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6화
405화-빙산 (4)
보는 것조차 불가능한 일격이 옆구리를 베고 지나간다.
그 와중에도 한 걸음 전진한 철백은 옆구리에서 올라오는 화끈거리는 통증을 느꼈다.
베였다.
아직 근육까지 갈라지진 않았지만, 명백하게 처음보다 더 깊게 베였다.
속도가 빨라지진 않았지만, 베는 위력은 확실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더 깊게 베인 것이 의아하다는 눈빛이군.”
그리고 그런 철백의 마음을 읽어 낸 모곡은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말했을 텐데? 벨 수 있는 것만 베는 겸손한 녀석들의 우두머리라고.”
말하는 와중에도 또 한 번 예기가 철백의 몸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 더 깊어진 상처에서 피가 배어 나온다.
“나무를 베는 법을 아나?”
뜬금없는 물음에 철백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도끼로 쪼개는 방법이 가장 흔하지.”
“알고 있군. 단단한 것을 벨 때는 대체로 다 비슷한 방법을 쓰는 편이지.”
또 한 번.
이번엔 팔뚝이 베인 철백은 그 충격을 털어 내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이쪽이 이 보 접근하면 저쪽에선 일 보 후퇴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나아가다 보면 잡을 수 있고, 자신이 할 수 있는 방식은 이것밖에 없는데.
한 점 흔들림도 없는 눈으로 다가오는 철백을 보며 모곡은 웃었다.
“애송이, 너처럼 대쪽 같은 놈들도 마찬가지지.”
한 번에 벨 수 없다.
인간의 뼈는 단단하다.
외공을 성실하게 단련한 무인일수록 근육은 질기고 뼈는 단단하다.
무인 중에 발도술을 익힌 이들이 적은 이유다.
조금이라도 제어에 실패해 잘못 휘둘렀다가 검이 뼈나 근육에 박히면 그대로 전력이 절반 이하로 급감한다.
남들은 검을 뽑은 상태로 싸우는 것을 연습할 때, 발도술은 도를 집어넣은 상태로 싸우는 것을 연습하니까.
같은 실력이라면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그래서 보통 발도술을 연습하는 무인들은 완벽한 일도(一刀)를 추구한다.
단 한 번의 휘두름만으로 모든 것을 벨 수 있는 참(斬)의 극(極)을 추구한다.
하지만, 모곡이 익히 도법은 달랐다.
발도술을 핵심으로 가져가되, 일격에 집착하지 않았다.
베기 힘든 것은 이 세상에 넘쳐난다.
단단한 물건이라면, 단단한 인간이라면 셀 수도 없이 많다.
전설에 나오는 천잠사로 만든 옷을 입은 무인을 만나 한 번에 베지 못하면 죽을 건가?
그럴 바엔 몇 번이고 도를 휘둘러 베는 것이 낫지 않은가?
그렇기에 만들어진 것이 모곡이 익힌 도법이다.
어중간하다고, 쓸모없다고 멸시받던 도법이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베면 어떤 놈들이든 결국 쓰러지더군.”
마치 천년 묵은 고송(古松)이 쓰러지듯 말이야.
만 번의 하늘을 본 고송일지라도 백 번의 칼질을 이기진 못한다.
그렇게 완성된 도법이다.
[만참천도(萬斬千刀)]
거창하지 않지만, 만 가지를 벨 수 있는 천 번의 칼질이다.
담담하게, 하지만 확실하게 이쪽을 베어 오는 모곡의 공격을 받아 내며 철백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도(刀)다.”
느껴졌다.
일격, 일격에 담긴 집념이.
불필요한 동작을 필요한 동작으로 바꾸기 위한 독기(毒氣)가.
집념과 독기가 섞여 만들어 낸 광기가.
그 광기로 빚어진 강함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상처로부터 올라오는 통증으로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극복해 내겠다.”
지금 이 자리에서 뛰어넘겠다.
아니, 뛰어넘어야 했다.
지금 이곳에 단주급 강자를 상대할 만한 사람은 유예린 하나뿐이다.
그런데 그것도 엄청나게 무리를 해야만 가능한 일.
그다음으로 가능성이 있는 건 내공 없이 무공을 익혀 통상적인 무인의 경지와는 거리가 먼 자신뿐이다.
호흡을 뱉어내며, 철백은 앞으로 나아갔다.
근육을 조이고, 관절을 붙인다.
적이 점차 자신에게 적응해 더 깊고 날카롭게 베어 온다면.
이쪽은 그만큼 더 단단해지면 된다.
