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4화
393화-손휘 (9)
“꺄하하! 대단하네! 응용력이 말도 안 되는 수준이야.”
흑관을 변형시켜 도(刀)를 만들어 낸 설천위의 모습에 웃음을 터트린 언여휘는 양팔을 활짝 펼쳤다.
“좋아! 얼마든지!”
언여휘의 뒤에서 솟구친 종려가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순식간에 설천위의 코앞까지 도달한 종려의 주먹이 설천위를 후려치고.
“후우…….”
반으로 갈라진 종려의 팔 너머로, 설천위가 호흡을 내뱉었다.
뜬금없이 완벽하게 반으로 갈라진 자신의 팔에 고개를 갸웃한 종려는 이내 허리를 비틀었다.
오른팔을 당기고, 왼팔을 내지른다.
그 잠깐의 동작만으로 반으로 갈라졌던 오른팔은 완치되고.
쾅!!
강렬한 일격이 설천위를 덮친다.
“더럽게 단단하네.”
그리고 [살악(殺握)]이 쥔 [패룡도(覇龍刀)]로 그것을 막아 낸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베려고 했는데, 베지 못했다.
제공권(制空圈)이 완전하지 못하다는 증거다.
자신의 영역을 자유자재로 다루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너무 욕심을 부려 과한 영역을 설정한 것인가?
능력에 비해 너무 넓은 영역을 손에 쥐려고 한 것인가?
‘아니.’
그렇지 않았다.
확신이 들었다.
이 정도는 충분히 해낼 수 있다.
부족한 것은 단지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뛰어난 오성을 지녔기에 설천위는 자신이 배운 거의 모든 것을 기억하고 있다.
천마에게, 소백진에게, 현태중에게, 암영의적에게, 청아에게, 혈교의 술사에게.
자신이 품은 혼들에게 배운 것은 물론, 학관 시절과 잠깐이나마 성화린에게 배웠던 것까지.
전부 기억했다.
여태껏 배운 모든 것을 써먹지 못한 것은 순전히 그것을 재현해 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재현해 낼 수 있는 것들만을 배운 성화린의 가르침은 전부 써먹다 못해 스스로 응용하고 발전시켜 나가고 있지 않은가.
배움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단지, 그것을 실행할 능력이 없을 뿐이다.
그런데.
그 능력이 지금도 부족한가?
혼(魂)은 육체를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증명했다.
스스로, 자신의 힘으로 증명했다.
그렇다면.
“충분해.”
능력은 충분하다.
어느새 완전히 회복된 종려의 오른팔이 설천위를 후려친다.
막고 있던 왼팔을 베어 내고, 다시 그 경로에 도달한 도(刀)가 오른팔을 베어 낸다.
절단엔 실패하고, 가죽과 살만을 베어 냈다.
그대로 밀고 들어온 팔에 밀려 설천위의 몸이 허공을 날았다.
자신이 만든 결계의 벽에 처박혀 땅바닥을 굴렀지만, 즉시 일어났다.
어느새 접근한 종려의 주먹이 다시 한번 파고든다.
막았으나, 막아 내지 못했다.
베었으나, 잘라 내지 못했다.
몸이 날아간다.
바닥을 구르고.
벽에 처박히고.
충격에 내장이 뒤틀린다.
그럼에도.
“후우.”
설천위는 일어섰다.
[살악(殺握)]은 단 한순간도 놓지 않은 도(刀)를 휘둘렀다.
베고, 또 베었다.
몇 번을 맞고.
몇 번을 베었을까.
어느 순간, 깨달았다.
[살악(殺握)]이 쥔 도(刀)가 자신이 배운 것과 같은 궤적을 그리고 있음을.
완전히 똑같은 영역에 도달했음을.
그리고 그 순간부터.
서걱.
베는 순간, 잘라 낼 수 있게 됐다.
피륙을 가르고, 뼈를 가른다.
옆구리를 노리고 파고들던 주먹을 잘라 내고.
머리를 내려찍는 발을 잘라 냈다.
자르고, 자르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순간, 눈이 마주쳤다.
정확하게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3개의 동공.
그리고.
“꺄하!”
미소 짓고 있는 언여휘.
그 순간, 베었어야 할 것을 베지 못했다.
도(刀)를 지나 파고든 주먹이 설천위의 복부에 꽂혔다.
여태까지 없었던 제대로 된 일격.
그야말로 내장이 뒤틀리고, 뼈마디가 으스러질 것 같은 통증과 충격이 밀려들었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도를 쥐지 않은 [살악(殺握)]의 왼손으로 종려의 어깨를 움켜쥐고 버텼다.
이거구나.
완벽한 순간, 단 한순간의 빈틈을 파고드는 반격.
언여휘가 종려에게 부여한, 살존의 심장을 찌를 수 있는 비수.
