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9화
388화-손휘 (4)
완전히 장악한 공간에서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휘저었다.
형태를 이루던 영력이 흐트러진다.
손휘의 분신이 원하던 형태에서 벗어난 영력은 허망하게 흩어져 형태를 잃었다.
[크아아아아!]
거듭되는 방해.
아예 자신을 가지고 놀다시피 하는 설천위의 행동에 분신은 악을 쓰며 몸을 마구 비틀었다.
끊임없이 술법을 펼치고 영력을 뿌리지만,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
완전히 설천위의 손에 들어간 이 공동안에서 그의 의지는 어떤 결과도 만들어 내지 못했으니까.
완전 봉쇄.
이쪽의 술법조차 봉인하는 설천위의 강력한 힘이 느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름 끼치는 것은.
‘……괴물 놈!’
이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저 괴물 놈은 자각하지 못한 것 같지만, 이게 만약 단순히 의지로 만들어 내는 현상이라면.
놈이 진짜를 각성하는 순간……!
끔찍한 상상에 절로 몸이 굳어 버린다.
술법을 반사적으로 펼쳐 내고 있지만, 눈앞으로 다가온 벽의 높이를 체감해 버렸기에.
[크아아아!]
의지가 꺾여 나간다.
악을 쓰며 최대한 반항하지만, 그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이성이 깨닫는다.
부정하려 해도, 이성과 본능이 전부 외친다.
이 발악이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흠.”
설천위의 힘 빠진 소리와 함께 분신의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린다.
이제는 주먹질조차 자유자재로 하는 것인가.
공포가, 절망이 치밀어 오른다.
지금 당장에라도 포기하고, 머리를 숙여 생존을 도모하고 싶다.
하지만.
[크으으윽!]
용서하지 않는다.
뿌리 깊숙이 남아 있는 손휘의 자존심이.
자신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인 감정이.
허리를 굽히고, 고개를 조아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럴 일 없다는 듯, 견고하게 허리를 조인다.
두 눈을 부릅뜨고 악을 쓰며 술법을 시전한다.
그야말로 발악하는 분신의 모습에 땅 위에서 그를 지켜보던 설천위도 결국 고개를 저었다.
“독하네.”
손휘.
독하다는 건 알았지만, 분신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게임에서야 무조건 소멸시키는 루트밖에 고를 수 없었으니 몰랐지만, 이렇게까지 독할 줄이야.
참으로 안타깝다.
분신이라곤 하지만, 그 손휘의 분신이다.
가지고 있는 술법적 지식만 뽑아내도 상당한 수준일 텐데.
아쉬움이 영 가시질 않지만…….
‘너무 오래 시간을 끌긴 좀 그렇지.’
사흘을 최소 기한으로 잡긴 했지만, 그건 만약을 위한 경우일 뿐이다.
빠르게 마무리할 수 있다면 빠르게 처리하는 것이 가장 좋다.
욕심이 나는 건 사실이지만, 이 분신을 잡고 시간을 끄는 것은 썩 좋은 선택이 아니다.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려면 밖에서 백수아의 상태를 직접 살피는 게 최고니까.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며, 욕심을 깔끔하게 접은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모았다.
[섬벽권(閃霹拳)] 실험도 꽤 넉넉하게 했겠다.
굳이 무공으로 마무리 지을 필요는 없겠지.
“후우우.”
호흡을 뱉어내며, 가볍게 손으로 원을 그린다.
정식으로 술법을 배운 적이 없어서 거의 대부분이 임기응변에다 짜 맞추기로 만든 것들이지만.
설천위가 사용하는 술법 중에도 몇 가지 정도는 정식으로 배운 것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흑관의 기본이 되는 방어 술법과 수류계 술법이다.
물론 둘 다 제대로 된 방식으로 쓰고 있진 않지만.
여하튼, 이렇게 정식으로 배운 것을 기반으로 하는 술법은 그 토대가 상당히 탄탄하다.
덕분에 이것저것 시도하기에 좋고…….
[네놈! 무슨 짓이냐!]
그중에서 가장 쓸 만한 술법 중 하나가 이거다.
공동 내부로 차오르는 물.
순식간에 천장에 떠 있는 분신의 발밑까지 물이 차오른다.
그리고 바닥에 서서 자신을 감싸는 흑관을 만들어 낸 설천위는 반투명한 벽 너머로 분신을 바라봤다.
“쇄(碎).”
주문을 뱉고, 술법이 기동한다.
시작은 흐름이다.
공동의 중앙에서부터 시작된 거대한 소용돌이가 빠르게 물을 회전시키기 시작한다.
마치 물속 한가운데에 용오름이 생긴 것처럼.
물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돌고.
