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7화
386화-손휘 (2)
분쇄되어 간다.
고속으로 펼쳐지는 술법이 순식간에 무너지는 모습은 술사의 입장에선 아찔하기 그지없는 광경이다.
구궁과 팔괘, 오행과 삼재를 기반으로 계산을 거듭해 육효(六爻)의 형태로 만들어진 술법.
술법이라는 미지(未知)를 수학으로 정형화시킨 술법의 정수가.
고작해야 의지로 빚어낼 뿐인 흑관에 분쇄되어 가는 광경은 그야말로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다.
[노오오오옴!!]
산산이 부서져 흩어져 가는 영력의 파편 속에서 손휘의 분신은 악을 쓰고 손발을 움직였다.
본래라면 맺지 않을 수인을 맺고, 입으로는 주문을 내뱉는다.
끌어올린 영력을 미친 듯이 쏟아 내며 단 한 순간의 빈틈을 노린다.
하나.
딱 하나의 술법만 완성되면 승기를 가져올 수 있다.
저 조잡하기 그지없는 막무가내식 술법 따위 이쪽의 술법이 완성만 되면 얼마든지 밀어낼 수 있다.
이를 악문 분신이 끊임없이 술법을 시전하고, 검을 땅에 박아 넣은 설천위는 담담히 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후.”
그리 오래 시간을 끌 생각은 없다.
준비된 술법으로 분신과 본체의 연결을 끊은 지금, 사흘 안에 본체가 깨어날 거다.
청아가 밖의 봉인을 최대한 유지할 테니 길면 닷새 정도까진 시간을 끌 수 있을 터.
그 안에 이 녀석을 확실히 마무리하고 밖에 나가 다음 준비를 해야 한다.
다음 준비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니 최대한 빨리 처리하는 게 베스트.
“하루. 하루 안에 끝내자.”
완전히 봉쇄된 공간.
적이 빠져나가지 못한다는 것만으로 나름 큰 이점이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상대다.
분신이라곤 해도 본체의 자아를 꽤나 가졌으니 그 힘은 귀(鬼) 중에서도 최상급이다.
흑관만으로는 부족하다.
“후.”
그렇기에 준비했다.
움켜쥐었던 검에서 손을 놓은 설천위는 자세를 갖췄다.
왼손은 앞으로, 오른손은 허리춤으로.
살짝 자세를 낮추고 시야는 넓게 해 그 안에 적을 담는다.
고속으로 달리는 차를 운전할 땐 먼 곳에 시야를 두어야 차가 흔들리지 않듯이.
멀리, 넓게 둔 시야 안에 술법을 토해내는 적을 담는다.
그리고.
“후으.”
숨을 토해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근육이 팽창한다.
단련된 하체가 힘을 폭발시키고.
든든한 내공이 그 힘을 보조한다.
압도적인 속도.
[섬벽권(閃霹拳) 제1초 일벽(一霹)]
한 줄기 섬벽이 된 설천위의 주먹이 단숨에 적을 꿰뚫는다.
[크아아아악! 네놈!!]
순식간에 가슴에 구멍이 뚫린 손휘의 분신이 악을 쓰며 양팔을 휘저었다.
무(武)의 편린 따윈 찾아볼 수 없는 조잡한 반항이었지만, 설천위는 물러났다.
조잡하게 움직이는 손에 휘감긴 흑염(黑炎).
술법이다.
찰나의 순간, 가슴이 꿰뚫리는 사이에 흑염을 일으켜 반항하다니.
“나쁘지 않네.”
그래,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본체가 깨어나기까지 사흘.
솔직히 말해서 이 분신에 하루 이상을 쓸 생각은 없다.
길어 봤자 반나절, 짧으면 30분 안에 잡는다.
본체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도 많으니까.
호흡을 가다듬고, 자세를 갖춘다.
죽어라 무(武)를 익혀 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런 순간에 써먹으려고 그런 것 아니겠는가.
술법만을 사용하는 악귀.
장소는 한정된 동굴 안.
압도적인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건 당연히 무공을 사용하는 이쪽이다.
[크하하! 방심했구나, 네놈!]
순간, 입꼬리를 비튼 분신의 외침과 함께 기어코 완성된 술법 하나가 검은 안개를 쏟아 냈다.
단순히 시야를 가리는 것을 넘어서.
[기어라! 애송이!!]
육체를 좀먹고, 그 의지를 꺾는 술법.
일종의 저주라고 해도 될 정도로 악랄한 술법이 좁은 공간이라는 이점을 활용해 설천위를 집어삼켰다.
[좁은 곳이라 네놈이 유리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술사와 싸워 본 적도 없는 네놈의 오만을 내가 꺾어 주마!]
