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1화
380화-준비는 다양하게 (4)
처음 손휘의 내면세계에 들어갔던 그다음 날.
설천위는 다시 공동을 찾았다.
하는 일은 전과 똑같았다.
미리 만들어 놓은 부적으로 밑 준비를 하고.
청아가 그걸 돕는다.
어느 정도 진행이 되면 봉인된 곳에 다가가, 손휘의 내면세계로 진입.
“……또 왔군.”
황량한 땅 위에서 손휘의 분신과 마주한다.
제대로 형체가 유지되지 않는 건 아마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이기 때문이겠지.
본체도 이렇게 허술하면 좋겠지만…….
“손휘, 이 이름으로 불러도 될지 모르겠는데…….”
어김없이 펼쳐지는 술법을 흑관으로 막아 내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고작해야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신, 역시 손휘라고 부르는 건 너무 과장 아닌가?”
“그런 같잖은 도발에 내가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넘어오진 않아도 반응은 하네.”
말없이 자신을 노려보는 손휘를 향해 히죽 웃어 준 설천위는 펼쳐 낸 흑관에 힘을 더했다.
뻗어 나간 흑관이 손휘의 술법을 밀어낸다.
그것은 기이한 광경이었다.
지금의 손휘가 아무리 온전치 못한 상태라고 할지라도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술사의 역량이 압도적으로 차이가 나지 않으면, 한쪽의 술법이 이렇게 일방적으로 다른 한쪽의 술법을 짓밟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아무리 설천위가 대단한 술사라고 할지라도, 손휘 또한 생전에 이름을 날리던 뛰어난 술사.
그런데도 이렇게 압도적으로 밀린다는 것은…….
‘괴물 놈.’
답은 하나밖에 없었다.
내면세계인 이곳의 특성을 이용해 말 그대로 정신력으로 찍어 누르고 있는 것이다.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분신이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설령 상대가 분신이라고 할지라도 그걸 실제로 해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
대체 얼마나 견고한 정신력을 가지고 있어야 이런 짓이 가능한 걸까.
아니, 애초에 인간에게 이게 가능한 일인가.
다른 존재의 내면세계에 침입해 자아를 유지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힘에 완전한 확신을 품고 그걸 구현해 낼 수 있는 정신력이라니.
인간의 정신력이 아니었다.
“너도 알고 있잖아?”
화염을 흑관으로 흐트러트리며 다가오는 설천위의 모습에 손휘는 이를 악물었다.
가슴 앞으로 모은 손이 순식간에 몇 개의 수인을 맺고 술법을 구현해 낸다.
거대한 물이 폭포가 되어 떨어지고.
땅이 일어나 파도가 되어 덮치고.
바람이 모여 칼날이 되어 몰아친다.
단숨에 이만한 술법을 펼쳐 내는 것만으로 지금 이곳에 있는 손휘가 본체에 밀리는 허접한 술사가 아님을 증명했으나.
“부질없는 반항은 그만했으면 좋겠는데.”
거대한 흑관이 폭포를 받아 내고.
계단으로 변한 흑관은 흙의 파도를 유유히 지나간다.
눈으로 보는 것조차 힘든 바람의 칼날은 마치 알고 있다는 듯 나타난 흑관에 가로막힌다.
“사용할 수 있는 건 하급 주술뿐. 그 역량이 뛰어나 나름 쓸 만한 위력을 뽐내고 있지만, 아무런 의미도 없지.”
결국, 분신의 한계다.
강제로 뜯겨 나와 봉인된 분신이 본체의 모든 것을 재현해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한계가 명확하기에.
“손휘.”
이렇게 거침없이 걸어오는 설천위를 막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순순히 내 밑으로 들어오면 살려 주마.”
“큭.”
자신의 앞에 서서 손을 내미는 설천위의 모습에 손휘는 조소를 지었다.
“애송이, 고작 네놈 따위에게 숙이고 들어갈 인간이었다면, 내가 이러고 있지도 않았을 거다.”
제대로 된 형체도 유지하지 못하면서 두 눈은 강렬하게 번뜩이는 손휘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명언이 있어.”
시간은 많다.
어차피 살존의 부하들이 재료를 모아 올 시간도 필요하니까.
“누구나 그럴듯한 계획이 있지.”
순식간에 손을 뻗어 손휘의 어깨를 붙잡은 설천위가 가볍게 반대쪽 손을 당겼다.
“한 대 처맞기 전까진 말이야.”
* * *
손휘를 가둔 봉인의 밖.
바닥에 쭈그려 앉아 부적을 붙이고, 설천위에게 받은 영력을 주입하던 청아는 번뜩 고개를 들었다.
