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8화
397화-손휘 (13)
검은 연기를 휘감은 설천위의 일격이 세상을 가른다.
땅이 갈라지고.
거기에 휘말린 아귀들도 덩달아 지하로 떨어진다.
“하핫!”
그 압도적인 위력에 언여휘는 감탄 섞인 웃음과 함께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지금 설천위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자성영역(自省靈域)을 쓰겠다고? 응, 천위? 진심이야?”
전심을 휘감은 검은 연기 속에서 금색의 안광이 번뜩인다.
“자성영역(自省靈域), 그거 뭐 있냐?”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며.
설천위는 도를 늘어트린 채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지.”
영역(靈域)은 이미 몇 번이고 사용해 봤다.
그 안에서 부하들을 훈련시키기도 했으니까.
영역의 사용 자체는 이미 익숙하다.
그 영역(靈域)이 자성영역(自省靈域)으로 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나는 패도(覇道)를 걷는 우자(愚者).”
영역에 반영시킬 의지(意志)와.
“순리를 거스르는 역천(逆天)의 용이다.”
절대적인 확신이다.
[크롸라라라라라라!!]
어느새 설천위의 주위를 벗어나 언여휘가 만들어 낸 자성영역 전체를 가득 채운 패융이 포효한다.
비틀거리는 몸을 흑관(黑棺)으로 감싸고.
도(刀)를 만들었던 변형을 응용해 갑주로 만든다.
육체가 움직이지 않는다면, 의지로 움직여라.
이미 만신창이가 된 육체를 흑관을 이용해 억지로 움직인다.
[크우어어어어어어!!]
좀 전에 있었던 일격의 여파로 날아갔던 종려가 땅을 박차고 날아온다.
이미 망가진 감각은 종려가 왼쪽에서 오는지 오른쪽에서 오는지도 제대로 읽어 내지 못한다.
한 번 영역을 거하게 갈라냈는데도, 아직 그 효과가 사라지지 않았다.
확실히 지옥(地獄)이란 이름을 붙일 만큼 강력한 능력이다.
그렇지만.
“방향을 알 수 없다면, 전부 막으면 되지.”
콰가가가가각!!
패융이 휘두른 꼬리가 용암과 땅을 가르며 설천위를 휘감는다.
설천위를 순식간에 감싼 꼬리가 종려의 주먹을 받아 낸다.
비늘이 우그러들고 꺾이지만.
[크롸라라라라라!]
거친 포효와 함께 휘두른 꼬리는 그대로 종려를 튕겨 냈다.
압도적인 크기에서 나오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힘.
체급조차 뛰어넘는 것이 강자의 역량이라고는 하나, 쉽사리 넘볼 수 없는 차이도 분명 있는 법이다.
종려를 튕겨 낸 꼬리의 틈으로, 설천위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어느새 적을 제대로 보는 것도 쉽지 않았다.
이 지독한 영역에 점점 더 잠식되고 있다는 증거.
“언여휘.”
그렇기에, 설천위는 두 눈을 감고 등 뒤에서 솟구친 양팔을 뻗었다.
“아무리 너라도 분신으로 자성영역(自省靈域)을 사용하는 건 상당한 부담이겠지?”
설령 이게 그녀가 쓸 수 있는 최대한의 기술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자성영역(自省靈域)이라는 정신력의 결정체를 분신으로 사용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닐 거다.
언여휘나 되기에 가능한 기적.
그러나 이 세상에 순수한 기적이란 없다.
특히, 그것이 언여휘가 일으키는 것이라면 더더욱.
[살악(殺握)]에서 나온 힘이 주위로 뻗어나간다.
천천히, 하지만 확실하게.
지옥(地獄)을 밀어낸다.
감각이 정상으로 돌아왔나?
아직 믿을 수 없다.
그렇다면, 믿지 마라.
지옥을 밀어낸 것에 안도하지 마라.
찾아야 할 것은 언여휘가 이곳 어딘가에 숨겨 둔 핵이다.
분신의 능력만으로 살존을 죽일 자성영역(自省靈域)을 만들어 낸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언여휘가 종려를 만질 때마다 보여 주는 압도적인 재생력은 말이 안 된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것.
“찾았다.”
그것이 이 공간의 핵이다.
용암 아래.
땅속에 묻어 놨을 힘의 근원을 찾아낸 설천위는 손을 움직였다.
몸에 붙어 있는 쪽이 아니라, 등에 붙어 있는 쪽으로.
도(刀)를 움켜쥔 [살악(殺握)]이 도의 끝을 땅으로 향한다.
[크어어어!!]
