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5화
394화-손휘 (10)
손에 쥔 도를 늘어트리고 설천위는 목을 이리저리 꺾었다.
“우리도 슬슬 마무리해야지?”
뻐근한 근육을 풀어내며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설천위를 보고 몸을 배배 꼰 언여휘가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꺄하하하! 천위! 천위! 천위!!”
정신 나간 사람처럼 설천위의 이름을 부르던 언여휘는 이내 순식간에 웃음을 지우고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역시 지금 데려가야겠어.”
얼굴을 덮은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입가에 걸린 비틀린 미소와 함께.
“종려.”
언여휘가 전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직접 종려를 다루기 시작했다.
가볍게 손을 뻗은 언여휘의 앞으로 어느새 머리를 숙인 종려가 도착했다.
종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언여휘의 손길.
거인이나 마찬가지인 종려를 작은 소녀의 외형을 한 언여휘가 쓰다듬는 광경은 비현실적이었으나.
그 어디에도 어색함은 없었다.
“하나의 무기를 잃었으니, 전략을 바꿔야겠지.”
종려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내린 언여휘는 입꼬리를 올리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어느새 재생이 끝난 종려가 그녀의 뒤에 서서 거친 살기를 흘렸다.
그런 종려를 등 뒤에 둔 채 언여휘는 유려한 손짓으로 양손을 움직였다.
허공을 가볍게 지나 묘한 무늬를 만들어 내는 손.
그녀의 손을 따라, 영력은 흔적이 남아 하나의 문양이 되고.
마치 줄기에서부터 뻗어 나간 가지처럼 순식간에 빈 곳을 채운 선은 복잡한 문양을 만들어 낸다.
순식간에 기이한 문양을 완성해 낸 언여휘는 이쪽을 향해 도를 겨누고 있는 설천위를 보며 빙긋 웃었다.
“그럼, 죽지 말아 줘. 천위.”
툭.
언여휘가 문양을 건드리는 것과 동시에.
기아아아아──────────!!
천지를 울리는 괴성과 함께 용암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설천위가 갈라냈던 아귀도를 순식간에 채우고, 그 위로 용암에서 기어 올라온 아귀들이 공간을 가득 메운다.
용암에서 기어 올라오는 아귀들의 한복판.
거대한 아귀가 공간을 찢어 버릴 것 같은 괴성을 지르며 거대한 상체를 일으켰다.
쿵!
손을 땅에 내려놓는 것만으로 땅이 뒤흔들리고.
그어어어어어─────────!!
성인 주먹보다 작은 입에선 고막을 찢어 버릴 것 같은 괴성이 터져 나온다.
그리고.
콰득!
땅을 짚은 손 하나를 들어 자신의 입에 박아 넣은 아귀는 그대로 자신의 입을 찢어 버렸다.
강제로 찢어진 입을 크게 벌리고.
손에 잡힌 모든 것을 입에 넣기 시작한다.
근처에 있는 아귀들은 물론 흙과 용암까지.
미친 듯이 입안으로 욱여넣기 시작했다.
“천위.”
그리고 그런 아귀를 불러낸 언여휘가 물러나는 순간.
쾅!!
순식간에 돌진해 온 종려의 일격을 겨우 막아 낸 설천위는 자신을 보며 웃고 있는 언여휘와 두 눈을 마주쳤다.
흥분과 기이한 열망으로 가득 찬 눈동자.
비틀린 의지와 욕망이 여기까지 느껴지는 것 같은 그 눈동자에.
“꺼져라.”
설천위의 도(刀)가 반월을 그렸다.
[키아아!!]
순식간에 팔이 잘리고, 그곳에서 검은 불꽃이 솟구친 종려가 괴성을 터트렸다.
그리고.
그아아아아아아────!!
덩달아 팔 하나가 잘린 거대 아귀 또한 고통에 몸부림치며 주위를 초토화시키기 시작했다.
단 일격.
[살악(殺握)]의 거대한 크기로 만들어 낸, 압도적인 공격 범위.
보통의 검사가 가질 수 있는 제공권(制空圈)을 가볍게 뛰어넘는 영역을 손에 넣은 설천위는 영력을 끌어올렸다.
양손으로 도(刀)를 쥐고.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종려와 두 눈을 마주한다.
이쪽을 향해 파고드는 종려를 순식간에 휘두른 도(刀)가 베어 들어간다.
단숨에 어깨부터 가슴까지 가를 수 있는 일격.
인간이라면 당하는 순간 죽고.
괴이라고 할지라도 치명상이 될 일격이다.
그야말로 극한의 훈련으로 완성된 후발선제(後發先制).
상대가 공격의 형태를 이미 정한 상태에서, 제공권(制空圈)을 이용해 늦게 출발했으나 먼저 도착한 공격은 방어 불능의 일격이 된다.
상대가 뒤늦게 방어를 하려고 해도 이미 늦었기에 자세는 흐트러지고 온전한 방어가 불가능하게 된다.
