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3화
392화-손휘 (8)
“살존을 살리고 싶으면 빨리 선택해야 할걸?”
방긋방긋 웃으며 상체를 옆으로 기울인 언여휘는 애교 있게 웃었다.
“천위가 과부를 좋아하는 취향인 줄은 몰랐지만, 난 이해해. 자고로 다른 사람의 것을 뺏는 게 진정한 쾌감 아니겠어?”
“……헛소리 그만해라.”
언여휘를 상대론 무시가 답이지만, 이번만큼은 반응할 수밖에 없었던 설천위는 비틀거리는 몸으로 허리를 폈다.
고개를 들고 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흐르는 피를 닦아 내니 시야가 환해진다.
이마가 조금 찢어져 피가 난 수준인가.
전신에서 올라오는 욱신거리는 통증을 무시하며 설천위는 언여휘를 응시했다.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미소, 놀러 나온 것처럼 가벼운 몸짓.
마치 어린아이가 함께 놀자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외양은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흐뭇한 미소가 절로 나올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데?”
그 안에 어떤 인간이 있는지 알고 있는 설천위의 표정은 차갑기만 했다.
외견에 휘둘리지 않을 만큼 수양이 깊은 건 아니지만, 내면을 알고도 넘어갈 만큼 머저리도 아니니까.
차갑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반응에도 히죽히죽 웃은 언여휘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거래! 우리 천위가 뭘 하고 싶은지 알거든? 그러니까 거래하자!”
“꺼져.”
“에에? 무슨 내용인지도 안 듣게?”
“거래라는 건 상호 신뢰가 있어야 하지.”
후, 가볍게 호흡을 고른 설천위는 삐걱대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세를 갖췄다.
기수식.
여태까지 해 왔던, 그 자세를 취한 설천위는 차가운 눈으로 언여휘를 바라봤다.
“뒤통수는 치지 않을 거라는 최소한의 신뢰도 없는 놈하고는 거래 안 한다.”
[섬벽권(閃霹拳) 절초(絶招) 섬벽(閃霹)]
단숨에 땅을 박찬 설천위의 주먹이 언여휘를 꿰뚫는다.
극에 달한 속도가 만들어 낸 섬전의 일격.
꽈악!
하지만, 거기까지다.
언여휘의 등 뒤에서 손을 뻗은 종려에게 잡힌 주먹을 설천위는 비틀어 빼냈다.
‘……반응 계열인가?’
살존의 부상.
저 괴물이 살존의 은신을 파훼했다는 증거다.
살존의 은신을 그냥 꿰뚫었을 리는 없고.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극한의 반응 속도로 찰나의 틈을 붙잡는 것.
살존이 은신 상태에서 공격을 실행하는 그 찰나.
정말 말도 안 되는 그 짧은 순간에 예지 수준의 반응으로 대응함으로써 살존에게 반격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게 가능한 이유는 아마도…….
‘술법.’
언여휘가 펼치고 있는 무언가다.
천구(天拘)로 언여휘와의 연결을 끊은 순간.
종려는 별다른 반응도 하지 못하고 천구(天拘)에 당했다.
살존의 공격에 반응할 정도의 반사 속도를 가지고 있다면, 천구에 갇혔다고 한들 일구(一拘)를 피하고, 그다음에 이어지는 공격도 전부 피했을 거다.
거기다.
단 한 번의 반격만으로 살존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의 파괴력.
분명 종려는 강하지만, 언여휘가 곁에 선 순간 그 힘의 수준이 완전히 달라졌다.
술법을 통한 강화라는 아주 단순한 방식으로 이렇게 극적인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나 의문이 들긴 했지만.
상대가 언여휘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최악, 최강의 술사.
무림맹이나 사천맹에서 단주를 맡고 있는 술사들조차 상대가 되지 않는 괴물이다.
살아온 세월만큼, 쌓아 온 시체의 수만큼 그 강함은 인간의 상식을 아득히 벗어났다.
지독하리만치 조심성이 많은 성격 덕에 웬만한 초고수보다 장수하는 노괴.
공략의 틈이 보이지 않는 강적이지만.
참으로 묘하게도, 그 지독한 조심성이 유일한 빈틈이다.
본체를 철저하게 감추고 인형만을 사용하는 방식.
아마 얼마 전에 혈천을 데리고 왔던 그 언여휘도 본체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특수하게 만든 본체에 가까운 분신일 터.
혈천을 다루고, 살존을 경계하기 위해 비싼 재료로 만든 분신을 직접 조종한 것일 거다.
그래.
분신.
언여휘가 어느 정도 제 실력을 발휘하려면 비싼 재료로 만든 분신이 필요하다.
함부로 쓰지 않는 분신이.
지금 눈앞에 있는 인형이 아닌 진짜 분신.