직접 당하니 감이 왔다.
이거.
못 이긴다.
제공권(制空圈)이라고 해서 만능은 아니다.
인간이 하는 일이기에 당연히 1의 이득이 있으면 1의 손해가 있다.
영역 내로 들어오는 모든 공격에 반응해 낼 수 있지만, 당연히 그 대가도 있다.
반응했지만, 방어에 실패했을 때.
치명적인 빈틈이 드러난다.
지금 복부를 맞아 내장이 뒤틀릴 것 같은 충격에 피를 토하고 있는 게 그 증거다.
솔직히 말해서,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다.
이런 반격을 당했는데, 고작 팔 하나 내주고 끝난 살존의 대처에 말이다.
이쪽의 공격을 완벽하게 읽어 내고, 그 찰나의 틈을 찌르는 반격이라니.
이런 개사기 기술을 무슨 이런 괴물이 쓴단 말인가.
이거,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다.
진짜.
더럽게 강하네.
“천위, 많이 아파? 슬슬 그만할까?”
피를 토해 내며 비틀거리는 설천위의 모습에 언여휘는 안쓰럽다는 듯 쪼르르 다가왔다.
적인 언여휘가 되레 설천위를 걱정하는 광경.
그 기묘한 광경에 의문을 품을 사람이 이곳에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으나.
설천위도, 언여휘도 그런 건 신경 쓰지 않았다.
“카악! 퉤!”
자신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언여휘의 팔을 쳐 낸 설천위는 비틀거리며 일어나서 피 섞인 가래를 뱉었다.
“언여휘.”
내공을 끌어다가 최대한으로 [회복]을 운용하며 설천위는 도를 어깨에 걸쳤다.
어깨가 없는 [살악(殺握)]이 어설프게 그 동작을 따라 했다.
“내가 왜 수라도(修羅道)랑 잘 맞는지 얼추 알 것 같다.”
“응? 정말?”
“어.”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언여휘를 향해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더럽게 아파도, 너 같은 새끼 면상만 보면 싸우고 싶어지네.”
자세를 낮춘 설천위의 왼손이 땅을 짚었다.
덩달아 [살악(殺握)]의 왼손 또한 땅을 짚었고.
도(刀)를 휘둘렀다.
언여휘를 통째로 갈라 버리는 일격.
말 그대로 목을 베어 버릴 일격이었으나, 설천위가 노린 건 언여휘가 아니었다.
언여휘를 지키기 위해 그녀의 등 뒤에 선 종려.
벤다고 죽지도 않는 언여휘를 지키기 위해 방어를 선택한 종려의 팔을 [살악(殺握)]의 도(刀)가 가른다.
팔을 자르고, 옆구리를 갈라 심장에 닿는다.
인간이라면, 아니 웬만한 괴이라고 할지라도 목숨이 위험할 치명상이지만.
[크우어어어어!!]
“더럽게 터프하네.”
호쾌하게 몸을 털어 낸 종려는 재생된 팔로 설천위의 도를 붙잡고 날려 버렸다.
바닥을 짚고 있던 왼손으로 움켜쥔 흑관이 뜯겨 나가며, 허공으로 떠오른 설천위는 새삼 깨달았다.
“역시 양팔만으론 부족한가.”
천천히 아래로 떨어지며, 태평한 목소리로 설천위는 몸을 틀었다.
두 다리로 땅에 안착.
깔끔한 자세로 다시 일어선다.
온몸에 피가 흐르고, 입가에서 흐른 피가 마르기도 전에 또 주르륵 흘러내렸지만.
“좀 더.”
설천위의 두 눈은 똑바로 종려를 향하고 있었다.
압도적인 재생 능력.
제공권(制空圈)을 무력화시키는 찰나의 틈을 노리는 반격.
유일한 빈틈인 언여휘는 그냥 베는 것으론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인형이고.
심지어 그런 인형조차 종려의 보호 아래 멀쩡한 꼴로 웃고 있다.
어디에 승산이 있는 걸까.
어디에 희망이 있는 걸까.
똑바로 이쪽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두 눈동자에 언여휘는 자신도 모르게 입을 가렸다.
‘아아.’
참을 수 없어.
저 눈.
저 눈이다.
저런 눈을 한 아이들은 언제나 나를 만족시켜 줬었지.
응.
언제나.
그러니, 나도 언제나처럼.
“가져야겠어.”
그 녀석들의 눈치도 있고 해서 천천히 길들일 생각이었지만, 역시 지금 가져가자.
입술을 핥은 언여휘가 손을 뻗었다.
지금 확실하게 제압하려면, 역시 술법을 써야 한다.
나쁘지 않은 기회다.
응.
그러니 지금…….
무언가에 홀린 듯 영력을 끌어올리던 언여휘는 순간 오싹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방금, 뭐지?