그것이 자신의 영역을 지나 상대의 제공권(制空圈) 안에 무리하게 파고드는 것을 무인들이 지양하는 이유다.
불리할 수밖에 없으니까.
괜히 탐색전을 이어 나가고, 서로 공격과 방어를 나누며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 아니다.
무리한 공격은 그대로 큰 빈틈으로 이어져 치명적인 비수가 되어 자신의 심장을 꿰뚫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통상의 무인들은 하지 않을 선택이다.
하지만.
그건 무인에게나 해당되는 이야기.
도(刀)가 상대의 어깨에 닿은 시점에.
설천위는 자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종려와 눈을 마주쳤다.
입꼬리를 비틀 한순간의 틈조차 없는 찰나의 시간.
몸을 비튼 종려가 설천위의 도(刀)를 흘려 낸다.
순식간에 공격에 실패한 설천위는 그대로 치명적인 빈틈이…….
서걱!
생기지 않았다.
[살악(殺握)]의 공격은 빗나갔지만, 설천위는 자신의 손에도 흑관으로 만든 패룡도(覇龍刀)를 쥐고 있었으니까.
당연히.
[크륵!]
반응했다.
예상했으니까.
상대가 반드시 반격할 것이란 것을 알고 있다면, 그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
직접 휘두른 도(刀)로 종려의 주먹을 반으로 갈라 버린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틀었다.
빗나갔던 [살악(殺握)]의 도(刀)가 다시 궤적을 바꿔 종려를 베어 나간다.
[키아아아!!]
그런 공격에 반응한 종려가 멀쩡한 손을 휘둘렀다.
그리고 어느새 재생이 시작된 종려의 주먹을 바라보며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부족하다.
이게 아니다.
좀 더.
이런 형태가 아니라.
“흩날려 피어라, 소령연화(燒靈燃枠).”
좀 더 집중해서 피워 올려라.
그것은 혼을 사르고, 벚나무의 꽃잎처럼 타오르는 불꽃.
살의와 패기로 검게 물든 힘일지라도.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살악(殺握)]으로 펼쳐 낸 것처럼.
완전하게 펼쳐 내라.
이 몸뚱이의 감각에 의지하지 마라.
자신의 혼을, 직감을 믿어라.
할 수 있음을 확신하고.
할 수 있음을 증명하라.
[살악(殺握)]의 도(刀)가 또다시 종려를 공격하고.
그런 [살악(殺握)]의 공격을 피해 종려는 능력을 사용했다.
극한의 반사 신경으로 만들어 내는 반격.
그리고 그 반격 앞에 선 설천위는 당연하다는 듯 도(刀)를 휘둘렀다.
[살악(殺握)]이 만들어 낸 거대한 제공권(制空圈) 안에 있는 작은 제공권(制空圈)을 만들어 낸 도(刀)가 종려의 주먹을 베어 낸다.
그리고.
[기아아아아아!!]
완전히 베인 주먹을 움켜쥔 종려가 기어코 뒷걸음질쳤다.
등 뒤로 뻗어 오는 거대 아귀의 손을 [살악(殺握)]의 도(刀)로 베어 낸 설천위는 즉시 땅을 박찼다.
종려가 그 경이로운 반사 신경을 연속으로 사용할 수 없다는 건 증명됐다.
그리고 길게 유지할 수 없다는 것도.
한번 몸을 틀어 반격을 시도하면 통상의 상태처럼 공격의 궤도를 꺾을 수 없게 된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만큼 압도적인 힘의 궤도를 완전히 수정하는 힘이다.
제약이 없을 리가 없다.
노려야 하는 것은 그 빈틈이다.
[살악(殺握)]으로 펼치는 공격만이 아니라, 이 몸뚱이로 펼치는 공격의 완성도를 끌어올려야 했다.
몸으로 [소령연화(燒靈燃枠)]의 사용을 가능케 해야 한다.
집중해라.
하지 못할 건 없다.
섬벽권을 익혔을 때와 같다.
혼으로 익힌 거라면.
몸으로도 펼칠 수 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설천위의 도(刀)가 살을 가르고, 뼈를 잘라 내려는 그 순간.
뒷걸음질을 치다가 기어코 반응한 종려가 그 일격을 피해 내고 앞으로 몸을 날렸다.
부상당한 손보다 지금의 일격이 더 중요하다는 듯.
망설임 없이 몸을 내밀어 멀쩡한 왼손을 휘두른다.
완벽한 반격.
마치 노렸다는 듯이 달려드는 거대 아귀가 [살악(殺握)]을 붙잡고 있었기에.
한번 공격을 실패한 설천위는 완전한 빈틈투성이가 되어 종려의 공격과 마주했다.
……라고.
“생각하냐?”
서걱!
이번엔 주먹이 아닌, 왼쪽 어깨를 완전히 베어 버린 설천위가 그대로 도를 당겼다.
자신의 반격이 막힌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는 종려를 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허실(虛實)이란 거다. 괴물 놈아.”
거리를 좁히며 날린 일격은 허초(虛招).