상대는 도(刀)를 다루는 무인.
심지어 발도술을 전문으로 익힌 무인이다.
근접한다면, 자신의 사거리 안으로 적을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승산은 충분했다.
두 눈을 부릅뜬 철백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철백을 향해 모곡도 공격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베고, 베고.
걷고, 걷고.
서로 같은 동작만을 반복하는 두 사람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의 충돌은 너무나도 강렬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순식간에 고깃덩어리가 되어 나뒹굴었을 참격이 수백 번 반복됐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거리를 내줬을 돌진이 수백 번 반복되었다.
그리고.
“후우. 철 소협, 미안해요.”
그 팽팽한 균형은 외부의 개입으로 깨졌다.
어느새 적들의 대다수를 제압한 유예린이 철백의 전투에 합류한 것이다.
그녀의 검이 모곡을 노렸다.
당연하게도 모곡은 방어를 위해 도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고.
그로 인해 생겨난 틈을 이용해 철백은 확실하게 전진했다.
순식간에 거리가 좁혀진다.
좁혀지고 좁혀져서.
“후욱, 후욱.”
피가 흐르지 않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무수히 베인 철백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모곡의 앞에 섰다.
주먹이 닿을 거리.
기(氣)를 뿜어내지 못하는 철백이 싸울 수 있는 최적의 거리.
아직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금강호령(金剛皓靈)]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이것 참…….”
그리고 그런 철백의 접근에 모곡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부하들을 꽤 많이 끌고 왔는데, 벌써 손발이 묶인 건가.
새로 결성된 흑룡단의 잡졸들만 있다고 해서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인원 위주로 데려온 건데…….
등 뒤에서 솟구치는 유예린의 공격을 피해 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안면을 노리고 파고드는 철백의 주먹을 발도로 튕겨 낸 모곡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이런 안일함에 그놈도 죽은 거겠지.”
“……그놈?”
“아아, 너희 쪽엔 소식이 아직 안 갔나? 하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막고 있으니까.”
유예린의 의문에 고개를 끄덕인 모곡은 피식 웃었다.
“단주가 죽었다. 흑수단주(黑獸團主)라는 녀석이지.”
“흑수(黑獸) 기규종……!”
“오, 알고 있나? 그럼 이야기가 빠르겠군.”
유예린의 반응에 기껍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모곡은 다시금 자신을 향해 파고드는 철백을 향해 일격을 날리곤 거리를 벌렸다.
방어를 위해 팔을 모은 순간 또 거리가 벌어진 모곡의 모습에 철백은 미간을 찡그렸지만, 일단 정지했다.
유예린이 생각이 있다는 듯 멈춰 서서 모곡을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부단주인 그녀가 전투를 정지했는데, 자신이 무턱대고 밀어붙일 순 없는 노릇 아닌가.
가볍게 호흡을 고르며 유예린의 곁에 선 철백은 언제라도 그녀의 방패가 될 수 있게 준비했다.
대화를 나누는 순간에도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철백의 모습에 피식 웃은 모곡은 어깨를 으쓱였다.
“뭐, 내분에 의해 죽었지. 사화 백유가 흑성이라 불리는 조력자와 함께 흑수단주(黑獸團主)를 죽였다.”
흑수단주(黑獸團主).
그 이름은 정파에도 널리 알려질 정도로 악명이 높았다.
실제로 옛날에 있었던 정사대전에서 활약했던 거마(巨魔)이기도 하고.
사천맹과의 원한 관계를 논할 때 수도 없이 등장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그런 얘기를 갑자기 왜 하시는 거죠?”
“음, 간단해. 흑성이 정파 쪽 인물이라는 정보가 있어서 말이야.”
히죽 웃으며, 모곡은 유예린의 두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흑룡단주, 그가 흑성이라고 하더군.”
사천맹의 단주 입에서 나온, 거의 확신에 가까운 정보.
그 신빙성이야말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다.
그렇기에 유예린은 두 가지 사실을 확신했다.
첫째, 설천위는 살아 있다.
그는 지금 백유와 함께 행동하고 있다.
만약 설천위가 죽어서 그 시체를 확인했다면 정보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 거다.
확신을 가지고 정파를 압박했겠지.
조약 위반으로.
둘째, 그렇기에 설천위는 지금 백유와 함께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맹의 단주를 죽인 흉수를 추적하지도 않고 단주가 이쪽에 와 있다는 것은 그들의 행적을 놓쳐 수색 중이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다.
위치를 알았다면 몇 명의 단주를 보내 확실하게 처리하려고 했겠지.
