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4화
383화-준비는 다양하게 (7)
옆구리를 파고드는 단검.
겨우 몸을 비틀어 피했지만, 귀신같이 늘어난 날에 결국 피가 배어 나온다.
내공 한 점 없이 순간적으로 검이 늘어난 것 같은 묘기.
그것이 은신을 이용한 일종의 환검(幻劍)이란 사실을 알기에 설천위는 이를 악물고 더욱 빠르게 움직였다.
뒤로 당긴 다리에 힘을 더하고.
굳건하게 세운 허리를 비튼다.
아래에서 위로 휘몰아치듯 솟구치는 일격.
“나쁘지 않아.”
가볍게 고개를 꺾어 피해 낸 살존은 웃으며 설천위의 명치에 무릎을 박아 넣었다.
“커헉!”
마른기침과 함께 날아가는 설천위.
살궁에서 지내는 동안 살존과 수백 번 대련을 했지만, 아직까지 단 한 번도 유효타를 먹여 본 적이 없다.
“아으…….”
“솔직히 말해서 대단한 수준이야. 몇 번을 봐도 감탄스러워.”
“놀리지 마세요.”
한 번도 제대로 유효타를 먹인 적이 없는데, 무슨…….
백유는 이미 살존의 무공인 소월환무(紹月繯舞)를 후반부까지 익혔다.
보아하니, 실전에서 사용해도 충분한 수준.
그런데 이쪽은 무공을 배우기는커녕 대련에서 아예 감도 못 잡고 있는데…….
“설천위, 누누이 말하지만 네 몸은 쓰레기다. 흔한 촌부만도 못한 자질이지.”
……이 누님이 갑자기 뼈를 때리시네.
아니, 누님이 아니라 나이로 치면 이모…….
“커헉!”
“쓸데없는 생각.”
“……독심술!”
“쓰지 않았다. 눈빛이 그냥 마음에 안 들었을 뿐이다.”
눈빛이 마음에 안 든다고 명치를 후려치다니!
무인들은 무식해서 문제야!
끅끅거리며 겨우 몸을 일으킨 설천위는 반항심 가득한 눈으로 살존을 바라봤다.
“제 재능이 없는 거랑 감탄하시는 거랑 무슨 관계가 있는데요?”
“오호, 말하는 본새가 참 당돌하구나.”
반항적인 설천위의 눈빛에 피식 입꼬리를 올린 살존은 웃으며 단검으로 설천위의 몸 곳곳을 짚었다.
날붙이로 몸을 쿡쿡 찌르는데 피 한 방울 나지 않는, 그야말로 완벽한 신검합일(身劍合一).
손가락 대신 단검으로 쿡쿡 찌르며 살존은 입을 열었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 단련했나 싶을 정도로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있다.”
“……균형이요?”
“유연성, 근육의 질, 골격 등등.”
철저하게 다져지고 다져진 거대한 기초공사의 결과물.
마치 천년을 지속할 수 있는 황궁을 세우기 위한 토대를 다진 것 같은 정성이다.
“그야말로 거대한 기초공사를 보고 있는 것 같구나.”
“……그거 어디서 들은 것 같은 이야긴데.”
사상 최강의 제자가 어떤 달인한테 들은 이야기 같은데.
어릴 때 본 만화에서 나왔던 대사를 새삼 다시 듣게 된 설천위는 이내 미간을 구겼다.
“그러면 뭐 해요. 아예 쓸모가 없는데.”
철저하게 육체를 단련하면 뭐 하나. 그 육체의 성능을 온전히 발휘해 내질 못하는데.
당장 대련만 봐도 그렇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익힌 제공권(制空圈)은 살존이라는 벽을 만나는 순간, 너무 쉽게 무너졌다.
완벽한 방어는 개뿔.
도(刀)를 토대로 익혔더니, 도(刀)를 쓰지 않으면 본래 위력도 제대로 발휘를 못 한다.
그나마 검과 주먹은 꾸준히 연습해 거의 9할 이상 재현할 수 있었지만, 손에 단검 하나 들렸다고 그게 제대로 안 된다.
철저하게 버려진 재능.
괴물 같은 스승들의 도움으로 꾸역꾸역 초절정에 오르긴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반쪽짜리라는 생각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영적인 힘을 빼고 순수 무인으로서 보면 임기응변이 그야말로 틀에 박은 반쪽짜리 무인이니까.
불만이라며 입술을 삐죽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살존은 웃음을 터트렸다.
“쓸모가 없긴! 무인은 자고로 육체가 기본이고, 기본이 됐다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
딸을 지극히 아끼는 살존조차 자신의 딸을 가르칠 때 육체 단련은 극한까지 몰아붙였다.
육체는 무(武)의 기본.
