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4화
403화-빙산 (2)
“도움이야 줄 수 있지만, 이쪽도 이번엔 피해가 크다.”
설천위의 부탁에 살존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팔을 가리켰다.
“사존이 사라진 틈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는 놈들이다. 분명 무언가 한 수가 있을 거다.”
이번에 언여휘가 데려온 종려처럼 현경급 고수조차 잡을 수 있는 괴이(怪異)가 있다.
사존의 빈자리를 노리고 움직이고 있는 놈들이다.
최소한의 방비조차 안 하고 움직일 리가 없다.
“2참모를 맡고 있는 연가 놈은 머저리이지만, 1참모는 무시할 수 없다.”
혈사련이라는 뒷배를 숨기지도 못하고 겨우 2참모 자리를 꿰찬 연주택은 머저리이지만, 1참모인 혈뇌는 다르다.
꽤나 많은 비밀을 가지고 있고 뒷배로 혈교를 두고 있을 거라는 추측은 있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다.
애초에 연주택과 달리 정말 순수하게 두뇌만으로 자리를 꿰찬 인물이다.
맹주의 신임도 두텁고, 그만큼 권한도 막강하다.
지금 전도울을 지지하고 있는 사파의 세력 중 상당수는 그녀의 영향력을 생각해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자들이다.
물론, 전도울 본인도 능력이 있고 지지층이 두텁다.
사존이 부재중이라곤 하나 괜히 사천맹을 쥐고 흔들고 있는 게 아니었다.
적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 모른다면 섣불리 움직일 수 없다.
더욱이.
“단순히 적을 싹 죽인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니까.”
백유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단순히 적을 죽인다고 해결되는 문제는 아니었다.
사천맹(邪天盟).
이 조직은 무림을 대표하는 양대 조직 중 하나이지만, 그 설립과 유지는 기이할 정도로 치우쳐져 있다.
사존(邪尊).
이 무림에 한 획을 그은 절대자가 홀로 이 거대한 조직을 떠받치고 있는 기둥이 되고 있다.
유명무실한 사파 연합을 진정한 맹(盟)으로 바꾼 사내.
홀로 사파 수장들의 머리를 땅에 처박고 정점에 오른 사내.
이건 정말로 대단한 일이었다.
수틀리면 배신하고, 뒤통수를 거하게 때리는 것이 사파라는 인간들의 특징이다.
괜히 간사한(邪) 무리(派)가 아니다.
어떤 놈이 쳐들어와서 자기 밑으로 들어오라고 이쪽의 머리를 흙구덩이에 처박으면 그 앞에선 비굴하게 웃다가 등 뒤에서 칼을 뽑는 놈들이다.
그런 사파의 무인들을 통합했다는 것.
놈들이 감히 뒤통수를 칠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짓밟고 짓눌렀다는 소리다.
압도적인 공포.
일개인이 만들어 내는 공포가 수많은 인간들의 뇌리에 깊이 박혀 하나의 세력으로 거듭난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사천맹이라는 조직이다.
“뭐, 죽이는 것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긴 하지.”
공포는 죽음에서 나오지만, 죽음이 곧 공포로 이어지진 않는다.
사존에게 무릎을 꿇은 이들은 단순히 죽음을 두려워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아니, 무릎은 죽음이 두려워 꿇었겠지만 그 뒤에 이어진 충성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인간은 상황에 따라서 죽음 정도는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사회적 동물이니까.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든, 자신의 자존심을 위해서든.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이들은 반드시 나오고, 그런 그들을 억누를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다.
압도적인 공포.
경외(敬畏).
사존이란 인물은 절로 이 경외심을 품게 만드는 거인이지만, 그 밑에 있는 제자들은 아니었다.
전도울도, 소준극도 그런 자질을 갖추지 못했다.
그렇기에 지금 사천맹은 이익에 따라 갈라진 상태가 됐다.
즉, 지금의 사천맹은 각자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소리다.
“배때기에 욕망이 그득그득 차오른 놈들은 웬만한 이익이 아니면 코웃음도 안 칠 거다.”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는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웃었다.
“뭐, 그렇다고 피를 빨아먹는 벌레와 합심하고, 남들 고혈이나 빨아먹는 돼지들에게 이익을 제시할 생각은 없어.”
재료는 이미 갖춰졌다.
백수아를 구했고, 그 덕에 살존은 자유로워졌다.
무림맹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북존마저 움직였다.
사천맹에 손을 뻗은 조직은 하나가 아니다.
사존의 무공을 이은 백유를 견제하기 위해 손을 잡았지만, 놈들도 끈끈한 사이는 아니다.
