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7화
396화-손휘 (12)
용암에 처박혔다가 나온 얼굴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고통.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방법들 중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소사(燒死)라고 했던가.
불에 타는 걸 넘어서 달라붙은 용암에 실시간으로 피부와 살이 녹아내리고 있으니,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끄윽!”
손을 뻗어 땅을 짚는다.
용암이 흐르지 않는 땅을 의지해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킨다.
콰득!
어느새 달라붙은 아귀의 입에 종아리가 뜯겨 나가는 것이 느껴졌지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얼굴의 통증이 너무 심해서 별다른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흡!”
이를 악물고 바닥을 내려친 손에서 터져 나온 영력이 물로 바뀐다.
얼굴을 중심으로 가슴과 팔 등에 묻었던 용암이 굳어 돌이 되고.
“끄으으윽!”
눌어붙은 살점과 함께 떨어져 나간다.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는 고통 속에서 설천위는 두 눈을 똑바로 떴다.
흔들리지 않고, 몸을 통제했다.
부동심(不動心).
스킬로까지 가지고 있는 힘이 극악의 고통 속에서도 이성을 유지하게 돕는다.
그 때문에 느껴지는 고통이 더욱더 선명해졌으나.
“후욱! 후욱!”
전투를 지속할 수 있는 여력을 얻는다.
자신의 몸 이곳저곳을 물어뜯던 아귀들을 물로 만들어 낸 칼로 베어 버린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비틀었다.
방금 전까지 그의 머리가 있던 자리에 종려의 발이 내려찍는다.
그대로 있었더라면, 머리가 박살이 났을 일격.
“꺄하하하! 천위! 생각보다 더 튼튼하네! 내 자성영역으로 만든 거라고는 하지만, 실제 용암이랑 별 차이가 없는데.”
낄낄거리며 웃은 언여휘는 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는 설천위 앞에 쪼그려 앉았다.
“천위, 아무리 그래도 무리라는 거 알잖아?”
무리.
그야 무리겠지.
다른 누구도 아닌 살존을 죽이기 위해 준비해 온 전략이다.
언여휘쯤 되는 인물이 살존의 수준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준비를 어설프게 했을 리 없다.
최소한 살존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전력.
여러 가지 변수를 감안해도 충분히 살존을 죽일 수 있다고 언여휘가 판단한 전략이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아직까지도 그 효능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는 그녀의 자성영역(自省靈域)과, 순수 육체 능력만으로 살존에게 비빌 수 있는 종려라는 괴물.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무림맹의 단주(團主)?
분명 높은 자리임은 맞지만, 그것이 압도적인 강함의 증명은 될 수 없다.
당장 무림맹에만 해도 단주들보다 강한 맹주가 있지 않은가?
무(武)의 길만 따져도, 무림맹의 단주보다 강한 이들이 이 무림에 열이 넘는다.
술사(術士), 괴이(怪異) 등까지 합치면?
그 숫자는 이미 손발로는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렇기에.
고작 단주(團主)인 것이다.
무림 십대 고수 둘과, 무림맹과 사천맹의 단주가 하나씩 있었음에도 그 자리를 유유히 벗어났던 살존(殺尊)의 격에 비하면.
고작해야 단주인 것이다.
“많이 강해진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쌓아 온 시간이 너무 다르다고 해야 할까~?”
장난스럽게 웃으며, 언여휘는 녹아내린 설천위의 뺨을 쿡쿡 찔렀다.
“차라리 술법을 익혔더라면, 제대로 마음을 잡고 성화린의 밑에서 술법을 갈고닦았더라면 희망은 있었을 텐데.”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설천위를 막을 생각이 없는지 그녀는 살짝 물러나서 양손으로 턱을 받쳤다.
“희망도, 구원도 없는데 대체 왜 그리 끈질기게 버티는 거야? 응? 여기에는 유예린 그 계집애도 없잖아?”
정말로 궁금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언여휘의 모습에 겨우 상체를 일으킨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냥.”
그래.
“……그냥, 아니꼬워서 새끼야.”
그뿐이다.
거창한 신념도.
굳건한 정의도.
경건한 믿음도.
아무것도 없다.
그저, 지금만을 바라볼 뿐이다.
“……후우,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꼴이 보기 싫거든.”
녹아내린 피부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 쓸어 넘긴다.
“내 눈앞에서 사람 같지 않은 짓을 하는 놈이 있고, 내 손에는 검이 들려 있네?”
후들거리는 다리 근육을 억지로 쥐어짜 고정한다.
“벨 수 있으니까 벤다. 막을 수 있으니까 막는다.”
허리를 쭉 펴고, 고개를 똑바로 향한다.
