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5화
384화-준비는 다양하게 (8)
쩡!!
설천위의 일권이 작렬하는 것과 동시에 결계에 금이 번져 간다.
“노옴!”
분신이 급히 결계를 수복했으나 설천위의 다음 일격은 그보다 더 빨랐다.
쩡!!
기어이 파편이 떨어져 나가기 시작한 결계.
급히 수복이 진행됐으나, 이미 빈 공간이 생겨 버린 결계에는 빠른 속도로 균열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흡!”
설천위의 기합성과 함께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소음조차 없었다.
설천위의 기합성과 거의 동시에, 무언가가 결계를 꿰뚫었을 뿐이다.
[섬벽(閃霹)]
섬벽권(閃霹拳)의 절초가 결계를 관통한다.
완벽한 파괴와 함께 무너지기 시작하는 결계.
쿵!
그리고 온갖 술법에 짓눌려 묵직해진 설천위의 일보(一步)가 황량한 대지를 뒤흔든다.
“이런 느낌이구나.”
입꼬리를 올린 설천위가 성큼성큼 걸음을 내디딘다.
그때마다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지만, 설천위의 근육이 품이 넓은 무복조차 찢을 기세로 부풀어 올라서 힘을 쥐어짜 냈다.
“난 여태까지 이게 가능한 놈들이랑 싸웠던 건가.”
쿵!
어느새, 넋이 나간 분신의 앞까지 도달한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너무 불공평한데.”
히죽 웃으며, 설천위의 손이 다시 한번 앞으로 모인다.
그리고.
콰득!!
“커헉!”
단숨에 가슴이 함몰된 분신의 몸이 사정없이 땅바닥을 나뒹군다.
거친 먼지가 피어오르고, 어느새 몸에 붙은 술법을 털어 낸 설천위가 가벼운 걸음으로 분신의 머리 앞에 섰다.
“최고로 High한! 기분……은 아닌가?”
그 정돈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분신이 알아듣지 못할 말을 하며 실실 웃은 설천위는 그대로 분신의 머리를 짓밟았다.
“오늘은 특별히 좀 더 기회를 주마.”
꾹 눌렀던 발을 당겨 그대로 분신의 머리를 걷어찬다.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충격과 함께 강제로 몸을 일으키게 된 분신은 이를 악물었다.
머리를 걷어차였는데, 몸이 절로 일어났다.
그냥 걷어찬 게 아니란 소리다.
흔들리는 상태로 겨우 땅 위에 버티고 있는 두 다리가 보인다.
자신의 내면세계인데, 이딴 싸구려 발길질에 당해 이런 꼴이라니…….
일렁임이 한층 더 거세진 분신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치켜들었다.
“찢어 죽여 주마!!”
절망적인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살기를 피워 올리는 분신의 모습에 활짝 웃은 설천위는 양팔을 벌렸다.
“그래! 받아 주마!! 덤벼라, 자식아!!”
* * *
이른 아침.
몸을 풀기 위해 훈련장으로 나온 백유는 언제나처럼 그곳을 먼저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모습에 작게 미소 지었다.
“천위.”
“백유, 빨리 왔네.”
“너만 하겠어?”
듣자 하니 밤새 술법의 준비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닌가 걱정될 정도다.
상황이 상황이니 설천위가 알아서 잘하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어, 딱히 가타부타 말은 안 했지만.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이리저리 관절을 풀어 주던 백유는 설천위를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평소라면 무식할 정도로 기초 단련을 하고 있어야 할 설천위가 웬일로 초식을 연습하고 있었다.
그것도.
“섬벽권(閃霹拳)이라고 했었나?”
“맞아.”
쾌(快)의 묘리를 품은 권법.
도나 검이 없을 때를 위한 무공이라고 했던가.
전투 중에 보아하니 꽤나 높은 수준으로 익히긴 했던 것 같지만…….
‘……뭔가 다른데?’
뭔가 다르다.
전투 때 몇 번이나 봤던 권법이지만, 무언가가 확실히 달랐다.
탁 집어 낼 수 없는, 간질간질하게 거슬리는 변화에 백유가 미간을 찡그리고 고민하는 사이.
“후우.”
가볍게 연습을 끝낸 설천위가 호흡을 고르며 백유를 바라봤다.
“백유.”
“으, 응?”
고민에 빠져 있다가 조금 얼빠지게 대답한 백유는 이내 설천위의 눈을 마주하곤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얼마든지.”
“아직 말도 안 했는데?”
“그 정도야 눈빛만 보면 아는 거 아니겠어?”
백유의 장난스러운 대꾸에 피식 웃은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자세를 다잡았다.
살짝 자세를 낮추고, 몸의 중심을 안정시키는 것과 동시에.
쏘아진다.
