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6화
375화-자질 (3)
설천위의 심장을 꿰뚫은 손이 빠져나간다.
휑하니 뚫린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며.
“쿨럭.”
피를 토해낸 설천위가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빠른 속도로 아물기 시작하는 상처.
하지만.
“……미친?”
그 속도가 본래의 [수라(修羅)]에 미치지 못한다.
마치 회복을 방해받은 것처럼.
“응. 직접 오길 잘했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함께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오싹한 한기가 치밀어 오른다.
순간적으로 힘을 쥐어짜 검을 털어 내듯 휘두른 설천위는 여전히 등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에이, 오랜만에 보는데 이런 대접은 조금 섭섭한데.”
장난스럽게 움직이며 부드럽게 설천위의 목덜미에 팔을 두른 언여휘가 설천위의 귀에 속삭였다.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 알았으면, 역시 진즉에 잡아 둘 걸 그랬어.”
설천위가 등 뒤로 내지른 팔꿈치를 가볍게 피해 내며 몸을 들어 올린 언여휘는 웃으며 팔을 풀고 떨어졌다.
“쌀쌀맞은 건 여전하네. 천위.”
“……언여휘.”
“오랜만이야. 아니, 처음 뵙겠습니다…… 가 맞으려나?”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손을 흔들며 언여휘는 자연스럽게 자신의 옷깃을 내렸다.
쇄골보다 조금 밑까지 내려온 옷깃 사이로 보이는 검은 상흔.
“이거, 대체 언제 가져갈 생각이야?”
마치 억지로 지워 낸 것처럼 흐려진 문양 위로 손가락을 쓸어낸 언여휘는 이내 품에서 막대가 달린 당과를 꺼내 입에 넣었다.
“혼자만 말하니 재미없네. 뭐, 됐어.”
딱딱하게 굳어 있는 설천위의 얼굴에 어깨를 으쓱인 언여휘는 입안에서 당과를 굴렸다.
“구마가 죽었길래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했더니, 생각보다 더 대단한 걸 가지고 있네, 천위.”
옅어졌던 [수라(修羅)]의 힘이 돌아오는 것을 느낀 설천위는 미간을 찡그렸다.
확실해졌다.
언여휘가 의도적으로 [수라(修羅)]의 힘을 상쇄시켜 회복을 막았다.
그 증거로 지금 언여휘가 힘을 거두는 순간, 급속도로 회복된 상처는 빠르게 아물어 이젠 그 흔적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설천위가 알기로 [수라(修羅)]를 상쇄할 수 있는 힘은 오로지 한 종류.
“지옥, 축생, 아귀. 셋 중 뭐냐?”
“……이거 놀라운데?”
설천위의 물음에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당과를 입에서 뺀 언여휘가 삐딱하게 고개를 꺾었다.
“누가 알려 줬지? 백화단주? 아닌데. 그 애송이는 정확한 정보를 모를 텐데? 응? 진짜 어떻게 알았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설천위를 이리저리 살피던 언여휘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곤 고개를 저었다.
“뭐, 상관없겠지. 함께할 때 천천히 물어보면 되니까.”
짝!
가볍게 손뼉을 친 언여휘는 웃으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질문에 대한 답은 아귀야.”
대답과 동시에 땅에서 솟구친 손이 설천위의 발목을 붙잡는다.
그 손을 시작으로 바닥에서부터 기어 나오기 시작하는 아귀들.
바늘구멍만 한 입으로 괴성을 내지르는 아귀들은 설천위를 잡지 않은 손으로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리고.
[크우어어어어어어어!!]
스스로 자신의 입을 찢어 버린 아귀의 포효와 함께 설천위는 즉시 검을 움직였다.
베어 내고 몸을 날린다.
흑관을 발판으로 삼아 몸을 띄워서 바닥에서 솟구치는 아귀들로부터 벗어나는 것과 동시에.
“수란(水亂)!”
열 개 정도의 물 구체를 뿌렸다.
이윽고 아귀들 사이로 떨어진 물 구체에서 강렬한 물줄기가 뿜어져 나와 사방을 난자하기 시작했다.
능숙하기 그지없는 대응.
아귀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술법을 쓰는 그 판단력에 고개를 끄덕인 언여휘는 자신의 뒤에 있는 혈천을 바라봤다.
무감정한 눈으로 서 있는 혈천.
언여휘가 자신의 싸움에 끼어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 노골적으로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고 있었다.
“에이, 삐졌어?”
