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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속 무림학관의 낙제생이 되다-377화 (377/624)

제377화

376화-자질 (4)

설천위가 쓰러지고, 백유는 빠르게 상황을 정리했다.

혈천과 언여휘가 도주하자, 혈교의 무인들도 재빠르게 몸을 뺐다.

사로잡은 흑수단의 포로들을 구마가의 지하 감옥에 가두고 부상자와 사망자의 수를 헤아렸다.

구마가에 남은 재산을 이용해 합당한 보상을 계획하고, 기타 여러 문제들에 대한 적절한 지시를 내린 뒤에야 백유는 침상에 누웠다.

“독하구나.”

겨우 침상에 몸을 뉘고 의원의 치료를 받은 백유의 모습에 살존은 작게 웃었다.

“그 사내의 제자다워.”

“……무슨 의도로 이곳에 오신 겁니까?”

천장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여는 백유.

자연스럽게 나온 존대에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백유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 아니었습니까?”

속내를 파악하려는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감정과 의지에 살존은 옆에 있는 사과를 들었다.

품에서 꺼낸 비수로 천천히 껍질을 깎기 시작하며 살존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개입하지 않았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지금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까?”

“그래. 필요해졌지.”

깔끔하게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 올리는 살존의 모습에 백유는 미간을 찡그렸다.

“천위 때문입니까?”

“그렇지. 그게 아니라면 널 구해 줄 이유가 어디 있겠니?”

“…….”

사과를 집어 먹는 살존의 모습에 백유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자신이 뭐라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천위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단순한 기절은 아닐 거야.”

상처로 인한 기절은 아니었다.

설천위가 많이 무리하긴 했지만, 고작 그 정도로 정신을 잃을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살존의 대답에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백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무리하면 회복이 늦어질 텐데.”

“그래도 봐야겠습니다.”

얇은 내의를 추스르며 백유는 걸음을 옮겼다.

설천위는 바로 옆방에 누워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백유가 방문을 여니 강한 약 냄새가 진동했다.

“대, 대인!”

“됐어. 잠시 자리를 비워 줘.”

설천위 옆에서 상태를 살피던 하인이 재빨리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다.

천천히 걸어서 설천위의 곁에 도착한 백유는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천위.”

부드러운 손길로 설천위의 이마를 훑는다.

“네가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나는 모른다.”

비밀이야 많겠지.

그리고 원하는 것도 많을 거다.

설천위는 손익을 따지지 않기엔 머리가 너무 좋으니까.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곁에 있어서 생기는 이득이 있기에 이렇게 붙어 있는 거겠지.

그 좋아하는 여자에게서 떨어져 자신의 곁에서 함께하고 있는 거겠지.

고작 자신을 사파의 정상에 올리는 것만이 그의 목적은 아닐 것이다.

그러니 다른 목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구나. 너를 먼저 만난 사람이 내가 아니란 것이.”

그 여자가 아니라 내가 널 먼저 만났더라면.

네가 정파가 아니라 사파에서 태어났더라면.

아쉬움이 감도는 입술을 굳게 닫으며, 백유는 조심스럽게 설천위의 손을 잡았다.

“비웃진 않으십니까?”

“무엇을 말이냐?”

“사파에서 태어난 여자가 이런 소녀 같은 사랑놀이를 하는 것 말입니다.”

어느새 조용히 방문 앞에 서 있던 살존은 백유의 질문에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마찬가지로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백유의 눈동자가 그녀의 눈과 마주친다.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분노, 살의, 광기다.

설천위의 손을 부드럽게 잡고 그에게 사랑을 속삭이면서도 그 눈에는 애틋함이나 아련함조차 없다.

지금 이 상황을 만든 적들을 향한 분노와 살의 그리고 그 모든 감정을 폭발시키는 광기만이 그녀의 눈에 선명하게 깃들어 있었다.

투쟁을 추구하는, 패왕(霸王)의 자질.

뒤를 돌아보지 않는, 패도(覇道)의 자질.

참, 녀석의 제자다운 눈빛이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저 자질이 그녀의 감정을 숨기고 있음을.

사랑인지 애욕인지 모를 감정을 살의와 광기로 억누르고 있음을.

입으로는 사랑놀이를 말하면서도 그 눈은 적을 향해 있다.

인간적인 감정은 억누르고, 그 외의 감정만을 터트린다.

그 모습에 살존은 작게 웃었다.

“구령학이 왜 자식이 없는지 아나?”

“……뜬금없이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겁쟁이라서 그렇다. 제 곁에 설 여인 하나 지킬 자신이 없는 머저리라서 그렇지.”

수많은 적을 만들고, 수많은 적을 짓밟고 정상에 선 사내다.

그 곁에 서서 그와 함께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겠는가.