“그 선택엔 선악의 구분은 없고, 옳고 그름의 시시비비도 없어.”
영문도 모른 채 게임 속 인물의 몸에 들어와서 어쩌다 보니 살인을 경험했다.
덤벼드는 산적들을 죽이며, 어떤 생각을 했던가.
거창한 다짐?
살인에 대한 속죄?
아니다. 진짜 더럽고 너무 억울해서 살아남겠다고 생각했다.
오직 그것뿐이었다.
이를 악물고 수련을 한 건 게임에서 펼쳐질 미래를 아니까.
수련하지 않으면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걸 아니까.
다만, 그러다 보니 포기할 수 없는 게 생겼다.
해야 할 일이 조금 더 늘었다.
단지 그것뿐이다.
“그냥 막는 거니까. 잡소리 그만하고 덤비기나 해.”
부들거리는 팔로 검을 드는 설천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기 시작한 검은 연기를 바라보며.
“꺄하하하하하하하하!!”
언여휘는 배를 잡고 나뒹굴었다.
정말로 재미있다는 듯.
너무 격렬하게 굴러서 그 몸이 용암 속에 빠졌다 나오기도 했지만.
그녀는 상처 하나 없는 모습으로 용암을 눈물 털듯 털어 냈다.
“아아, 정말로 재미있네. 천위, 너무 귀여워.”
용암에 처박혀 얼굴의 피부와 살이 녹고, 손과 가슴의 근육이 피부와 엉켰다.
이쪽의 전력이 더 강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명백하고.
이 싸움 끝에 죽음이 기다린다는 것 또한 명백하다.
그런데.
이유를 묻는 말에 대한 대답이 ‘그냥’이라…….
그냥 이런 짓을 하는 인간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하지만.
“응, 뭐 그런 이유겠지?”
이쪽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눈을 보며 언여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놈들은 원래 이렇다.
이성적인 판단?
그런 걸 하는 놈이었으면 진즉에 도망쳤을 거다.
우선순위를 따지자면 이곳에서 살아남는 게 먼저니까.
백유를 데리고 도망쳤겠지.
살존과 살존의 딸이 아무리 매혹적인 보상이라고 해도,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는가 하면 그건 아니니까.
설천위가 무엇을 노리는지 정확히 알 순 없으나, 백유와 함께 행동하는 것으로 보아 사천맹이 혈교에 먹히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것일 터.
살존은 매력적이긴 하나, 꼭 필요한 존재는 아니다.
그러니, 설천위가 지금 여기에 서 있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그냥, 그러고 싶으니까.
해야 하니까 한다.
영웅(英雄)이라 불리는, 협의지사(俠義志士)들은 언제나 그러했다.
그리고.
“박명할 팔자야~!”
언제나 금세 스러졌다.
그냥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선택하는 멍청이들은.
이 무림의 독니에서 결코 살아남지 못했다.
정파의 머리에 항상 구렁이를 잔뜩 품은 노괴들이 자리 잡는 건 다 그런 이유에서다.
그냥이라는 말 하나로 행동을 정하고 살아온 녀석들은 그 위치에 오르기 전에 대부분 죽으니까.
설령 죽지 않더라도 정치에 밀려 외진 곳을 전전하다가 죽는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거다.
“그러니, 내가 데려가더라도 원망하지 말라고?”
후후 웃으며, 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언여휘는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시간은 충분히 줬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수인을 맺으며.
“그럼 이제 끝내자.”
설천위에게 절망은 선고한다.
그녀가 수인을 맺은 손이 비틀리는 순간.
설천위가 바라보던 세계 또한 비틀어졌다.
상하가 뒤바뀌고.
좌우가 뒤틀린다.
왼쪽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선은 사선을 향하고.
오른손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왼손을 든다.
“아귀도(餓鬼道)는 끝없는 굶주림의 세계.”
전신에 퍼지는 강력한 충격과 함께 설천위는 이를 악물었다.
대화를 하는 동안 발동시킨 [패룡기(覇龍氣)]로 외상은 상당수 치유됐지만, 진탕된 내부는 아직 그대로다.
그런 상황에서 몸의 감각을 상실하고 일격을 맞았으니, 그 충격을 제대로 해소할 수 있을 리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날아갔다간 용암에 처박히게 될 터.
이를 악물고 버티는 길을 선택한 설천위는 뒤틀린 뼈와 근육에서 오는 고통을 씹어 삼키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극한의 굶주림과 끝없이 반복되는 고통은 공포와 절망을 불러오고 결국엔 정확한 인지조차 불가능해지지.”
언여휘는 천천히 두 손을 벌렸다.
천천히, 느긋하게.