[섬벽권(閃霹拳) 제1초 일벽(一霹)]
그야말로 쾌속의 일격.
몸의 이동 자체를 공격의 일부로 포함시킨, 속도의 일권(一拳).
몸 전체로 펼치는 한 줄기의 벼락은 강렬하게 백유의 방어를 강타했다.
“하핫! 좋잖아! 천위!!”
단검을 우수(右手)에 쥐고, 두 팔을 교차해 좌수(左手)로 설천위의 공격을 받아 낸 백유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모습에 설천위가 주먹을 빼는 순간.
단검을 쥐지 않은 백유의 왼손이 귀신같이 설천위를 따라붙는다.
동시에 자유로워진 오른손은 허리춤으로 당기며 공격을 준비하고.
그야말로 야수처럼 돌진한다.
뻗어 낸 왼손은 적에게 무방비하게 드러났지만, 그런 건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돌진해 오는 백유.
무식하기 그지없는 돌진.
빈틈이 너무 많아서 이대로 왼팔만 붙잡으면 그대로 제압할 수 있을 것 같은 공격이다.
허나, 설천위는 당연하다는 듯 땅을 박찼다.
방어나 아슬아슬한 회피 따위가 아닌, 공격권을 한 번 더 주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하게 피하려는 회피.
얼핏 겁쟁이처럼 보이는 움직임이었지만, 백유는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역시, 너무 빤히 보였나?”
살짝 혀를 내밀며 웃는 백유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배우는 걸 옆에서 전부 봤으니까.”
“제자도 아니면서.”
“보여 주는데 거절할 필요는 없지.”
어깨를 으쓱이며 웃은 설천위는 다시 자세를 잡았다.
무릎을 굽히며 살짝 중심을 낮추고.
왼손은 앞으로, 오른손은 허리춤에 붙인다.
수많은 권법에서 기수식으로 취하는 자세.
너무 흔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작은 요소들이 그 무공의 결과를 가르는 동작.
미묘하게 앞으로 향한 중심.
힘이 빠져 있는 왼손.
천천히 가다듬어지는 호흡.
그리고 설천위가 지금 쓰고 있는 권법의 종류까지.
극한의 속도로 싸우는 무인들 간의 전투에서 그 무엇보다 필요한 관(觀)의 눈.
단숨에 수많은 정보를 읽어 낸 백유는 다음 공격을 예측했다.
보고.
예상한다.
그 간단한 이치를 해내지 못해 목이 달아나는 무인들이 수두룩한 이 무림에서.
“하핫!”
단숨에 허리를 뒤로 젖혀 주먹을 피해 낸 백유는 쾌활하게 웃었다.
코앞을 스쳐 지나간 주먹에 담긴 위력이 심상치 않았다.
그 위력에 백유가 작게 감탄하는 그 순간.
유연하기 그지없는 몸이 탄력적으로 움직였다.
본능에 몸을 맡긴 움직임.
뒤로 젖혔던 허리를 트는 것과 동시에 왼발을 축으로 아예 몸을 회전시킨다.
순식간에 왼쪽으로 상반신 전체를 틀어 낸 백유는 자신의 배가 있던 곳을 스치고 지나가는 주먹에 입꼬리를 올렸다.
[섬벽권(閃霹拳) 제2초 이벽(二霹)]
두 개의 벼락.
얼굴을 노린 첫 공격이 허초였던 건 아니었다.
오른손과 왼손, 양쪽 다 진짜였을 뿐.
몸을 회전시킨 힘을 이용해 아예 공중으로 떠오른 백유는 그대로 발을 뻗었다.
순식간에 설천위의 오른쪽 다리에 발을 거는 데 성공한 백유는 그대로 무릎을 굽혔다.
뛰어난 발목의 힘과 중력을 거스르는 흡결의 묘리를 이용한 변칙적인 움직임.
설천위의 허벅지를 발판 삼아 쪼그려 앉은 백유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설천위를 훑었다.
그와 동시에 마치 빨려 들어가듯 설천위를 휘감는 백유의 몸.
양팔은 단숨에 목과 팔을 지나가고, 상체는 그대로 설천위의 등을 점령한다.
동시에 오른손에 쥔 단검이 설천위의 목을 겨누고.
“흡!”
강력한 기합과 함께 백유의 몸이 튀어 올랐다.
[섬벽권(閃霹拳) 제6초 폭뢰(爆雷)]
전신의 근육을 일순간 폭발시키는 것으로 만들어 내는 반탄력.
근육을 응축시켰다가 이완하는 것만으로 힘을 만들어 내는 그야말로 체술의 정수.
순간적으로 자신이 걸었던 속박이 풀리며 튕겨 나온 백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설천위가 이런 수를 쓴 것이 처음이라서?
