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6화
395화-손휘 (11)
봉인에서 깨어난 손휘는 직감했다.
지금의 자신은 온전하지 않다는 것을.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니 마지막 순간이 떠올랐다.
강력한 법구를 가져온 살존에게 강제로 봉인되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다.
그 법구에 담긴 힘의 출처를 알기에 손휘는 지금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언여휘에게 당한 것이 짜증나서?
아니다.
언여휘에게 놀아난 것이 문제다.
봉인된 것은 언여휘 때문인데.
지금 깨어난 것도 언여휘 때문이다.
법구에 깃들어 있던 영력이 가까이 접근한 언여휘에게 반응해 백수아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손휘를 깨웠다.
짜증 나는 점은 언여휘가 아니었다면 앞으로 한참은 더 있어야 깨어날 수 있었을 거라는 점이다.
언여휘 때문에 봉인되었는데, 언여휘 덕에 깨어난 상황.
그 계집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에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엇보다 살존에게 자신의 암살을 의뢰했을 거라고 추측되는 인물들 중 하나가 언여휘다.
완전히 놀아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제는 그걸 알고도 그 의도에 따라야 한다는 것.
[거슬리는군.]
그렇기에 손휘는 자신이 있는 동굴의 입구를 막고 있는 두 계집의 행동이 참으로 거슬렸다.
하나는 딱 봐도 꽤나 실력 있어 보이는 무인이고, 나머지 하나는 조잡한 식령이다.
저런 것들이 입구를 틀어막겠다고 팔랑거리고 있으니 어찌 짜증이 나지 않을 수 있나.
영력으로 만들어 낸 촉수를 뻗어 내자, 격렬한 반응이 돌아왔다.
생각해 보니, 아까 깨어났을 때 무의식중에 이런 방법으로 밀어냈던 것 같기도 하고.
오랜만에 깨어나서 그런가, 영 정신이 흐릿하다.
영적인 존재에게 정신이 흐릿하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
조금 전에 느꼈던, 자신이 온전하지 않았다는 직감과 연결지은 손휘는 빠르게 결론을 내렸다.
[분신이 죽었군.]
자신과 완전히 단절된 상태에서 완벽하게 소멸 당했다.
상당히 뛰어난 술사가 있다.
언여휘는…….
[아닌 것 같군. 방식이 너무 깔끔해.]
언여휘의 성격이라면 몇 개나 되는 함정을 파고 그 안에 분신을 가둬 놨을 거다.
함정임을 알고도 쉽게 포기할 수 없게 지독할 정도로 교묘하게.
그게 언여휘의 방식이다.
미친 것처럼 일을 마구 벌이지만, 결코 선을 넘지 않는다.
습격을 해도, 뒤통수를 쳐도.
상대방이 쉽게 따라올 수 없는 환경을 조성하고, 알아서 포기하게끔 만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
그게 언여휘라는 능구렁이의 방식이다.
그러니.
[이번엔 휘둘려 주지.]
언여휘에게 분노해 집착하는 것은 하책이다.
뭐가 됐든, 언여휘로 인해 기회가 생긴 것은 사실.
그러니 지금은 그 기회를 잡을 때다.
백수아의 몸을 일으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손휘는 이내 동굴 밖으로 보이는 모습에 천천히 손을 뻗었다.
꽤나 능력 있는 계집이다.
지배하면 쓸모가 있겠어.
촉수를 내보낸 손휘는 천천히 상대를 가늠했다.
혼의 성질.
영력의 급.
내공의 수준.
무공의 강함.
천천히 상대를 분석하며, 어떤 것이 최고의 방법이 될까 고민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으니 빠르면서도 좀 장기적으로 볼 수 있는 술법이…….
[으음.]
너무 오래 잠들어 있다 깨어나서 그런가, 머리가 영 돌아가질 않는다.
결국 손해를 감수하고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을 선택하려는 순간.
“백유!”
“스승님!”
밖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계집의 목소리는 낯설었지만, 다른 목소리는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감정에 반응한 촉수들이 동굴 밖을 향해 쏟아져 나갔으나, 철저하게 막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가공할 속도로 촉수들이 사라지며 한 사람이 동굴의 입구로 걸어 들어왔다.
“내 딸이라면 말릴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저건 내 딸이 아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는 여인을 보며 손휘는 억지로 백수아의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미소를 짓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살존(殺尊).]
기괴한 미소와 함께 손을 뻗은 손휘는 자연스럽게 펼쳐 냈다.
순식간에 뻗어 나가는 영력이 단숨에 주위를 잠식한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공간 전체를 잠식한다.
