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71화
370화-흑수(黑獸) (5)
짐승과 흑룡이 맞부딪친다.
여태까지의 싸움은 마치 장난이었다는 듯, 충돌의 충격에 무너진 집이 이미 세 채를 넘어섰다.
손발이 뒤엉키고, 서로가 흘려 낸 힘의 파동이 주위를 휩쓴다.
쾅!!
순간적으로 몸이 공중에 뜬 일순간을 노리고 파고든 발차기에 백유의 몸이 날아간다.
단숨에 건물 하나를 무너트리며 잔해에 박힌 백유.
보통이었다면 싸움이 끝나고도 남았을 모습이지만, 흑수단주는 멈추지 않는다.
단숨에 땅을 박차 잔해 위로 날아간다.
거력을 머금은 손이 모든 것을 할퀸다.
거대한 발톱이 긁고 지나간 것처럼 깊게 파이는 건물의 잔해와 땅.
그 안에 사람이 있다면 단숨에 고깃덩어리가 됐을 것 같은 무시무시한 일격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손이 흑룡의 송곳니가 되어 흑수단주의 팔을 붙잡았다.
정말, 아주 찰나의 붙잡힘.
그것만으로 흑수단주의 몸은 땅을 향해 빨려 들어갔다.
쾅! 쾅!
아주 찰나.
세 번이나 땅에 머리가 처박혔던 흑수단주는 자신의 팔을 붙잡은 손을 풀고 허공에서 자세를 고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솟구치는 흑룡.
손에 두른 강기로 흑룡을 쳐 내며 흑수단주는 몸을 비틀었다.
흑룡을 후려친 힘을 이용한 회전.
단숨에 방향을 바꾼 흑수단주의 몸이 순식간에 백유에게 접근한다.
숨소리조차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도달한 흑수단주의 손이 백유의 목과 옆구리를 노린다.
손등이 목을 지키고, 무릎으로 옆구리를 지킨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방어.
동시에 한 번 방어해 낸 것으로 다시 공격권을 얻은 백유의 손이 날카롭게 흑수단주를 파고든다.
목을 노리고.
눈을 노리고.
심장을 노리고.
국부를 노리고.
발로 흙을 차올리고.
잡을 수 있으면 잡고.
굴러야 하면 땅을 구르고.
얼굴에 침을 뱉는다.
일정 수준 이상 오른 고수의 싸움에서는 절대 나오지 않는 치졸한 수법이 판을 친다.
서로를 붙잡고 땅바닥을 구르는 것이 기본인 진흙탕 싸움.
검은 짐승에게 끌려 함께 진흙탕을 구르는 흑룡의 모습은 꽤나 기이했으나, 이미 두 사람은 주변의 시선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개판이구먼.”
그렇기에 그 전투를 지켜보던 설천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관심을 껐다.
이쪽이 끼어들 싸움도 아니었고, 끼어들 이유도 없었다.
저기 겁도 없이 흑수단 쪽으로 가고 있는 혁래문 녀석들은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잠깐 고민했지만.
뭐, 전장으로 나가는 건 무인의 선택 아니겠는가.
신경 쓰지 말자.
몸을 돌린 설천위는 벽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전장으로 향하는 것이 무인의 선택이라면.
자신이 선택해야 할 전장은 이쪽이니까.
“거기, 벽에 그렇게 장난치면 무너진다고.”
“……당신이 이 벽을 만들어 낸 술사입니까?”
딱딱하게 굳은 얼굴의 사내는 벽을 향해 뿌렸던 영력을 거두며 설천위를 바라봤다.
“훌륭한 술법입니다. 단순한 구조로 이렇게까지 튼튼할 수 있다니…….”
“뭐, 칭찬 고맙네.”
“하지만 그렇기에 아쉽습니다. 이렇게까지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면 충분히 제 역할을 해낼 수 있었을 텐데.”
하늘을 향한 사내의 시선에 뇌전을 품은 먹구름이 담긴다.
인위적으로 불러낸 게 확실한, 영력을 품은 구름.
대체 어떤 술법으로 만들어 낸 것인지 이 거리에서 확인하기 힘들었지만, 저 정도 규모의 술법이라면 그 힘의 소모가 예상된다.
“제물의 사용도 없이 이만한 규모의 술법이라니 과욕입니다.”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내는 사내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두고 볼 일이고, 귀령단에서 나온 사람인가?”
“부단주인 오본이라고 합니다.”
“흑성이라고 불러.”
정중한 태도로 인사한 오본은 설천위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뛰어난 술사가 있다는 정보를 듣긴 했지만, 실제로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도 귀령단에서 움직일 줄은 몰랐는데.”
어깨를 으쓱인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휘둘러 자신에게 접근하던 영력을 흐트러트렸다.
“이런 조잡한 수를 쓰는 녀석이 부단주라는 것도 몰랐고.”