그것이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어떤 기연도 잡을 수 없다.
설령 그것이 스스로 고찰 끝에 얻어 낸 깨달음이라고 할지라도.
그렇기에 무인은 준비된 자여야 하고, 끊임없이 준비해야 한다.
여전히 납득하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살존은 피식 웃었다.
“앞으로 사흘 남았지.”
“……네. 준비는 거의 끝나 가요.”
“그래. 그럼, 지금부터 하는 말은 딸을 가진 어미의 이기심으로 받아들여 주시오.”
뜬금없는 살존의 말에 설천위가 고개를 갸웃했고.
[……으음.]
[참으로…….]
[허허.]
기묘한 혼들의 반응에 설천위는 더욱 고개를 갸웃했다.
천마가 신음하는 것도 기이한데, 현태중과 소백진도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혼들의 반응에 말없이 고민하는 설천위. 그 모습에 살존은 쓰게 웃으며 단검을 들었다.
“딱히 제지하지 않으니 허락한 것으로 알겠소.”
단검을 역수로 쥐고, 포권과 함께 작게 고개를 숙인 살존은 이내 고개를 들고 똑바로 설천위를 바라봤다.
“설천위,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는 말 들어는 봤겠지?”
“네……. 뭐, 들어 봤죠.”
못 들을 리가 있겠는가.
무협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 중 하나가 아닌가.
“네 스승들이 네 육체를 극한까지 단련시킨 이유는 그 때문이다.”
“예?”
그게 만류귀종이랑 무슨 상관이야?
술법으로 무(武)를 통달하라, 뭐 그런 건가?
그 준비?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술법으로 네 육체마저 다스려라.”
“……예?”
진짜로?
“너는 오성이 충분히 뛰어나 무공의 원리와 흐름은 충분히 이해하고 있을 거다.”
“그렇죠?”
그게 아니면 상대의 공격을 읽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니까.
무공의 흐름을 파악하는 눈과 머리조차 없었으면 진즉에 죽었을 거다.
“부족한 것은 오로지 육체 하나뿐. 육체를 제대로 통제할 수 없으니 배운 것을 체득할 수 없는 것뿐이다.”
무공에 재능이 없다는 건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오성이 부족하거나 육체적 능력이 부족하거나.
설천위는 당연히 후자 쪽이고, 후자의 경우 드러나는 특징들이 있다.
오성은 뛰어난데 육체적 능력이 부족한 경우는 그야말로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체화시키는 방법이 있다.
누군가는 수십 년을 해야 겨우 고수의 경지에 오르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물론, 설천위는 수십 년으로도 해결이 안 되는 몸치이지만.
그걸 술법과 스킬로 어떻게 잘 비벼서 해결해 냈다.
하지만, 일정 수준 이상의 재능을 필요로 하는 화경은 그에게 크나큰 벽이 된 상태다.
머리론 이해하지 못해도 육체가 알아서 길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있다.
백유가 화경에 오르기도 전에 강기를 만들어 냈던 것처럼.
이성적인 깨우침이 없어도 몸이 알아서 그것을 해내는 이들이 있다.
왜냐고 물으면 그냥 되니까, 라고 대답하는 재능을 가진 이들이다.
그것이 경지를 넘을 수 있는 자와 아닌 자의 차이다.
그리고 설천위에겐 그 재능이 없고, 그렇기에 여태까지 빌빌대며 초절정에 머물러 있던 것인데…….
“체득할 필요 없다. 자연스럽게 해내면 될 뿐이니까.”
“……그게 안 되는데요.”
심지어 백유에게 조언을 받고도 강기를 만드는 데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게 되면, 진즉에 화경에 올랐…….
“만류귀종이라, 육체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네 혼으로 움직여라.”
“……네?”
“네 육체는 끊임없이 네 발목을 잡지만, 네 혼은 네 의지와 정신력에 좌지우지되는 것.”
살존이 설천위를 보며 감탄했던 이유는 단순히 고도로 단련된 육체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말 철저하리만큼 새겨진 기술들.
그야말로 혼에 새긴 것 같은, 설천위의 육체로는 도저히 표현이 불가능할 것 같은 기술들.
거의 3주가 되는 시간 동안 대련을 진행하며 확신했다.
“너에겐 혼으로 체득할 수 있는 재능이 있다. 설천위.”
그의 스승들이 지독하리만큼 육체의 단련에 집착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 * *
손휘의 분신이 갇혀 있는 동굴.
오늘도 어김없이 밤에 그곳으로 찾아간 설천위는 부적이 가득한 바닥 위에 앉았다.
‘……혼으로 체득하라고?’
그러고 보니, 그런 성능을 내는 스킬도 있었지?