실제로 무림맹에서도 흉악한 마두가 나오면 단주를 두셋씩 보내기도 하니까.
설천위는 살아 있다.
그런 확신을 얻은 유예린은 안도하는 것과 동시에 긴장했다.
감각을 곤두세우고, 확실하게 주위를 살폈다.
단주를 죽일 수도 있는 강적을 처리하기 위해 두셋의 단주를 보내는 것은 기본이다.
그렇다면, 단주 두셋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죽일 수 있는 괴물을 상대하는 일에 고작 한 명의 단주만 보냈을까?
모곡의 뒤를 노리면서도 끊임없이 경계를 늦추지 않았던 유예린은 잠잠한 주변의 공기에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
“……아무도 없군요.”
“하하! 다른 단주가 있는 걸 경계하고 있었던 건가? 어쩐지 공격이 조금 경직되어 있다 했지.”
웃음을 터진 모곡은 호쾌하게 웃으며 손을 저었다.
“뭐, 당연한 생각이긴 한데 아쉽게도 아니야. 나는 감시 역으로 온 것뿐이니까.”
……감시 역?
단주가 감시해야 할 일이 뭐가 있지?
생각이 이어진 순간, 결과는 빠르게 나왔다.
아까 철백이 상대했던 거인.
명백하게 인간이 아닌 존재.
철백에게 막혔지만, 만약 보통의 무인이라면 쉽게 상대할 수 없는 형태의 강함을 지닌 것이 분명한 괴물.
그리고 괴물을 상대하는 데 괴물을 사용하는 것은 어찌 보면 꽤나 당연한 상식이다.
그것을 깨달은 유예린이 고개를 드는 순간.
“……하?”
유예린의 입에서, 평소라면 절대 나오지 않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 멀리 거대한 산이 보였다.
아니, 산이 아니다.
“……말도 안 돼.”
거대한 얼음덩이.
그야말로 빙산(氷山)이라 불러도 모자라지 않을 거대한 얼음이 숲 한가운데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인지한 순간, 긴장감에 놓치고 있던 미세한 변화를 깨달았다.
‘……추워졌어.’
전투의 흥분으로 끓어올랐던 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다.
빙산의 크기를 가늠하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멀리 떨어진 곳인데.
그곳의 냉기가 여기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말도 안 되는 현상에 유예린조차 감정을 숨기지 못하는 그때.
“흠, 역시…….”
유예린이 보는 곳과 같은 방향을 보던 모곡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이 길이 맞나?”
* * *
혈교의 술사, 요설화는 떨리는 손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잡혀야 할 것이 잡히지 않는다.
아니, 그냥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뿐일지도.
힘겹게 아래로 내린 눈으로 보니 헛된 희망이었다는 듯, 텅 빈 어깨가 보였다.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간 흔적.
거기다 그 상처를 감싼 손은 붉게 물들고 곳곳이 부풀어서 벌벌 떨고 있었다.
동상(凍傷)이 생긴 증거다.
그것도 꽤나 심각하게 얼어붙은 증거.
몇 번이나 봤던 것이니 잘 알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몸이 이런 꼴이 될 거라곤 상상해 본 적도 없었지만.
“괴, 괴물 놈, 드들.”
떨리는 목소리로 힘겹게 고개를 든 요설화는 새하얗게 물든 세상을 바라봤다.
필사적으로 도망쳐서 직접적인 범위에서 벗어나긴 했는데도 이 정도다.
얼음 내부에 갇힌 부하들은 이미 전부 죽은 상태다.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시체들.
그리고 그 한가운데.
눈으로 보기도 힘들 정도로 깊은 얼음 속.
번뜩이는 안광이 이쪽을 향한다.
“하하…….”
그 안광을 마주한 요설화는 털썩 주저앉았다.
축축하게 젖으며 따뜻해진 사타구니가 순식간에 차갑게 얼어붙는 것이 느껴진다.
아니, 느끼지 못했다.
공포에 질려 도저히 제정신을 유지할 수가 없었으니까.
재(災)에 근접한 상급 귀(鬼)를 재료로 수십의 목숨을 때려 박은 술법이다.
저 괴물을 잡기 위해 무려 상급 혈귀까지 미끼가 되어 함께 갇혔다.
……일대를 완전히 얼음에 가둘 정도의 술법인데!
“대체 어떻게 살아 있냐고!!”
저 괴물은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냔 말이다.
거대한 빙산의 내부, 자신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거인의 앞에 선 설주철이 얼음 속에서 일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