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5화
374화-자질 (2)
목을 베고 지나간 서늘한 감각에 혈천은 비틀었던 허리에 힘을 더했다.
검이 지나간 빈자리로 다시 상체를 당기며 주먹을 휘두른다.
상대가 어떻게 갑자기 속도를 올린 것인지 모르겠지만, 고작 그 정도에 흔들려 목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팔 하나 정도야, 시간이 지나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고.
중요한 것은 이렇게까지 힘을 쥐어짠 상대를 지금 이 자리에서 짓밟는 거다.
혈천이 내지른 주먹이 강맹한 위력을 품고 설천위의 안면을 노리지만, 설천위 또한 몸을 틀어 그 공격을 피해 냈다.
그리고 그것을 시작으로 순식간에 뒤엉키기 시작하는 두 사람.
설천위의 검은 몇 번이고 혈천의 목을 노리고.
혈천은 끊임없이 거리를 좁혀 설천위의 빈틈을 노린다.
공격과 회피가 거듭되는 전투 속에서.
혈천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일단 팔이 돌아왔다.
마치 시간을 거스른 것처럼, 어느새 잘렸던 팔이 제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아무리 자신의 재생력이라고 하지만, 전투에 집중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재생은 말이 되질 않는다.
다음으로.
“카핫!”
설천위의 허점을 몇 번이나 파고들었는데도, 설천위의 움직임은 멀쩡했다.
마치 상처가 낫고 있는 것처럼.
“이상하냐? 이상하지?”
그리고 그런 혈천의 의문을 눈치챈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며 검을 휘둘렀다.
그 검을 마주한 순간, 혈천이 몸을 비틀었지만 평소와는 다른 반응에 온전히 검을 피해 내지 못한다.
어깨에서 피가 튀고 강렬한 통증이 올라왔으나, 이내 가라앉는다.
“무슨 짓을 한 거냐?”
상처를 지혈할 생각도 하지 않고 역으로 다시 몸을 앞으로 내민 혈천은 설천위의 턱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아슬아슬하게 턱을 치켜든 설천위의 움직임에 비껴가긴 했지만, 그 여파만으로 사람의 턱 정도는 가볍게 으스러트려야 할 일격인데…….
“별로? 아무 짓도 안 했어.”
“거짓말에 너무 성의가 없군.”
설천위의 반응에 코웃음을 친 혈천은 또다시 설천위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무슨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쪽이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었다.
거침없이 파고든 혈천은 이제는 검을 휘두를 틈도 주지 않겠다는 듯 주먹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차돌처럼 움켜쥐었던 주먹은 활짝 펴져 수도(手刀)가 되기도 하고, 날카롭게 벼린 손끝은 맹금류의 발톱으로 변하기도 한다.
변화무쌍하게 형태를 바꾸며 이쪽의 목을 노리고 파고드는 혈천의 공격에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염천이 살아 있을 때도 비슷한 싸움을 했었는데.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보이거든.”
지금의 혈천은 그리 빠르지 않다는 점이다.
[수라(修羅)]는 평등한 투쟁의 장으로 만드는 힘.
염천이 각양각색의 손 모양을 만들어 공격한 것은 적이 그 손의 움직임을 읽을 수 없게 하는 속도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초식에 필요한 기본적인 속도라는 것이 있는 법.
지금 혈천이 사용한 초식은 그 최저한의 속도가 상당히 빨라야 가능한 변초다.
[수라(修羅)]의 힘 아래 느려진 몸으로 재현하기엔 버거운 기술이란 소리다.
속도가 부족하니 아무리 변화를 줘도 초식에 어색함이 남는다.
아무리 설천위가 무공에 재능이 부족해도 쌓아온 짬이 얼만데, 그 어색함을 놓치겠는가.
혈천의 손을 검으로 베어 버린 설천위는 그 기세 그대로 몸을 비틀어 검을 움직였다.
그대로 혈천의 품으로 파고 들어간 검이 혈천의 가슴을 가르고, 복부를 베어 낸다.
[수라(修羅)]에 적응하지 못한 혈천을 설천위가 확실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모습이었지만.
“과연.”
자신의 몸을 파고든 검을 움켜쥔 혈천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예상이라도 했다는 듯이.
“주위를 가득 메운 이 기이한 힘. 네 것이었나?”
[수라(修羅)]를 이용해 목을 베었던 구마와는 다르게 혈천은 태생이 괴이한 존재.
영력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해 휘둘렸던 구마와는 격이 달랐다.
