해야 겨우 그 존재를 읽어 낼 수 있는 공격.

아무리 은신을 업으로 삼는 섬서유가의 여식이라고 하지만, 이건 확실히 상식을 넘어섰다.

저 나이에 이 정도의 실력이라.

거기다.

‘강기(罡氣)인가.’

언뜻언뜻, 공격 사이사이에 섞인 일격에 강기가 깃들어 있었다.

공격을 쳐 내는 순간, 확실하게 느껴졌으니까.

다만, 그 농도가 옅었다.

아직 불완전한 강기라는 증거.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후, 요즘 어린것들은 참으로 성장이 빠르군.”

목을 노리고 파고든 소검을 쳐 내며 거리를 벌린 모곡은 자세를 다잡고 한숨을 내쉬었다.

“백유도 그렇고, 너희도 그렇고 이것 참……. 늙어 가는 사람으로서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모곡은 도를 쥔 손에 힘을 풀었다.

느슨하게.

최소한의 힘만을 준다.

“뭐, 하지만 너희들은 그나마 낫구나. 백유, 그 계집은 화강(化罡)을 사용했다는 보고가 있었으니.”

팔에서 시작된 탈력(脫力)은 전신으로 퍼져, 몸 전체의 근육을 이완시킨다.

“이 아저씨는 아직 살 만하다고 생각해.”

장난스러운 농담과 함께 팔이 움직인다.

아니, 팔만이 아니었다.

다리, 허리, 등, 어깨, 팔, 손목, 손끝까지.

전신의 모든 것이 채찍이 된 것처럼 부드럽게 움직여 하나의 선을 만들어 낸다.

촤악!

벤다.

순식간에 유예린의 앞을 가로막은 철백의 팔에서 피가 솟구친다.

명백하게 아까 전보다 더욱 날카로워진 공격.

팔에서 올라오는 화끈한 통증과 함께 철백은 거침없이 한 걸음을 앞으로 내디뎠다.

이렇게 갑자기 위력이 강해진 공격은 힘을 모으거나 자세를 고친 경우가 대다수다.

어떤 과정을 취하든 결과는 공격에 더욱 힘을 줬다는 것.

당연히 공격 이후의 방어가 취약해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그만큼 공격에 투자를 했으니까.

그러니 이 틈을 파고들어 적의 여유를 끊어 낼 수 있다면.

‘충분……!’

승산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한 수가 된다.

거침없이 앞으로 뻗은 다리가 땅을 딛고.

그 다리를 축으로 철백의 몸이 나아간다.

힘을 모으는 만큼 후속타는 늦게 나올 것이다.

혹은 이대로 방어에 들어갈 수도 있다.

그러니, 나아가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두 눈을 부릅뜬 철백이 앞으로 나아간 그 순간.

“피해!”

옆에서 파고든 창이 허공을 가르는 선을 잘라 냈다.

강한 충격에 창이 튕겨 나간 자리를 직시한 철백은 자신이 크나큰 착각을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힘을 더해 공격이 경직돼?

후속 공격이 제대로 안 돼?

말도 안 되는 착각이었다.

애초에 상대는 힘을 더 준 적도 없었는데, 결과만 보고 멋대로 착각하다니.

“서 매! 뒤로!”

공격을 포기하고 자세를 바꾼 철백은 망설임 없이 방어에 집중했다.

지금 이대로 적을 향해 파고드는 것은 자신의 역량을 넘어서는 일이다.

강기를 막아 내지 못해 피투성이가 되긴 했지만, 뼈만큼은 베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본능이 경고했다.

지금 이대로 파고들면, 확실하게 잘린다.

뼈가 됐든, 목이 됐든.

철백이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방어에 집중하기 시작하자, 멍한 눈동자로 그를 바라보던 모곡은 그대로 공격을 이어 나갔다.

베고, 또 벤다.

철백을 중심으로 방어를 굳힌 유예린과 서하영의 합격이 딱딱 맞물려 모곡을 몰아붙였다.

‘……무리군.’

그리고 어느 순간, 탈력이 깨진 모곡은 그대로 거리를 벌렸다.

‘둘이면 동수, 셋이면 열세인가.’

보통 부단주 셋 이상은 모여야 겨우 단주와 동수를 이룰 수 있다는 점을 생각했을 때, 이 전력은 확실히 강하다.

웬만한 단주와 맞먹는 부단주들에 그에 버금가는 대주들.

‘무시할 수 없겠군.’

흑룡단에 대한 평가를 크게 올린 모곡은 도를 쥔 손을 풀었다.

탈력이 아니다.

“여기까지 하도록 하지.”

“누가 보내 준다고 했죠?”

모곡을 도발하기 위해 제압 따위를 입에 담았던 유예린이지만, 그게 말도 안 된다는 건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척살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쪽은 셋.

화경에 근접한 자신과 화경의 공격조차 견뎌 낼 수 있는 철백이 있다.

거기다 강기를 쓰지 못할 뿐, 창의 기예만큼은 화경급 고수와도 견줄 수 있는 서하영까지.

상대가 철백처럼 강기가 아니면 뚫지 못하는 외공의 고수가 아니라면, 충분히 해 볼 만한 싸움이다.

‘천위는 사천맹을 잠재적 동맹으로 여기고 있는 것 같지만…….’

누가 뭐래도 사천맹은 명백한 적이다.

전력을 줄일 수 있다면, 확실하게 줄이는 게 좋다.

