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9화
378화-준비는 다양하게 (2)
살존의 장원.
설천위와 백유는 살존이 내어준 별채에 짐을 풀었다.
“……내가 뭘 본 건지 모르겠군.”
“나는 우리가 왜 같은 방을 쓰는지 모르겠는데.”
“그건 선배의 따뜻한 배려다. 천위, 이런 간단한 것도 모르고……. 사회생활을 좀 더 해야겠어.”
“너한텐 듣고 싶지 않은 말인데…….”
사회생활이란 사회생활은 전부 개판으로 하고 있는 인간한테 그런 설교를 듣는 내 기분도 좀 헤아려 줬으면 좋겠는데.
백유의 능청에 고개를 저은 설천위는 탁자에 앉아 붓을 들었다.
“뭘 본 건지 궁금하다고 했지?”
“음. 일단 악귀라는, 풍문으로 들은 존재 같더군.”
“뭐, 정답이야.”
다만, 그 뿌리가 조금 독특한 악귀일 뿐이다.
태생이 독특하고.
성장 과정이 독특한.
그래서 보통의 악귀를 아득히 뛰어넘는 형태로 강해진 악귀.
“문제는 녀석이 자리를 잡은 방식과 장소이지.”
천천히 부적을 그려 넣는 설천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것 때문에 내가 이곳에 와 있는 것이기도 하고.”
“그럼 내가 나설 상황은 없는 건가?”
“그래, 그리고 환자가 무슨?”
“천위, 너도 만만치 않은 중상일 텐데.”
“난 거의 회복했어.”
내상이 아직 좀 남아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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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라도(修羅道)의 파편을 흡수하였습니다(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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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탯, 수라(修羅)를 습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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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여휘가 주고 간 선물.
무려 수라도의 파편이다.
즉, 기절하고 내면세계에서 봤던 모든 것이 수라도의 일부란 소리다.
솔직히 말해서 생각지도 못한 수익이다.
아무리 언여휘가 미친 종자라지만, 육도의 파편을 적한테 심을 줄이야.
목적이 뭔지 모르겠다.
흡수에 실패하면 회수하는 데 꽤나 애를 먹어야 하고.
흡수에 성공하면 그대로 적이 강해지는 건데.
육도의 힘을 모르는 것도 아닐 테고…….
읽어 내기 힘든 언여휘의 꿍꿍이에 미간을 찡그리던 설천위는 이내 고개를 털었다.
지금은 이런 걸로 고민할 때가 아니었다.
육도는 그 파편을 얻은 것만으로 충분히 전력 강화에 도움이 되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엔 아니었다.
수라(修羅)라는 스탯은 오로지 전투에만 의미가 있으니까.
그런데 솔직히 설천위에겐 그 유일한 효과조차 별로 필요가 없었다.
수라(修羅) 스탯은 전투 지속성을 크게 늘려 주는 것이다.
높으면 높을수록 체력의 한계가 올라가고 회복력이 증가한다.
거기에 더해, 전투를 길게 지속하면 지속할수록 그 수치가 점점 상승한다.
추가로 전투 시간이 일정 시간을 돌파할 경우, 모든 스킬 레벨이 일시적으로 상승하기도 하고.
물론 전투가 끝나면 전부 최소치로 돌아오지만.
앞으로 있을 전투에 큰 도움이 될 힘은 맞지만, 일단 지금은 필요 없다.
상처 회복에 조금 도움이 되는 정도?
살존의 의뢰 해결에는 썩 큰 도움이 안 될 거다.
그러니 일단 이건 다음에 실전에서 시험해 보기로 하고.
“중요한 건 그 녀석을 약화시키는 거야.”
“약화?”
“그래, 상대가 묶여 있는데 그걸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부적을 그리는 손에 힘을 더하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준비만 할 수 있다면, 어떤 레이드든 성공으로 이끌 수 있지.”
* * *
“이건……?”
“그 녀석이 준 재료 목록이다.”
……재료 목록?
긴 두루마리를 펼친 일살은 말문이 막혀 가만히 내용을 읽었다.
재료들 중 상당수가 쉽게 구할 수 있는 거지만, 그중 구하기 극히 어려운 재료들도 몇 가지 포함돼 있었다.
물론, 이해는 간다.
무려 재(災)의 악귀를 상대하는 일이다.
만반의 준비를 하는 게 옳고, 그 준비엔 당연히 희귀하고 값진 재료가 들어가겠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작게는 소궁주를 위해서, 크게는 궁주를 위한 일이며 궁극적으로는 이 살궁 전체를 위한 일이다.
얼마든지 구해 올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런데.
“……재료의 위치까지 적혀 있군요.”
이건 조금 이해하기 힘든 일인데?
천년지라초(千年芝蘿草), 아백송(娥白松)의 가지 등등.
보통은 거의 쓰지 않는 특수한 재료들이다.
