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0화
379화-준비는 다양하게 (3)
설천위를 공동으로 안내하고, 그 밖에 서 있던 살존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등 뒤의 벽 너머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감각으로 전해진다.
어느 순간 제대로 된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자, 살존은 걸음을 옮겼다.
딸 수아가 잠들어 있는 관.
그 관에 다가간 그녀는 조심스럽게 관을 쓸었다.
딸의 얼굴조차 만지지 못한 지 벌써 몇 해가 흘렀는지.
그녀를 살리기 위해 특수하게 제작한 이 관의 감촉은 이제 지겹다 못해 거북했다.
하지만, 그것이 딸을 그나마 가장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는 방법이기에 그녀는 이곳에 오면 항상 이 관을 어루만졌다.
무표정하지만, 창백한 안색.
건강했을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미안하구나.”
살아 있을 적엔 해 본 적 없는 사과를 이렇게 또 허공에 내뱉는다.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살존은 억지로 눌렀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선배.”
“여긴 무슨 일이지?”
“작은 부탁이 있거든요.”
특유의 미소를 지으며 나타난 백유는 엄지로 동굴 입구를 가리켰다.
“가서 대련이나 한판 하시죠?”
“……말투가 점점 가벼워지는구나.”
“음, 누워 있는 딸을 보니 친구 엄마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가?”
외양은 그냥 언니지만.
아무리 고수의 외모가 평균보다 젊다지만, 살존은 그게 좀 심하지.
젊게 꾸미면 십 대로도 보일 것 같은 수준이니까.
잠시 살존의 외견을 이리저리 뜯어보던 백유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그래도 경쟁자는 아니네요. 그 녀석도 과부에겐 관심 없을 테고! 문제없음!”
“무슨 헛소리를…….”
백유의 헛소리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살존은 관에서 일어나 백유에게 걸어갔다.
“그래, 마침 네게 부족한 것도 좀 채워 놔야 할 것 같으니 좋은 기회구나.”
“부족한 점이요?”
“철섬수(鐵殲手)는 괜찮은 무공이지만, 모자란 무공이기도 하지.”
자신이 익힌 주력 무공을 향한 살존의 평가가 꽤나 짰지만, 백유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긴 하죠.”
애초에 일류 수준의 무공.
당연히 한계가 명확하다.
사존에게 배운 위천공의 뇌기와 강기.
거기에 더해 본인의 뛰어난 전투 능력을 살려서 싸우고 있을 뿐.
백유는 실질적으로 무(武)의 깊이가 그리 깊지 않다.
화경에 오른 고수에게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녀가 얻은 깨달음은 무(武)의 기술적인 부분이 아니라 기(氣)에 관한 깨달음이었다.
즉, 그녀는 화경이라는 경지에 비해 무(武)의 깊이가 얕았다.
시간이 지나면 타고난 재능이 그것조차 메워 버릴 새로운 무(武)를 만들어 내겠지만.
그래서야 늦는다.
“공동전인이라…….”
백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본 살존은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님이라고 부르도록.”
“예?”
백유조차 뜬금없는 말을 따라가지 못하고 벙찐 얼굴을 했지만, 살존은 담담했다.
“사파의 하늘에 오를 생각이라면 따라와라.”
* * *
살존이 언여휘와의 거래로 얻으려고 했던 것은 딸의 치료였다.
달라붙은 악귀를 떼어 내고, 그 악귀를 소멸시키는 것.
문제는 살존이 손휘의 존재를 알아챘을 땐 이미 그녀의 딸에게 그가 완전히 기생한 뒤였다는 점이다.
살존이 직접 딸을 데리고 나가 언여휘에게 보여 줬지만, 언여휘조차 난색을 표했다.
살존을 이용하기 위해 나름 줄다리기를 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치료 자체가 힘들었다.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게 결론을 내린 언여휘는 살존에게 임무를 주며 천천히 치료를 진행하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중간 조치로 취한 것이 바로 봉인이었다.
악귀의 힘을 일부 떼어 내, 점점 더 심해지는 잠식을 늦추기 위한 조치.
다만, 아무리 언여휘가 무림에서 손에 꼽히는 술사라고 해도 한계는 있었다.
손휘는 생전에 그 이름이 무림에 널리 퍼진 고위 술사.
유지 보수가 진행되지 않은 봉인에 무한정 묶여 있을 하수가 아니었다.