순식간에 어두워진 동굴 입구와 주위를 보고 백유가 단검을 꺼내 드는 순간.
[참으로 오랜만이야.]
백수아의 손에서 떨어진 핏방울이 바닥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 순간 자신이 서 있던 곳이 호수로 바뀌었다는 것을 인지한 백유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안 돼요! 빨리 나가야……!”
다급하게 외치는 청아의 목소리가 묻힌다.
어느새 동굴의 막힌 천장이 아닌 뻥 뚫린 하늘 위로 구름이 내려온다.
촤악!
물이 솟구치며 쏟아져 내리는 소리로 인해 마치 폭포의 소음처럼 청아의 목소리는 물론 백유의 대답마저 묻혀 버렸다.
순식간에 솟구친 거대한 전각들이 거대한 장원을 만들어 낸다.
[환영한다.]
양팔을 벌린 채 장원의 정문 앞에 선 손휘가 웃었다.
[나의 장원에 온 것을.]
[자성영역(自省靈域) 신위지경궁(神位之擎宮)]
누각들이 완전히 형태를 갖추자, 손휘는 천천히 손을 뻗었다.
[가벼운 환영식으로 시작하지.]
손휘의 손짓에 장원의 담벼락에서 활들이 솟구쳤다.
그 광경에 헛웃음을 지은 백유는 망설임 없이 단검을 겨눴다.
“헛소리만 하면 모가지 날아가는 거 몰라?”
진득한 살의가 담긴 목소리에 손휘는 피식 웃었다.
[살존의 제자라고 하기엔 살의가 너무 천박하구나. 이 아이의 반도 못 해.]
자신의 가슴을 툭툭 두들긴 손휘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다.
[재능 있는 아이였지. 어미의 업(業)만 아니었다면, 이 무림에서 새로운 별이 됐을 아이였다.]
손휘가 혀를 차는 것과 동시에 화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활시위를 당기는 사람도 없는데, 마구잡이로 쏟아지기 시작하는 화살.
하지만, 상대는 무려 화경급 고수와 현경급 고수다.
청아를 사이에 둔 살존과 백유는 능숙하게 화살을 쳐 내기 시작했다.
수십 개의 활이 동시에 화살을 쏟아 내고 있었지만, 두 사람에게 이 정도 화살을 쳐 내는 것은 밥을 먹는 일보다도 간단했다.
두 사람 사이에 껴 있는 청아가 조금도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 깔끔한 방어.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청아는 두 사람을 바라봤다.
움직임이 다르다.
능숙하게 화살을 쳐 내고 있지만.
묘하게 움직임이 더뎠다.
그리고 청아가 보는 것만으로 알아챌 수 있는 변화를 당사자인 백유와 살존이 눈치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단검을 휘두르던 백유는 짜증이 담긴 눈으로 손휘를 바라봤다.
[너도 마찬가지다. 너와 맞지 않는 스승을 만난 데다 그 업으로 이런 꼴을 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깝구나.]
정녕 마음이 아프다는 듯 혀를 찬 손휘는 손을 휘저었다.
화살을 쏟아 내는 활 뒤로 창이 솟구친다.
그리고.
거칠게 쏘아지는 창이 살존과 백유를 두들겼다.
화살과는 비교도 안 될 묵직함을 지닌 창까지 합류하자, 백유와 살존의 방어가 더욱 거칠어졌다.
하지만, 확실하게 바빠졌을 뿐 막는 데 부담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통탄할 일이지. 이 세상에 이리도 잘못된 업을 쌓은 이가 있다는 것이.]
그러나 손휘가 손을 휘두를 때마다 하나씩 병장기가 추가되기 시작했다.
백유와 살존의 앞에 솟구친 검이 두 사람을 압박하고.
그들의 뒤에 나타난 도가 청아를 위협했다.
검을 부러트리고, 도를 쪼갰다.
창과 화살까지 막아 내는 사이.
자잘한 상처가 하나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흐읍!”
청아가 힘겹게 펼친 방어는 너무나도 쉽게 깨졌다.
영적인 힘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격차로 인한 결과.
세 사람은 서서히 몰리기 시작했다.
숨통을 조여 온다.
[무인(武人)을 상대로 싸울 땐 이런 것이 참 싫지.]
술법으로 만들어 낸 물리력으로 끊임없이 적을 몰아붙이며, 혼을 압박해 서서히 방어를 무너트린다.
혼이 짓눌리면 신체 또한 당연히 조금씩 짓눌린다.