수요가 적으니 가뜩이나 적은 공급이 더 어려워지는 물건들.
구하기는커녕 시장에 있을지 없을지를 걱정해야 하는 재료들인데…….
그 모든 재료들의 자생지가 적혀 있다니.
아무리 그래도 이건…….
의심이 절로 고개를 들었다.
혹시 함정이 아닐까.
궁주님의 절박함을 이용한 적의 계략이 아닐까.
의심은 순식간에 수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고, 불신을 낳았다.
“일살.”
“……예!”
“설령 함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겐 선택지가 없다.”
조금은 힘없는 살존의 목소리에 일살은 깊이 고개를 숙였다.
살존께서 어째서 언여휘를 끊어 냈던가.
그들의 의뢰를 들어주는 것으로 소궁주를 구해 내더라도 결국 그들의 꼭두각시가 될 거란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악귀를 제거하는 과정에서 놈들이 소궁주에게 손을 쓰지 않을 리가 없다.
살존이라는 거인을, 살궁이라는 예리한 칼을.
그들이 쥐고 흔들게 되면 그 끝에는 오직 파멸만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 아닌가.
그 끝이 파멸이란 것을 알고도 그들에게 손을 뻗었던 살존에게 손을 내밀어 준 것이 바로 설천위다.
지금 그를 의심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다.
“……명을 받듭니다.”
고개 숙인 일살이 물러나고, 살존은 가만히 술병을 들었다.
술잔을 채우고 입에 가져가는 술.
독한 화주의 냄새가 코로 들어오고.
꾹.
술잔을 거세게 쥔 살존은 이내 술잔을 내려놨다.
“……수아야.”
언제까지고 도망칠 순 없다.
아니, 이젠 정녕 도망쳐선 안 되는 순간이 왔다.
각오를…….
“선배님, 계십니까.”
무슨 짓인가.
문 앞까지 사람이 도달했는데, 이제야 그 기척을 느끼다니.
스스로의 허술함에 혀를 차며 살존은 문을 열었다.
자연스러운 허공섭물로 마치 사람이 열어 주는 것처럼 부드럽게 열리는 문.
그 밖에 서 있던 설천위가 담담한 얼굴로 살존을 바라봤다.
“사전 작업을 시작하겠습니다.”
* * *
동굴 내부.
악귀는 여전히 일렁이며 허공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년째였더라.
그 계집이 견디지 못하고 쓰러진 뒤로 줄곧 이곳에 갇혀 있었으니 그리 긴 시간은 흐르지 않았겠지.
고작해야 삼사 년 정도일 터.
그사이에 살존이 가져온 이 제기에 봉인을 당했으니 더 많은 시간이 흘렀을 수도 있지만.
확실한 건 십 년은 아닐 것이다.
그랬다면 그 계집이 버티지 못하고 진즉에 죽었을 테니까.
[언여휘……. 그 같잖은 년이…….]
자신을 옭아맨 봉인.
아무나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재(災)에 버금가는 악귀를 봉인하는 법구(法具)는 생각보다 많은 술사가 만들어 낼 수 있다.
재료와 시간만 갖춰지면, 천천히 공들여 만들어 내면 되니까.
하지만, 타인, 그것도 영력을 쓰지 않는 일반인이 재(災)를 봉인해야 한다면 얘기가 다르다.
술사의 역량 없이, 오로지 도구의 역량만으로 재(災)를 봉인할 수 있는 법구라니, 거의 신물의 영역이다.
그런 법구를 만들 수 있는 건 전 무림을 뒤져도 한 손에 꼽힐 정도다.
그리고 그중 하나가 언여휘고.
생전에 그녀를 알았던 악귀는 단박에 이 봉인을 만든 제작자를 알아챘다.
그 괴물 년…….
‘잘도 이딴 봉인을 만들었군.’
제물을 이용한 봉인은 아니었다.
그런 음(陰)의 성질로 만든 봉인은 역효과라는 것을 알기에 오히려 순수하고 맑은 것들만을 재료로 써서 만들었다.
그 괴물 년이 단순히 미쳐 버린 괴물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철저한 지성과 이성을 가지고, 제 일족을 몰살시킨 괴물.
자신도 생전에 인간답게 살진 않았으나, 그 괴물에 비할 바는 못 되었다.
천륜(天倫)이란 것은 엄연히 술사에게 꽤나 큰 영향을 끼치니까.
그걸 제 욕망을 위해 부수고 제멋대로 짊어진 그 괴물이 이상한 거다.
여하튼, 그런 괴물이 만든 봉인이기에 이렇게 당해서 계획이 크게 차질을 빚었지만.
[애송이.]
이런 애송이에게까지 얕보일 줄이야.
일렁이는 눈을 뜬 악귀는 봉인 밖에 서 있는 설천위를 노려봤다.