쿵! 쿵!
거세게 심장이 요동치는 것 같은 떨림.
제단이 그 박동에 맞춰 흔들리는 것이 보인다.
그 중앙에 갇혀 있는 악귀의 형체 또한 시시각각 흔들리는 모습.
“……대체 뭔 짓을 하고 있는 거래.”
봉인된 악귀의 내면세계로 들어간다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주인의 모습에 고개를 저은 청아는 다시 작업에 몰두했다.
주인의 술법 실력은 대체 왜 늘어나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신 차리면 늘어나 있으니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면 지는 거다.
그냥 바람이 불고 초목이 자라는 것처럼 당연한 자연의 이치…….
“하, 새끼. 생각보다 질기네.”
순간, 들려온 주인의 목소리에 다시 고개를 든 청아는 말과는 달리 꽤나 상쾌한 미소를 짓고 있는 주인을 발견했다.
그리고.
[네…… 놈…….]
축 늘어진 악귀의 모습은 덤이었다.
“생각보다 끈질기네.”
분명 그럴듯한 계획은 시작과 동시에 부숴 줬는데.
입으로 추정되는 구멍을 악물고 자신을 노려보는 손휘를 보며 설천위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언제든 생각이 바뀌면 말하라고. 친절하게 상담해 줄 테니까.”
[개소리…….]
대체 안에서 얼마나 심력이 깎였으면 욕하는 것도 힘이 없지?
이죽거리던 손휘의 모습과 지금을 비교하던 청아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주인님!”
“어, 일은?”
“착착 해내고 있었어요!”
“좋아. 고생했으.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넵!”
빠릿빠릿하게 손을 올리는 청아의 머리를 쓰다듬은 설천위는 그대로 공동을 나왔다.
뒤에서 손휘가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슨 상관인가.
할 일은 끝났는데.
애초에 하루 이틀로 끝낼 일이 아니었다.
시간을 들여 확실하게 준비할 필요가 있었다.
분신으로 떨어져 나온 손휘의 약화는 그 첫 단계.
그다음은…….
“어때요?”
[음, 확실히 일반적인 병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다. 천음지체와도 완전히 상황이 달라.]
신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설천위는 석관에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안을 살피니, 명불허전의 미모를 간직한 수아의 모습이 보인다.
“이렇게 보니 또 새롭네.”
백수아.
살존의 딸.
물론 성은 죽은 아버지의 것이다.
그 성정은 부드럽고, 정이 넘친다.
죽은 아버지를 닮았다…… 라는 설정이었지.
성격은 아버지를 닮았고, 재능은 어머니를 닮았다는 설정의 여인.
설천위는 사실 살존에 대해선 그리 깊게 알지 못하지만, 이 백수아에 관해서는 꽤나 많은 정보를 알고 있다.
그 이유야 간단하다.
살존은 어떤 루트를 타든 간에 백수아 없이 생존하지 않는다.
백수아가 죽으면, 살존도 무조건 죽는다.
백수아가 살아남으면, 살존은 죽거나 폐인이 된다.
정말, 아주 정말 철저하게 준비를 거쳐 살존의 무위를 보존하는 방법도 없진 않지만.
그렇게까지 준비하다 보면 다른 이벤트들을 너무 놓쳐 게임 전체에 망조가 든다.
그렇게 되면 유저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하나.
백수아를 살려서 전력으로 삼는 것뿐이다.
설천위도 마찬가지였다.
백수아는 몇 번이고 구해 봤고, 동료로 넣고 움직여 봤다.
유예린 저리 가라고 할 정도의 은신 능력.
영적인 존재와 결합됐던 후유증으로 크게 올라간 영적 공격력과 수비력.
별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악에 받쳐 수련에 수련을 거듭해 가파르게 상승하는 능력치.
진짜 동료로서는 이만한 전력도 없다 싶을 정도로 뛰어난 인재다.
게임의 후반부로 갈수록 영적인 힘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큰 차이로 나타나니까.
그런 의미에서 참으로 훌륭한 동료였지만…….
백수아의 공식 별호는 수월화(水月花)였다.
살존의 독문무공 수월(水月)을 이어서 그런 점도 있지만, 정확히는 전혀 흔들리지 않는 그녀의 표정 때문에 붙은 별호다.
물 위에 비친 달처럼, 이지러지고 흔들려도 그 본모습은 절대 변하지 않는 암살자.
무표정한 월아(月娥).
성정이 부드럽고, 정이 넘치는 성격.
아버지를 닮았다.
이 정보를 설정으로밖에 못 본 이유가 이거다.
