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4화
373화-자질 (1)
자신만만한 설천위의 도발에 혈천은 망설임 없이 땅을 박찼다.
사방을 가득 메우는 흑관을 때리고 부수며 거침없이 길을 뚫어낸다.
단숨에 혈천을 포위해 거리를 벌리고 시간을 벌려 했던 설천위는 무식하기 그지없는 혈천의 돌진에 혀를 차며 힘을 더했다.
순식간에 늘어나는 흑관.
단숨에 일대를 전부 메운 흑관이 다시 한번 혈천의 길을 막았으나, 혈천은 혈귀에서 태어난 괴이.
인간의 혼과 심장을 먹고 실체를 얻은 괴이이기에 설천위의 술법에 약하긴 하지만, 반대로 설천위의 술법에 손을 쓸 수 있기도 하다.
영력에 크게 영향을 받는 만큼, 반대로 영력에 영향력을 끼칠 수도 있다는 말이다.
단순한 물리력으론 오히려 부수기 어려운 흑관을 혈천은 혈기(血氣)를 두른 손으로 가볍게 분쇄해 나갔다.
하지만, 가볍게 분쇄한다고 한들 아예 시간이 걸리지 않은 건 아니었다.
혈천이 흑관을 부수며 거리를 좁히는 동안, 설천위도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단순히 흑관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다.
애초에 이곳에서 설천위가 펼치고 있던 술법은 흑관이 아니니까.
“흡!”
짧은 기합성과 함께 천지가 요동치는 것 같은 굉음이 터져 나온다.
그것이 머리 위의 구름에서 흘러나오는 굉음임을 알고 혈천은 조용히 손을 들었다.
귀가 먹먹해지는 굉음과 함께 떨어지는 벼락.
여태까지 이 일대를 사정없이 두들기던 자잘한 벼락들과 달리 압도적인 두께의 벼락은 그에 걸맞은 위력을 품고 있었다.
혈천의 발 주위가 새까맣게 그을릴 정도로 실체에 간섭할 수 있는 강력한 벼락.
술법으로 만들어 낸 것이라곤 믿기 어려운 위력이었지만.
“버틸 만하군.”
혈천은 약간의 연기를 두른 채 담담히 걸어 나왔다.
“위력은 나쁘지 않지만, 조잡해.”
“……뭐가?”
“마치 타인의 것을 눈으로 보고 베낀 것 같은 완성도다.”
아니, 누가 보면 술사인 줄 알겠어.
혈천의 지적에 미간을 찡그린 설천위는 백유를 등에 업은 채 한 손을 앞으로 뻗었다.
“그럼, 조잡하지 않다고 느낄 때까지 때려 박아 주마.”
벼락이 꽂힌다.
설천위의 장담대로.
엄청난 빈도로 벼락이 꽂히기 시작했다.
정확하게 혈천만을 노리고.
대지가 검게 그을리고.
강렬한 열기에 바닥의 돌마저 붉게 달아오른다.
막는 것에 집착하지 않고 피하려는 혈천을 흑관이 막아서고.
혈천은 그런 흑관을 가볍게 부수며 경로를 틀어 한 끗 차이로 벼락을 피한다.
그러다가 피하지 못하는 순간이 오면 벼락을 맞지만, 몸에 두른 혈기로 그것을 견뎌 낸다.
그렇게 서서히, 하지만 확실하게.
“조잡하다.”
혈천은 설천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전신에 혈기를 두르지 않고 한 손에만 혈기를 집중시킨 혈천이 손을 휘두르는 순간.
“점점 더 약해지는군.”
벼락이 튕겨 나왔다.
처음 떨어졌던 벼락보다 그 두께가 부족한 벼락이었으나, 땅에 구멍을 뚫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음에도.
“술사가 만들어 내는 벼락은 이 정도가 한계인가.”
벼락을 쳐 내는 것에 성공한 혈천은 그 뒤로 회피를 선택하지 않았다.
쳐 내고, 부수고.
설천위가 펼치는 술법들을 분쇄하며 착실히 거리를 좁힌다.
그리고.
“아직도 조잡하다만, 언제까지 이런 장난질을 할 거지?”
어느새 설천위의 앞에 당도한 혈천의 질문에는 미약한 짜증이 담겨 있었다.
상대의 능력이 고작 이 정도가 전부가 아님을 알기에.
혈천은 짜증을 담아 설천위를 재촉했다.
“검을 쥐어라.”
그가 설천위를 따라온 이유.
목적을 이루는 걸 방해해서?
아니다.
물론 처음에는 그것에 짜증을 느끼고 복수도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이내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애초에 혈천 자신이 부하들을 데리고 무림맹 지부가 있는 무혈을 공격한 것은 각성의 부작용이었을 뿐이니까.
