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88화 (388/624)

제388화

387화-손휘 (3)

혼란.

살궁에 찾아온 혼란은 이곳이 어디인지 안다는 듯 조용하게 피어올랐다.

빨래하는 아낙네들의 조용한 웃음소리가 퍼져 나오는 냇가.

은밀하게 접근한 혈의인들의 비수가 거침없이 그들의 목을 노린다.

단숨에 피가 냇물을 더럽히고.

기껏 세탁한 옷이 피로 물들기 직전의 순간.

“어머, 어머.”

까득!

“실력이 많이 죽었네요.”

혈의인의 목에 박힌 비수가 뼈에 막혀 섬뜩한 소리를 내며 비틀린다.

섬뜩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만들어 낸 것과 달리 비수를 뽑아낸 여인은 호호 웃었고.

“역시 안 쓰면 녹스는 게 칼이라니까요.”

단숨에 반대쪽 목을 그어 혈의인의 숨통을 완전히 끊어 버린 다른 여인이 안타깝다는 듯 비수를 거뒀다.

“이런……. 빨래에 피가.”

“진짜 실력이 녹슬긴 했나 보네요.”

“앗! 옷에도 튀었네!”

느긋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그리고 그것은 비단 그녀 둘만의 모습은 아니었다.

이곳에서 빨래를 하던 아낙네들 전부가 이미 비수로 자신들에게 접근하던 혈의인의 목을 그어 버린 뒤였다.

신속하고, 정확한 손놀림.

본인들은 녹이 슬었다고 말하지만, 지금 당장 무림에 나가도 일절이라 평가받을 만큼 깔끔하기 그지없는 일격.

“후, 빨래에 물도 다 안 짰는데…….”

안타깝다는 듯 빨래 바구니를 두고 일어선 여인은 물이 묻지 않도록 올렸던 머리를 풀었다.

“오랜만이네요. 침입자는.”

“그러게요.”

“경종이 울리는 게 조금 늦는 것 같은데…….”

최대한 여유롭게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며, 습관적으로 소지하고 있던 무기들의 위치를 확인한 여인들은 조용히 주위를 살폈다.

당장 주변에 보이는 적은 없는 상황.

그리고.

땡땡땡!

격하게 울리는 경종과 함께 살궁에 있던 고요가 깨진다.

평화롭게 뛰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사라지고, 은밀한 살의가 작은 마을 전체를 뒤덮는다.

살궁은 도망친 살수들이 모인 곳.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나.

다수가 살수의 삶을 경험한 이들.

그리고 살수에게 생존은 강함의 증거였다.

가만히 제자리에서 경종이 울리길 기다리던 여인들은 경종에 담긴 의미를 감지하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디가 위험하고, 어디에 적이 많은지를 높은 전각에 오른 종지기가 종소리로 알려 주고 있었다.

순식간에 산개한 여인들.

그리고 그런 여인들처럼 나무를 하거나, 사냥을 준비하던 사내들도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궁(殺宮)이.

자신의 품으로 들어온 벌레들을 향해 살행(殺行)을 시작했다.

* * *

“꽤나 실력이 좋은 녀석들인데?”

점심이 막 지난 오후.

점심이 막 지난 오후.

살존에게 오늘은 실전이라는 말을 듣고 대기하고 있던 백유는 은밀하게 접근해 오는 적들의 기척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살존에게 오늘은 실전이라는 말을 듣고 대기하고 있던 백유는 은밀하게 접근해 오는 적들의 기척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살존에게 직접 은신술을 배운 덕에 감지 능력 하나는 훌륭해졌다.

직접 쓰는 건 영 성격에 안 맞아서 능숙하지 못하지만.

살존의 제자가 살수의 손에 죽었다는 것만큼 우스운 일도 없을 테니 감지 능력만큼은 진지하게 배우고 있었다.

“읏차.”

가볍게 담벼락 위에 안착한 백유는 자신의 밑에서 솟구치는 혈의인과 눈을 마주쳤다.

“초면인가?”

엷은 미소.

느긋한 인사.

“그럼 잘 가고.”

목이 베인 혈의인의 몸이 바닥을 향해 떨어지고, 백유는 그 뒤를 이어 솟구치는 적들을 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좋아! 드루와!”

단검을 세우고, 장난스럽기 그지없는 도발과 함께 백유는 발을 내질렀다.

담을 타고 올라오던 적 하나의 안면에 그대로 꽂히는 발.

순간적으로 적이 그 발을 붙잡으려 했지만, 이미 몸을 비튼 백유는 발을 빼고 있었다.

동시에, 그 회전 그대로 양옆에서 달려드는 적들의 목을 베고 뜯는다.

단검을 든 손으론 베어 내고.

맨손으로는 뜯어낸다.