언여휘가 느낀 위기감을 공유하고 있는 종려가 땅을 박차고 달려들었지만, 패융의 꼬리가 다시 한번 종려를 막아 낸다.
비늘이 꺾이고, 살이 파이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는다.
절대 무너지지 않는다.
[크롸라라라라라!!]
패융 또한, 패도를 걷는 패룡(覇龍)이니까.
그리고 그렇게 패융이 만들어 낸 시간 속에서.
“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설천위가 움직였다.
도(刀)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횡으로 베어 간다.
공간을 통째로 가르는 일격을.
땅을 향해 펼친다.
[단천(斷天)]
쾅!!
폭음이 터져 나온다.
“꺄하하하하!”
동시에 터진 웃음과 함께 바위에 걸터앉은 언여휘가 턱을 괸 채 설천위를 바라보며 웃었다.
“천위, 알잖아? 어림도 없다는 거.”
설천위가 처음 사용한 [단천(斷天)]은 언여휘가 만들어 낸 영역을 아예 통째로 가르고 지나갔다.
당연히 핵 또한 그 범위에 들어갔음에도 그것은 멀쩡히 움직이며 자성영역을 유지시키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술사로서의 역량이 달라.”
깰 수 없다.
설천위의 힘으로는.
언여휘의 웃음과 함께 패융의 꼬리가 설천위를 스치고 지나갔다.
“설령 용이라 할지라도 내 영역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어. 아니, 영적인 존재이기에 더욱더 큰 영향을 받겠지.”
설천위가 처음부터 패융을 꺼내지 않았던 이유.
언여휘의 영역이 패융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몰랐기에 설천위는 패융을 꺼내지 않았다.
물론 [살악(殺握)]으로도 충분히 가능할 거란 계산도 있었고.
그러나 방어를 위해 꺼낸 지금, 패융은 확실하게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의 영향 아래 들어갔다.
아예 전체를 공격하고 방어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지만, 그 와중에 설천위를 공격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조절이 있었는데.
그 제어가 틀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자성영역(自省靈域)도 실패했고, 네가 사용하는 그 화강(化罡)도 슬슬 한계지?”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며 언여휘는 웃었다.
[단천(斷天)]은 강한 기술이나, 거기까지다.
화경급 고수의 깨달음을 영적인 능력으로 거대하게 재현했다고 한들 그 격(格)이 오르는 것은 아니다.
철이 아무리 거대해져도 금강석보다는 무르다.
“그럼 슬슬…….”
“실패?”
바위에서 일어나려는 언여휘의 말을 끊으며, 설천위가 손을 뻗었다.
“아직 시도조차 안 했는데, 무슨 실패라는 거냐?”
설천위의 손에 맺힌, 주먹만 한 물방울이 천천히 낙하한다.
그리고.
철퍽!
땅에 부딪히는 것과 동시에 터진 그 물방울은.
콰가가가가가각!
거대한 급류가 되어 사방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치이이익!
물과 만난 용암이 식어 버리며 대지가 되었고.
기괴한 소리를 내며 아우성치던 아귀들을 휩쓸고 떠내려갔다.
그리고.
콰가가가각!
어느새 생겨난 검은 벽에 가로막혀 튀어 오르는 아귀들을 패융의 꼬리가 짓이긴다.
[크어어어!]
패융의 꼬리가 사라진 빈틈을 노린 종려가 거센 급류를 헤치며 설천위에게 접근한다.
물이 만들어 내는 압도적인 힘조차 가볍게 무시하며 달려든 종려의 주먹이 설천위를 내려치는 순간.
꿀렁.
물로 만든 구체가 종려의 주먹을 휘감았다.
거기서 만들어진 저항에 붙들려 나아가던 주먹은 기세를 잃고, 설천위의 코앞에서 멈췄다.
“일단, 임시로 이름 붙이기로 할까.”
자신의 코앞에서 거친 기세를 뿜어내는 종려를 흐릿해진 시야에 담으며, 설천위는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수관대밀옥(水棺大密獄).”
순식간에 종려의 몸을 휘감은 물이 거대한 감옥이 되어 종려를 짓누른다.
동시에.
식어 버린 용암 위를 채운 물이 미친 듯이 회오리치기 시작했다.
마치 거대한 드릴이 된 것처럼.
카가가가가가각!!
급류는 송곳이 되어 땅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영력과 패기를 품고, 확실하게 이쪽의 영역을 잠식하기 시작하는 설천위의 힘에 언여휘는 멍하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봤다.
“하, 하하하하하하!!”
그리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진짜! 진짜 말이 안 되네!”
설천위가 수류계 술법을 쓸 수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예전에 직접 보기도 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보조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설천위는 흑관이라는 술법을 주로 사용했으니까.
