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3화
382화-준비는 다양하게 (6)
일주일 뒤에 결행.
설천위의 선언 이후 살궁은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움직였다.
살궁의 살수들은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 재료들을 모았고.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해 경계 태세를 더욱 강화했다.
그야말로 살궁으로는 개미 한 마리 들어오지 못할 만큼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후우.”
설천위는 살존에게 맞은 부위를 천천히 풀어 주며 동굴 속을 걸었다.
일주일이라고 선언하긴 했지만, 딱히 큰 변화가 생긴 건 아니었다.
아침 수련도 그대로 했고, 살존의 수업도 그대로 받았다.
대신 잠을 방에서 자지 않았다.
백수아가 잠들어 있는 방을 지나 손휘의 분신이 있는 곳에 도착한 설천위는 털썩 주저앉아 벽곡단을 꺼내 들었다.
입에 넣고 씹으니 살짝 고소한데 뻑뻑하기는 더럽게 뻑뻑한 벽곡단이 서서히 풀어지는 게 느껴진다.
기름으로 뭉친 건데, 왜 이렇게 뻑뻑할까.
이게 곡물의 힘인가.
그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벽곡단을 씹어 삼킨 설천위는 그대로 고개를 들어 분신을 바라봤다.
일렁이는 형체.
인간의 형태를 지니고 있으나, 일렁이는 육체는 그것이 인간이 아님을 확실하게 알려 준다.
이쪽을 노려보는 눈동자엔 여전히 반항심이 가득하다.
“분신, 우리 이렇게 길게 끌지 말자고.”
[꺼져라.]
“에헤이, 알 거 다 아는 사람끼리 이래서야 되겠어?”
툭툭 엉덩이를 턴 설천위는 봉인을 유지하는 기둥 앞에 섰다.
“이 끝에 남는 건 너의 소멸밖에 없다니까?”
언여휘라고 해도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하물며, 타인에게 주는 법구로 온전히 재(災)를 봉인한다?
연옥의 괴물들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다.
가능이야 하겠지만, 상당한 대가를 치러야 할 터.
그렇기에 언여휘는 당연하게도 전체를 봉인하는 것은 포기했다.
지금 이곳에 있는 손휘는 분신, 엄밀히 말하면 손휘의 일부다.
백수아의 몸에 깃들어 있는 손휘의 일부를 강제로 뜯어내서 봉인한 것이다.
그 충격으로 백수아는 완전히 정신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목숨은 연장할 수 있게 됐다.
덤으로 본체 또한 혼의 일부가 뜯겨 나간 충격으로 언여휘의 술법에 의해 강제로 깊은 잠에 빠져들었고.
뜯겨 나간 일부는 홀로 지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자각했다.
손휘이면서 손휘가 아닌 자신을 자각한다.
언여휘가 노린 것도 바로 이것이다.
“협력해. 소멸당하고 싶진 않잖아?”
[…….]
손휘이면서 손휘가 아닌 존재.
강대했던 힘을 기억하지만, 그 힘은 없는 존재.
스스로가 저기 봉인된 이와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한 하나의 인격체.
가늘게 연결된 본체와의 연결이 끊기면 서서히 약해지다가 결국은 소멸할 존재.
혹은 연결이 다시 단단하게 이어지면 본체에 흡수되어 사라질 존재.
“이렇게 봉인 속에서 고통을 받다가 개죽음으로 마무리하고 싶은 건 아니잖아?”
이쪽으로 끌어들이면 단숨에 손휘의 본체에 강대한 타격을 입히고, 그 전력까지 깎아 낼 수 있다.
물론 그러고도 해결해야 할 문제가 몇 가지 더 있지만.
언여휘가 살존을 끌어들이기 위해 진심으로 움직였다는 건 확실하다.
이만한 정성이면, 언여휘라도 꽤나 공을 들였을 테니까.
후에 다시 접근해서 기회를 잡을 생각이었겠지만…….
“순순히 넘어와.”
기회는 설천위에게 넘어온 상태다.
히죽 웃으며 손을 까딱이는 설천위의 모습에 이를 악물던 분신은 다시 고개를 내렸다.
[……꺼져라.]
거듭되는 거절.
손휘의 지식 중 일부를 가지고 있기에 누구보다 자신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분신은 몇 번이고 설천위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 끝에 기다리고 있을 결말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지독한 오기이지만, 설천위 또한 조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저 오기(傲氣)는 오로지 하나의 감정에서 나오고 있는 거다.
자존심.
참으로 우습게도, 손휘의 분신인 주제에 손휘와 같은 자존심을 내세우며 이 제안을 거절하고 있는 거다.
이런 어린놈 따위에게 결코 굽힐 수 없다.