그의 소중한 연인이 되는 것만으로 감당할 수 없는 위험 속에 빠지고, 그 자체로 그의 약점이 된다.

그렇기에 그가 몸을 취한 여인은 있어도 마음을 준 여인은 없었다.

“자신이 없다면 포기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만.”

들고 있던 사과를 씹으며, 살존은 작게 웃었다.

“뒤를 돌아보며 후회하는 건 네 성격에 안 맞을 것 같구나.”

* * *

그곳은 붉은 대지와 붉은 하늘의 세상이었다.

곳곳에 낡고 부러진 병장기들이 가득했고, 불어오는 바람은 붉은 모래를 가득 품고 있었다.

아니.

“……피딱지인가.”

잘 모르겠다.

입안에 들어온 모래에서 비린 맛이 나는 건 확실한데.

조용히 하늘을 올려다본 설천위는 천천히 걸었다.

일단, 상황 파악이 안 되니 걸어 보는 수밖에.

“언여휘, 그 자식이 뭔 짓을 하긴 했는데…….”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며 걷던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일단 다른 공간으로 이동된 건 아니었다.

연옥의 괴물 중에서도 정상급 괴물이 튀어나온 게 아니라면 힘들다.

언여휘가 그 정도 능력이 될 리는 없으니 결론은 하나.

지금 자신이 걷고 있는 이곳은 내면세계란 소리다.

단순한 꿈일 리는 없을 테니까.

“진짜 아무도 없나.”

구태여 입으로 말을 내뱉었지만, 주위에 반응하는 이가 없다.

천마는 물론이고, 청아나 청랑의 기척도 없다.

패융의 기척도 느껴지질 않는 걸 보니 일단 평상시의 내면세계가 아니란 건 확실했다.

정말 깊은 심층의 내면세계이거나.

다른 무언가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내면세계이거나.

아무리 생각해도 후자일 것 같은데…….

“너무 노골적이란 말이지…….”

주위에 가득한 병장기.

피가 진득하게 배어 있는 흙.

바람에 실려 풍기는 피 냄새.

너무 노골적이어서 다른 것이라고 추측하기에도 민망할 정도다.

“수라도(修羅道).”

사각.

밟히는 흙의 감촉을 느끼며, 설천위는 옆에 있는 낡은 검을 움켜쥐었다.

“이런 경험은 처음인데…….”

게임 속에서 몇 번이나 써먹었던 스킬이지만, 이런 이벤트가 있다는 건 처음 본다.

들어 본 적도 없고.

즉, 게임 속에선 발견하지 못했던 특수 상황이라는 뜻.

“키킥.”

녹슨 병장기를 절그럭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초췌한 사내의 모습에 설천위는 뽑아낸 검을 겨눴다.

초점이 흐릿한 눈에는 이지(理智) 따위 담겨 있지 않았다.

철저하게 망가지고 일그러진 존재.

“문답무용(問答無用)인가.”

하긴, 정말로 그 수라도가 맞는다면 대화가 가능할 리 없지.

생각을 정리한 순간, 설천위는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생각했던 것보다 더 느리고 약한 움직임.

하지만, 그에겐 딱히 낯설 것 없는 나약함.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은 적의 움직임을 담는다.

발과 손의 위치.

허리를 비트는 방향.

그것들을 읽어 내서 적의 공격을 예측한다.

사내가 휘두르는 도를 왼쪽으로 몸을 살짝 트는 것으로 피해 낸 설천위는 단숨에 검을 찔러 넣었다.

목을 꿰뚫고 지나간 검의 손잡이를 설천위는 왼손으로 후려쳤다.

단숨에 빠져나오는 검.

순식간에 목의 절반이 갈라진 사내가 쓰러지고, 설천위는 담담하게 주위를 둘러봤다.

어느새 사방을 포위한 적들.

피가 썩은 것 같은 악취가 밀려온다.

그리고.

“신입 환영 인사가 너무 거친데.”

일제히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적들 사이로 설천위는 몸을 날렸다.

* * *

피하고, 베고.

단순 반복이다.

신체 능력은 단련하기 이전으로 돌아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처참했고.

감각은 무뎌져 제공권조차 제대로 구축해 내지 못했다.

볼 수 있는 만큼 피하고.

못 보는 부분은 맞았다.

몸에 난 상처가 몇 개인지 세는 것조차 힘들었다.

그런데도.

쓰러지지 않는다.

무너지지 않는다.

정신이 버티는 한, 이 몸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뺨의 살을 크게 도려낸 일격에 끔찍한 고통이 밀려온다.

옆구리에 생긴 구멍에서는 뭔가 뜨끈한 김 같은 게 올라오는 것 같다.

내장이 튀어나온 건가.

