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92화
391화-손휘 (7)
자성영역(自省靈域).
그것은 괴이의 힘이다.
가진 능력이 강화된 끝에 공간 전체를 집어삼키는 것.
일전에, 설천위가 백화단주를 따라 임무를 수행하러 갔다가 본 공간이 뒤틀린 장원.
그 장원도 자성영역의 발현이다.
힘으로 공간 전체를 채워 자신만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것.
그게 자성영역(自省靈域)이라는 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엄밀히 말해 악귀가 그 공간의 주인이 되는 것을 뜻한다.
그곳에서는 술사의 술법이 어그러지고, 영력은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술사에게 자성영역(自省靈域)을 발현하는 악귀는 공포 그 자체다.
가진 능력의 2할도 발휘하지 못하는 환경 속에서 수많은 술사들이 죽어갔다.
수많은 희생 끝에 술사들이 깨달은 대처법은 그곳에서 자신들의 영역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악귀가 자신의 땅을 만들고 그곳에 웅크리고 있다면.
그 안으로 쳐들어가 자신의 땅을 선포하면 된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술사의 자성영역(自省靈域)이다.
술사 본인의 깨달음, 지식, 지혜, 신념 등등.
모든 것이 담겨 있는 그야말로 술법의 정수.
무학으로 따지면, 화강(化罡)과 비슷하다.
초인의 증거이면서.
또 한 번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자질의 증거.
정녕 괴물로 향하는 길에 설 자격.
그것이 화강(化罡)이고, 자성영역(自省靈域)이다.
그렇다면 화강(化罡)이라고 다 똑같을까?
자성영역(自省靈域)이라고 전부 비슷한 위력을 가졌을까?
물론 당연히 아니다.
성질, 뿌리, 발동 방식 등으로부터 시작해 시전자 개인의 역량까지.
화경 시절의 살존이 만들어 냈던 화강(化罡)은 현경 시절의 살존이 만들어 내는 화강(化罡)에 한참 미치지 못하듯.
자성영역(自省靈域)에도 급이 있다.
그리고.
“이런 미친……!”
언여휘의 자성영역(自省靈域)은 정점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순히 술사로서의 역량을 총동원한 것을 넘어서서.
그녀가 품고 있는 육도(六道)의 힘을 녹여 낸 자성영역(自省靈域).
그것은 이미 인간이 품어도 되는 힘이 아니었다.
밑에서 올라온 아귀의 손에 발목이 잡힌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몸을 비틀었다.
동시에 [살악(殺握)]으로 만들어 낸 손을 팔처럼 굽혀 몸을 감쌌다.
그 직후, 강렬한 충격이 설천위의 몸을 뒤흔들었다.
종려가 내지른 주먹에서 밀려오는 압도적인 충격.
[살악(殺握)]으로 막아 내지 않았더라면, 몸이 곤죽이 되다 못해 터져 나갔을 무시무시한 파괴력이다.
이를 악물고 버텨 낸 설천위는 즉시 영력을 끌어올렸다.
뿌드득!
흑관을 발판 삼아 한 걸음 올라서며, 강제로 다리를 끌어올렸다.
땅에 하체가 박혀 있는 아귀의 팔이 끊어졌지만,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마른 장작처럼 비틀어진 팔은 가볍게 으스러져 흩어진다.
쾅!!
그 순간, 정면을 때리는 강력한 충격에 몸을 감싼 [살악(殺握)]을 더욱 굳건히 굳힌 설천위는 눈을 돌렸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
‘……후.’
없다.
그새 모습을 감춘 살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아귀들도 허공을 헤집고 있는 상황.
그래, 아무리 그래도 자성영역(自省靈域) 하나만으로 살존을 잡을 순 없겠지.
언여휘의 자성영역(自省靈域)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만으로는 살존을 붙잡을 수 없다.
그렇게 판단한 설천위는 즉시 자세를 고쳤다.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저 괴물 놈만 해치운 다음 천천히 자성영역(自省靈域)을 해제하고 빠져나가면 된다는 소리다.
[크르르…….]
낮은 울음소리와 함께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괴물.
세로로 갈라진 세 개의 동공이 인상적이다.
그런 종려를 보며 설천위는 양손을 가슴 앞으로 모았다.
“육체를 기반으로 만든 악귀, 마(魔)의 일종.”
언여휘의 특기 분야다.
강시(僵尸)를 시작으로 사자(死者)의 육체를 다루는 소귀법(召鬼法)을 갈고닦은 후.
혼을 다루는 반혼술(返魂術)을 이용, 혼을 모아 마치 고독(蠱毒)과 같이 골라낸다.
생물이라 부를 수 없는 기괴하게 강화된 죽은 육체에.
수많은 혼과 악귀를 먹어 치우고 완성된 혼이 합쳐져 만들어지는 것.