[뭐 하는 거냐?]
“작업.”
손으로 이리저리 거리를 재는 모습이 무슨 목수 같다.
“이름, 음……. 손휘? 맞나?”
[…….]
“맞나 보네. 뭐, 지금도 그 이름으로 부르길 원하면 그걸로 불러 주지.”
침묵하는 악귀를 보며 히죽 웃은 설천위는 천천히 봉인의 주위를 걸었다.
과연, 언여휘 그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더니 역시나다.
“완성도 하나는 확실하네.”
살존을 적으로 돌릴 생각은 없었는지 성능 하나는 확실했다.
철저하게 계산된 힘의 분산과 역할.
완벽하게 맞물려 이뤄 낸 견고한 구조.
과연 인세 최강의 술사 중 하나다.
인성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서 그렇지.
그 인성 때문에 이렇게 점검을 온 거기도 하고.
‘예상 밖인데.’
별다른 조치가 느껴지지 않는다.
해 봤자, 술사가 이 봉인의 상태를 느낄 수 있는 정도?
보아하니 위치를 특정 짓는 종류의 술식도 느껴지지 않는다.
물론, 이쪽은 배움이 얕은 만큼 눈치채지 못하고 넘어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최소한 혈교의 술사를 쥐어짜 얻어 낸 지식의 범주 안에선 없다.
이 이상 확인할 방법은 딱히 없으니 넘어가고.
“청아.”
“네.”
“시작하자.”
실체화한 청아는 고개를 끄덕이곤 재빨리 움직였다.
미리 준비해 놓은 부적을 공동의 벽에 붙이고, 이리저리 움직인다.
[뭐냐.]
갑자기 식령을 불러 무언가를 시작한 설천위의 모습에 손휘가 미간을 찡그렸으나,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알게 될 거야.”
기이한 설천위의 자신감에 손휘가 미간을 찡그리고, 얼마 안 있어 손휘의 표정이 격하게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네놈…….]
“오, 뭐야? 벌써 눈치챘어? 역시 생전에 꽤 이름 날렸던 술사인가?”
청아가 붙인 부적을 하나씩 만지며 작업하던 설천위는 손휘의 반응에 즐겁게 웃었다.
“치졸하게 자식한테 붙으면 쓰나.”
손휘는 살존에게 원한을 품은 악귀.
다만, 살존이 너무 강하기에 달라붙는 대상을 그녀의 딸로 삼았을 뿐이다.
곤괴와 그 손녀의 사례와 비슷한 상황.
다만, 곤괴의 손녀인 혜는 천음지체라는 특수한 체질 때문에 잡귀들이 뭉쳐 그녀에게 해악을 끼쳤지만, 살존의 딸은 그런 체질이 아니었다.
무재(武才)야 살존의 딸이니 당연히 뛰어나겠지만, 영적인 측면으로는 모나지도 특출나지도 않은 체질.
손휘가 달라붙기에 큰 부담이 없었지만, 동시에 큰 이점도 없었다.
그렇기에 손휘는 살존의 딸, 수아에게 달라붙고 서서히 그녀를 잠식해 나갔다.
힘을 키우지 못하는 대신 완벽하게 그녀에게 달라붙는 형태로 힘을 키워 왔다.
지금 수아에게서 멀리 떨어진 이 봉인조차 임시 봉인.
손휘의 본체는 아직도 수아의 몸에 달라붙어 있다.
다만, 그 의식의 큰 부분을 뭉텅이로 잘라 내 이곳으로 옮겨 와서 봉인했을 뿐이다.
즉, 지금 이 봉인에 있는 저 강렬한 악귀의 형태조차 손휘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는 소리다.
결국 수아를 구하기 위해선 그녀의 몸에 달라붙어 있는 본체를 제거해야 한다는 소리인데…….
“참, 치사한 방식이야.”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수아를 구하기 위해선 손휘를 없애야 하는데, 손휘의 본체는 수아의 몸 깊숙이 잠들어 있다.
강제로 뜯어내는 순간, 수아는 영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큰 타격을 입고 즉사.
반대로 이대로 방치하면 수아는 서서히 영력과 생명력을 빨려 고사(枯死)한다.
진퇴양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정말 답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정답은 생각보다 아주 간단하다.
끄집어내면 된다.
수아의 몸에 들어가 있는 저놈을 끄집어내서 쓱싹.
간단하지 않은가?
물론.
언여휘가 이 짓을 하면 백이면 백, 그 여파를 못 이긴 수아가 얼마 못 가 죽겠지만, 이쪽은 그럴 생각이 없다.
구할 거라면 확실하게.
“자, 누가 싸움을 더 잘하는지 보자고?”
봉인 앞에 자리 잡은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봉인을 향해 손을 뻗었다.
우웅!
공기가 흔들리고.
[네놈?]
손휘의 형태가 격하게 일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