물론 화경급 고수를 눈먼 화살에 맞을 수 있을 정도까지 끌어내린다는 건 보통의 술사에겐 불가능한 이야기지만.
손휘에겐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거기다.
[아직도 결단을 내리지 못한 것인가, 살존?]
비웃음이 담긴 손휘의 질문에 살존은 입술을 깨물었다.
말없이 자신의 곁에 서 있는 백유의 모습에 절로 이가 악물어졌다.
백수아의 몸을 차지한 손휘를 무인인 자신들이 반격할 수 없음을 이용한 일방적인 공격.
제압할 수 있는 적이 아니기에 할 수 있는 선택은 오직 방어밖에 없다.
그런데, 이슬비에 옷이 젖듯 적의 공격은 끊임없이 이쪽을 갉아먹는다.
무인에게 상성상 약한 술사라도 일정 경지를 넘어가면 방법이 있다는 듯 확실하게 이쪽의 숨통을 조여 온다.
[살존.]
살존이 느끼는 압박감을 읽어 낸 손휘가 옅게 웃으며 그녀를 바라봤다.
[옆에 있는 제자까지 보낼 셈인가?]
도발.
차라리 지금 딸을 죽이는 게 어떠냐.
어차피 구하긴 늦은 몸이다.
옆에 있는 제자라도 살리려면, 어서 빨리 선택을 하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런 뜻이 담긴 손휘의 물음에 살존은 이를 갈았다.
턱이 부서질 것처럼, 거칠게.
“……그래.”
한다면, 내 손으로 해야겠지.
놈에게 휘둘리는 꼴이 되더라도.
최소한 딸의 몸으로 저 괴물 놈이 죄를 짓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다.
결심을 했으나, 미세하게 떨리는 손을 들어 올린 살존의 몸이 서서히 흐려지는 순간.
“에헤이.”
그 손을 백유가 붙잡았다.
반대쪽 손으로는 날아오는 화살과 창을 쳐 내며.
어느새 완벽하게 구축한 제공권으로 청아와 살존을 지키며, 백유가 웃었다.
“그 녀석이 아직 오지도 않았는데, 너무 일 처리를 성급하게 하지 마시죠.”
히죽 웃으며, 백유는 자신의 뺨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을 핥았다.
“우리 사저(師姐)를 구하겠다고 천위가 그렇게 용을 썼는데, 시도도 안 해 볼 순 없죠.”
[천위?]
순간, 그 이름이 묘하게 신경에 거슬린다는 것을 느낀 손휘는 이내 깨달았다.
[그녀석이구나. 내 분신을 소멸시킨 녀석이.]
“어쭈? 어떻게 알았대?”
[아무리 단절시켰다고 해도 그 흔적은 남는 법. 혼(魂)의 신비는 깊고도 넓으니라.]
꽤나 실력이 있는 술사일 것이다.
아무리 봉인되었다고 해도 자신의 분신을 완전히 소멸시킨 녀석이니까.
하지만.
[이곳에 없다는 것은 언여휘와 싸우고 있다는 소리일 터.]
“…….”
단숨에 상황을 읽어 낸 손휘의 말에 백유는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뭐?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에 손휘는 입꼬리를 올리며 손을 뻗었다.
[언여휘를 상대로 술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나?]
그 언여휘다.
화경급 무인이라도 상황과 조건에 따라 압도할 수 있는 언여휘.
그런 그녀에게 술사가 덤빈다?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만약 상대가 자신과 동급의 술사였다면, 분신을 소멸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언여휘의 자극 정도론 절대 깨어나지 않을 강력한 봉인을 걸었을 터.
즉, 술사로서의 실력은 언여휘보다도 한 수 아래.
그런데 언여휘를 상대한다?
말도 되지 않는…….
“당신, 천위를 모르니까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손휘의 반응에 오히려 입꼬리를 올린 백유가 입꼬리를 올렸다.
“걔, 눈 돌아가면 진짜 장난 아니거든.”
백유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웃는 순간.
[크롸라라라라라라라!!]
강렬한 포효와 함께 손휘가 만들어 낸 자성영역(自省靈域)이 흔들렸다.
무엇보다 외부와 단절된 결계를 뚫고 들어올 정도의 강렬한 파동이라니.
순간 고개를 돌린 손휘는 감탄하고 말았다.
자신의 자성영역(自省靈域)에 구멍이 뚫렸다.
그리고 그 너머.
거대한 용이 포효하는 공간 속에서.
“뒈져어어어어!!”
만신창이가 된 인간이 손에 쥔 거대한 도(刀)를 내리긋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