언여휘는 그런 존재들을 하나로 엮지 않고, 각자의 이름을 붙인다.
마치 자식처럼.
“이름이 종려였던가?”
그렇기에 설천위는 담담하게 움직였다.
앞으로 모은 양손에 영력을 흘려보낸다.
종려.
게임에서 몇 번 봤던 네임드다.
언여휘가 다루는 인형들 중 하나.
그것도 후반까지 등장하는 괴물 중 괴물.
다행히 지금 시기가 이른 만큼 게임에서 나온 수준으로 완성된 것 같진 않지만.
그래도 상대하기 버거운 괴물이라는 건 틀림없었다.
언여휘에겐 내가 있는데 이런 걸 왜 가져왔느냐고 큰소리를 치긴 했지만.
쉽게 처리할 수 없는 적이란 건 분명했다.
영력이 충분히 모인 것을 확인한 설천위는 오른손으로 원을 그렸다.
그리고 그런 설천위의 모습에 기다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종려가 땅을 박찼다.
단숨에 설천위를 짓뭉개 버리겠다는 듯, 양손을 모아 깍지를 끼고 망치처럼 내려찍는다.
마치 운석이 날아든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일격을 [살악(殺握)]으로 받아 낸 순간.
설천위는 이를 악물 수밖에 없었다.
살악으로 힘의 상당 부분을 받아 냈음에도 그 충격이 땅을 내려앉혔다.
반구의 형태로 파인 땅.
찌릿찌릿한 충격에도 설천위는 손으로 원을 그리는 것을 멈추지 않는다.
익힌 술법이 한정되어 있기에 이런 상황에서 무엇이 효과적인지 잘 모른다.
그러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한다.
상성 따위 무시하고 적을 찍어 누를 수 있는 선택지를 고른다.
그리고 그 시작은.
“후우……!”
쿵!!
당연히 이것.
설천위의 오리지널이면서 기이할 정도의 운용 능력으로 극한의 범용성을 갖춘 기술.
사방을 에워싸기 시작한 흑관이 앞뒤 좌우뿐 아니라 발아래와 하늘까지 뒤덮기 시작한다.
완전한 어둠.
완전한 고립.
[흑관(黑棺) 천구(天拘)]
“후으…….”
호흡을 뱉어 내며 설천위는 손을 모아 합장하고, 그 끝을 종려에게 향했다.
“시작하자.”
설천위가 팔과 손을 살짝 비틀었다.
“일구(一拘).”
콰직!
섬뜩한 소리와 함께 박혀 들어간 흑관이 종려의 허벅지를 꿰뚫었다.
그대로 말뚝처럼 한쪽 다리를 고정시킨 흑관.
그 흑관을 종려가 뽑으려는 순간.
설천위가 조금 더 손을 비틀어 손바닥을 어긋나게 하고.
“이구(二拘).”
두 개의 흑관이 이번엔 종려의 양팔을 꿰뚫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팔을 뒤로 모아 서로 결합해 종려를 속박한다.
“삼구(三拘).”
이번엔 남은 한쪽 다리와 복부를 꿰뚫는다.
설천위가 모은 양손의 어긋남이 커지면 커질수록.
“사구(四拘).”
흑관의 수는 빠르게 늘어간다.
그리고.
“구구(九拘).”
아홉이 되고.
종려의 몸에는 이제 세는 것도 힘들 정도로 많은 흑관이 빼곡하게 박혀 그 움직임을 묶어 두고 있었다.
두 다리는 몇 개나 되는 흑관이 말뚝처럼 박혀 바닥에 고정되었고.
양팔은 뒤로 모아져 몇 개나 되는 흑관에 꿰뚫려 연결되었다.
거대한 흑관이 어깨와 복부, 가슴을 꿰뚫어 천장과 바닥에 닿았고.
이제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은 머리밖에 남지 않았다.
[크으어어어어어어!!]
찢어질 것 같은 괴성이 울려 퍼졌지만, 설천위는 담담하게 손을 움직였다.
어느새 양손 모두가 반대쪽 손목에 닿아, 가슴 앞에 일직선이 된 손으로 설천위는 양손을 움켜쥐었다.
“천구(天拘).”
천장에서부터 시작된 점은 선이 되고, 거대한 창이 되어 내려온다.
종려의 머리부터 바닥까지.
일직선으로 꿰뚫어 내려간다.
그리고.
콰직!
[크아아아아!!]
살이 찢어지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종려의 몸에서 솟구친 아홉 개의 흑관이 그 몸을 헤집었다.
비명을 내지르던 종려가 결국 조용해져 축 늘어지고.
“후우.”
가볍게 숨을 내뱉은 설천위는 양손을 풀었다.
언여휘가 살존에게 정신이 쏠린 사이에 펼친 건데, 생각보다 잘 풀렸다.
[허허, 참. 말도 안 되는구나.]