심지어 적은 지금 혈교 혹은 정체 모를 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단주다.

죽여야 할 이유는 충분했다.

유예린의 눈동자가 서늘한 살기로 일렁이는 순간.

“너무 열 내지 말아 줬으면 하는군. 나는 아직 중립이라서 말이야.”

“……중립이요?”

살의가 정보 수집의 가능성에 밀려 누그러든다.

상대가 무기에서 손을 놓고 입을 연 시점에서 대화할 여지는 충분했다.

“흑수가 죽고, 사천맹은 꽤나 어지러워졌다.”

무려 흑수(黑獸)다.

사천맹 맹주가 오로지 그 힘만을 바라고 자신의 밑에 둔 괴물.

그의 강함은 단주들 사이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다.

혹자는 맹주의 바로 아래에 두기도 할 정도로 강한 노괴.

그런 노괴가 이제 방년의 나이를 맞은 어린 계집에게 져서 그 수급이 떨어졌다.

흑룡단주에게 죽었다고 알려진 백절생사단주(百絶生死團主) 염천과는 경우가 달랐다.

염천은 악명이 높았지만, 그 무력은 중간 정도였으니까.

무엇보다 적의 손에 죽은 것이 아니라 내부의 인물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

정파라는 거대한 적이 있는 상황에서 내분으로 맹 자체가 갈가리 찢어질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맹 전체를 덮쳤다.

사천맹이 흔들리지 않을 수 없었다.

의견이 갈리고, 단주들은 자신이 설 곳을 정해야만 했다.

“전쟁을 바라는 녀석들은 벌써 움직이기 시작했지.”

전쟁을 바라던 단주들은 원래 있어 왔다.

거기다 밑에 있는 대(隊)에서도 전쟁을 바라는 자들이 많았다.

사천맹은 흑룡학관의 독특한 교육 정책 때문에 대(隊)의 규모로 묶여 있는 경우가 많다.

단이 큰 축을 만들어 내고 있지만, 사실 사천맹을 움직이는 진짜 힘은 자잘하게 나뉘어져 있는 대(隊)다.

그런 대의 대주들 중 상당수가 지금 맹주 대리를 맡고 있는 전도울의 의견에 찬동하고 있다.

반대하는 단주들과 대주들은 열세.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상황이다.

“녀석들의 실력이 나쁘지 않다는 건 증명된 것 같군.”

저 멀리 냉기를 뿜어내고 있는 빙산에서 강력한 기파가 느껴진다.

하지만, 조금 전에 느꼈던 것처럼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진 않았다.

확실하게 발이 묶였다는 증거.

“그 북존(北尊)을 막을 능력이 있다면, 동맹으로서의 가치는 충분하겠지.”

감시자로서 이 자리에 와서 지켜본 바로는 확실했다.

동맹을 맺을 가치가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너희를 적으로 돌려야 하는가, 그것이 문제다.”

혈교와 손을 잡는 순간, 무림맹은 완전히 적이 된다.

과연,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가?

모곡의 태도에 대충 상황을 파악한 유예린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이쪽과 협력할 의지가 있다……. 그렇게 해석해도 될까요?”

“아쉽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아니다.”

고개를 저은 모곡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이쪽은 혈교가 왔다.”

이쪽은?

그 말에 담긴 의미를 깨달은 유예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모곡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럼 다음 전장에서 만나지.”

그대로 걸어가 자리를 뜨는 모곡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유예린은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검을 거뒀다.

감각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만, 은신으로 이쪽의 기감(氣感)을 속일 수 있을 정도면 이쪽이 멀쩡하게 살아 있을 리가 없다.

“언니.”

“아무래도 상황이 꽤 복잡하게 흘러가고 있는 모양이야.”

적이 사라지자마자 철백을 앉히고 그의 몸에 약을 바르고 있는 서하영의 모습에 작게 웃은 유예린은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있는 그것을 바라봤다.

여전히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는 거대한 빙산.

‘……확인해야겠어.’

“문제없소.”

상처의 고통 따위 없다는 담담한 목소리로 철백은 유예린을 바라봤다.

“단주가 없는 지금, 유 부단주가 우리의 단주라오.”

따르겠다.

의지가 담긴 그 눈동자에 유예린은 작게 웃었다.

“언제나 말하지만, 말 편하게 해도 된다니까요?”

“임무 중이니 이 정도가 최선이오.”

고개를 젓고 자신의 등을 찰싹찰싹 때리는 서하영의 손길을 참아 내며 철백을 따라 일어섰다.

“다음 명령을.”

철백의 뒤로, 전투의 피로를 참아 내는 부하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킨다.

죽은 이들의 곁에서 눈물을 훔치고 일어서는 이들도 보인다.

아직은 미숙한, 제대로 된 임무도 수행해 본 적 없는 이들.

조금 더 시간을 들여 실력을 쌓게 한 뒤에 이런 무대에 데려오고 싶었다.

그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게 하고 싶었다.

그게 이 단을 만든 단주가 원하는 것이니까.

가슴 절절한 비극보다 심심한 희극을 원하는 그런 사람이니까.

하지만.

“사망자들의 호패를 챙기세요.”

현실은 바라기만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동해야 한다.

알아야 한다.

적이 무엇을 노리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이미 쓰러진 이들의 죽음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들의 죽음을 마냥 위로하고 있어선 안 된다.

“지금부터 저 빙산으로 향합니다. 주위의 경계를 강화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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