“조잡하다니 속상하군요. 나름 초절정의 고수조차 쓰러트리는 비기입니다만.”
“그건 상대가 술사가 아니니까 가능한 일이겠지.”
전혀 아쉬워하는 기색이 없는 오본의 모습에 입꼬리를 올린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모았다.
“몇 명 썼지?”
“무엇을 말입니까?”
“이 정도 속도로 공격해 올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지.”
귀령단주의 비전인 축지술(縮地術).
그걸 이용한 초고속 이동밖에 없다.
하지만 무려 사천맹에서 이곳까지 한달음에 달려올 수 있을 정도의 축지술은 귀령단주조차 쓸 수 없다.
축지술은 좁히는 거리, 이동하는 대상에 의해 그 힘의 소모가 급격하게 늘어나는 술법이다.
짧은 거리야 단숨에 이동할 수 있지만, 사천맹에서 남창까지의 장거리라면 결코 단숨에 이동할 수 없다.
애초에 불가능한 방법.
“생각보다 더 아는 게 많으신 분이군요. 역시 내부에서 새어 나간 분이신가요.”
그리고 술법에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방법은 오직 하나뿐이다.
“한 삼백 명 정도일 겁니다. 물론, 제가 쓴 건 응축된 혈석의 형태였지만 말입니다.”
제물이다.
막대한 제물을 쏟아부어 모자란 것을 채우면 된다.
사람의 피와 살은 물론이고, 그 혼조차 쥐어짜 땔감으로 사용하면 된다.
그게 불가능한 술법을 가능으로 만드는 유일한 방법.
“추살령이 내려지자마자 흑수단주께서 움직이길 원하셔서 급하게 오느라 조금 낭비해 버렸지요.”
어깨를 으쓱이며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젓는 오본.
“뭐, 괜찮습니다. 이번에 일벌백계의 의미로 이 일대를 짓밟기로 했으니까요.”
“누가 들으면 사천맹에서 나온 게 아니라 혈교에서 나온 줄 알겠어.”
당당하게 대량 학살을 예고하는 오본을 설천위가 비웃었지만, 오본은 정답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지요. 혈교도 결국 사파이니 딱히 틀린 말도 아닙니다.”
혈교도 뭐, 정파인의 구별법으로는 사파이니 비슷한 거 아니겠는가?
지금의 맹주가 혈교를 무림공적으로 지정하고 몰아내긴 했으나, 혈교도 결국 그 뿌리는 사파다.
실제로, 꽤나 먼 옛날에는 사파 연합에서 한자리를 차지했을 정도로 대놓고 움직이던 조직이었다.
다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잔혹함이 도를 넘어섰고 그에 따라 사람들의 인식이 변하면서 완전히 외도 취급을 받게 됐지만.
“사파의 본질은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지요.”
양심과 도리를 버리고 비열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목적을 이루기에 사(邪).
간사하고, 어긋난 존재들.
그런 인간들이 모여 만든 사파에서 도리를 찾고, 최소한의 선을 찾는다니.
이 얼마나 웃기는 일인가.
“쓸 수 있다면 쓰고, 할 수 있다면 하는 게 바로 사파의 도리지요.”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오본은 품에서 부적을 꺼냈다.
긴장감 하나 없는, 느긋한 움직임.
술사이면서 무인으로서도 강자인 설천위를 앞에 둔 것이라고 보기엔 너무나도 안일한 태도.
하지만, 설천위는 그런 오본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니, 공격할 수가 없었다.
“얼마나 많이 끌고 온 건지 모르겠군.”
곳곳에서 피어오른 살기가 끈적하게 달라붙는다.
혈귀는 아니다.
혈교라고 혈귀를 다루는 술사만 있는 건 아니니까.
아니, 오히려 뿌리는 무림의 조직인 만큼 무인이 압도적으로 많다.
교육과 세뇌로 키워 낸 광신의 무인들.
들켰다는 것을 깨달은 적들이 단숨에 솟구쳐 오른다.
숫자가 족히 수십은 되어 순식간에 빽빽하게 주위를 메우는 적들의 모습에 설천위는 어깨를 으쓱였다.
“귀찮게 하는군.”
뻗은 손이 단숨에 적의 목을 붙잡고 그 뼈를 으스러트린다.
사방에서 파고드는 검을 흑관으로 막아 내며 설천위는 전투를 시작했다.
허나, 혈교의 무인이라고 해서 무작정 목숨을 내던지는 머저리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적을 죽이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독기를 품은 이들이기에 그들은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움직였다.
동료의 죽음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해낸다.
설천위와의 충돌로 내상을 입어도 흔들리지 않고 제자리를 지키고.
뼈가 부러지고, 근육이 터져도 제자리를 지킨다.
독기로 가득 찬 합격진.
목적은 오로지 하나.
적을 죽이는 것.
순식간에 혈교의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설천위는 간결한 움직임으로 전투를 이어 나갔다.