사존을 따르는 무리는 노골적으로 변하는 전도울과 소준극의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다.
화약고는 빵빵하게 차올랐고.
이제 남은 것은.
“거하게 터트리는 일뿐이지.”
입꼬리를 올린 설천위의 눈동자가 비열하게 빛났다.
그리고 그 모습을 턱을 괸 채 지켜보던 백유는 환하게 웃었다.
“천위, 역시 너는 정파보다는 이쪽이 더 어울려.”
* * *
“빌어먹을!”
신여시(新余市).
그곳을 주름잡고 있는 양사문(兩蛇門)의 문주 양국은 부들거리는 몸의 떨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개 같은 놈들이!!”
분노로 떨리는 손이 거칠게 탁자를 후려쳤다.
화를 삭이기 위해 한 행동이지만, 주먹을 타고 올라오는 희미한 통증은 오히려 그의 화를 돋우기만 했다.
“더러운 정파 놈들……!”
갑자기 넘어온 호남설가의 무리가 강서성을 휘젓고 다니기 시작한 지 꽤 시간이 흘렀다.
사천맹 놈들이 막으려 했지만 처참하게 깨졌고, 이쪽에서 모은 병력도 당연하다는 듯 여지없이 깨졌다.
발목을 잡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이쪽의 전력이 와해되어버렸다.
압도적인 강함.
그래, 북존이 직접 움직였으니 그럴 수 있지.
이쪽이 일방적으로 깨지는 것 정도야 얼마든지 감내할 수 있는 문제였다.
놈들은 결국 잠깐 쳐들어왔다가 물러갈 이방인에 지나지 않을 뿐이니까.
정사대전을 일으킬 생각이 아니라면 아무리 북존이라도 물러날 수밖에 없다.
사천맹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아무리 북존이라도 홀로 사천맹 전체를 상대할 순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런데……!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냐!”
이놈들이 작업장을 건들고 있다는 사실이 문제였다.
이쪽에서 운영하는 기루나 도박장을 완전히 때려 부숴 장사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약이나 사람 장사 쪽은 아예 작살을 내고 있었다.
설령 지금 당장 북존이 물러간다고 해도 족히 수년은 허리띠를 졸라매고 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정도로 크나큰 타격을 받았다.
아무리 정파와 사파 간의 분쟁이라고 해도 최소한의 상도덕은 있는 법이거늘……!
이를 악문 양국은 부들거리는 몸의 떨림을 최대한 가라앉혔다.
화만 내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어떻게든 대책을 강구해야만 했다.
다행히 설가는 이쪽만을 노리고 움직이고 있진 않았다.
마치 강서성 전체를 도발하듯 자신들의 발길이 닿는 곳은 전부 건드리고 있었다.
덕분에 이곳 신여 말고도 다른 지역에 있는 사파들도 움직이고 있는 상황이다.
긴밀하게 연락을 주고받으며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고, 사천맹에도 연락을 넣었다.
하나의 절대 고수는 수천의 잡졸이 있어도 죽일 수 없을지 모르지만, 절대 고수 곁에 있는 녀석들은 전부 죽일 수 있다.
독존(獨存)하는 괴짜가 아니라면 주변인들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물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사존께서 부재중인지라 그 제자들이 사천맹을 다스리고 있다고 하지만, 사파의 숫자가 줄어든 것은 아니다.
제아무리 북존이라고 한들, 곳곳에서 모이는 사파의 병력 앞에서는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으리라.
문제는 피해를 최소화하는 거다.
병력이 모이기까지는 어쩔 수 없이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 시간 동안 피해를 최소화해 이후에 있을 경쟁에서 살아남을 기반을 마련하는 것.
그것이 지금 문주로서 양국이 해야 할 최선의 방법이다.
물론, 이번 일에 밑의 것들을 꽤 많이 보낸 탓에 머릿수가 상당히 비어 버렸지만, 그거야 나중에 채우면 될 일이다.
삼류 무사 따위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으니까.
“일단 돈부터 모아야겠군.”
작업장 곳곳에 퍼져 있는 현물과 현금을 모아 두는 게 먼저다.
후에 다시 사업을 시작할 때 필요할 테니까.
그리고 다음은…….
“무, 문주님!”
“뭐냐!”
고민을 이어 나가던 양국은 겁도 없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오는 부하의 모습에 와락 얼굴을 구겼다.
이놈들이 어수선하다고 빠져 가지고, 겁도 없이 문주님의 집무실 문을……!
“무림맹의 병력이 남하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 * *
“하아…….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인가 싶네요.”