나는 손휘다.
뭐, 이런 자존심?
이것이 지금 저 분신을 지탱하고 있는 유일한 감정이다.
일렁이는 눈동자에 독기를 품은 분신이 이쪽을 노려보기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자꾸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나도 거친 수를 쓸 수밖에 없어?”
[네놈……. 양심이라곤 없는 거냐?]
내면세계에서 한 짓이 기억이 안 나나?
내가 거기에서 얼마나……!
이를 악문 분신이 격하게 일렁이지만,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이곤 봉인을 손으로 쓱 어루만졌다.
“그게 부드럽게 대해 준 거란 걸 왜 몰라, 응?”
“……주인님, 흑도 왈패 같아요.”
뒤에서 조용히 부적을 붙이던 청아가 일침을 가했지만, 설천위는 무시했다.
“뭐, 좋게좋게 가기 싫다면 이쪽도 선택지가 없지.”
봉인에 손을 올린 설천위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네놈.”
“오, 마음의 준비는 했나?”
황량한 대지 위에 선 설천위는 경계심 가득한 분신의 시선을 느끼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내가 널 손휘로 대접해 주는 건 이제 끝이야. 분신.”
“개소리.”
“어허.”
순간, 거리를 좁힌 설천위의 손이 분신을 향해 뻗어 나간다.
여태까지 당한 것이 있기에 미리 준비하고 있던 분신이 곧바로 술법을 펼쳐 방어했다.
옅은 푸른색을 띤 결계가 분신과 설천위의 사이를 가로막았으나.
“커헉!”
단박에 부서졌다.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그대로 결계를 뚫고 지나간 설천위의 손이 분신의 목을 움켜쥐었다.
“내가 첫날 했던 말 기억하냐?”
“크윽! 무슨……!”
“널 제압하고 몇 가지 실험을 할 거라고 했던 말.”
비틀린 미소와 함께 분신을 허공으로 들어 올린 설천위가 반대쪽 손을 들었다.
“여태까진 제압에 집중하며 상황을 살폈지만…… 아무래도 슬슬 시간 끝나 가는 것 같아서 말이야.”
우웅!
설천위의 손에 깃든 힘이 천천히 진동한다.
순식간에 오망성을 그리고, 그것을 손바닥 위에 둔 설천위가 서서히 분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니 망가지지 마라.”
조금 급하게 실험할 생각이니까.
* * *
“끙.”
살궁의 훈련장.
몸을 일으킨 백유는 툭툭 먼지를 털어 냈다.
“스승님.”
“뭐냐?”
“원래 이렇게 강한 겁니까, 오존(五尊)은?”
“기본적으로 나 정도는 한다고 봐야겠지.”
날이 살짝 나간 단검을 살피며 살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불존(佛尊) 빼고는 전부 직접 만난 적 있지만, 쉬워 보이는 상대는 없었지.”
“불존 빼고라면…… 북존도 봤다는 소린가요?”
북존(北尊) 설주철.
호남설가의 가주.
소림의 방장과 같이 무림맹과 협력 관계에 있으나 무림맹에 이름은 올리지 않은, 무림의 최고수 중 하나.
그리고 설천위의 친부 되시겠다.
“봤지.”
백유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 살존은 피식 웃었다.
“차가운 남자였다. 내 외모를 보고도 전혀 흔들리지 않은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하나지.”
그 몇 안 되는 사람들 중 설천위도 있으니, 부자에게 전부 무시당한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불쾌한데.
설천위 걔는 수아를 보고도 아무런 생각이 없던 것 같던데…….
“북존이 천위를 홀대한다는 건…….”
“뭐, 맞는 말이지.”
막내 그리고 죽은 둘째 부인의 자식.
살아 있는 첫째 부인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라고 세간은 생각하고 있지만.
“다만, 착각하진 말아라. 북존이란 남자는 자식들 전부를 홀대하는 인간이니까.”
“……네?”
“정확히 말하면, 홀대라기보다는 방임? 방치?”
히죽 웃은 살존은 우연한 기회에 만나 술잔을 기울였던 사내를 떠올렸다.
이를 악물고 새벽부터 수련하는 자식에게 칭찬 한마디 던지지 않던 사내.
자식을 고작 가문의 부속품으로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워져 날카롭게 쏘아붙였었다.
돌아온 대답이 아주 걸작이었지.
그때의 대화를 떠올린 살존은 피식 웃으며 단검을 던졌다.
가볍게 백유의 손앞에 꽂히는 단검.
“좋은 아비는 못 되는 인간이지만, 최소한의 아비 노릇은 하는 인간이다.”