그리고 그런 설천위의 모습에 천마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말이 쉽지 지금 이곳은 언여휘의 자성영역(自省靈域) 안이다.
그 힘을 끊어 내고, 저 괴물을 이렇게 압도적으로 몰아붙이는 술법을 펼친다?
힘을 끊어 내는 단절의 술을 고작 얼마 전에 처음 사용해 본 녀석이?
배운 지 오래됐다곤 하지만, 그걸 이렇게 활용해 실전에서 쓰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다.
‘……역시 내가 너무 조심스러웠던 것인가.’
압도적인 재능.
만약 전부터 이 재능을 무(武)에 활용할 수 있게 했더라면.
지금 설천위의 강함은 이 정도가 아니지 않았을까.
이런 어려움 정도는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지 않았을까.
천마는 자신의 후회가 하나 더 늘었다는 것을 깨닫곤 쓸쓸하게 웃었다.
그래, 지금이라도 깨달은 것이 어디냐.
다른 것들과 달리, 설천위는 아직 삶을 살아가고 있는 생자(生者)다.
더 큰 후회가 없게 자신이 옆에서 도우면 된다.
그러면 되는…….
-꺄하하하, 이거 참.
순간, 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벽 너머의 목소리에 설천위의 두 눈이 커졌다.
천마조차 놀라 시선을 내리자, 그제야 보이지 않던 것이 보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바닥.
흑관이 마치 녹기 직전의 철판처럼 빨갛게 달아올라 거품이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아니,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데 녹은 쇳물처럼 거품이 끓어오르고 있다는 게 말이 되나?
그런……!
-놀려고 왔는데, 이러면 섭섭…….
푹!
“……하지!”
용암 속에서 솟구친 팔이 구멍을 넓히고, 작은 몸이 그 구멍을 지나 안으로 들어온다.
“야호! 안녕~!”
꺄하!
양손을 펼치고 선 언여휘가 히히거리며 웃었다.
“응응? 뭐야? 그새 저렇게 된 거야? 이여~! 술법은 아직 부족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가 보네?”
완전히 박살이 나다시피 흑관에 꿰뚫린 종려의 모습에 언여휘가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응, 역시 천위는 우리…….”
쾅!!
설천위의 [살악(殺握)]이 단숨에 언여휘를 후려쳤다.
인형에 불과한 언여휘라면 그대로 날아갔어야 할 일격.
하지만.
“평소 같으면 우리 천위를 배려해 맞아 줬겠지만~, 지금은 대화를 해야 하니까 안 돼!”
가볍게 검지를 뻗어 [살악(殺握)]을 저지한 언여휘가 웃으며 검지를 굽혔다.
그리고.
딱!
검지를 튕기는 것과 함께 [살악(殺握)]이 강한 반탄력에 튕겨 나온다.
언여휘의 신체 능력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압도적인 힘.
“놀란 눈빛이네. 왜? 술사가 힘으로 막은 게 의아해?”
“……후.”
언여휘의 말을 무시한 설천위는 짧은 고민 끝에 기수식을 취했다.
술법으로 언여휘를 이긴다?
아기가 일류 무인을 이기려 드는 것과 같은 수준의 오만이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술법에 한해서는 지금 언여휘가 자신보다 압도적인 역량을 지녔음을.
기껏 펼친 흑관을 힘으로 뚫고 저리 천연덕스럽게 들어올 능력을 가진 술사에게 술법으로 덤비는 건 우책(愚策)이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은 이럴 때를 위해 준비한 것을 꺼내는 것.
기수식을 취한 설천위가 자세를 낮추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천위, 뒤에.”
언여휘의 웃음 가득한 경고와 함께 설천위는 몸을 비틀었다.
동시에 그의 등에서 솟구쳐 있던 [살악(殺握)]이 양팔을 교차해 막아 낸다.
쾅!!
단 일격에 공중에 발이 뜬 설천위가 날아가 자신이 만들어 낸 흑관의 벽에 부딪혔다.
[크르르르…….]
온몸이 찢어져 마치 난자된 인형 같은 모습으로 엄청난 피를 흘리는 종려가 주먹을 거둔다.
“아이구! 우리 종려, 고생이 많아.”
그런 종려의 머리를 언여휘가 토닥이자, 흐르던 피가 역행하며 종려의 몸이 빠른 속도로 회복되기 시작했다.
마치 살존과 처음 부딪혔을 때 수준의 재생 능력.
잠깐의 접촉만으로 종려의 혼을 회복시킨 언여휘는 히죽히죽 웃으며 뒤를 돌아봤다.
“자, 그럼 천위 빨리빨리 이야기를 진행하자.”
쿵! 쿵! 쿵!
벽을 두들기는 격한 소음 속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서는 설천위를 바라보는 언여휘는 방긋 웃었다.
“살존을 살리고 싶으면 빨리 선택해야 할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