혈귀로서의 살육 욕구와 염천이라는 사천맹의 단주가 바라는 무림맹 공격이 서로 목적이 일치해 일어난 결과일 뿐이다.
완벽하게 자신을 수습하고 금제를 끊어 낸 지금, 그때 방해받았던 것에 대한 짜증 따윈 없었다.
하지만, 그 빈자리를 채운 것이 있었으니.
“검을 쥐어라.”
그건 갈망이다.
목이 탔다.
미치도록.
생전에 이루지 못한 염천의 바람이.
힘이 없어 죽어 가던 어린아이들의 흔적이.
혈천으로 하여금 강렬한 갈증을 만들어 냈다.
일단 후퇴해 자신을 다스리는 과정에서 혈천은 이 갈증을 인지했다.
그리고 그것이 나쁘지 않음 또한 인지했다.
강해진다는 것은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니까.
그러니 어차피 해야 할 것이라면 강하게 갈구하는 것도 나쁠 건 없다.
거기까지 인정하고 나니, 어렴풋한 기억이 그를 자극했다.
제대로 깨어나기 전.
아직 조잡한 자아를 가지고 있던 시절의 기억.
자신을 조종하던 술사를 단숨에 고깃덩어리로 만들고.
자신마저 한순간에 행동 불능으로 만들었던 그 검술.
흐릿한 기억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깨달을 수 있었다.
그 검술이야말로 염천도, 혈천도 닿은 적 없는 아득한 영역의 힘이란 것을.
설천위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저 너머에 있는 힘이란 것을.
주먹을 쓴다는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저 너머에 있는 경지에 닿는 것.
그 실마리가 그곳에 있기에.
“검을 쥐어라.”
혈천은 이곳에 왔다.
세 번째 경고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흑관과 벼락만을 다루어 자신을 방해하는 설천위의 모습에 혈천은 움직임을 바꿨다.
흑관을 분쇄하고, 벼락을 쳐 내던 것을.
쿵!!
멈춘다.
전신에서 방출하는 짙은 혈기가 벼락을 집어삼키고, 흑관을 집어삼킨다.
부수지도, 쳐 내지도 않는다.
상대가 무(武)로 싸울 생각이 없다면.
이쪽도 철저하게 힘으로 찍어 눌러 버리면 그만이다.
꺼내지 않는다면, 꺼내게 만들면 된다.
막대한 혈기를 휘감은 혈천은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앞을 가로막는 흑관은 그냥 몸으로 부수고.
머리 위로 떨어지는 벼락은 그냥 맞고 견딘다.
그야말로 미친 듯이 달려서.
설천위의 코앞에 도달한다.
여태까지 혈천이 기다려 줬다는 것을 증명하듯 단숨에 설천위의 코앞에 도달한 혈천이 손을 뻗었다.
한 손으론 백유를 등에 업고, 한 손으로 술법을 펼치던 설천위로선 대응할 수 없는 일격.
안면을 향해 파고드는 주먹이 그대로 설천위의 얼굴을 박살 내려는 순간.
“안 되지.”
설천위의 뒤에서 뻗어 나온 손이 혈천의 주먹을 쳐 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일순간의 빈틈.
그 빈틈을 하나의 검이 가른다.
[소적검(消跡劍)]
궤적이 없는 검이 혈천의 가슴과 배를 가른다.
주먹이 막힌 시점에서 몸을 뒤로 빼던 혈천은 그럼에도 깊게 새겨진 상처에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쁘지 않군.”
원했던 검은 아니었지만, 이것도 보고 싶었던 것은 매한가지다.
모든 것을 속이는 다변(多變)의 검.
수십, 수백의 변화를 품고 인지조차 비틀어 버리는 무흔의 검.
흥미가 없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다만.
“고작 그것만으로는 무리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혈기로 단숨에 상처에 깃든 힘을 밀어낸 혈천은 상처의 회복과 동시에 다시 한번 몸을 들이밀었다.
설천위의 등 뒤에 있는 여자가 깨어났다는 것은 인지했으니, 다음 공격은 그것을 감안하고 움직이면 된다.
고작해야 죽어 가는 인간 하나 깨어난 것뿐이다.
인지하지 못한 순간의 기습이라면 몰라도 인지한 순간, 상대방의 움직임에 작은 변화가 추가된 것과 비슷하다.
거리를 좁힌 혈천의 손발이 빠르게 움직여 설천위를 압박한다.
환자를 등에 업고, 어쭙잖은 자세로 전투를 이어 가려 한다면.
그 안일한 각오를 비틀어 뜯어내야 하지 않겠는가.
혈천의 손이 어지럽게 움직이고.