하물며, 최소한의 영력을 불어넣어 줄 술사도 없는 상황에서 봉인이 제대로 유지될 리가 없었다.
애초에 언여휘도 아예 유지 보수 없이 봉인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기둥의 안쪽에 있는 불길은 이미 처음에 비해 많이 약해진 상태.
초기의 봉인은 타오르는 불길 안에 있는 손휘의 형체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즉, 봉인의 유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봉인이 풀리면, 수아의 몸 밖으로 나온 손휘의 일부가 수아의 몸으로 돌아갈 것이고.
수아는 급속도로 생명과 영혼을 뺏길 것이다.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황에서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얌전히 부적을 붙이던 청아는 끔찍한 상상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거 맞아요? 주인님.”
그녀의 시선이 봉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설천위를 향했다.
“아무리 봐도 무리수 같은데…….”
본체에서 떨어져 나온 악귀를 처리해 본체를 약화시킨다.
간단한 이치고, 당연한 결론이긴 하지만…….
문제는 떨어져 나오긴 했어도 저 악귀는 수아라는 여자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다.
떨어져 나가는 순간, 본체도 약해지지만 수아라는 여자의 혼과 육체 둘 다 함께 타격을 입는다.
“이게 진짜 효능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그걸 막기 위해 지금 자신이 이렇게 덕지덕지 부적을 붙이고 있는 거지만…….
이게 진짜 효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왜 저리 위험한 방법을 좋아하는지…….”
악귀의 내면세계로 쳐들어간다는 발상은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 * *
“삭막하네.”
황량한 대지.
너무나도 판에 박은 듯한 지형과 환경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이리저리 몸을 풀었다.
나름 술사 출신이란 녀석이 상상력이 없어요, 상상력이.
“네놈…….”
“뭐야, 내면세계까지 들어와 줬는데 그 꼴이야?”
일렁이는 육신.
제대로 된 형체조차 잡지 못하고 일렁이는 손휘의 모습에 설천위는 쯧쯧, 하고 혀를 찼다.
“그래서야 복수나 하겠어?”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애송이?”
설천위의 도발에도 손휘는 오히려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무언가.
무언가 이상하다.
한껏 경계심을 끌어올린 손휘의 모습에 설천위는 피식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뭐, 간단해. 널 제압하고 몇 가지 실험을 할 거야.”
“제압? 나를 말이냐? 이 내면세계에서?”
내면세계는 영혼의 공간.
다른 명칭으로는 자아(自我)의 공간이라 부르는 곳.
이곳의 가장 큰 특징은 침입자가 한없이 불리하다는 점이다.
애초에 그 공간의 지배자가 있는 곳에 끼어들었으니, 당연히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이곳은 손휘의 내면세계.
봉인을 지나 설천위가 억지로 들어온 것이니 당연히 손휘가 우위를 보인다.
그런데 제압이라니?
“봉인 당해 있다고 나를 얕잡아보는 거냐?”
“아니, 그냥 얕잡아보는 건데.”
무려 재(災)의 영역에 이른 악귀 앞에서 지껄일 수 있는 말인가, 이것이.
아무리 일부가 떨어져 나와 봉인된 것이라고 해도.
그 힘은 웬만한 악귀는 가볍게 소멸시킬 수 있는 수준이다.
설령 술사라고 할지라도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것이 마땅하거늘.
오만하기 그지없는 설천위의 접근 방식에 손휘는 망설임 없이 움직였다.
살존이 데려온 녀석이니만큼 경계해야 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겁먹고 움츠릴 필요는 없었다.
“놈, 격의 차이를 보여 주마.”
손휘의 손에서 펼쳐진 술법이 단숨에 공간으로 뻗어 나간다.
“오, 화염인가?”
자신의 주위로 녀석의 영력이 닿자마자 발화하는 것을 목격한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흑관(黑棺)]
그리고 단숨에 짓밟는다.
수십 개의 흑관이 손휘가 만들어 낸 화염을 집어삼킨다.
단숨에 공격이 막혔지만, 손휘는 기다렸다는 듯 다시 손을 움직였다.
생전에 뛰어난 술사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수많은 술법이 쏟아져 나온다.
화염, 물, 바람, 대지.
기본적인 속성은 물론이고 결계, 저주 등도 펼쳐진다.
웬만한 술사라면 정신을 차리지도 못할 정도로 무수한 술법들의 향연.
손휘조차도 내면세계이기에 가능한 무식한 난사였지만…….