피를, 죽음을 보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잔혹한 손속.

자신의 목을 노리고 들어오는 적에겐 어떤 자비도 없이 움직인다.

“캬핫!!”

죽은 동료의 시체를 관통하고 찔러 들어오는 검을 피하고.

어느새 반대쪽으로 넘어가 밑에서 솟구치는 적의 팔을 다리로 휘감아 그 턱을 부쉈다.

자연스럽게 움직인 팔은 옆에서 튀어나오는 적의 목을 베고.

남은 손은 밑에서 솟구치는 적의 안면을 뜯어낸다.

베고, 때리고, 부수고, 뜯고.

이것이 똑같이 사지를 가진 인간이 보일 수 있는 움직임인가.

담벼락 위에서 마치 춤을 추듯 손발을 움직이는 백유를 중심으로 적의 시체들이 쌓여 간다.

두 번 이상 손을 쓴 경우는 없었다.

목이나 심장 혹은 머리.

당하는 순간, 확실하게 죽음에 이르는 인체의 급소만을 노린다.

“하아.”

이윽고, 백유가 낮은 숨을 토해냈을 때.

“생각보다 더 쉽네.”

고작 성인 남성의 팔 길이보다도 짧은 폭을 가진 담벼락 위에서.

“배운 보람이 있는데.”

수십 명으로 구성된 한 개 대(隊)가 전멸하고 말았다.

가볍게 툭툭 바닥을 친 백유는 전투의 여파를 이기지 못하고 부서진 담벼락 위에서 뛰어내렸다.

가볍게 착지.

곳곳에서 전투의 여파로 인한 신음 소리와 짙은 피 냄새가 퍼져 온다.

이렇게나 피 냄새가 짙은데도 들려오는 것은 고작 작은 신음 소리뿐이라는 점에서 이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투의 양상을 눈치챌 수 있었다.

살수 간의 전투는 이렇구나.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인 백유는 발길을 돌렸다.

지금 이 순간, 최우선으로 지켜야 할 것은 이 습격에 대비가 안 되어 있는 인물.

저 멀리 있는 동굴을 바라보는 백유의 몸이 이내 흐릿하게 사라졌다.

* * *

살궁에 적이 침입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살은 즉각 움직였다.

사실 어느 정도 예측은 하고 있었다.

짧은 시간 안에 소궁주의 치료를 위한 재료를 급하게 모으다 보니, 살수들은 제대로 흔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무리 가명을 쓰고 대리인을 내세웠다고 한들, 물건만큼은 반드시 움직인 흔적이 남는다.

적이 온갖 수단을 동원해 물건의 행적을 좇았다면, 살궁의 위치가 발각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리고 만약 그게 가능하다면 그 적은…….

“보고드립니다. 내부로 침입한 적들의 상당수는 전시 태세로 전환한 하급 살수들이 막고 있습니다.”

“상급 살수들 중 자리를 비운 이들을 제외한 전원, 전투에 돌입했습니다.”

“외곽 경계를 맡던 이들에게서…….”

“현재 사상자의 집계는…….”

빠르게 보고가 올라온다.

적의 기습은 갑작스러웠으나, 그들의 실력만큼은 예상 범주 내였다.

이곳에 모인 살수들은 도망자들이 대부분이기에 그들을 추적하는 추적자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아무리 오지에 몸을 꽁꽁 숨긴다고 한들, 완벽한 은신은 힘들었다.

알음알음 퍼지는 정보를 토대로 이곳에 도달하는 적들은 항상 있어 왔고, 이 작은 궁 안에서 일상을 되찾은 이들은 그 일상을 지키기 위해 사력을 다해 왔다.

그런 살궁의 방어를 고작해야 살수 흉내나 내는 머저리들이 뚫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적습은 그리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제압될 거다.

사상자는 나오겠으나, 적들의 제압 자체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진짜 문제는.

‘……궁주님.’

자신들의 머리가 실종됐다는 거다.

분명 아침까진 처소에 있었던 것을 확인했는데.

갑자기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 아예 흔적이 보이질 않는다.

단순히 은신해 있다고 보기엔 제자와의 수업조차 건너뛰었다.

그렇다면, 선택지는…….

“외부에서 처리해야 할 적이 있다는 건가…….”

궁 안에서 처리하면, 그 여파로 사상자가 나올 강자가 적들 사이에 끼어 있다.

그 예측을 거의 확신하다시피 한 일살은 고민했다.

어떤 대처를 해야 최선의 선택이 될 것인가.

궁주님을 방해하지 않으면서, 이 습격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 낼 방법은 무엇일까.

고민이 깊어지고, 덩달아 일살의 미간에 새겨진 골도 깊어지는 순간.

“부궁주님.”

“……무슨 일이냐?”