“나는 그 상태를 섬망(譫妄)이라고 불러.”
어느새 완전히 떨어진 손으로 뒷짐을 지며 언여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 아귀도에서 올바르게 사물을 보고 인지하는 것은 불가능해.”
그것이 오령귀문진(五靈鬼門陣)으로 발동해 낸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의 효능 중 하나.
언여휘가 종려를 이용해 살존을 죽일 계획을 세운 근거다.
설령 살존이라고 할지라도, 무의식을 뒤흔들며 새겨지는 감각의 괴리는 피할 수 없을 테니까.
“설령 공포에 질리지 않더라도, 굶주림에 허덕이지 않더라도 멀쩡할 순 없어.”
무릎을 꿇고 피를 토하는 설천위의 머리를 언여휘는 토닥였다.
“솔직히 말해서, 여기까지 버틴 것도 대단해. 그 살존조차 흐름을 뺏겨 공격을 허용했는데 말이야.”
이렇게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의 영향을 견뎌 내고 활동했다는 것 자체로 설천위가 가진 혼의 그릇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결코 놓칠 수 없는 그릇.
“그러니, 이제 그만하고 슬슬…….”
“흣.”
언여휘의 손을 쳐 내며, 고개를 든 설천위가 입가의 피를 소매로 훑었다.
“과연 그런 거군.”
게임 속에선 본 적 없던 기술이라서 뭔가 했지.
자신이 알던 그 기술을 쓰지 않은 건.
분신으론 불가능해서인가.
뭐, 상관없나.
“더럽게 까다롭네.”
거지 같은 기술이란 건 변하지 않으니까.
내성 무시의 속도 디버프라는 거 아니야.
명중률 너프도 있고.
이쪽이 치명타 대미지를 입을 확률도 높이고.
여러모로 끝판왕 디버프의 결정체네.
게임에서 봤으면 망겜이라고 욕을 한 바가지는 퍼부었을 패턴이네.
그런데.
“입은 만악의 근원이지.”
대충 알고 있다면 방법은 있지.
이쪽의 명중률, 회피율, 민첩성 전부 너프 먹었다면.
그딴 거 상관없는 전략을 쓰면 되잖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히죽히죽 입꼬리를 올리는 설천위의 모습에 언여휘는 자신도 모르게 손을 움직였다.
분명 이쪽이 압도적인 우위에 있는데.
역전의 요소 따위 단 한 톨도 존재하지 않는데.
‘……어째서?’
이 불안감은 대체 뭐란 말인가?
본능에서 올라오는 경고에 즉시 종려를 움직이는 것과 동시에 앞으로 모은 손을 비틀었다.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 안에 가득 찬 기운이 설천위의 모든 것을 비튼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만들어진 빈틈을 종려가 파고든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종려의 주먹이 단숨에 비틀거리는 설천위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쿵!
묵직한 타격음과 함께 땅이 흔들린다.
종려가 주먹을 내지른 여파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잔잔한 흔들림.
그리고 그 순간, 이상함을 깨달은 언여휘가 다시 한번 무간아귀도(無間餓鬼道)의 힘을 비트는 순간.
[크르르르르르]
용의 울음소리와 함께 묵직한 충격이 그녀를 후려쳤다.
동시에, 종려도 그 힘에 휘말린 듯 몇 걸음이나 물러났다.
“이런 디버프 장판 위에서는 싸우는 방법이 있지.”
고개를 든 언여휘의 눈에 설천위를 휘감은 검은 흑룡이 들어왔다.
빠른 속도로 그 크기를 키우기 시작하는 흑룡.
종려의 주먹을 막아 내며 찌그러졌던 비늘이 다시 회복되는 것이 보인다.
눈에 보일 정도의 속도로 커져 가는 흑룡을 따라 검은 불꽃이 일렁인다.
그리고 그 속에서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도를 움켜쥔 설천위가 언여휘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장판에는 광역기지.”
[크롸라라라라라라라!!]
무식한 피통은 덤이고.
언여휘의 술법에 노출될까 아끼던 패융을 불러낸 설천위는 사방으로 [소령연화(燒靈燃枠)]를 퍼트리며 도(刀)를 겨눴다.
무식하게 때려 박은 패기와 내공이 설천위의 도(刀)를 휘감아 그 덩치를 불린다.
설천위의 등에서 솟구친 거대한 손에는 그 크기에 걸맞은 도(刀)가 들려 있었다.
하늘을 향해 치켜든 도(刀)와 설천위의 몸을 타고 검은 연기가 휘몰아친다.
그리고.
“뒈져어어어어!!”
검은 불꽃을 품은 거대한 도(刀)가 지옥을 갈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