한 손으로 검을 쥐고 휘두르는 설천위의 손 또한 덩달아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
문제는 설천위의 열세가 너무나도 뚜렷하다는 점이다.
검사(劍士)가 권사(拳士)에게 손이 닿을 정도의 거리를 내어준 상황.
한쪽은 오로지 한 손으로 검만을 사용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손발이 완전히 자유롭다.
거기다 한 손을 쓰는 이가 다른 한 손으로는 무언가를 지키고 있다면?
“커헉!”
승부가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가 없다.
옆구리에 꽂힌 주먹에 마른기침을 토해낸 설천위는 몸을 비틀어 검을 움직여서 겨우 혈천을 떼어 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혈천이 다시 한번 품으로 파고들자, 설천위는 제대로 호흡을 가다듬지도 못하고 검을 움직였다.
막고, 베고, 막고, 막고, 베고, 막고, 막고, 막고.
반격의 기회는 점점 더 줄어들고.
그저 방어에만 치중하기를 수십 합.
힘을 쥐어짠 백유의 견제마저 상대의 술수에 전부 막히는 상황.
완벽하게 패색이 짙어진 상황 속에서 설천위는 끈질기게 검을 휘둘렀다.
포기하지 않겠다는 독기가 아니라.
포기할 이유가 없다는 듯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검을 휘두른다.
그 모습에 기이함마저 느껴지는 순간.
“……흑성.”
미약하지만, 확실한 목소리가 설천위를 불렀다.
그것을 신호로 일순간 내공을 끌어올린 설천위는 강력한 한 수로 혈천을 떨쳐 냈다.
[소적검(消跡劍)]
보이지 않는 무흔의 일격에 거리를 벌리게 된 혈천이 다시 거리를 좁히려는 순간.
“후…….”
설천위의 등에서 내려온 백유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서서 그를 바라봤다.
“방해꾼이 들어올 줄이야.”
짜증이 담긴 눈동자.
그 안에 담긴, 꺼지지 않는 투지에 혈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
“비켜. 너 때문에 이쪽이 아직 안 끝났으니까.”
짜증을 넘어 짙은 살기가 배어 있는 목소리.
그녀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음을 깨달은 혈천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짐승과 같은 울음소리를 내며 서 있는 사내.
자신이 죽기 직전에 구해 낸 흑수 단주다.
염천의 기억 속에 있는 그의 모습을 떠올린 혈천은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하도록.”
눈이 돌아간 흑수 단주의 모습을 보아하니 말을 한다고 협력이 되는 상태도 아니고, 애초에 협력할 생각도 없었다.
이쪽도 목적이 뚜렷하니까.
순순히 백유를 놓아준 혈천은 다시 설천위에게 신경을 집중했다.
“아주, 지X들 한다.”
물론, 삐딱하게 선 설천위는 그 모든 광경을 삐딱한 눈동자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백유.”
“……왜?”
흑수 단주와 달리 설천위의 목소리에 확실하게 반응한 백유는 살기를 억누르고 설천위를 바라봤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약 설천위가 후퇴하자고 한다면 후퇴할 용의가 있다.
자존심?
여태까지 쌓아 온 명성?
그게 무슨 소용인가.
죽으면 다 의미가 없어지는데.
날아오르기 위해서라면 흙탕물에서도 웅크릴 수 있는 게 흑룡 아닌가.
인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설천위가 힘들다면 온 힘을 쥐어짤 준비가 되어 있던 백유는 설천위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리고 말았다.
“오래 못하니까 빨리 정리해라.”
후퇴 따윈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듯 한 점 흔들림 없는 눈동자.
그 모습에 입꼬리를 올린 백유는 말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거침없이 흑수 단주를 향해 걸어간다.
그런 백유의 모습에 흑수 단주도 기어코 발을 움직여 그녀를 향해 걸어가고.
“야!”
설천위는 짜증이 가득한 목소리로 혈천을 불렀다.
“궁금하군. 왜 도망치지 않지? 네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텐데?”
저 여자를 데리고 가는 것도 조금 무리하면 가능할지도 모르는데.
어째서 이런 가망 없는 싸움에 나서는 거지?
설천위를 극한으로 몰아서 그때의 검을 다시 보고자 했던 자신을 잊고 묻는 혈천이었지만,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며 다른 말을 했다.
“개싸움이나 해 보자고.”
진짜, 웬만하면 이건 안 쓰려고 했는데.
엄청난 기세로 빠져나가는 영력을 느끼며, 설천위는 움직였다.
그리고.
“허?”
단숨에 팔이 잘린 혈천의 두 눈이 커지고.
[수라(修羅)]
설천위의 검이 망설임 없이 혈천의 목을 노리고 파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