봉인에 갇힌 탓에 내면세계에서조차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지만……!
봉인이 완전히 풀린 지금, 이쪽은 그야말로 완전해진 상태.
아예 시전조차 막혔던 술법까지 자유롭게 쏟아 낼 수 있었다.
승산은 온전히 이쪽에 있다.
두 눈을 부릅뜬 분신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술법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영력의 한계?
봉인이 풀린 지금 그런 건 거의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다.
적에게 파훼 당한 술법의 잔존 영력은 흩어지기도 전에 바로 돌아온다.
그건 상대도 마찬가지이겠지만, 살아 있는 인간이 악귀보다 효율적으로 영력을 재활용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설천위의 주먹에 꿰뚫려 생긴 구멍이 빠른 속도로 채워진다.
일렁이는 검은 형체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구멍을 메워 나가고.
[크하하하하! 놈 걸려들었구나!]
그 와중에도 검은 안개에 갇힌 설천위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손휘의 분신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겼다.
그 악독한 괴물 놈을 드디어……!
요 몇 주간, 그 얼마나 긴 치욕적인 시간이었던가!
이제 그 치욕의 시간을 딛고, 이 봉인을 깨부순 뒤 다시 본체에게 돌아가기만 하면 모든 것이……!
“아아.”
그 순간 검은 안개 속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다른 술법을 이어서 펼치려던 분신은 흠칫 몸을 떨었다.
군데군데 일렁이는 분신의 형체가 더욱 격하게 흔들리고.
“이런 방식도 있구나.”
검은 안개 속에서 담담히 걸어 나오는 설천위가 이리저리 목을 틀었다.
“참신하네. 몸을 약화시키는 것과 동시에 심리적인 부하를 거는 술법인가? 통하지 않아서 정확한 효과는 모르겠지만, 재미있네.”
마치 재미있는 공연을 봤다는 듯이 여유롭게 웃는 설천위의 모습에 분신이 다시 한번 술법을 쏟아 내려는 그 순간.
[큭!]
분쇄됐다.
완성되기도 전에 또다시 흑관에 의해 분쇄된 술법이 흩어진다.
처음의 반복이다.
다시 자세를 갖추고 이쪽을 바라보는 설천위의 모습에 분신은 오싹한 오한을 느꼈다.
분명 확실하게 좌절(挫折)의 술(術)을 걸었는데……!
대체 어떻게?!
아니, 이럴 순 없다.
[이럴 순 없어!!]
인간이 그걸 견뎌 낼 수 있을 리가!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을 리가 없다!
악을 쓰며 더욱더 술법의 시전에 몰두하는 분신의 모습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왜, 안 통하니 빡치냐?”
자세를 갖춘 설천위가 흐릿하게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커헉!]
단숨에 가슴이 꿰뚫린 분신이 비틀거리며 허공을 뒹굴었다.
겨우 중심을 다잡고 몸을 일으켰을 땐 이미 시전을 준비하던 대부분의 술법이 취소된 상황.
[크아아아악!]
다시 악을 쓰며 술법을 펼치기 시작한 분신은 자신의 가슴에 뚫린 상처를 회복할 영력조차 술법에 때려 박았다.
온갖 술법이 저주의 형태로 공동을 가득 메운다.
분노로 눈이 돌아간 분신의 무차별 난사.
흑관의 생성이 따라올 새도 없이 난사하겠다는 듯 그야말로 쥐어짠 술법이 순식간에 설천위를 에워쌌다.
“뭐, 너 같은 녀석들이 할 생각이야 뻔하지.”
사방을 가득 메운 술법의 중심에서 설천위는 가볍게 목을 이리저리 꺾으며 웃었다.
“봉인만 풀리면 할 만하다. 저런 애송이 따위 얼마든지 이길 수 있다. 뭐, 그런 생각으로 버텼던 거겠지?”
주먹을 쥐고 자세를 낮추며 설천위는 손휘의 분신을 비웃었다.
“봉인에 힘이 막혔던 건 이쪽도 마찬가지거든.”
팟!
순식간에 사라지는 설천위.
주위를 완전히 둘러싼 술법 따위 상관없다는 듯 거리를 좁힌 설천위의 손이 단숨에 분신의 가슴을 꿰뚫는다.
그리고.
이번에도 심장을 꿰뚫지 않은 채 반대쪽에 착지한 설천위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니, 마지막 기회를 주마.”
수백의 흑관이 공동의 벽을 빼곡하게 메운다.
벽뿐만이 아니었다. 바닥과 천장까지.
그 밑에 깔려 있는 부적의 흔적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빽빽하게 차오른 흑관 속에서.
“소멸과 굴복.”
요동치는 분신의 영력조차 흐트러트리는 자신의 공간 속에서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네가 가고자 하는 길은 뭐지?”