뭐, 웃는 모습을 봤어야 성격이 부드러운지 알지.
대화도 거의 못 하는데, 어찌 알겠는가.
그런 여자가 이 백수아인데.
“참…….”
평온하게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뭔가 좀 감회가 새롭다.
차가운 것이 매력 포인트로 꼽히는 조연 중 하나였는데.
웃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아우성치는 유저들도 겁나 많았지만, 백수아는 유예린과 마찬가지로 공략 불가능한 캐릭터였다.
흠흠, 솔직히 한 번쯤 공략해 보고 싶은 마음이…….
“주인님, 또 나쁜 생각을…….”
“또는 무슨 또야.”
헛소리를 지껄이는 청아의 머리를 쥐어박은 설천위는 관에서 떨어졌다.
뭐, 일단 구하는 데 집중하자.
상황도 상황이고, 동료로 끌어들이긴 힘들 테니까.
다만, 역시 문제는 신의조차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 백수아의 상태다.
“……가능할지 모르겠네.”
게임 속에선 백수아의 상태를 헤아리지 않아도 되는 방식으로 백수아를 구해 낸다.
문제는 그게 상당히 어렵고, 꽤나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점.
시간이나 난이도는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다.
백유의 상황이 썩 좋지 않지만, 일단 백수아의 급한 불 정도만 꺼 놓고 백유를 도와 일을 처리하면 되니까.
문제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지금 없다는 점이다.
게임 속에서 백수아를 구하는 방법에는 최소 열 명 이상의 술사가 필요하다.
그것도 중급 이상 즉, 대주급 이상의 술사가 열 명 이상 필요하다.
보통 백수아를 구할 때는 무림맹이 움직이는 시기라 백화단이나 만귀단의 협조를 얻어 어떻게든 가능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도저히 무리다.
“……역시 그 방법을 써야 하나?”
슬쩍 청아를 바라본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듣는 순간, 천재인가 싶을 정도로 참신한 아이디어였지만…….
윤리적으로 조금…….
으음…….
“으음…….”
신음이 속과 입으로 둘 다 나오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며 걷던 설천위는 본능적으로 걸음을 멈추고 상념에서 벗어났다.
그러자 들려오는 밝은 목소리.
“천위!”
“……참 해맑네.”
담벼락에 처박힌 채 손을 흔드는 백유의 모습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설천위는 그녀의 손을 잡아 뽑아냈다.
“고마워!”
“너, 뭔가 더 활기차졌다.”
눈을 가늘게 뜬 설천위의 시선에 이리저리 몸을 풀던 백유는 히죽 웃으며 답했다.
“재밌거든!”
“부상도 고려해서…….”
“회복도 더 잘되고 있는 느낌이야.”
거침없이 자신이 몸으로 무너트린 반대쪽 담을 넘는 백유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저었다.
크게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이 없는 걸 보면 진짜 부상이 낫고 있는 것 같긴 한데…….
가능한가?
[추궁과혈이구나.]
[살존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
[물론, 그걸 받아도 회복력이 늘어난 건 저 아이의 태생적인 육체의 힘이겠다만…….]
아하.
가능하군.
재능만 있다면 뭔들 불가능하겠어!
무너진 담벼락 사이로 고개를 내민 설천위는 히죽히죽 웃고 있는 백유의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살존의 나무 단검에 신나게 두들겨 맞고 있는 것만 아니면 참 해맑은 웃음이라 칭찬해 줬을 텐데.
[무(武)에 재능이 있는 이는 대체로 배움을 좋아하는 편이지.]
“정확히 말해 주세요. 무(武)에 대한 배움을 좋아하는 거라고. 무식한 무림인이 얼마나 많은데.”
[흠흠, 아무튼 배움을 좋아하는 것 맞지 않느냐? 무학(武學)이라고 부르는 데는 다 이유가…….]
천마의 헛기침에 대충 손을 저은 설천위가 다시 가던 길을 가려는 순간.
“설천위, 너도 이리로 와라.”
“네?”
그게 무슨?
빠각!
살존이 휘두른 단검에 백유의 몸이 다시 훨훨 날아갔지만, 무려 공중에서 방향을 틀어 버린 백유가 땅에 착지했다.
응, 그렇겠지.
화경급 고수니까.
저래 봬도 나름 사천맹의 단주를 쳐 죽인 강자니까!
그런 강자를 날려 버린 나무 단검을 휘리릭 돌리며 살존이 부드럽게 웃었다.
“상처 회복에 좋은 안마를 해 주마.”
안마를 받다가 죽고 싶진 않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