[수라(修羅)]의 힘에 순응한 혈천은 자신의 한계점을 빠르게 파악해 냈다.
그리고 이 힘이 가지는 독특한 효능까지.
“기이할 정도로 비틀린 힘이다. 네놈, 사람이 맞긴 한 거냐?”
“뭐래.”
혈천의 말에 검을 비틀어 뽑아낸 설천위는 어느새 적응한 혈천의 모습에 미간을 찡그렸다.
괴이에서 태어난 존재이기에 [수라(修羅)]의 영향을 더 강하게 받지만, 역으로 [수라(修羅)]의 힘을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기에 적응도 빠르다.
본래의 감각과 [수라(修羅)]의 감각에서 오는 괴리감을 좁히지 못한 구마의 빈틈을 찔러 단숨에 마무리했던 것과는 다른 결과.
조금 전의 공격도 그 괴리를 실험해 보는 것이었을 뿐인가.
생각보다 더 능숙한 혈천의 대응에 설천위는 계획을 수정했다.
이대로 혈천을 빠르게 마무리한다는 계획은 일단 폐기다.
지금의 상황을 봐선 빠르게 마무리를 하기는커녕, [수라(修羅)]를 유지하는 동안 결착을 지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미친 듯이 영력을 잡아먹는 [수라(修羅)]의 특성상 애초에 그리 길게 유지할 순 없지만.
그걸 감안해도 최대한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더 까다롭다.
거기다 게임에서는 본 적도 없는 혈천이다.
상대가 어떤 수를 숨기고 있을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혹시 모를 만약의 사태를 대비하면서 움직여야 하는 상황.
실시간으로 적과 상황을 읽어 대응해야 했다.
“덤벼. 우리가 그리 길게 대화할 사이는 아니잖아?”
혈천을 향해 달려들며 설천위는 영력을 움직였다.
딱히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순 없지만, 마냥 불리한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수라(修羅)]에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은 그만큼 힘의 평준화가 제대로 이루어졌다는 소리.
그렇다면, 단순히 무(武)가 아닌 방식으로 충분히 우위를 점할 수 있다.
“흡?!”
달려드는 설천위를 막기 위해 손을 움직이던 혈천은 자신의 팔을 가로막은 흑관의 존재에 다급하게 허리를 숙였다.
허공을 가르고 지나가는 검.
근력의 부족함 때문에 궤도를 꺾어 그대로 내려치지 못한 것이 아쉽다.
작은 아쉬움을 뒤로하고 설천위는 그대로 몸을 움직여 상대를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흑관으로 적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이쪽의 검은 끝없이 사혈을 노린다.
그리고.
“허!”
중간중간에 [수라(修羅)]를 해제해 끊임없이 감각의 괴리를 만들어 낸다.
이쪽도 많이 성장하면서 그 영향을 꽤 받게 됐지만, 혈천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신체 스펙만으로 화경급 고수와 싸울 수 있는 혈귀를 토대로 화경급 고수의 혼을 흡수해 완성된 존재가 혈천 아닌가.
약해진다는 감각 자체가 생소할 터.
영력을 이용해 민감하게 반응해서 빠르게 적응해 낸다고 해도 그것이 불규칙적으로 반복되면 따라가는 데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로 인해 생기는 빈틈.
설천위는 끊임없이 그 빈틈을 노려 혈천을 압박했다.
[수라(修羅)]는 영역 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상처들을 되돌리는 기술.
반대로 말하면, 영역 밖에서 발생한 상처에는 관여하지 못한다.
[수라(修羅)]가 해제된 순간, 입은 상처는 다시 [수라(修羅)]가 발동해도 회복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수라(修羅)]의 발동과 해제를 반복하는 설천위의 방식 때문에 혈천도, 설천위도 꾸준하게 상처가 늘어갔다.
자연스럽게 상처를 회복했어야 할 혈천마저 스며드는 패기와 [수라(修羅)]의 영향으로 비틀리는 힘의 감각 때문에 바로바로 상처 회복에 실패하는 사이.
쿠르릉!
벼락이 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릎을 꿇은 흑수 단주와 그 앞에 서 있는 백유.
자신들의 전투를 이어 가던 설천위와 혈천마저도 일순 전투를 멈추고 두 사람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보이는 대로 결과가 훤히 나온 상황.
“남창의 무인들은 들어라!!”
거칠어진 목소리로 외친 백유가 주위를 둘러본다.
흑수단과 혁래문의 문도들은 물론이고, 기웃거리던 남창의 다른 문파들도 일순 마른침을 삼켰다.