돌고.
그러다가 설천위가 있는 공간에 부딪혀 깨지고.
돌고.
또 돌고.
회전을 거듭해 가며, 물은 어느새 줄기가 된다.
하나의 선이 되어 공간을 가른다.
카가가가가각!!
거침없이 공간을 가르며 서서히 날로 변한다.
물로 만들어진 칼날.
설천위가 있는 곳에 부딪히며 난회전을 일으키기 시작한 물은 어느새 한 방향이 아닌 수십 갈래의 방향으로 회전하기 시작했다.
마치 수십 개의 날을 가진 거대한 믹서처럼.
모든 것을 갈아 버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악!]
천장에 붙어서 그 흐름에서 벗어나려 애쓰던 분신의 일부가 그 날에 휘말려 잘려 나갔다.
다리.
팔.
이제는 술법을 발동시킬 여유조차 없어 필사적으로 회복에 집중하는 분신은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복구했으나.
카가가가가가가각!!
물의 칼날은 그가 세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많았다.
베고, 찢고, 잘라 낸다.
난자한다.
그리고.
“아, 이걸 까먹었네. 오랜만에 쓰다 보니…….”
살짝 부끄럽다는 듯 뒷머리를 긁적인 설천위가 손을 뻗는 것과 함께.
[끄아아아아아아악!!]
분신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르다.
조금 전까지의 그 물줄기가 아니다.
잘려 나간 다리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통증에 몸을 비튼 분신의 눈에 드디어 그것이 보였다.
공동의 중앙을 기점으로 미친 듯이 회전하고 있는 거대한 칼날.
어느새 검게 물들어 버린 그것은 마치 이쪽의 존재 자체를 갈아 없앨 것처럼 흉흉하게 휘몰아쳤다.
그리고 단순히 기세만 그런 것이 아니라고 증명하듯 칼날은 거침없이 분신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베고, 자른다.
이를 악물고 회복하려 해도 칼날에 스며든 검은 기운이 회복을 방해한다.
양팔이 잘리고, 이제 천장에 붙어 있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영력이 흔들렸을 때.
기어이 땅으로 떨어진다.
‘아.’
설천위의 술법으로 검게 물든 천장이 보인다.
나는 여태까지 놈의 술법에 달라붙어 있었던 것인가.
그렇게 구차하게 이 존재를 유지해 왔던 것인가.
순간, 치밀어 오르는 무언가와 함께 느려진 시간이 돌아온다.
정확히 말하면.
카가가가가각!
그의 머리와 전신을 가르고 지나가는 검은 물줄기에 그 시간이 끝났다.
더 이상 사고하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약 3분.
분신이 완전히 분쇄되는 것을 가만히 기다리던 설천위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서서히 느려지는 물줄기 속에 흘러 다니는 분신의 파편엔 이제 일말의 염(念)조차 남아 있질 않았다.
놈의 지식은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손을 턴 설천위가 물을 다시 영력의 형태로 흡수하자, 공동은 순식간에 깨끗해졌다.
이윽고, 흑관마저 전부 해체하는 순간.
“……하?”
콧속으로 파고드는 강렬한 피 냄새에 정신이 번쩍 든다.
분신을 상대하면서 이쪽은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 피 냄새의 시작점은 하나.
“청아!”
즉각 문을 열고 나간 설천위는 복도에 깔린 환술을 확인하고 작게 안도했다.
술법이 온전하다.
최소한 술사는 안전하다는 소리.
특히, 괴이 출신인 청아의 술법은 본체가 무너지면 술법도 자연스럽게 무너지니 청아가 무사하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설천위는 청아가 펼친 술법에 영향을 주지 않도록 살짝살짝 움직여 복도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오, 천위 나왔네?”
동굴 입구에서 시체 위에 앉아 있는 백유의 모습을 확인하고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습이야?”
“응. 놈들의 상태로 봐선 한 곳에서 온 건 아닌 것 같은데?”
“사천맹은?”
“그 머저리들은 확실히 아니야.”
사천맹은 아니다.
백유의 확신이 담긴 대답에 설천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후보는 자연스럽게 음지쪽 조직들로 좁혀진다.
이곳을 칠 만한 동기가 있는 놈들이라면 언여휘가 몸을 담그고 있는 혈사련이나 사혈천.
아니면 혈교 정도인데…….
‘혈교는 빼야 하나?’
지금 녀석들은 살존을 적으로 돌릴 때가 아니니까.
무엇보다 놈들이 손에 넣었어야 할 특급 혈귀를 언여휘에게 뺏겼다.
살궁을 습격할 시간에 눈을 부릅뜨고 그걸 찾아다녀야 맞는…….