‘오령귀문진(五靈鬼門陣)이라고 했나.’
본체와 연결을 강화시키는 술법이라고 했지.
종려를 강화하고 자성영역(自省靈域)을 사용하기 위한 시작점.
그걸 깨부술 수 있다면, 승산은 이쪽으로 넘어온다.
주먹을 빼내고, 자세를 갖추는 짧은 시간.
상황 정리를 끝낸 설천위는 단숨에 두 손을 마주쳤다.
짝!!
영력을 가득 머금은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 나간다.
흑관으로 만든 공간이 흔들리고, 밖에서부터 퍼져 오는 진동이 거세진다.
흑관 밖에 있는 아귀들이 발악하는 소리가 더욱 격렬하게 전해져 오지만.
“꺄하하! 찾고 있는 거야? 오령귀문진(五靈鬼門陣)의 중심을?”
설천위가 무엇을 하는지 단박에 간파한 언여휘가 웃으며 손을 휘저었다.
“무리무리. 무식하게 무공이나 배운 세월이 전부인데, 아무리 천위 네가 재능이 뛰어나도 그건 무리야.”
히히 웃으며, 언여휘는 안쓰럽다는 듯 설천위를 바라봤다.
“차라리 성화린 그 계집의 밑에서 배웠더라면 이런 꼼수 정도야 금방 분쇄했을 텐데. 안타깝네. 걔가 많이 부족하긴 해도 기본은 하는 아이거든.”
검지로 자신의 볼을 찌르며 한숨을 내쉰 언여휘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뭐 지금부터라도 늦지 않았어. 자, 나랑 같이 가…….”
쩡!!
강렬한 소음과 함께 자신의 말이 묻혀 버린 언여휘가 고개를 돌렸다.
종려의 손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게 보였다.
“언여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살악(殺握)]을 꺼낸 설천위가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은 채 그녀를 바라봤다.
“여기서 죽어도 너 같은 걸 스승으로 모실 생각은 없다.”
[흑관(黑棺) 개(改)]
설천위의 머리 위에서 [살악(殺握)]이 한 손은 주먹을 쥐고 다른 한 손은 손바닥으로 그 주먹을 감쌌다.
그리고.
똑같은 손 모양을 취한 설천위가 천천히 도(刀)를 뽑아내기 시작했다.
음각(陰刻)된 용(龍)의 문양이 도신을 타고 흐른다.
얇은 도신의 폭은 손가락 두 마디 정도였고, 그 길이는 설천위가 양팔을 크게 벌려야 그 끝이 보일 정도로 길다.
후웅!
그리고 똑같은 형태의 도(刀)를 손에 쥔 [살악(殺握)]이 거친 소리와 함께 완전히 도를 꺼내 들었다.
“주먹으로 할 수 있는 거라면, 도(刀)로도 할 수 있겠지.”
[패룡도(覇龍刀)]
자세를 갖추고, 천천히 자신의 공간을 가늠한다.
하는 것은 전투 중에 항상 해 오던 것.
언제나 해 왔던 것.
자신의 손이 닿는 영역을 가늠하고.
그 영역만큼은 확실하게 손에 넣는다.
제공권(制空圈).
무(武)의 기초이자 끝.
“뭐, 잘됐어.”
내면세계에 들어가서 수련한다?
나쁘지 않은 이야기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영적인 부분으로 수련하는 게 좋다면, 이 [살악(殺握)]으로도 충분하겠지.
“지금부터 수련 시간이다.”
* * *
“……지독하군.”
설천위가 만들어 낸 흑관의 결계 밖.
언여휘마저 사라져 홀로 남은 살존은 지독한 유황 냄새에 코를 막았다.
바닥에 깔린 용암.
사방에서 아우성치는 아귀들.
이곳이 정녕 그녀가 알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끔찍한 공간.
지독한 악취 속에서 살존은 조용히 기를 가라앉혔다.
상황이 좋진 않으나, 그것이 조급해질 이유가 되진 않는다.
침착하게 모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모으고,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한다.
그것이 생존과 임무 완료로 가는 지름길이다.
‘아마도 반응을 강화하는 방식일 터.’
종려와의 전투를 복기한 살존은 얼추 종려의 능력에 대한 답을 내린 상태다.
극한의 반응 속도.
공격의 순간.
극히 짧은,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
그 순간을 읽어 내 반응한다면 그 괴물이 자신에게 반격을 가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언여휘의 주술이 더해진다면 더더욱 실현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만.
‘무엇을 희생했지?’
술법은 만능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제약이 아주 많은 편에 속한다.
강한 육체까지는 여러 제물을 이용해 언여휘가 어떻게든 만들어 낸다고 치더라도, 자신의 은신을 따라올 정도의 반응 속도는 쉽게 구현해 낼 수 없다.