실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사각에서 찔러 들어온 창이 어깨를 꿰뚫었다.

끔찍할 정도로 강렬하게 엄습하는 통증.

그 통증을 무시하며 팔을 휘두르자, 손에 들린 검에 무언가가 걸린다.

힘을 주어 당기니 피가 솟구치는 소리와 함께 어깨를 꿰뚫은 창이 느슨해졌다.

그걸 뽑아내고 다시 앞으로 걸어간다.

이번에는 마침 창이 손에 들어왔으니 창을 써먹었다.

물론, 더럽게도 못 써서 몸에 바람구멍이 몇 개나 생기는 바람에 금방 버렸다.

서하영 얘는 이런 긴 무기를 대체 어떻게 그렇게 잘 다루는 건지.

잡생각을 이어 나가며 걷고 또 걸었다.

달려드는 적을 죽이고.

달려드는 적에게 베이고.

왜 죽지 않는 것인지 의심스러울 만큼 온몸에 상처를 새기며.

설천위는 나아갔다.

나아가고, 또 나아갔다.

쿵!

마침내 거대한 문 앞에 도착했다.

6m가 넘는 거대한 창이 묵직하게 바닥을 때리며 나는 울림이 이쪽의 몸까지 같이 울리게 했다.

[이곳은.]

[수라의 길.]

문의 양옆에서 4~5m는 되어 보이는 거인들이 설천위를 내려다봤다.

[통행은.]

[불가(不可)하다.]

붉은 거인들 중 창을 든 거인이 다시 한번 창으로 땅을 내려찍었다.

쿵!

[돌아가.]

[투쟁하라.]

이번엔 도를 쥔 거인의 부릅뜬 눈이 설천위를 내려다봤다.

[돌아가.]

[투쟁…….]

“에헤이.”

거인들의 말을 끊으며, 설천위는 삐딱하게 서서 두 거인을 올려다봤다.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이러시면 곤란하지. 누가 나가고 싶다고 했나?”

몸 곳곳에서 올라오는 끔찍한 통증에도 설천위는 히죽 웃었다.

“물론 나가긴 할 거지만.”

[불가(不可).]

[네겐 허락되지 않은 길이다.]

거인들의 몸에서 흉흉한 기세가 뿜어져 나온다.

설천위의 헛소리를 더 이상 들을 용의가 없다는 듯 거칠게 뿜어 나오는 기세에는 살기 비슷한 것이 깃들어 있었다.

보통의 혼이라면, 이들과 마주한 것만으로 찌부러졌을 위압감.

하지만.

“그건 당신들이 정하는 게 아니야.”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튼 채 검을 땅에 박아 넣었다.

땅에 박은 검을 잡고, 꼿꼿하게 허리를 편 채 설천위는 두 거인을 바라봤다.

“내가 정하는 거지.”

투쟁을 거듭하다 보니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솔직히 아무 생각 없이 싸워서 몇 시간이나 지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이 길의 주인이야.”

바람이 멎고.

바닥을 기던 망자들의 움직임조차 멎었다.

붉은 하늘이 끝없이 높아지고.

붉은 대지가 끝없이 펼쳐진다.

비현실적인 평원 위.

“비켜.”

설천위의 기세로 가득 찬 공간 속에서 두 거인은 이미 거인이 아니었다.

하나씩 꿇은 무릎으로, 한 손으로 문을 밀어 연다.

[수라의 왕에게.]

[육도의 의지가.]

고개를 숙인 거인들을 지나 설천위는 문을 통과했다.

“흐읍!”

거친 호흡이 돌아온다.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흠.”

뭔가 말랑말랑한 게 느껴지는데.

음.

수라의 길에서 나오면 원래 천상에 닿나?

여기가 바로 그 무릉도원인가 하는 그곳인가?

천도복숭아가 열리는 그곳인가?

내 눈앞에 있는 이게 그 천도복숭아…….

“……라고 하기엔 좀 다른데.”

이건 떡 아닌가.

[정신 차려라.]

[이! 이 파렴치한……!]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이곳이 천상이 아님을 깨달은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빠르게 상황 파악이 끝난다.

“……일어나라, 백유.”

“우웅? 천위, 환자는 좀 더 자야 한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왜 내 침대에서 자고 있…….”

말을 다 끝내지 못한 설천위는 자신의 허리를 휘감는 백유의 팔에 딱딱하게 몸이 굳었다.

‘아미타불…….’

부동심아, 좀 더 버텨라! 이 이상 딱딱해지면 안 된다……!

순식간에 불제자가 되어 버린 설천위는 자신도 모르게 불호를 외는 사이.

백유가 설천위를 올려다보며 히죽 웃었다.

“선배의 조언을 따르고 있는 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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