고고하다.
그 말이 저런 피투성이의 환자에게 쓸 수도 있구나.
그런 생각이 절로 드는 강렬한 위압감.
피를 토하는 흑수 단주의 목을 수도로 쳐 낸 백유는 망설임 없이 그 수급을 들어 올렸다.
베어 냈다기보다는 뜯어냈다고 말해도 될 정도로 거친 단면.
백유가 깔끔하게 처리할 여력도 남아 있지 않다는 증거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그걸 신경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흑수 단주는 죽었다!!”
거친 포효.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읽은 이들의 얼굴에 희비가 교차한다.
흑수단의 무인들은 포기하라는 그 선언에 딱딱하게 굳었고.
승리가 코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 혁래문의 무인들은 흥분에 차올랐다.
이겼다.
이 뒤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겼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겠는가.
흥분에 찬 포효가 터져 나오고.
이를 악문 흑수단이 최후의 전투를 준비하는 순간.
“흑수단은 지금 투항하라.”
전혀 예상치 못한 백유의 발언에 모두의 얼굴에 의문이 떠올랐다.
아니, 지금 흑수 단주를 죽이고 승기를 가져왔으면서 왜 적한테 투항하라는 거지?
완전히 수적 우위에 선 지금, 적들을 쓸어버리지 않으면 그게 다 후환으로 남을 텐데?
내중수마저 백유의 의도를 읽어 내지 못하고 미간을 찡그린 순간.
“지금 항복하면 목숨은 살려 주마.”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백유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서 있는 것도 아니, 살아 있는 것도 신기할 정도로 심각한 부상을 입은 몸으로.
백유는 걸었다.
그녀의 행보가 앞으로의 전투에 미칠 영향을 직감한 설천위와 혈천마저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상황에서.
“피비린내 가득한 벌레를 짓밟아라.”
백유의 몸에서 풍겨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주위의 모두를 짓눌렀다.
설천위가 펼친 [수라(修羅)]의 영향력마저 무시하는, 그야말로 패도(覇道)의 기세.
“내가 만들어 갈 하늘 아래 고혈을 빠는 벌레의 자리는 없다.”
사천(邪天)이라.
그저 존재감만으로 모두의 위에 올라선 그녀의 선언에 흑수단의 무인들은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들과 검을 맞대던 이들은 조용히 그들의 곁에 섰고.
“쳐라!! 벌레를 짓밟아라!!”
가장 빠르게 정신을 차린 내중수의 지시로 눈치를 보며 모였던 남창의 무인들이 혈교의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단숨에 전장의 흐름이 뒤바뀌었고, 기세가 치솟은 남창의 무인들이 혈교를 몰아내기 시작했다.
“크하하하하!!”
그 모습에 혈천이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터트렸지만, 설천위는 그 모습을 비웃지 않았다.
알 것 같았으니까.
“과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혈천이 고개를 돌려 설천위를 바라봤다.
“네가 어째서 도주를 선택하지 않았는지 알겠구나.”
“뭐라는 거냐?”
딱히 백유한테 의존할 생각 따윈 처음부터 없었는데.
“그냥 할 만해서 남은 것뿐이다.”
혈천을 처리하고, 주위를 정리할 가능성이 보여서 남은 것뿐이다.
이길 수 있다면 약간의 도박 정도야 얼마든지 가능하니까.
“내가 만약 염천이었다면, 저 녀석을 지지했을 것 같군.”
그렇기에 혈천의 쓸데없는 소리를 설천위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인데, 들어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잔말 말고 시작하자.”
“좋지.”
설천위의 도발에 웃으며 응답한 혈천은 그대로 땅을 박찼다.
한 걸음, [수라(修羅)]가 그 발을 붙잡고.
두 걸음, [수라(修羅)]가 사라져 몸이 튕겨 나간다.
사용하면서 익숙해진 것인지 엄청난 속도로 변화하는 육체의 감각에 혈천은 적응하지 못하면서도 적응하려 애썼다.
육체의 역량이 변하는 것이 무슨 상관인가.
닿아서 부수면 그만인 것을.
또다시 흑관이 혈천의 팔을 막아서고, 설천위가 그 틈을 이용해 검을 찔러 넣는 그 순간.
“하핫!”
맑고 명랑한 웃음소리와 함께 흑관이 순식간에 사라진다.
방해가 사라진 혈천의 손이 거침없이 설천위의 가슴을 꿰뚫고.
“자격이 있구나, 천위.”
언여휘는 비틀린 웃음소리와 함께 설천위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