다급하게 접근한 부하의 부름에 일살은 고개를 들었다.

풍기는 피 냄새가 짙다.

꽤나 난전을 겪은 것이 분명했다.

“혈귀가 나타났습니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이 없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일살은 망설임 없이 지시를 내렸다.

“상급 살수들은 전원 혈귀의 척살에 나서라. 비전투 인원은 전부 대피소로 향하고, 하급 이상의 살수들은 전원 대피소 앞을 지키도록.”

지시를 내린 일살은 즉시 집무실을 나섰다.

이런 순간에 지시를 내려야 하는 머리가 자리를 비우는 건 문제가 될 수도 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혈교라니……!’

이건 문제가 심각했다.

혈교는 지금 사천맹을 먹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상황.

백유를 쫓고 있긴 하겠으나, 이 살궁의 위치를 추적해 이런 대규모 습격을 할 정도의 여력은 없을 터다.

무엇보다 사천맹을 집어삼키는 과정에서 살존을 적으로 돌리는 행동을 섣불리 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혈교가 움직였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다.

“더러운 혈충(血蟲)들이……!”

손을 잡았다.

이곳을 습격한 세력과 혈교가.

그리고 혈교에게 이곳에 대한 정보를 건네준 이가 있다.

이곳의 정보를 잘 알고, 지금 살존에게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아는 인물이 혈교에게 손을 내민 것이다.

“언여휘……!”

그 괴물이 혈교와 손을 잡았다.

* * *

“이건 의외인데.”

살궁의 근처에 있는 공터.

본래는 나무가 꽤나 무성한 숲이었던 이곳은 현재 쓰러진 나무와 시체들이 뒤엉킨 끔찍한 공터가 되어 있었다.

그 한가운데에 단검을 손가락 사이로 현란하게 돌리며 살존은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대체 무슨 깡으로 이렇게 쳐들어왔을까, 응?”

살존답지 않게 짙은 살기가 노골적으로 배어든 목소리.

아름다운 모습은 그대로였으나, 듣는 순간 전신이 죽음을 외치는 것 같은 섬뜩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꺄하하하! 내가 무슨 깡이 있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웃으며 손을 휘저은 소녀가 어깨를 으쓱였다.

“봐 봐. 지금도 인형으로 왔잖아?”

히히, 웃으며 자신의 목을 쿡쿡 찌르는 언여휘의 손가락이 살을 파고들었으나, 피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아예 살아 있는 것으로 위장조차 하지 않은, 진짜 인형.

그런 인형 속에서 언여휘는 히죽히죽 웃었다.

“우리 살존 언니 혼자서 맛있는 걸 독차지하려고 하니까 심술이 났다고 할까?”

“소름 끼치는군.”

삐딱하게 꺾었던 고개를 되돌리며, 단검을 탁 손에 쥔 살존은 살기를 거뒀다.

“할머니뻘에게 언니 소리를 듣는 건 처음이다.”

“어머, 숙녀의 나이를 그렇게 간접적으로 까발리는 건 역시 나라도 부끄러워잉…….”

정말 역겹다는 듯 눈동자가 메마른 살존은 언여휘의 애교에 더욱더 살기를 갈무리했다.

그리고 어느새.

“하핫! 역시 대단한데!”

시체들로 가득한 이 공간에서 한 점의 살기조차 없이 고요하게 서 있는 살존의 모습에 언여휘가 감탄했다.

정말 극에 이른 제어다.

살의(殺意)도, 살심(殺心)도, 살기(殺氣)도.

결국 의지에 의한 것.

뜻을 세우면 그것이 일어나고.

뜻을 굽히면 그것이 수그러드는 것은 자연의 이치다.

그런데.

그 이치조차 무너트린 괴물이 지금 눈앞에 서 있다.

지금 당장에라도 이쪽의 목을 벨 생각이면서.

한 점의 살기조차 흘리지 않을 수 있다니.

과연.

“살존이야.”

툭 튀어 오른 머리와 함께 히죽 웃은 언여휘는 데굴데굴 굴러가는 자신의 머리를 발로 잡았다.

“너무하네. 아직 말하는 중이잖아.”

응차, 팔을 휘적거리다가 자신의 머리를 붙잡은 언여휘는 그것을 허리에 꼈다.

“설천위에게 자격이 있다는 걸 확인했어.”

“……자격?”

“응. 넌 모르는 자격. 아마 아는 사람은 전 무림에서 열도 안 될 거야.”

히히 웃으며, 언여휘는 손을 뻗었다.

가볍게 뻗은 그녀의 손에는 검지와 중지 사이에 누런 부적이 껴 있었다.

부적을 내민 언여휘가 히죽 웃는 것과 동시에 살존이 있던 공간이 통째로 폭발했다.

“그러니, 우리가 데려갈게.”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