언제든 무너트리고 다시 쌓을 수 있는 가짜 누각이다.
종려의 반사 신경이라면 그것이 허초라는 것쯤은 눈치챌 수 있어야 정상이지만.
볼 수 있는 눈만 있다고 올바른 판단까지 내릴 수 있는 건 아니지.
거기에 더해.
[키아아악!!]
어깨에서 피어오른 검은 화염이 종려의 상처를 좀먹기 시작했다.
[소령연화(燒靈燃枠)]로 만들어 낸 불꽃.
영(靈)을 태우고 사르는.
흩날리는 염화(炎枠).
괴성을 내지르는 종려와 다시 거리를 가늠한 설천위는 도(刀)를 쥐고 자세를 낮췄다.
굳건하게 땅에 다리를 못 박고.
완벽하게 설정한 제공권(制空圈) 안에 적을 담는다.
그 뒤에 이어지는 것은 완벽한 일격.
확실하게 적을 베어 낼 수 있는 참격을…….
“꺄하! 역시 대단해.”
순간, 종려의 바로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시야가 기울어졌다.
땅이 순식간에 다가오는 느낌.
상황을 인지한 순간, 설천위는 즉각 몸을 비틀었다.
전투의 흥분과 성장으로 얻은 고양감이 육체를 지탱하고 있는 상황.
부상이 없는 게 아니라, 참고 있는 상황이다.
소백진이 전수한 도(刀)를 사용한 것도 익숙해서만은 아니었다.
기동성이 부족한 것을 인지했기에 한 선택.
그렇기에 철저하게 제공권(制空圈)을 구축했는데…….
“대체 어떻게?”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온다.
어느새 땅에 처박힌 얼굴이 뜨겁게 달궈진 용암의 열기에 타오른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끔찍한 고통이 찾아왔지만, 설천위는 몸을 비틀었다.
어떻게든 근육을 쥐어짜고, 몸을 웅크려 일으킨다.
타오르는 피부가 녹아 흘러내리고, 겨우 고개를 든 설천위는 종려의 등 뒤에서 활짝 웃으며 손을 흔드는 언여휘와 눈을 마주쳤다.
바닥에 쓰러진 설천위를 보며 언여휘가 해맑게 웃었다.
“야호~! 천위, 말했잖아? 죽지 말라고.”
아귀들이 설천위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 * *
설천위를 뒤로하고 동굴에 도착한 살존은 이미 초토화된 동굴의 입구를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백유!”
“스승님!!”
검은 촉수를 베어 내던 백유는 살존의 등장에 크게 웃었다.
“마침 잘 왔네! 딸내미 좀 어떻게 해 봐요!”
“내 딸이 문제를 일으키는 게 아니다.”
“그게 아닌 것 같아서 그렇죠!”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은 백유는 다시 동굴에서 솟구친 검은 촉수를 베어 넘겼다.
그리고 그런 백유의 곁에서 그녀를 돕던 청아는 조마조마한 얼굴로 살존을 바라봤다.
“주인님은요?”
“……언여휘와 싸우고 있다.”
언여휘와 싸우고 있다.
그 말에 담긴 위험성을 모르지 않을 텐데.
입술을 작게 깨물고 고개를 돌리는 청아의 모습에 살존은 조용히 단검을 들었다.
그렇게 주인을 잘 따르던 저 아이마저 자신의 주인을 믿고 이 자리에서 힘을 쏟고 있다.
주인이 다른 곳에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완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다.
그렇다면.
이쪽도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낸다.
날카롭게 단검을 세운 살존은 백유가 틀어막고 있는 동굴의 입구를 향해 단검을 겨눴다.
극한까지 예리하게 벼려진 그녀의 살의가 동굴에서 뻗어 나오는 촉수들을 베어 낸다.
고작해야 영력으로 만들어 낸 촉수.
백유는 강기를 두른 단검으로 베는 게 고작이었지만, 살존은 아니다.
부상당한 손을 늘어트리고 살존은 앞으로 걸어 나갔다.
의지에 반응한 기(氣)가 참격이 되어 앞에 있는 적을 가른다.
그리고 그렇게 갈라내고 갈라내며 안으로 걸어가던 살존은 순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광경.
그녀의 뒤로 다가온 백유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스승님, 저 딸내미 좀 어떻게 할 수 있죠?”
흐릿한 눈으로 허공을 바라본 채 서 있는 백수아.
그녀의 불투명한 동공이 백유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두 사람을 응시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살존은 이를 악물고 단검을 겨눴다.
“내 딸이라면 말릴 수 있었겠지만, 안타깝게도 저건 내 딸이 아니다.”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상대도 그녀를 한눈에 알아봤다.
기이할 정도로 비틀린, 기분 나쁜 미소와 함께 백수아의 입이 뻐끔거렸다.
육성으로 만들어 내는 목소리가 아닌, 공간을 울려 만들어 내는 목소리.
[오랜만이구나, 살존(殺尊).]
재(災) 등급의 악귀, 손휘가 깨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