“쓸데없는 짓이다. 나 혼자서도 충분했다.”
“응, 가능했겠지. 확률은 오 할 정도였던 것 같지만.”
승률이 반반이었다는 언여휘의 말에 딱히 반박하지 않은 혈천은 허공으로 떠올라 술법을 펼치는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 모습에 미련이 남아 있는 것을 알아챈 언여휘는 고개를 저으며 혈천의 어깨를 두들겼다.
“원래 인생이란 것이 다 가지지 못하는 것도 있는 거야. 이 누님이 인생 경험을 빠르게 시켜 줬다고 생각해라.”
“……같잖은 소리를.”
작은 신장 탓에 닿지도 않는 어깨 대신 등을 두들기는 언여휘의 같잖은 위로에 혈천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흥이 식었다. 나는 손을 떼겠다.”
“그래그래. 나머지는 누님한테 맡기고 푹 쉬도록.”
“……자꾸 헛소리하면 네년부터 죽일 거다.”
“어머? 혈교의 주박을 풀어 준 게 누군데? 은혜도 모르기는.”
“지금까지 참고 있는 게 그것 때문이란 걸 알았으면 좋겠군.”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거리를 벌린 혈천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백유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먹잇감을 뺏겨 기분이 나빠진 짐승처럼 살벌한 기세를 뿜어내는 혈천의 모습에 남창의 무인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다가서는 순간, 죽는다.
그런 확신이 들었다.
하지만.
“비켜.”
거침없이 걸어가 혈천의 앞에 선 백유는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봤다.
“방금 들었듯, 나는 저 계집에게 빚이 있다.”
짜증이 담긴 목소리로 혈천은 담담하게 혈기를 풀어냈다.
“지금 덤빈다면, 고통스럽지 않게 보내 주지.”
“하!”
도발인지, 진심인지 모를 혈천의 오만함에 백유는 헛웃음을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꺼져.”
망설임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승산?
아마 일 할이 안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만히 있을 생각 따윈 없었다.
설천위가 지금 저기에서 싸우고 있고.
눈앞의 적이 잠정적인 위협이라면.
싸우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설천위가 목숨을 걸고 있는 지금, 자신이 승산이 낮다고 해서 도망칠 생각 따윈 없었다.
“오만하군.”
백유의 두 눈에서 이길 거라는 의지를 읽어 낸 혈천은 더더욱 거세게 혈기를 끌어올렸다.
도망칠 생각이 없다는 건 이쪽이 귀찮아질 일이 줄어 다행이지만.
저런 몸 상태로 승리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이게 더러운 기분이란 건가.”
불쾌했다.
입꼬리를 비틀며 혈천은 혈기를 움직였다.
일어서서 싸울 생각?
없다.
저쪽에서 고통스럽지 않은 죽음을 약속했지만, 떳떳하게 무인 대 무인으로 싸워 준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설천위와 언여휘의 전투가 시작되고 얼마 안 있어 힘을 뺐던 압박감이 사라졌다.
설천위와 전투를 시작하기 전과 같은 만전의 상태란 소리다.
상처 입고 망가져 서 있는 것조차 고작인 산송장을 상대하는 덴 이 정도면 충분했다.
거침없이 거리를 좁혀 오는 백유와 혈천이 뿜어낸 혈기가 맞붙는 순간.
강렬한 폭발과 함께 백유의 몸이 날아가…….
“……에?”
“무슨?”
……진 않았다.
너무나도 간단하게 갈라진 혈기의 무더기 속에서, 백유만이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의 앞을 바라보고 있었을 뿐.
“……당신이 여긴 왜?”
정말 오랜만에 보는 그 등에 백유가 미간을 찡그리며 물었다.
아니, 짐작 가는 바가 없는 건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에 개입이라니.
마치 도와줄 때를 기다리다가 나타난 것 같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서 널 구해 줄 생각은 없었다만…….”
백유의 질문에 담담히 손을 뻗은 여인은 저쪽에서 감사의 눈빛을 보내는 설천위를 보며 작게 웃었다.
“네가 죽으면 저 아이가 일을 대충 할 것 같으니 어쩔 수 없지.”
이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뒤로 몸을 날렸던 혈천의 팔이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혈천이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하고 팔을 내어준 꼴이었지만, 혈천도, 여인도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코앞까지 다가왔음에도 인지하지 못할 정도의 은신술.
공격의 순간조차 읽어 낼 수 없었던 암경.