그것도 맞지만, 진짜 놀란 이유는 설천위가 이런 수법으로 자신을 튕겨 냈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전신의 근육을 섬세하게 사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이런 초식으로 설천위가 자신을 튕겨 낼 정도의 힘을 만들어 낼 수는 없었을 텐데?
쉽사리 믿기 힘든 결과에 의아함을 품는 것과 동시에 백유는 어제 있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살존이 먼저 사죄를 하면서까지 설천위에게 했던 조언.
그게 만약.
‘혼들이 거대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애써 감추고 있던 길이었다면?’
저 괴물 같은 천마 할배가 숨기고 있던, 호쾌하게 뚫린 대로(大路)였다면?
설천위가 홀로 깨달아 더 높은 영역에 도달하길 원해서 일부러 숨기고 있었던 것이었다면?
만약 살존이 그것을 읽어 내고 자신의 딸을 구하기 위한 의식이 시작되기 전에 최대한 설천위를 강하게 만들고자 그것을 풀어낸 거라면?
너무 말도 안 되는 자신의 상상에 그만 헛웃음을 지었던 백유는 이내 입꼬리를 크게 비틀었다.
말이 안 되면 어떤가.
천마 할배는 그때 침묵으로 허락했고.
살존은 설천위에게 길을 제시했다.
그리고 설천위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렇다면, 이제 중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뿐이다.
결과.
“천위!!”
한껏 흥분한 백유의 몸이 땅에 안착하고.
한껏 자세를 낮추며 왼손으로 땅을 짚은 백유가 단검을 쥔 손을 등 뒤로 감췄다.
“백유.”
어느새 몸을 돌린 설천위가 고고할 정도로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아직 힘 조절을 잘 못하니까 알아서 잘 막아.”
양손을 앞으로 뻗은 설천위의 경고에 백유는 입꼬리를 비튼 채로 땅을 박찼다.
“물론!”
단숨에 거리를 좁힌 백유가 파고드는 것과 동시에.
극한까지 끌어올린 백유의 집중력 때문에 그녀의 눈에 모든 것이 담겼다.
가슴 앞으로 모은 팔은 반쯤 굽어 있기에 결국 뻗어 나가는 길이는 극히 짧다.
주먹의 위력을 죽이는 잘못된 시작점.
한껏 당기지 못한 주먹은 거리를 확보할 수 없고, 충분한 거리를 확보하지 못한 주먹은 최대 속도에 도달하지 못한다.
결국, 그 안에 담긴 힘이 완성되기 전에 적에게 도달하기 때문에 그 힘은 크게 줄어든다.
무엇보다 긴 길이를 이동한 주먹일수록 허리의 힘이나 무게를 싣는 데 유리하다.
그렇기에 거리가 짧은 직선 형태의 권각술은 견제의 용도나 거리를 재는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보통.
그런데 설천위는 그것보다도 더욱 불리한 위치에 주먹을 놓았다.
그것도 양 주먹 모두.
발차기로 따지면 발을 앞으로 내민 다음에 앞차기를 하는 것과 같다.
지지하는 다리의 힘이 어지간히 강하지 않으면 무거운 문 하나도 제대로 열지 못할 허술한 자세.
그런 자세인데.
‘하핫!’
어째서 이렇게 긴장되는 걸까!
전신의 근육이 경고한다.
본능이 외친다.
피해라!
스스로의 본능을 인지한 순간, 백유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섬전과 같은 일격이 단숨에 공간을 가른다.
흩날리는 머리카락 사이로 지나가는 강렬한 위력에 백유는 입꼬리를 비틀었고.
“후읍!”
어느새 같은 자세로 다시 돌아온 설천위가 똑바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천위, 아주 좋아!”
읽었다.
그리고 감탄했다.
순간적으로 근육에 끌어모은 힘을 단숨에 폭발시키는 것으로 속도의 부족함을 메우고.
압도적인 하체의 힘으로 부족한 힘마저 메운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은 최단(最短), 최속(最速)의 일권(一拳).
그야말로.
[섬벽권(閃霹拳) 절초(絶招) 섬벽(閃霹)]
번뜩이는 벼락이었다.
* * *
“재능.”
설천위와 백유의 대련을 지켜보던 살존은 헛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조언했지만, 설마 하룻밤 만에 이렇게 될 줄이야.
아무래도 진짜 괴물을 깨워 버린 것 같은데…….
“아무래도 좋아.”
무슨 상관인가.
중요한 것은 수아를 구할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올라갔다는 점이다.
재료를 모은 부하들이 속속 살궁으로 돌아오는 것을 느끼며 살존은 두 눈을 감았다.
“벌레가 꼬였네.”
천천히 떠지는 그녀의 눈에 여태껏 없던 살기가 깃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