* * *
“……난리도 아니네요.”
백수아가 잠들어 있는 방.
그곳에서 분신이 봉인되어 있는 통로 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청아는 요동치는 영력에 작게 혀를 찼다.
완전한 절단.
이걸 위해 그동안 몇 주를 준비했던가.
일이 끝날 때까지 충분한 시간을 확실히 벌 수 있다.
다만.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걸까.’
차마 무서워서 묻지 못했지만, 가장 큰 의문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술법의 세계는 드넓으면서도 깊다.
설령 살존의 딸이 악귀에 씌었다는 것을 알았더라도 그 형태는 수십 가지로 나타날 수 있다.
당연히 그에 따른 해결 방법도 수십 가지로 나뉠 텐데, 어떻게 주인님은 이 술법만을 꼭 집어서 연습한 걸까.
무림맹에 있을 때부터 홀로 틈틈이 조사해서 연습했던 술법.
그때는 그냥 뭐 새로운 술법을 구상하느라 저러나 보다 싶었지만…….
이젠 확신할 수 있었다.
주인님은 지금 이 상황을 완벽하게 예측하고 있었다는 것을.
당연하다는 듯 이 순간을 위한 최선의 준비를 해 왔다는 것을.
대체 어떻게?
그런 의문을 품으면서도 청아는 조용히 마음을 가라앉혔다.
지금은 그런 의문을 품을 때가 아니었다.
완전한 절단은 성공했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언여휘의 법구로 간신히 도려내 봉인하긴 했으나, 그 연결이 본체와 완전히 끊어진 건 아니었다.
분신이 자아를 확고하게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크게 잘라낸 탓이다.
너무 크게 잘라서 완전히 자르지 못한 거다.
무엇보다 백수아에게 타격이 갈 수 있기에 그리한 것이지만.
그렇기에 지금이 중요하다.
영력을 뻗어 봉인을 감싼 청아는 열심히 영력을 움직였다.
중요한 것은 속이는 것이다.
몇 주간 분신의 방에서 괜히 시간을 낭비한 게 아니었다.
단순히 단절할 뿐이라면, 사나흘이면 충분했으니까.
시간이 필요했던 이유는 몇 가지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환술을 다루는 청아가 봉인된 분신의 기운과 형태를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서.
그 방의 구조와 형태, 안에 담긴 영력을 온전히 기억하기 위해서.
모든 것은.
[환(幻)]
본체에게 아직 분신이 연결되어 있다고 속이기 위해서다.
영력이 완전히 자리를 잡는 것을 느낀 청아는 조심스럽게 뒤를 돌아봤다.
이 방법의 유일한 문제점은 단절이 되고 짧은 시간 동안, 봉인에 공백이 생긴다는 점이다.
잠깐이지만, 본체가 충분히 그 이변을 감지하고 깨어날 수도 있는 공백.
환술이 완성된 것을 확인한 청아는 긴장으로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
그곳에 있는 석관을 가만히 응시한다.
눈을 한 번 깜빡이고.
두 번 깜빡이고, 세 번 깜빡였지만.
“……후.”
움직이지 않는다.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뱉은 청아는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일단 환술의 유지는 문제없다.
주인님은 사흘 정도 예상했고, 그 정도야 충분히 버틸 자신이 있다.
문제는 변수.
“……잘 자고 있네요.”
백수아의 곁에 접근한 청아는 얌전히 누워 있는 그녀의 상태를 확인했다.
일단 고통에 얼굴을 찡그리는 일도 없었고, 아직 의식을 차린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손휘의 본체도 아직 잘 잠들어 있는 것 같고.
일단 한번 미리 깨워서 몸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 확인한 보람이 있었네.
“그나저나 주인님은 진짜 그 방법을 쓰시려나.”
자신이 제안하긴 했지만, 그래도 좀 무리수인 것 같은데.
물론, 그나마 위험을 가장 많이 줄일 수 있는 방법이긴 하지만…….
백수아를 빤히 바라보던 청아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환술을 펼친 곳으로 다가갔다.
뭐가 됐든, 일단 상황은 안정됐으니 해야 할 일만 잘하면…….
킁킁.
순간, 코를 간지럽히는 냄새에 청아는 휙 고개를 돌렸다.
이 냄새……!
“아아, 걱정 마.”
동굴 입구에서 단검을 손에 쥔 백유가 서서 입꼬리를 비틀었다.
자신의 뺨에 튄 핏자국을 손으로 훔치며.
“이쪽은 알아서 잘 처리할 테니까.”
자신의 뒤에서 솟구치는 적의 목에 단검을 꽂아 넣는다.
“아무래도 살수들이 급하게 움직이느라 꼬리가 잡힌 것 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