무공 실력이 한참 부족한 오본도 그가 펼친 제공권의 범위 안에 확실하게 들어올 정도로 간결하고 효과적으로 움직인다.
마치 손이 여러 개로 늘어난 것처럼 모든 공격을 쳐 내고 피해 내는 모습이 참 대단하…….
“음?”
벽을 해제하는 술법을 발동시키며 설천위의 전투를 바라보던 오본은 기이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했다.
수십 명의 합공을 견뎌 내고 있는 설천위.
원래는 백유를 끌어내고 구마가로 잠입할 예정이었던 혈교의 무인들을 굳이 부른 보람이 있을 정도로 강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인간의 강함에는 한계가 있는 법.
두 손으로 수십 명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 한계를 뛰어넘은 초인이라면, 저렇게 막고만 있진 않을 테니 반드시 뚫려야 정상인데…….
어째서 그는 상처 하나 없는 거지?
기이한 광경에 오본조차 의문을 품는 그 순간.
쿠르릉
하늘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해서, 그들의 머리 위에 떠 있는 구름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품은 뇌전의 굉음이 새어 나오고.
강렬한 섬광이 번뜩이기 시작한다.
저런 걸 인간이 만들어 냈다니.
정말 반신의 영역에 다다른 술법이 아닌가.
혈교의 주교들은 물론이고, 혈사련과 사혈천의 괴물들도 따라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술법이다.
그리고 그 순간.
“……설마?”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과 동시에 오본은 술법을 펼쳤다.
몸을 지키는 호신의 술.
반투명한 구체가 그의 몸을 감싸고.
여태껏 다른 것에 집중한 것처럼 오로지 자신의 몸만을 지키던 설천위가 입꼬리를 비틀었다.
그리고.
쿠르르릉!
하늘이 무너지는 굉음과 함께 강렬한 섬광이 땅 위로 쏟아진다.
아니, 소리보다도 먼저 섬광이 쏟아졌지만 안타깝게도 그 선후를 따져 구분할 여유를 가진 인간은 이 자리에 없었다.
“크아아악!”
“끄륵!”
범람하는 뇌전 속에서 경련과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한 무인들이 쓰러지기 시작한다.
급하게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지킨 무인들조차도 일순 경직된 몸에 공격을 허용했고.
“생각보다 더 오래 걸리네.”
목이 꺾여 축 늘어진 무인을 밀어내며 설천위가 걸어 나왔다.
“역시 부단주야. 실력이 좋네.”
“……당신은 뭐 하는 괴물입니까? 설마 연옥에서……?”
“에이, 그건 너무 나갔고.”
거기에 있는 괴물들에 비할 정도는 아니지.
연옥의 실체도 모르고 어림짐작하는 오본을 비웃으며 설천위는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퉁!
단단하게 뭉쳐 설천위의 주먹질을 막아 내는 오본의 방어막.
그 위로 흐르는 뇌전의 모습에 설천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술법으로 만들어 낸 뇌전이다 보니 술사의 방어에 생각보다 쉽게 막히는 경향이 있네.
개선점을 찾은 설천위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내공을 끌어올렸다.
내상이 나아가는 도중이라 웬만하면 힘을 무리해서 쓰고 싶진 않지만.
안타깝게도 술사에겐 이런 방법이 직방이다.
강제로 오본의 방어막을 뚫어 버린 설천위의 손이 그대로 오본의 멱살을 움켜쥔다.
단숨에 방어막이 뚫릴 거라는 예상을 하지 못한 오본은 순식간에 붙잡혔다.
“추살령이라고 했지? 꽤나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군.”
오본의 멱살을 쥔 채 그를 흔들며 설천위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나쁘지 않다.
이렇게 대놓고 움직이면 이쪽도 아예 대놓고 움직이기 편해지니까.
양지로 끌고 올라가면 오히려 이쪽에 유리한 점이 더 많다.
그러니 충분하다.
설천위의 자신만만한 미소에 이리저리 흔들리던 오본은 입꼬리를 올렸다.
“뭔가 착각하고 계시는군요. 제가 죽더라도 이 싸움은 저희의 승리입니다.”
아직 흑수단주가 있다.
고작해야 얼마 전에 경지에 올랐을 어린 무인이 수십 년을 강호에서 구른 흑수단주를 이길 수 있을까?
그럴 리가.
강자들의 전투에서 나온 승자가 결국 전투의 승자로 이어진다.
흑수단주가 승리하는 순간, 이 싸움은…….
“반대다, 머저리야.”
자신만만하게 자신을 비웃는 오본을 쥐고 몸을 돌린 설천위는 검은 벽을 투명하게 만들어 내부를 비춰 줬다.
“네가 날 이겨도 우리가 이긴다.”
백유의 뇌전이 흑사단주의 머리카락 없는 두피를 태우고 있었다.