[영각(靈覺)]
혼에 새겨진 기억과 힘을 끌어내는 스킬.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뒤에는 거의 사용하지 않아 잊고 있었는데…….
“흐음.”
입꼬리를 삐쭉이며 고민하던 설천위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가 됐든 쓸데없이 길게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살존의 조언 이후 혼들은 입을 다물었으니 결국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상대가 있는 게 좀 더 나으려나?”
그냥 명상으로 내면세계에 들어갈까 했던 설천위는 봉인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일석이조라고 저기서 해결하자.
성큼성큼 걸어가 축 늘어져 있는 분신이 있는 봉인에 손을 댄다.
이젠 밖에선 제대로 된 반항도 안 하는 분신.
슬슬 꺾일 때가 됐는데, 아직도 이를 악물고 버티고 있다.
쓸데없이 독하기는.
가볍게 혀를 차며 기둥에 손을 댄 설천위는 그대로 정신을 가라앉혔다.
빠르게 내면세계로 들어가는 정신.
“흐음.”
새삼스럽게 내면세계로 들어온 자신의 몸을 이리저리 살핀 설천위는 고개를 갸웃했다.
역시 밖이랑 별로 다를 게 없는 것 같은데?
“……네놈.”
잠시 이리저리 몸을 살피던 설천위는 초췌한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분신을 보며 웃었다.
“여, 또 왔어.”
“독하기가 사갈 같구나……!”
“에이, 술사 짓도 하고 무인 짓도 하는데 당연히 독하지. 거, 왜 뻔한 걸 지적하고 그러시나.”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는 이번에는 바로 분신에게 접근하지 않았다.
본래는 들어와서 바로 접근해 발악하는 분신의 술법을 깨부수고 그대로 두들겨 패는 방식으로 일을 진행했지만…….
“마지막 기회를 줄게.”
이번에는 실험해 볼 게 있으니 특별 서비스다.
“시작하자고?”
“놈!”
한껏 여유를 부리는 설천위의 모습에 은밀하게 술법을 준비한 분신이 기다렸다는 듯 술법을 펼쳤다.
“그 오만한 콧대를 꺾어 주마!”
이를 악물고 악을 쓰는 분신의 결계가 설천위의 사방을 가로막는다.
기본 중 기본인 결계술.
하지만 손휘의 지식과 실력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결계는 완성된 순간부터 꽤나 확실한 방어력을 자랑했다.
“호오.”
설천위가 가볍게 주먹으로 쳐도 멀쩡한 강도.
여태까진 빠르게 접근해서 완성되기 전에 아예 깨부숴 버려서 몰랐는데, 역시 최상급 술사의 분신.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고 두 손을 앞으로 모았다.
혼으로 체득하라는 살존의 조언.
솔직히 말해서 정확하게 어떻게 하라는 건진 잘 모르겠지만…….
‘일단 해 보면 알겠지.’
육체가 아닌, 혼으로.
육체에 얽매이지 않고, 오로지 스스로의 의지와 정신력만으로.
펼치는 것은 권법.
천마를 스승으로 얻고 거의 바로 익히기 시작했음에도 아직도 대성하지 못한 [섬벽권(閃霹拳)].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성공하지 못했던 마지막 절초.
내면세계에서 천마가 몇 번 보여 주는 것을 직접 눈으로 봤지만 단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다.
“흡!”
앞으로 모았던 양손 중 왼손이 순식간에 허리춤으로 당겨지고, 오른손은 짧은 거리를 나아간다.
텅!
당연하다는 듯이 막혀 튕겨 나오는 주먹.
그리고 그 모습에 설천위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분신은 즉시 술법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육체에 달라붙어 속도를 늦추고, 움직임을 제약하는 저주에 가까운 술법을 계속해서 펼쳐 낸다.
텅! 텅!
그 와중에도 설천위의 주먹은 끊임없이 결계에 막혀 튕겨 나오고.
“드디어 정신이 나갔구나!”
서서히 느려지는 설천위의 움직임에 분신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길 수 있다.
이곳은 자신의 내면세계.
놈을 죽일 수 있다면, 놈은 죽음을 맞이한다.
설령 죽이진 못하더라도 반쯤 폐인으로 만들 수 있을 터.
여태까지 당했던 서러움이 솟구쳐 두 눈이 살기로 번들거리는 분신이 미친 듯이 술법을 펼치던 그때.
텅!!
소리가 강해졌다.
분명 상대를 속박하고 약화시키는 술법들이 더해지고 있음에도.
텅!!
소리는 점점 더 커져 갔고.
쩡!!
이내 결계에 금이 가는 끔찍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하.”
그리고 그 안에서 입꼬리를 비튼 설천위가 다시금 자세를 취했다.
“이렇게 하는 거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