방어계 술법을 응용해 무궁무진하게 활용하는 그 응용력엔 절로 감탄이 나왔는데.
자성영역(自省靈域)을 수류계 술법으로 구현한다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설천위는 패도의 기세를 품고, 패룡을 다스린다.
실제로 여태까지 그가 싸우면서 주력으로 썼던 힘은 전부 그쪽이었다.
즉, 그에게 익숙한 것은 수류계 술법이 아닌, 어디까지나 패기 혹은 살기의 영역에 있는 힘이다.
그런데, 굳이 자주 쓰지 않는 수류계 술법으로 자성영역(自省靈域)을 만들어 냈다고?
어째서?
아니, 어떻게?
단천(斷天)의 일격으로 베어 내지 못했던 결계를 물의 송곳이 갉아 내는 것이 느껴졌다.
일격에 베어 내는 것은 불가능하더라도 수백, 수천 번 파고들면 꿰뚫을 수 있다는 그야말로.
“산류천석(山溜穿石)이로다.”
흐르는 물방울이 바위에 구멍을 뚫듯이.
결계를 확실하게 무너트려 간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언여휘는 깨달았다.
이것은.
“만들어 냈구나.”
만들어 낸 자성영역(自省靈域)임을.
자성(自省)해서 얻어 낸 것이 아니라.
자성(自成)하여 만들어 낸 것임을.
스스로 만들어 낸 가짜임을.
“꺄하하하하하하!!”
웃음이 터져 나온다.
대부분의 술사들이 평생을 바쳐도 도달하지 못하는 영역을.
억지로 만들어 낸다.
마치.
자신이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를 만들어 낸 것처럼……!
“이, 이 깜찍한 괴물이이이!!”
비틀린 웃음과 함께 터져 나온 감탄과 동시에.
나아가지 못하던 종려가 겨우 물의 속박에서 벗어난 순간.
바닥을 뚫고 들어간 물의 송곳이 핵을 꿰뚫었다.
결계가 뚫린 시점에서 다른 어떤 대비책도 없는 핵은 순식간에 퍼지는 균열과 함께.
쿠르릉!
무너진다.
핵이 부서지는 것과 동시에 언여휘가 만들어 낸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땅의 틈을 뚫고 솟구쳐 물과 만나서 돌이 되던 용암은 가라앉고.
벌어졌던 균열은 서서히 닫히기 시작한다.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기에.
“아아.”
무리하게 술법을 이어 나가던 언여휘의 분신에도 영향이 미쳤다.
“이건 글렀네.”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 몸에 작게 고개를 저은 언여휘는 검은 갑옷으로 전신을 감싼 채 서 있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오늘은 여기까지 할게.”
“…….”
“뭐, 오늘이라고 하긴 했지만……. 천위, 다음에 또 볼 수 있을지 모르겠네?”
히히 웃는 언여휘는 서서히 가루가 되어 바스러지는 손으로 설천위의 곁에서 거친 호흡을 토해내고 있는 종려를 가리켰다.
“저 아이, 능력은 진짜거든?”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가 풀렸을 뿐, 종려가 무너진 것은 아니다.
종려는 애초에 그녀의 술법으로 조력을 얻었을 뿐, 가짜가 아니었으니까.
“그러니, 잘 살아남아 봐.”
이미 망가진 육체는 제대로 움직일 수조차 없을 터.
저쪽에선 깨어난 손휘가 살존과 백유를 붙잡아 두고 있는 상황이다.
설천위가 종려를 이길 가능성은 높게 쳐줘야 반반…….
“천구(天拘).”
손을 뻗은 설천위의 손바닥에서 튀어나온 어둠이 순식간에 종려를 휘감는다.
콰득! 콰득!
살점이 꿰뚫리고 비틀리는 섬뜩한 소리가 울려 퍼지고.
종려를 먹어 치운 검은 반구는 계속 요동쳤다.
“하아…….”
그야말로 순식간.
처음 종려를 몰아붙였을 때처럼 단숨에 종려를 제압한 설천위가 손을 거두자.
“꺄하!”
언여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완전히 망가진 종려의 혼이 설천위의 손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 보였으니까.
“역시……!”
그렇기에 더욱 확신했다.
설천위야말로.
통천을 위해 필요한 가장 중요한 열쇠임을.
그가.
그 괴물의 뒤를 이었음을.
“응. 뭐 이번에는 실패인가.”
그렇기에 순순히 인정했다.
“그럼 다음에 봐, 패황(覇皇).”
바스러진 손을 흔들며, 언여휘의 분신이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