“과연.”
그 어떤 것도 뚫지 못했다.
설천위를 감싼 [흑관]은 마치 철옹성이라도 되는 것처럼 모든 술법을 받아 내고 지워 버렸다.
“……어째서?”
그 경악스러운 광경엔 손휘도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고작해야 새파란 어린 술사 놈이다.
그런 녀석이 고작 단 하나의 술법으로 자신의 모든 술법을 막아 낸다고?
“역시 반쪽짜리라 그런가. 영 약하네.”
……저런 도발까지 해 가면서?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설천위의 모습에 손휘의 형체가 비틀렸다.
눈과 입이 있어야 하는 자리의 구멍이 비틀린다.
“감히, 감히……!”
분노를 참지 못한 혼은 일렁이고, 덩달아 그 내면세계까지 흔들리기 시작한다.
황량하기 그지없는 땅이 격하게 요동치고.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짝!!
설천위의 손뼉 소리가 단숨에 공간을 휩쓸었다.
한순간 전신이 격하게 뒤흔들린 손휘가 다시 중심을 되찾았을 때.
“그럼 내일 보자.”
설천위는 여유로운 미소와 함께 내면세계를 떠나고 있었다.
* * *
“흠, 생각보다 쉽네.”
봉인 때문에 약해져서 그런가?
동굴에서 나온 설천위는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손휘의 상태에 만족했다.
상대하기 까다로운 수준으로 강했다면 꽤나 애를 먹었을 텐데.
이 정도면 훌륭하다.
시간을 끌기에도 적당하고, 여러모로 공부하기에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재료가 모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그나저나.
“상태는 어떤 것 같아요?”
[격한 반동이 오면 높은 확률로 목숨이 위험할 게다.]
관 속에 있는 수아의 진단을 맡은 신의의 말에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역시, 이게 가장 큰 문제다.
손휘와 수아의 분리도 분리지만, 수아가 그 부작용을 견뎌 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무슨 짓을 해도 아무런 충격 없이 둘을 분리해 내는 건 불가능하니까.
최소한의 체력 정도는 되찾아 줘야 한다는 건데…….
이젠 의식도 제대로 못 차리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서 체력 보충을 시킨단 말인가.
달여서 만든 약재를 먹이는 거로 증진시킬 수 있는 체력에는 한계가 있는데.
그냥 살존의 재능을 물려받아 튼튼하기를 바랄 수밖에 없나?
아니, 뭐 구해 내기만 하면 확실하게 1인분을 하는 여자이니 나름대로 강인하겠지만…….
그거야 온갖 방법으로 안전하게 구해 낸 뒤의 이야기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하겠지만, 게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역시, 뭔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내긴 해야…….
“음?”
살존의 장원에 도착해 별채를 향해 걸어가던 설천위는 저 멀리서 들리는 기합 소리에 고개를 갸웃했다.
이 익숙한 목소리는 분명 백유인데…….
왜 처맞는 소리가 나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걸음을 옮긴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처맞을 만하네.”
“처맞을 만하다니! 천위! 말이 심하네!”
거, 말도 짧게 해야 하는 상황이면서 굳이 반응하기는.
살존의 목검으로 몸 이곳저곳을 안마 받고 있는 백유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조용히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은 설천위는 담담한 표정으로 백유를 지도하는 살존의 모습을 바라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
백유는 패도(覇道)를 걷는 자.
당연히 수아를 구할 능력과는 동떨어진 성장을 한다.
뭐, 찾아보면 방법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설천위의 적은 플레이 경험으로 백유는 대체로 살존의 적이었다.
설령 아군이었다고 한들 사제(師弟) 관계가 될 사이는 아니었고.
그렇기에 은밀함을 품은 살존의 무공을 흡수하는 백유의 모습은 썩 낯설었지만.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놀랍도록 빠르게 적응하는 그 모습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학관 시절에 영약도 주고, 사존의 무공도 익히게 해 줬는데.
이번엔 살존의 무공이라.
가만히 백유를 바라보던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상관없나.
강해지면 좋지, 뭐.
수아를 살릴 고민이나 하자.
일단 약재나 기물로 최대한 끌어올리는 게…….
[주인님, 주인님.]
“……왜?”
[이건 어때요?]
뜬금없는 청아의 제안에 잠시 그녀의 말을 들은 설천위는 이내 두 눈을 크게 떴다.
“……청아, 너 천재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