내가 이렇게 느낄 만한 무언가가 있나?
아닌데?
설천위가 강하긴 하지만, 그리고 실전 속에서 성장하는 괴물이라곤 하지만 아직까진 이곳에 닿지 못하는 게 확실한데?
자신의 감을 확신에 가깝게 신뢰하는 언여휘가 떨떠름함에 고개를 갸웃거리는 순간.
종려의 팔을 잘라 낸 설천위가 고개를 들었다.
“아아.”
그 안에 담긴 것은 아쉬움.
그것을 인지한 순간, 언여휘는 자신의 불안감마저 잊고 다시 탐욕이 들끓었지만 그것을 터트릴 순 없었다.
“언여휘.”
차갑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설천위가 그녀를 불렀으니까.
“선수를 쳤구나?”
“어머, 벌써 알았어? 식령을 심어 둔 건가?”
“봉인에 쓰인 법구를 네가 제작했다고 했을 때부터 예감은 했지만…….”
안 좋은 예감은 항상 맞는 법이지.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왼손을 뻗어 가볍게 휘저었다.
그리고 그에 맞춰 주위를 가득 메운 결계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크우어어어어!]
결계의 붕괴에 반응하듯 미친 듯이 돌진해 오는 종려에 맞서 설천위는 도(刀)를 움직였다.
좀 더 세밀하게, 좀 더 견고하게.
[살악(殺握)]의 손으로 쥔 도(刀)로 만들 수 있는 제공권(制空圈)을.
줄이지 않고, 더욱더 다듬는다.
물론, 종려의 반격에 따라가지 못하는 부작용은 다시 그대로 설천위를 덮쳤다.
좀 더 세밀하게 하고자 했으나, 아직도 구멍이 있었고.
좀 더 견고하게 하고자 했으나, 아직도 무른 곳이 있었다.
빈틈을 파고든 일격이 설천위를 뒤흔들고, 상처가 늘어간다.
[회복]으로도 따라잡지 못하는 내상이 격렬하게 설천위를 뒤흔든다.
그리고 결계가 무너지고 쏟아져 나온 아귀들 중에서 제공권(制空圈) 안으로 들어오는 아귀들을 베어 넘긴 설천위는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그러자, 시선이 느껴졌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나약한 시선이.
“뭐 해요?”
고개를 돌리니 망설임이 가득한 눈동자로 이쪽을 바라보는 살존의 모습이 보였다.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몇 번이나 봤던 얼굴.
후회로 가득 찬.
모니터 화면에서만 보고 싶었던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확신이 들었다.
여기서 해야 한다.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다.
해내야만 한다.
설천위에게 전수해 준 소백진의 도법(刀法)은 다리가 약한 소윤혜를 위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다리가 아예 필요 없는 것은 아니다.
정말 최소한의 버팀목 정도는 필요하다.
그렇기에.
양팔로는 부족하다.
설천위의 등을 타고 내려온 영력이 그의 허리와 다리를 감싼다.
화려한 움직임은 없다.
애초에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무공이니까.
그저 서서, 확실하게 버틸 수만 있으면 된다.
두 다리로 땅에 서고, 설천위의 도(刀)가 하늘을 향한다.
[살악(殺握)]이 손에 쥔 패룡도(覇龍刀)가 하늘을 가리킨다.
검에 새겨진 패룡의 문양이 빛나고.
그 위에 피어오르는 것은 검은 불꽃.
그 안에 담긴 것은 설천위가 여태껏 쌓아 온 모든 것.
기이할 정도로 반짝이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언여휘를 무시하고, 하늘을 향했던 도(刀)를 내리긋는다.
몸은 움직이지 않으나, [살악(殺握)]으로 만들어 낸 사지는 확실하게 움직여 설천위의 무(武)를 재현해 냈다.
[단천(斷天)]
언여휘가 만들어 낸 아귀도가 갈라진다.
용암으로 가득 찬 땅이.
메케한 연기로 가득한 하늘이.
그 안을 메운 아귀들이.
갈라진다.
그리고 그 일격 너머, 평소와 같은 하늘 속에서 일렁이는 검은 존재에 설천위는 고개를 돌려 살존을 바라봤다.
“빨리 가요. 우리 애도 죽을 것 같으니까.”
백유의 뒤에서 열심히 영력으로 뭔가 하고 있는 청아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설천위는 도(刀)를 움직였다.
살존을 향해 몸을 날리는 종려를 베어 낸다.
팔을 가르고, 다리를 잘라 냈다.
본래라면 언여휘의 힘을 이용해 단숨에 재생되어야 할 팔다리의 재생이 더디다.
그 찰나의 순간, 살존은 이미 사라졌고.
“자, 우리도 슬슬 마무리 단계로 가야지?”
일렁이는 불꽃으로 도(刀)를 휘감은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