혈기로 잘려 나간 팔을 회수하며 혈천은 적의 정체를 확신했다.
보는 것만으로 시선을 빨아들일 것 같은 아름다움.
남자의 마음을 뒤흔드는 자태까지.
보는 것만으로 잊을 수 없고.
한 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것 같은데.
도저히 눈에 담을 수 없는 극에 이른 은신술.
“살존(殺尊)……!”
상대의 정체를 정확하게 파악한 혈천은 망설임 없이 거리를 벌렸다.
필사적으로 땅을 박차고, 언여휘가 있는 곳을 향해 몸을 날린다.
하지만 이조차 거리를 제대로 벌린 것인지 확신할 수 없어 혈천은 전신에 혈기를 둘렀다.
“준비성이 좋군.”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 그런 혈천의 혈기를 뚫고 파고든 검기가 혈천의 어깨를 꿰뚫었다.
목을 베려 했던 공격이 고작 어깨를 꿰뚫은 것 정도에서 멈췄다는 사실에 살존은 담담히 고개를 돌렸다.
저 괴이의 역량이 높다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한 방어.
대처법을 알려 준 녀석이 있다.
“벌써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내 존재를 짐작하면서도 이렇게 모습을 드러냈나? 죽고 싶어 환장했군.”
“응. 그래서 사실 숨어 있을 생각이었는데…….”
아쉽다는 듯 설천위를 바라본 언여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살존을 바라봤다.
“아무래도 가만히 있기 힘들어져서 말이지.”
“네가 인내심을 잃을 이유라……. 궁금하군.”
감각이 전부 이어진 인형의 팔다리를 잘라 고문해도 멀쩡한 것이 언여휘의 정신이다.
비틀리고 뒤틀려 끝내 인간이 아닌 무언가가 된 정신.
기다리고 인내하는 것은 수많은 뒤틀림을 견뎌 낸 그녀의 특기다.
언여휘가 어째서 수십 년을 넘는 세월 동안 도망쳐 다닐 수 있었겠는가.
나설 때와 몸을 사려야 할 때를 구분 짓고 필요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참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살려서 이 무림에서 꿋꿋하게 버텨 온 언여휘가 이렇게 나설 이유.
살존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언여휘는 애초에 비밀이 많은 인물이니까.
언여휘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살존이 작게 미간을 찡그린 순간.
“뭐, 당신이 모습을 드러냈으니 일단 물러나도록 할까.”
살존의 살기 한 점 없는 눈빛에 오히려 서늘함을 느낀 언여휘는 히죽 웃으며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어느새 그녀의 곁에 도착한 혈천이 언여휘의 작은 어깨를 붙잡고.
언여휘의 손에 들린 부적이 은은한 빛을 뿌리기 시작했다.
범상치 않은 영력의 움직임에 그것이 보기 드문 고등 술법임을 직감한 살존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았다.
술사의 술법에 무턱대고 끼어들려고 했다가는 큰 화를 입을 수도 있으니까.
그렇기에.
“아, 그건 선물.”
언여휘의 한 마디에 살존이 미간을 구기는 순간.
“이런 ㅆ……!”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다 뱉지도 못한 설천위가 쓰러졌다.
* * *
무림맹의 무혈 지부.
이곳에 자리 잡은 지 몇 주가 지난 유예린은 마지막 서류에 도장을 찍고 쭉 허리를 폈다.
“이곳의 일도 얼추 정리가 되어 가는군요.”
실종된 흑룡단주를 대신해 무혈 지부에 도착한 유예린은 즉시 전투의 뒤처리를 맡았다.
도망쳤던 지부장을 참하고.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무인들에게 포상을 내렸고.
부상자들의 회복을 위해 각종 약재와 의원들을 끌어모았다.
거기다 남궁세가와 협력까지.
그야말로 일에 파묻혀 지낸 시간이 3주가 넘는다.
그 시간 동안 꽤나 많은 일을 처리할 수 있었고, 꽤나 많은 것들을 알아낼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금까지 기다리실 줄은 몰랐는데요.”
“하하, 워낙에 급한 일이라서.”
자리에서 일어나 손님을 맞는 탁자 앞에 앉은 유예린은 담담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봤다.
“무슨 일이신가요? 아주버님.”
“음, 꽤나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제수씨.”
급한 일이 생겼다는 말과는 다른 담담한 목소리로 찻잔을 내려놓은 사내, 설천운은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유예린을 바라봤다.
“사천맹의 내분이 전쟁으로 바뀔 것 같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