“아아, 이것 봐라?”
상황 파악을 위해 기감을 펼치던 설천위는 익숙한 느낌에 미간을 찡그렸다.
살궁의 외곽.
상당히 익숙한 기척이 무려 다섯이나 느껴진다.
“이 새끼들이 드디어 맛이 갔나?”
혈귀를 다섯이나 이곳에 보내?
혈귀는 혈교의 주력이긴 하지만, 절대 막 굴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재료의 수급부터 제작, 교육과 성장에 이르기까지.
상당한 품과 자원이 드는 게 바로 혈귀다.
하물며, 재료의 수급을 위해서는 어린아이들을 다수 납치해야 한다.
들키는 순간 바로 척살대가 조직되고, 추적이 들어오니 조심스럽게 제작할 수밖에 없다.
그런 혈귀이기에 혈교도 혈귀를 아껴 쓸 수밖에 없는데.
그런 혈귀를 이곳에 다섯이나 보냈다?
그만한 이득이 어디에 있다고?
살존은 사파의 정치에 나서진 않지만, 그 영향력만큼은 확실하다.
지금 혈교에서 하고 있는 사천맹의 장악 작업도 살존을 적으로 돌리면 막대한 손해로 돌아올 것이 확실하다.
막대한 손해를 감수하면서까지 혈교가 이곳을 공격할 이유는…….
“아!”
만약, 이 공격을 주도한 것이 언여휘라면.
그리고 언여휘가 혈교에게 다른 손해 따윈 무시할 수 있는 제안을 했다면.
그들이 입을 가장 큰 피해를 없앨 수 있다고 확언했다면.
“위험한데.”
살존을 죽일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왔다면.
혈교가 언여휘의 손을 잡은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즉시 백유에게 다가간 설천위는 백유의 어깨를 붙잡고 물었다.
“살존 선배의 위치는?”
“응? 스승님? 밖에서 적을 처리하고 있는 거 아닌가? 내궁 근처에서는 못 봤는데?”
과연.
이 습격을 누구보다 빨리 알아차렸을 살존이기에 유도도 그만큼 쉽다 이건가.
백유의 어깨를 놓은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돌려 뒤를 돌아봤다.
백수아의 곁에서 조마조마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청아가 보였다.
……내가 이 자리를 비워도 되나?
백수아의 상태라는 시한폭탄을 두고, 밖으로 움직여도 되나?
나 말고 다른 이를 움직인다면?
다시 고개를 돌려 백유를 바라본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살존을 죽이기 위해 언여휘가 데려온 전력이다.
단순한 무인일 리가 없다.
백유는 전력이 되지 못한다.
작게 이를 악문 설천위는 다시 백수아가 있는 관을 바라보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백유.”
설천위의 흉흉한 기세에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며 웃었다.
“이 동굴 안으로 벌레 한 마리 못 지나가게 하면 되지?”
“부탁한다.”
백유의 어깨를 가볍게 치고, 설천위는 그대로 땅을 박찼다.
애초에 백수아의 상태는 넉넉하게 시간적 여유를 두고 계획했던 거다.
지금 당장 살존을 구해야 한다면, 그쪽으로 움직이는 게 맞았다.
설천위가 사라지고, 시체 위에서 내려온 백유는 가볍게 발을 굴렀다.
화경에 오른 중후한 내공이 땅을 흔들어 시체들을 굴린다.
작은 둔덕이 되었던 것이 무너지고, 하나둘 발로 차서 치워 버린 백유는 동굴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역시, 이대로는 도움이 안 되나.”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고 직접 움직인 설천위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은 백유는 단검을 들었다.
스승이 하는 것처럼 손에서 이리저리 단검을 돌리며,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순식간에 고요하게 가라앉은 백유의 기세에 안쪽에서 숨을 참고 있던 청아는 자신도 모르게 작게 숨을 내뱉었다.
갑자기 나타나 적들을 쓸어버리고 그 위에 털썩 앉는 모습이 참…… 뭐라 말하기 힘들 정도로 무서웠지만, 그래도 아군이라고 생각하니 꽤나 듬직했다.
‘……내 할 일만 제대로 하자.’
가볍게 자신의 뺨을 때린 청아는 환술 쪽으로 걸어갔다.
환술은 확실하게 작동되고 있다.
그것을 확인한 청아는 안도하다가도 어느새 동굴에 가득 찬 피 냄새에 미간을 찡그렸다.
바로 앞에서 사람이 무더기로 죽었으니 역시 피 냄새가…….
짙은 피 냄새에 찝찝함을 느끼며 청아가 작게 툴툴대는 사이.
꿀렁.
관 속에 들어가 있는 백수아의 그림자가 꿈틀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