새로운 단검을 꺼내며, 살존은 백유에게 손짓했다.
“그러니, 아버님이 될 사람 신경 쓰지 말고 덤비도록. 아직 후반부 초식은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있는 주제에 산만하구나.”
“궁금한 것뿐이거든요.”
손앞에 있는 단검을 뽑으며, 백유는 몸을 일으켰다.
“천위는 아버지 이야기를 안 하니까요.”
자신처럼 가족과 연을 끊은 줄 알았다.
백유의 말에 그 의미를 알겠다는 듯 웃은 살존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순식간에 백유의 목과 어깨를 스쳐 지나가는 단검.
겨우 반응한 백유의 회피에 얇은 실선이 생기는 것으로 끝나고.
단숨에 파고든 백유의 단검이 살존의 급소를 노린다.
목과 어깨.
살존이 회피하는 순간, 뱀처럼 휘어진 팔이 그대로 겨드랑이와 복부를 노린다.
부드러운 초식의 연계.
참 가르치는 보람이 있는 제자다.
뭐, 화경급 고수인 제자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아비나 자식이나 비슷한 거겠지.”
어느새 백유의 눈앞에서 사라져 그녀의 옆에 나타난 살존이 웃었다.
동시에 부러진 단검의 날이 튕겨 오르고, 살존의 주먹과 단검이 백유의 전신을 두들긴다.
그 와중에 부러진 단검으로 대응하는 백유의 발악에 살존이 쥐고 있던 단검의 이가 또다시 나간다.
순식간에 몰아붙이는 공격과 겨우 방어에 성공하는 백유.
그녀들의 주위엔 부러진 단검의 잔해가 가득했다.
* * *
“참…….”
호남과 강서의 경계.
그곳에서 설천운은 허허롭게 웃었다.
“많이도 모였네.”
무림맹의 무혈 지부에 다녀온 뒤 곧바로 움직였지만, 어디서 정보를 들었는지 벌써 저리 벌 떼처럼 모여들었다.
뭐, 이쪽의 움직임을 딱히 철저하게 숨긴 게 아니니 당연한 결과이겠지만…….
가문의 무력 단체인 북풍대가 야영을 하고 있는 언덕 너머 저 아래에 가득 모인 무인의 숫자가 어림잡아도 삼백은 넘어 보인다.
이쪽은 고작 쉰 정도의 인원만 데려왔는데.
압도적인 숫자의 열세.
하지만, 그럼에도 설천운은 웃으며 혀를 찼다.
“용감하네.”
무슨 깡으로 이렇게 모인 걸까.
거기다 정보가 샜다곤 해도 이렇게까지 빨리 모일 거란 생각은 안 했는데.
가만히 사파의 무리들을 바라보던 설천운은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로 돌아왔다.
수적 열세는 확실하지만, 설천운도 그가 이끄는 북풍대도 아무런 감흥 없이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북풍대의 가운데,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중년 사내.
그에게 다가간 설천운은 담담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아버지.”
설천운의 목소리에 천천히 고개를 드는 사내, 설주철.
한 점의 감정도 담기지 않은 차가운 눈동자로 그는 자신의 장남을 바라봤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사천맹에 벌레들이 꼬였다는 정보가 사실이군.”
“그런 것 같네요.”
설천운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대응은 기존의 사천맹과 맞지 않았다.
사존이 정점에 오른 사천맹은 자신들의 영역을 독하게 지키긴 했지만, 그래도 선은 지켰다.
무엇보다 저렇게 경계 지점에 다수의 병력을 보내는 짓은 웬만해선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설가가 움직였다는 사실 하나로 이렇게 헐레벌떡 뛰어왔다는 건…….
“그 노친네가 또 방랑벽이 도졌나 보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설주철은 담담하게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 직접 나서실 겁니까?”
“벌레들이 좀먹은 이상 대화는 무용(無用)이다.”
성큼성큼 걸어서 언덕의 끝에 도달한 설주철은 흉흉한 기세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는 적들을 내려다봤다.
역겨운 피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올라온다.
동시에 무(無)에 가깝던 그의 눈동자에 흐릿한 살기가 맺혔다.
호남설가는 오로지 사파만을 견제하는 가문.
본래 사파의 영역이었던 호남을 먹어 치운 후 홀로 남쪽에 자리 잡고 자신들의 삼면을 차지한 사파를 역으로 압박하던 가문.
그리고 그 오만한 행보의 핵심은.
“비키도록.”
압도적인 힘이다.
설주철의 발에서 시작된 냉기가 대지와 공기를 얼린다.
역한 피 냄새조차 얼어붙어 사라지고.
언덕 아래에선 얼어붙은 적들의 하얀 입김만이 올라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