“말도 안 되는 계획인 건 맞죠.”
한숨을 푹푹 내쉬는 여미려의 한탄에 고개를 끄덕인 유예린은 주위를 둘러봤다.
흑룡단을 비롯해 무혈 지부에서 자진해서 합류한 무인들까지.
총원 약 백 명.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여도 사파의 권역 내에서는 들킬 수밖에 없는 머릿수다.
그나마 백유의 지배하에 들어간 도시 쪽에서 정보를 흩트려 준 덕에 여기까지 별다른 전투 없이 도달할 수 있었지만…….
‘슬슬 움직이겠지요.’
이쪽의 정보를 파악한 사파가 움직일 때가 됐다.
사천맹이든 무림맹이든 움직이는 수순은 똑같다.
각지에 퍼져 있는 문파 혹은 지부에서 정보를 입수하고, 지원 요청을 한다.
그사이에 움직일 수 있는 병력은 움직여 적들을 가로막고, 최대한 시간을 끈다.
만약 근처 지부로 파견을 나온 맹의 병력이 있으면 지원이 빨리 오고 아니면 족히 열흘은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지금의 경우…….
‘이틀 아니, 사흘 정도인가요.’
한창 사천맹의 촉각이 곤두선 상황이다.
무려 북존이 대놓고 움직이며 강서성을 마구 휘젓고 있으니 당연한 결과다.
어떻게든 북존을 막기 위한 사천맹의 병력이 움직이고 있을 시기.
그런 상황에서 무림맹의 병력이 내려온다면?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혼란에 빠진 적은 취할 수 있는 행동의 폭이 크게 줄어든다.
발작하듯 공격하거나, 협상하려 들거나.
통상 둘 중 하나의 태도를 취하기 마련.
이쪽은 어느 쪽이든 나쁠 게 없었다.
설가는 다른 목표가 있는 것 같지만, 유예린을 비롯한 흑룡단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니까.
설천위의 구출.
말이 구출이지, 자진해서 사파에서 활동하고 있는 정신 나간 단주를 끌고 오는 거다.
흑룡학관에서 좀 놀았다고 자기가 사파인 줄 아나.
‘성격도 사파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
설천위는 기본적으로 악(惡)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선(善)을 추구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악을 혐오하는 만큼 더러운 짓을 일삼는 이들과는 섞이지 못한다.
최근 맹주의 지배력이 약화되며 더욱더 날뛰고 있는 사파 놈들과 설천위가 어울린다?
어림도 없는 소리다.
뭐, 그런 이유로.
사파에 설천위가 들어간 시점에서 피바람이 불 거라고 생각했는데…….
‘……후, 자꾸 어딜 그리 돌아다니는 건지.’
그러다 갑자기 그 행적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
백유와 함께.
혈교가 개입했다는 정보와 함께 백유와 설천위가 죽었다는 소문이 은밀하게 퍼지고 있었다.
사파에선 나름 힘 좀 쓴다는 이들은 거의 다 알 정도이고, 정파에서는 정보에 민감한 이라면 한 번쯤 들어 봤을 법한 수준이지만.
그 소문이 꽤나 신빙성 있다고 여기는 이들도 많았다.
혈교가 지금의 사천맹에 꽤나 공을 들이고 있다는 것은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우리 주군은 어디로 가셨나 모르겠네요.”
“아마 살존의 곁일 겁니다.”
물론, 유예린은 대충 짐작은 하고 있었다.
살존은 자신의 낭군님과 무언가 약조를 맺은 상태였으니까.
설천위가 사파의 영역에서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질 수 있는 가장 유력한 방법은 살존의 도움을 받는 거다.
그리고 지금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는 것은…….
‘살존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거나 혹은 실패했거나.’
최대한 해결한 뒤에 뒷수습하고 있는 중이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일이란 것은 꼭 바라는 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니니, 최소한의 준비를 할 필요가 있었다.
‘살궁은 강서성에 있어.’
정보를 얻는 것은 힘들었지만, 아예 못 구할 정도는 아니었다.
일단 사천맹의 관심을 끌어낸 다음, 적당히 싸우다가 해산한다.
그리고 적들이 안심한 사이에 소수의 인원을 끌고 잠입해 조심스럽게 합류하면…….
[흐음.]
순간, 코를 찌르는 짙은 피 냄새에 유예린은 망설임 없이 손을 휘저었다.
그녀의 손에서 일어난 검기가 전방을 휩쓸고 지나가고.
[나쁘지 않은 제물들이 모였구나.]
인간의 크기를 훌쩍 뛰어넘은 거한이 그녀의 검기를 털어 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