거의 예지에 가까운 반응이 필요할 터.
무언가를 크게 희생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결과물이다.
문제는 종려에게는 딱히 부작용이 없어 보였다는 점이다.
속도도 반응에 따라갈 정도로 빨랐고.
근력도 살존의 팔을 단숨에 뭉갤 정도로 강했다.
대체 무엇을 희생했기에 그런 강함이 가능할까.
그 답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아무리 설천위라도 이길 수 없다.
‘지금 당장 그 아이에게 나 이상의 전투력을 요구하는 건 무리다.’
혼을 통한 수련법을 조금 더 일찍 알려 줬어야 했나.
그렇다면 준비할 시간이 좀 더 있었을 텐데.
때늦은 후회를 하며, 살존은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종려의 약점을 알아내는 것도 알아내는 거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일단 설천위가 있는 곳으로 합류하는 거다.
반구 형태의 검은 결계.
그 주위를 감싼 아귀들은 어느새 벽을 타고 기어올라 그 천장까지 가득했다.
마치 무언가를 갈구하듯 벽을 긁고 때리기를 반복하고 있는 아귀들.
그 모습을 차가운 눈동자에 담으며 살존은 천천히 결계에 접근했다.
일단 방법은 두 가지.
강제로 열고 들어가거나, 설천위가 열어 주길 기다리거나.
다만, 후자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언여휘가 저 안으로 들어갔을 테니 전투는 더욱 치열해졌을 터.
아귀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설천위가 이쪽의 움직임을 읽고 안으로 들여보내 줄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방법은 역시 하나뿐.
다만.
‘단숨에 가르면, 바로 재생할 수 있나?’
아귀들의 처리야 쉽지만, 그래도 적이 많아지는 건 좋지 않다.
하물며 이쪽은 팔 하나도 성치 못한 상태.
괜히 무리하게 들어갔다가 역으로 적에게 기회를 줄 수도 있다.
정보가 없으니 어찌해야 할지 고민되는 상황.
지금 당장 언여휘의 자성영역(自省靈域)을 해결할 방법도 없다.
“……오랜만이군.”
이렇게 무력하게 느껴진 적은.
딸이 그 악귀 놈에게 당하고 난 뒤로 끊임없이 느낀 감정이라 생각했거늘, 이리 겪으니 여전히 심장을 아프게 후벼 파는구나.
잠시 딸이 있는 동굴 쪽을 바라본 살존은 천천히 단검을 들었다.
자신의 욕심으로 끌어들인 아이다.
이런 방식으로 끝을 맞이하게 둘 순 없다.
아귀들이 조금 섞여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이쪽이 손을 보태는 것만으로 설천위의 숨통이 조금은 트일 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살존이 검에 의지를 담는 순간.
쿵!
저 멀리서 울려 퍼져오는 진동에 살존의 단검이 멈췄다.
그리고 극한까지 단련된 살존의 눈에 그것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수아야!”
동굴에서 일렁이는 검은 기운.
그 앞에서 미친 듯이 단검을 휘두르고 있는 제자 녀석.
예정보다 훨씬 더 빠르게 놈이 깨어났다.
딸의 치료 과정이 완전히 일그러진 것을 깨달은 순간, 땅을 박차려 했던 살존은 이내 이를 악물고 멈췄다.
“……후.”
정신 차려라.
이성을 유지해라.
자신이 지금 딸에게 가서 무엇을 해 줄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을 도우러 온 아이가 저 안에서 괴물 같은 노괴랑 싸우고 있는데.
“나는…….”
어찌 내가 먼저 버릴 수 있단 말인가.
딸을 믿자.
끝까지 버텨 줄 거라고…….
그 아이는, 나를 닮아 강하니까…….
강한 아이…… 니까.
단검을 쥔 손이 떨린다.
무(武)의 경지를 떠나 사람으로서 품은 원초적인 공포가 그녀를 잠식했다.
내 아이.
내 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그것이 그녀의 칼끝을 무디게 만들기 시작하는 그때.
키에에에에!!
키아아악!
결계가 무너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사라진 결계에 아래로 떨어진 아귀들이 괴성을 내지르고.
“하아, 하아.”
피투성이가 된 설천위가 도(刀)를 손에 쥔 채, 살존을 바라봤다.
망설임으로 가득한 살존의 눈동자 속에 기묘한 미소를 지은 설천위가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이 들어왔다.
“뭐 해요?”
[살악(殺握) 참수(斬首)의 형(形)]
설천위의 등 뒤에서 나타난 손이 쥔 흑도(黑刀)가 하늘을 찍고, 땅에 닿는다.
[단천(斷天)]
아귀도가 갈라지고, 길이 열린다.
“빨리 가요. 우리 애도 죽을 것 같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